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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선생생가 [李秉岐先生生家] 전북기념물 제6호
1981년 여산 원리리 진동마을에서 태어난 가람 이병기 선생은 국문학자이며 시조시인으로 한국 현대시조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礪山面) 원수리(源水里)에 있는 국문학자이자 시조작가인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1891~1968)의 생가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가람 비 옆 언덕위에 가람 이병기선생의 묘가 있다. 생가를 두르고 있는 대나무의 푸름이 그분의 인품을 말해주는 것 같다.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선시대의 것으로 고패형식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고방채·모정(짚이나 새로 지붕을 인 정자)로 구성되었으며, 입구에 세워졌던 3칸의 행랑채는 철거되었다. 모정 앞쪽에는 두 개의 작은 못을 파놓았으며, 뒤쪽에는 일꾼을 위한 각각 1칸씩의 방과 부엌으로 된 외딴채가 있다.
가람 선생의「별」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별과 함께 나 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 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요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안채나 사랑채 건물이 소박하고, 집 안에 모정과 못을 마련하는 등 조선 후기 선비가옥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국문학자이자 시조작가인 가람 이병기는 시조의 현대적 혁신과 부활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고전의 발굴·연구에 힘쓰는 한편 청소년 교육을 통해 민족의 말과 글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1945년 이후 전북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교수하였으며, 저서에《역대시조선》《가람시조집》《국문학전사》 등이 있다.
전통시조의 현대화로 시조부흥을 이끌어낸 가람 이병기(李秉岐.1891∼1968, 가람 嘉藍) 선생을 기리는 “2008년 가람시조문학제”가 11월 8일부터 9일까지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에서 열렸다. 서거 40주년을 맞아 가람시조문학회(회장 신길수)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에서 가람시조 신인문학상 시상, 초·중·고시조백일장시상, 학술발표, 특별공연, 가람생가 수유재 방문 등의 일정으로 펼쳐졌다. 이에 앞서 전국 초중고 시조백일장이 지난 10월 31일 익산배산체육공원 야외음악당에서 개최되었다. 학술 발표에서는 전북대 최승범 명예교수가 기조발표를 했으며 서울여대 김준 명예교수와 경기대 이지엽 교수가 주제발표를 했다. 특별공연으로는 시낭송, ‘매창의 사랑’이란 시조극, 판소리, 경기민요 등의 공연과 참가자 장기자랑으로 꾸며졌다. 이날 행사에는 가람선생 후손, 문인단체, 원로시조시인 등을 비롯한 전국 200여명의 문인들이 참가해 가람이병기선생의 문학 혼을 기렸으며 특히 가람생가와 익산투어로 익산에 서려 있는 가람 향기를 함께 나누었다.
가람선생의 「故鄕으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데나 정들면 못살 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삼베 무명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밭을 파고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1921. 7. 23(토) 맑다. 불교회로 가서 ‘훈민정음’을 베꼈다” 한 줄도 좋다! 4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자신의 생활의 흔적을 남기려고 노력했던 이가 있다. 가람 이병기 선생.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이 ‘가람일기’는 평생 동안 국문학 연구에 열정을 쏟은 가람 이병기 선생의 담백한 삶을 그대로 보는 듯 하다. 가람 선생은 1921년에는 권덕규·임경재·최두선 등과 함께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여 활약했고, 1922년부터 동광·휘문고등보통학교 교원, 1926년부터 시조에 대한 논문과 시조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가람 선생은 전북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1956년 정년퇴임한 후 이듬해 뇌일혈로 쓰러져 앓다가 1968년 여산 고향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오래 전에 가고 없지만 고향 익산에는 고인의 생가, 가람시조문학상, 천향 호산춘 등 그의 살아있는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한마디를 덧붙여 보면 익산시가 가람의 생가를 보존하고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지난 2001년 총 사업비 2억3000여만원을 들여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벌였고, 2003년 본채 및 사랑채·헛간 등 지붕 개초와 내부 수리, 주변 일대에 대한 조경작업을 통해 편익시설을 갖추었다. 또 지난해에도 5000만원을 투입해 보수작업을 벌였다. 이처럼 많은 예산을 들여 정비작업을 추진했음에도 2009년 2월 현재도 생가 사랑채 헛간은 그대로 방치해 폐가를 방불케 하고 장독대 또한 관리되고 있지 않고 있어 지저분해 보였다. 본체 마루에는 각종 흙이 흩어져 있어 지방기념물로서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있다. 본래 소박하고 정갈한 생가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지역은 문학관까지 건축해 놓고 많은 관심과 관리로 관광객을 맞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너무나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내가 찾은 날도 많은 분들이 찾았으나 실망한 모습으로 돌아섰다.
이 그림같은 생가를 조금만 더 관심을 갖어 활성시키면 좋겠다. 문학관도 이곳에 만들어 놓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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