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di, Giuseppe[베르디, 1813-1901] Opera-Attila아틸라
서막과 3막으로 구성된 서정적 드라마. 대본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가 자카리아스 베르너(Zacharias Werner)의 소설 ‘훈족의 왕 아틸라’를 원본으로 하여 썼다.
초연 : 1846년 베니스 훼니스극장
주요배역
아틸라(훈족의 왕)
오다벨라(아퀼레이아 총독의 딸)
에지오(로마의 장군)
포레스토(아퀼레이아의 기사)
울디노(아틸라의 노예)
레오네(늙은 로마인 : 레오교황)
서기 425년 훈족의 장군이며 왕인 아틸라(에첼)가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Aquileia)를 침공하였다. 이퀼레이아의 여 전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도시는 잿더미가 되었고 사람들의 시체는 언덕을 이루었다. 훈족들이 다른 동맹 부족들과 함께 전승의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아틸라에게 투항한 울디노(Uldino)가 훈족에 대항하여 싸운 여 전사들을 파티 장소에 끌고 들어온다. 아틸라는 오히려 이들 여 전사들의 용기를 높이 치하하고 목숨을 살려준다.
잡혀온 여전사들 중에는 아퀼레이아 총독의 딸인 오다벨라(Odabella)도 있다. 오다벨라는 조국을 파괴한 아틸라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더구나 오다벨라의 아버지도 이번 전투에서 죽임을 당한바 있다. 잠시 후 아틸라는 로마제국의 발렌티니안 황제가 보낸 사신인 에지오(Ezio)장군을 만난다. 에지오 장군은 아틸라에게 속히 이탈리아에서 물러가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아틸라는 살기 좋고 풍요로운 이탈리아를 모두 점령하겠다고 대답하며 아랑곳 하지 않는다.
아퀼레이아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호수가의 피난처로 모여든다. 사람들은 아퀼레이아의 기사인 포레스토(Forresto)에게 전보다 더 강하고 든든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줄 것을 당부한다. 포레스토는 오다벨라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다. 사람들은 포레스토에게 오다벨라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 분명하므로 이제 그만 잊으라고 말한다.
제1막
오다벨라가 아틸라의 진중에 억류되어 있는 것을 안 포레스토는 훈족 병사로 가장하여 아틸라의 진중으로 잠입한다. 적진에서 오다벨라는 아버지의 시신 곁을 지키며 슬퍼하고 있었다. 오다벨라와 포레스토는 서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알고 감격적인 포옹을 한다. 오다벨라는 포레스토에게 자기가 아버지의 시신이라도 지키기 위해 아틸라의 진중에 억류되어 있다는 설명해 준다. 두 사람은 아틸라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한편 아틸라는 측근인 울디노에게 꿈 얘기를 해준다. 로마까지 파죽지세로 진군하였으나 로마의 성문에서 만난 어떤 노인이 그만 퇴각하라고 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이다. 아틸라가 전군에 진격 명령을 내리고 출전하려 할 때 어린아이들과 함께 교황 레오가 나타난다. 레오교황을 본 아틸라는 그가 바로 꿈에서 본 노인임을 생각하고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급히 말에서 내려선다. 이 모습을 본 기독교도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한다.
제2막
에지오장군은 황제로부터 전갈을 받는다. 훈족과 휴전을 했으니 속히 로마로 돌아오라는 내용이다. 에지오장군은 유약한 황제가 훈족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강화조약만 체결하자 몹시 분개하며 혼자서라도 훈족과의 싸움을 다짐한다. 마침 아틸라가 강화조약을 기념하여 에지오장군을 성루로 초청한다.
에지오장군과 포레스토는 아틸라를 성루에서 만날 때 힘을 합쳐 함정에 빠트려 죽이기로 약속한다. 아틸라가 에지오장군을 만나로 성루로 나가려 하자 측근들이 적장과 만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으니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한다. 그러나 아틸라는 이러한 진언을 모두 물리친다.
아틸라를 만난 에지오장군은 함께 로마로 진격하여 유약한 발렌티느안 황제를 무너뜨리자고 제안해 보지만 거절당한다. 한편 그 이전에 포레스토는 울디노가 아틸라를 독약을 먹여 죽일 계획인 것을 알게 된다. 포레스토는 이 사실을 오다벨라에게 얘기해준다. 두 사람은 자기들이 죽여야 할 아틸라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다벨라는 아틸라에게 포도주를 조심하라고 미리 일러준다.
