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일상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쓰기 시작한 건 (침팬지와 구분되는) 영장류로 진화하게 되면서부터다. 나뭇가지를 잡고 매달릴 수 있도록 발달한 대향(對向)성 손가락 구조가 점차 정교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은 자기 몸의 연장으로서 도구를 만들어 쓸 줄 알게 됐다. 이렇게 평범한 사실이 메이커 운동처럼 생산 방식의 패러다임을 뒤집을 흐름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덴 어떤 요인이 작용했을까?
전문가들은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변으로 “IT 기술 발전”을 꼽는다. 지난 회차에서 확인했듯 온라인 네트워킹을 기반으로 하는 메이커스페이스 수가 급증한 건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이 대중화하고 모바일 기기가 보급되면서부터다. 본인 집 작업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규모로 DIY(Do It Yourself)에 열중하던 세계 각지 사람들이 자유롭게, 실시간으로 연결(connect)되면서 메이커스페이스를 중심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3D프린터와 Z세대, 메이커 운동 견인하다
IT 기술 중 ‘메이커 운동 확산의 1등 공신’은 단연 3D프린팅이다. 지난 회차 서두에서 소개한 ‘DIY 아기 신발’을 예로 들어보자. 어찌어찌해서 본(本)을 구하고 가죽을 그 본대로 자른 후 구멍을 뚫어 끈을 끼울 수 있게 했다 해도 밑창 만드는 작업은 결코 만만찮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사용자를 고려해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소재를 써야 하는 건 기본. 쉬 미끄러지지 않도록 적당히 골도 파여 있어야 한다. 대량 생산 체제에서라면 이 공정을 소화하기 위해 플라스틱 몰딩(molding) 기계를 들여놓겠지만 ‘사용자 취향에 따른 소량 생산’이 기본인 DIY 키트 사업에선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3D프린터는 이런 상황에서 더없이 요긴하다. 견본(sample)용 제품을 하나 구입, 분해해 밑창을 놓고 3D프린터를 동원하면 원하는 개수만큼 얼마든지 간편하게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확대∙축소 인쇄 기능을 활용하면 크기를 다양화하는 것도 문제 없다. 이에 맞춰 재단한 가죽과 신발 끈을 박스에 넣은 다음, 제작 방법 설명서까지 챙겨 넣으면 제법 어엿한 DIY 아기 신발 키트가 완성된다.
일찍이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 전 와이어드 편집장이 언급했던 일명 ‘롱테일이론(The Long Tail)’의 핵심은 소량 생산 품목의 전체 판매액이 대량 생산 품목의 그것을 넘어서며 생산 방식 전반에서의 혁명을 견인한다는 데 있다<롱테일이론과 관련, 좀 더 상세한 설명은 2015년 7월 8일자 스페셜 리포트 “‘3D 프린팅 유니버스’가 몰려온다” 참조>. 따지고 보면 메이커 운동이야말로 롱테일이론이 실제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3D프린팅을 비롯한) IT 기술의 개발∙보급은 기술적 기반 역할을, (유명 브랜드에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뭔가 만들어내며 보람을 느끼는) 밀레니얼∙Z세대의 취향은 문화적 기반 역할을 각각 맡고 있다.
“새로운 무역풍, 다시 미국 쪽으로 향할까?”
[1] 원제 “What Is the Maker Movement and Why Should You Care?’”
1950년대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에선 ‘고학력’이 곧 ‘안정된 직장과 높은 보수’와 동의어였다. 당연히 이들은 자녀 교육에 열을 올렸고 이때 교육은 대부분 선진국에서 형성된 학문을 가르치는 데 집중됐다. 그런데 막상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자녀 세대는 이런 식의 교육에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왜 실용적이지도 않고 어렵기만 한 고전과 복잡한 방정식 따위를 배워야 하나요? 그보다 실제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키우는 게 훨씬 중요한 것 아닌가요?”
3D프린팅 기술은 소규모 DIY 부문에서 누구나 세련된 완성품을 아주 쉽게 만들도록 도왔다. 그렇게 소소한 활동이 온라인 네트워크로 엮이며 DIY는 점차 ‘DIT(Do It Together)’로 변모해갔다. 자기 집 차고에서, 거실이나 주방 한쪽에서 뭔가 뚝딱거리며 만들던 사람들이 제작∙판매 노하우를 공유하고 협력하며 꽤 규모가 큰 생산자 집단(pool)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같은 나라에선 이 같은 흐름을 “국제경제 체계의 반가운 선회” 조짐으로 해석, 환영하기도 한다<아래 박스 참조>.
