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의 우리들은 5월 4일 오후에,
사진을 올린 날은 7월 16일 오전,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는 7월 30일 새벽에 있다.

그 사이에 석 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뭘 하며 지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5월이,
예년보다 너무 길어지는 무기력증에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점철됐던 6월이,
명상을 배우려고 사이비종교라는 오명의 수련단체 단월드에 다니기 시작한 7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이렇게 가끔 평화로운 밤도 있다.

남편이 꼭 가보고 싶다고 손꼽은 큰엉해안경승지.
서귀포시 남원읍의 금호리조트 바로 앞에 있다.
'큰엉'이란'큰 언덕'이란 뜻으로
커다란 바위 덩어리들이 바다를 집어 삼킬 듯 입을 벌리고 있는 언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사진 오른쪽의 예쁜 집은 금호 리조트와는 별개의 펜션.
해안의 산책로가 마치 금호리조트의 앞마당인양 바다를 따라 1.5km 가량 주욱 펼쳐져 있다.
절벽 아래로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비바람이 제법 몰아치니
엄살대마왕 정유진님과 함께 산책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주변에 한국 최초의 영화박물관인 신영영화박물관도 있다는데,
비바람의 기세에 눌려 어디를 더 찾아보고 할 마음의 여유를 내지 못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비도 오고 하니 박물관 구경도 좋은 여정이었을 텐데.. 싶은 아쉬움이 뒤늦게 인다.

높이가 15-20에 이르는 용암덩어리 해안 기암절벽이 성을 쌓은 듯 펼쳐져 있는데
어째 사진은 좀 평범하게 나왔다.

좋아, 이런 날은 비에 젖는 바다를 바라보며 차 한 잔을 마셔야 제격이지!
갑자기 박물관이고, 미술관이고 제쳐둔 채
효원이네의 추천 카페, '숑'으로 향했다.
그러나 비바람을 뚫고 달려간 숑에서 우리를 맞아주는 것은
들어서자마자 감싸오는 따뜻한 훈기와
얼굴마저 훈훈한 주인장 오빠의 친절하고도 정중한 사과 말씀 ...
"죄송합니다. 테이블이 많지 않아서... 혹시 차를 드시고 싶으시면 조금 더 올라가셔도 카페가 하나 더 있는데요."
그렇게 도착한 카페 '요네주방'

여러가지 생활소품의 공방을 겸하는
요네주방.
나중에 알고보니 한정된 식사시간에만 제공되는 음식 맛도 좋아서 나름 이 동네의 소문난 맛집이라고.

창호지 문살을 옮겨놓은 듯한 천장의 장식.
그림도 박혀있다.

춥기도 하고, 등받이도 없어서 창쪽 자리에는 앉아 있지 못했지만,
소박하면서 운치있는 풍경이다.
검은 모래와 자갈이 있는 이 해변의 이름은 '공천포'
역시 남원읍에 위치해 있다.


유진이는 본인 취향의 그림과 소품들이 많아서
한 장 한 장 모두 사진에 담고 싶어했다.

만화체의 그림, 적절히 예쁜 서체.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돋게 만드는 문장들까지.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오늘이라..
이 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으면 내일이 걱정되게 만드는 오늘인데.

찻 잔도 예쁘고, 커피 맛도 아주 훌륭했다.

유진이는 그림도 그리고,
전 날부터 아빠의 도움까지 얻어가며 얼개를 짠 팬픽 줄거리를 열심히 기록했다.

아빠 얼굴.. 심각해보여..
실은.. 그냥 나이들어 보이는 것뿐..?
이제는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얼굴이 되어가고 있다.

유진이는 바다가 보이는 이 아기자기한 카페에 있었던 시간을
제주도 여정 중에 가장 좋았다고 손꼽는다.

낭만적이고, 편안하고,
그리고 뭔가 자기가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시공간이었던 거겠지.

이 글은 글씨체가 마음에 든다며 유진이가 꼭 찍어달라고 한 방명록인 듯. ^^;;

딸의 이래라저래라 요구에 열심히 호응해주시는 정기홍 아버님...
아닌가?
유진이가 직접 찍었을래나?

타일로 만들어진 테이블 위에 아이패드에 켜 있는 화면은 3만원? 8만원??이나 하는 해부학 앱.
이렇게 좋은 카페에서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기홍씨는 또 역시나 그렇게도 좋은 해부학 공부를... >.<
학자로 학교에 남았으면 한의학계에 이름 석자를 길이 남겼을 텐데.
물론 그 안에서도 예외가 아닌 이전투구에 수명은 단축됐을지도.. -.-;;
물론 당신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그 이름을 충분히 깊이 남기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카페 안에서 습기어린 시간이
천천히 .. 평화롭게 ...
흐르고 있었다.
첫댓글 카페 안의 평화가 슬며시, 내 안에 스며들어 오네요..
그리고 그날 해부학 앱 보며 외웠던 게, 특별히 잘 외워졌던 것 같아요~^^
크하하, 특별히 잘 외워졌다니 정말 기홍씨다운 멘트네요그려~
내가 봐도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