성루에서 포레스토가 아틸라에게 포도주를 한잔 권한다. 아틸라는 그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노예로 하여금 먹어 보도록 한다. 독이 든 포도주인 것이 밝혀진다. 포레스토는 도망간다. 아틸라는 오다벨라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면서 왕비로 삼겠다고 선언한다.
제3막
다음날 아침 일찍, 포레스토는 숲속에서 우연히 울디노를 만난다. 울디노는 오다벨라가 아틸라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에지오장군은 아틸라를 기습할 병사들이 준비되어 있다고 얘기해준다. 한편, 이미 왕비의 상징물을 받아가지고 있는 오다벨라는 곧 결혼식에 나가야 할 입장이다. 결혼식장에서 아틸라는 포레스토의 모습을 본다. 아틸라는 오다벨라가 포레스토와 내통하여 자기를 죽이려는 것을 눈치 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한때 아틸라와의 결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려던 오다벨라는 로마인들과 아퀼레이아 사람들이 훈족 병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마음을 돌려 먹는다. 이어 오다벨라의 칼날이 아틸라의 가슴을 찌른다. 에지오장군은 아틸라가 없는 훈족의 진영을 마음껏 공략한다.
◘ 아틸라 Attila
출생 미상
사망 453
국적 훈족
로마 제국을 침략한 새외 민족 최고의 왕이며 남부 발칸 지방과 그리스, 이어서 갈리아와 이탈리아까지 공략했다. 아틸라는 중세 독일의 전설적인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는 에첼, 아이슬란드의 무용담에서는 아틀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아틸라와 형 블레다가 이어받은 제국은 서쪽의 알프스 지방과 발트 해 연안에서 동쪽의 카스피 해 근처까지 걸쳐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마르구스(포자레박)에서 동로마 제국과 체결한 평화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공동통치자로서 역사에 나타났다.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을 공격, 매년 황금을 약탈했고, 445년경 그는 형 블레다를 죽이고 유일한 전제군주로서 훈족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447년에는 동로마 제국에 2번째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아틸라의 그다음 대원정은 451년의 갈리아 지방에 대한 공격이었다. 452년 훈족은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7개 도시, 즉 아퀼레이아, 파타비움(파도바), 베로나, 브릭시아(브레시아), 베르고뭄(베르가모), 메디올라눔(밀란)을 약탈했다. 453년 아틸라는 다시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으나 아틸라는 급사했고, 아틸라를 계승한 그의 아들들은 아틸라의 제국을 분할하여 지배했다.
로마 제국을 침략한 새외(塞外) 민족 최고의 왕이며 남부 발칸 지방과 그리스, 이어서 갈리아와 이탈리아까지 공략했다. 아틸라는 중세 독일의 전설적인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 Nibelungenlied〉에서 에첼, 아이슬란드의 무용담에서는 아틀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 동로마 제국 침입
아틸라와 형 블레다가 이어받은 제국은 서쪽의 알프스 지방과 발트 해 연안에서 동쪽의 카스피 해 근처까지 걸쳐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마르구스(포자레박)에서 동로마 제국과 체결한 평화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공동통치자로서 역사에 나타났다. 이 조약으로 동로마는 지금까지 훈족에 지불해왔던 보조금을 2배로 늘리고 이후 매년 300kg의 황금을 주기로 약속했다.
435~439년의 아틸라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는 자기 영토의 북부 또는 동부 야만족에 대한 정복사업을 했던 것 같다. 동로마 제국은 마르구스 조약에서 약정한 금액을 지불하지 않았고, 그결과 동로마군이 서부와 동부 국경지대에 머무르고 있던 441년 아틸라는 도나우 강 유역 변경에 대해 강력한 습격을 감행했다.
그는 싱기두눔(베모그라드)을 포함한 많은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동로마 제국은 442년에 간신히 1년의 휴전을 맺고 서부에 있던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443년 아틸라는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도나우 강변의 도시들부터 휩쓸기 시작하여 나이수스(니시)와 세르디카(소피아)를 향해 제국의 내부로 밀고 들어가 두 도시를 파괴했다. 이어서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려서 필리포 폴리스를 점령하고, 이후 계속되는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주력부대를 격파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북쪽과 남쪽 해안까지 진출했다.