[2] 1857년 월간지로 출발했지만 현재는 1년에 10호씩 발간되고 있다
[3] 원제 “Mr. China Comes to America”
이와 함께 한때 낮은 임금과 허술한 규제 등의 문제를 노리고 개발도상국(이하 ‘개도국’)에 집중되던 대량 생산 방식도 점차 달라지는 추세다. 이는 중국 등 주요 개도국의 임금 수준이 올라가고 환율이 조정되면서, 또 이들 국가에서의 생산 과정을 바라보는 소비자의 눈이 까다로워지면서<이와 관련, 좀 더 상세한 설명은 2018년 2월 14일자 스페셜 리포트 “CSR은 여전히 건재하다. 아니 더 강해지고 있다” 참조> 예전 같은 생산 조건이 더 이상 이점이 되지 못한단 현실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대량 생산 시스템의 일부’로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아 단순 조작, 혹은 기계적 손놀림을 반복하던 근로자의 모습도 바뀌어가고 있다. 오늘날 좀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인력은 창의적 아이디어와 세련된 심미안으로 새로운 걸 디자인해내는, 교육 수준이 높은 생산자다. 이런 환경에서 공장은 대규모일 필요도, 규제가 허술한 곳에 자리할 필요도 없다. 미국∙유럽 등지에서 도서관이나 마을회관 등이 새로운 메이커스페이스로 속속 자리 잡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늘 그렇듯 정답 찾으려면 ‘소비자’ 연구해야
메이커 운동의 최신 기류를 의식하든 아니든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이 같은 변화에 걸맞게 크고 작은 혁신을 시도하는 중이다. 사실 미디어 공간을 중심으로 ‘다품종 소량 생산’이란 용어가 떠오르기 시작한 건 이미 20년 전이다. 이후 제품 종류를 막론하고 “장인의 예술혼을 더해 한정판을 제작하는 일”은 대부분의 기업에서 브랜드 이미지 제고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결국 관건은 품질 차별성만으론 만족하지 못하는 신규 소비 주역, 즉 밀레니얼(과 Z) 세대의 구미를 맞추는 작업이다. 국내에서도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란 줄임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밀레니얼(과 Z) 세대는 온라인 정보 소스 취급에 능해 가격 대비 품질이 훌륭한 제품을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고급스러운 것만 찾아 필요 이상의 돈을 쓰는 일은 이들에게 관심 밖 일이다. 따라서 그들의 시선과 마음을 붙들려면 생산자로서의 진정성을 보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
날로 강해지는 이들 소비 주역은 진정성 있는 기업 활동만큼이나 ‘자발적 참여’를 중시한다. 그리고 그 범위는 이제 생산 과정의 핵심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밀레니얼(과 Z) 세대는 완제품을 사서 쓰고 버리는 행위를 반복하기보다 뭐가 됐든 스스로의 힘을 더해 완성하고 그걸 소중히 여기는 소비 행태를 보인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야기(story)가 붙고, 그걸 타인과 공유하는 형태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기업을, 그리고 사회 전반을 어떻게 바꿔나갈까? 2014년 미국 버지니아주(州) 알링턴(Arlington)에서 열린 ‘메이커 정상회담(Maker Summit 2014)’은 어렴풋하게나마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백악관이 주최하는 메이커 페어와 함께 열린 이 대규모 행사에선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메이커가 모여 메이커 운동의 의미와 장래를 토론했다. 그 내용은 고스란히 ‘메이커미디어’와 ‘엣지딜로이트센터’가 공동으로 작성한 보고서에 담겼다. 이중 상당수는 “메이커 운동이 장차 기업과 사회에 끼칠 영향”에 집중돼 있으며 주요 내용을 정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흔히 21세기를 ‘해체의 시대’라고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기업과 저널리즘 간 경계가 무너진 건 꽤 오래전 일이다<2015년 2월 25일자 스페셜 리포트 “글로벌 기업은 지금 ‘브랜드 저널리즘’ 실험 중!” 참조>. 그뿐 아니다. 실재하는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도 점차 흐릿해지고 있으며<2015년 6월 24일자 스페셜 리포트 “가상현실, ‘또 한 번의 부활’ 꿈꾸다” 외 여러 편 참조>, 생산자와 소비자를 가르는 경계선도 조금씩 불분명해지는 게 사실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영 환경에서 기업은 늘 소비자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골몰해왔다. ‘메이커 운동’으로 대표되는 가능성이 새롭게 발견된 지금, 기업은 또 어떤 길을 찾아 소비자와의 동반을 모색하게 될까? 다음 편에선 삼성전자를 포함, 국내외 메이커 운동의 최신 사례를 중심으로 그 대응 방안을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