훈족 사수들이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성벽을 뚫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틸라는 갈리폴리 반도로 퇴각해 있던 동로마의 나머지 군대를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곧이은 평화조약에서 아틸라는 동로마에게 황금 2,570㎏에 달하는 연체된 공납금을 지불하도록 했고, 연간 공납금을 3배로 늘려 그 후부터 매년 황금 900kg을 강탈했다.
443년 가을에 체결된 평화조약 이후 아틸라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445년경 그는 형 블레다를 죽이고 유일한 전제군주로서 훈족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447년에는 동로마 제국에 2번째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 전투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전쟁은 441~443년 때보다 더 큰 규모로 계획되었고, 주공격 방향은 전의 공격지보다 좀더 동쪽인 남동부 유럽의 로어스키티아와 모에시아 지방이었다. 그는 우투스(비드) 강에서 동로마 제국 군대를 맞아 격파했으나, 그 자신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어서 아틸라는 발칸 지방을 황폐화시키면서 남쪽으로 내달아 그리스에 이르렀다. 그리스에 들어온 그는 테르모필레에서 저지당했다. 이후 3년간의 침략 기간은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외교사절과 아틸라 간의 복잡한 협상과정으로 점철되었다. 동로마는 도나우 강 남쪽의 광대한 지역에서 철수해야 했고, 금액은 알 수 없지만 동로마의 공납은 계속되었다.
● 갈리아 지방 침입
아틸라의 그 다음 대원정은 451년의 갈리아 지방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때까지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 지배자인 로마의 아이티우스 장군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갈리아 지방의 침략 동기에 대한 기록은 발견된 것이 아직 없다.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에서 자신의 목적은 톨로사(툴루즈)를 본거지로 한 서(西)고트족(동·서 로마 제국의 일부 지역을 정복했던 게르만족)의 왕국이며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는 아무런 불만도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450년 봄 황제의 누이 호노리아가 그녀의 반지를 아틸라에게 보내면서 예정된 결혼에서 자기를 구해달라고 간청해왔다. 그러자 아틸라는 호노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선언하고 그녀의 지참금으로 서로마의 반을 요구했다. 아틸라가 갈리아 지방으로 돌아오자 아이티우스는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세와 협상을 맺어 훈족에 대항할 연합군을 편성했다.
이 전쟁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이 남아 있지만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에 아틸라 군대가 아우렐리아눔(오를레앙)을 대부분 점령했던 것은 확실하다. 아이티우스와 테오도리크의 군대가 훈족을 몰아내려고 했을 때는 훈족이 이미 이 도시 안에 교두보를 확보한 상태였다. 결정적인 교전은 카탈루냐 평원에서 있었는데, 일부 학자는 마우리카였다고도 한다(두 곳 모두 확인되지 않음). 서고트족 왕이 전사하는 등 격렬한 전투 끝에 아틸라는 후퇴했고, 곧이어 갈리아 지방에서 물러났다. 이 싸움은 아틸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였다(카탈루냐 평원 전투).
452년 훈족은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7개 도시, 즉 아퀼레이아, 파타비움(파도바), 베로나, 브릭시아(브레시아), 베르고뭄(베르가모), 메디올라눔(밀란)을 약탈했다. 아이티우스는 훈족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해에 이탈리아를 휩쓴 기근과 역병 때문에 훈족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453년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 당시 동로마의 새로운 황제 마르키아누스는 전임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약속한 보조금 지급을 거부했다. 그러나 아틸라는 결혼식 날 밤 급사했다. 그와 그의 보물을 묻은 자들을 살해하여 그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도록 했다. 아틸라를 계승한 그의 아들들은 아틸라의 제국을 분할하여 지배했다.
448년 아틸라의 막사를 방문하여 그를 본 프리스쿠스는 아틸라를 작고 땅딸막한 키에 큰 머리, 깊은 눈, 낮은 코, 가는 수염을 가진 인물로 묘사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아틸라는 성마르고 고함을 잘 치며 사나운 성미였지만 매우 끈질긴 협상자였으며, 무자비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하여 아틸라가 나무 접시에 담은 고기만 먹고 있는 반면, 그의 부하장수들은 은 접시에 맛있는 음식을 담아 먹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장군으로서의 자질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갈리아 침입 이전까지 아틸라가 거둔 성공을 보면 그가 탁월한 전략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