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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8년(2014년) 3월 6일 후기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18)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787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787
의 후속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열여덟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에는 환희장엄 법우와 저 관문, 이렇게 두 명이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Thich Nhat Han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중 Part Three Other Basic Buddhist Teachings: Chapter Twenty-One The Three Jewels 와 Chapter Twenty-Two The Four Immeasurable Minds 를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164 페이지 8째 줄부터 173 페이지 밑에서 16째 줄까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진현종 옮김,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반디미디어>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PART THREE Other Basic Buddhist Teachings
제3부 기타 불교교리
Chapter Twenty-One The Three Jewels
21장 삼보(三寶)
Dharma books and tapes are valuable, but the true Dharma is revealed through our life and our practice. Whenever the Four Noble Truths and the Noble Eightfold Path are practiced, the living Dharma is there. There are said to be 84,000 Dharma doors. Sitting meditation is one door, and walking meditation is another. To take refuge in the Dharma is to choose the doors that are most appropriate for us. Dharma is great compassion, understanding, and love.2 To realize these qualities, we need a Sangha.
법이 담겨있는 책이나 테이프는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짜 법은 우리의 삶과 수행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사성제와 팔정도를 수행할 때, 바로 그때 살아나는 법이 존재한다. 84,000 법문(法門)이 있다고 한다. 좌선도 하나의 법문이고 걷기 명상 역시 마찬가지다. 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법문을 고른다는 것이다. 법은 큰 연민, 이해와 사랑이다.(주2) 이러한 특성들을 성취하려면 승가가 필요하다.
2 For a further explication of the Second Jewel, Dharma, see chap. 20, 'The Three Bodies of Buddha."
주2) 두 번째 보물인 법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20장 ‘부처님의 삼신’을 보라.
Sangha is the fourfold community of monks, nuns, laymen, and laywomen, as well as the other elements that support our practice — our cushion, our walking meditation path, the trees, the sky, and the flowers. In my country, we say that when a tiger leaves his mountain and goes to the lowlands, he will be caught by humans and killed. When a practitioner leaves her Sangha, she may abandon her practice and "die" as a practitioner. Practicing with a Sangha is essential. Even if we have a deep appreciation for the practice, it can be difficult to continue without the support of friends.
승가는 비구, 비구니, 재가 남자 신자와 여자 신자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덧붙이자면 수행을 뒷받침해주는 것들, 즉 좌복, 걷기명상에 필요한 산책길, 나무, 하늘, 꽃도 포함된다. 우리나라[베트남]에는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오면 사람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다는 말이 있다. 수행자가 승가를 떠나면 수행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것은 곧 수행자의 ‘죽음’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승가와 함께 수행을 해야 한다. 설령 수행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다 할지라도 도반들의 도운 없이 수행을 계속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It is well worth investing in a Sangha. If you sow seeds in arid land, few seeds will sprout. But if you select a fertile field and invest your wonderful seeds in it, the harvest will be bountiful. Building a Sangha, supporting a Sangha, being with a Sangha, receiving the support and guidance of a Sangha is the practice. We have individual eyes and Sangha eyes. When a Sangha shines its light on our personal views, we see more clearly. In the Sangha, we won't fall into negative habit patterns. Stick to your Sangha. Take refuge in the Sangha, and you'll have the wisdom and support you need.
승가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불모지에 씨앗을 심으면 싹을 틔우는 씨앗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름진 땅을 골라 씨앗을 심으면 수확량이 많아질 것이다. 승가를 세우고, 승가를 지원하고, 승가와 함께 하면서 승가의 도움과 지도를 받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우리에게는 개개인의 눈과 승가의 눈이 있다. 승가가 개인의 시야에 빛을 비추면, 우리는 더욱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승가와 함께 하면 부정적인 습관에 빠질 일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승가와 떨어져서는 안 된다. 승가에 귀의하면 필요한 도움과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When members of a Sangha live in harmony, their Sangha is holy. Don't think that holiness is only for the Pope or the Dalai Lama. Holiness is also within you and within your Sangha. When a community sits, breathes, walks, and eats together in mindfulness, holiness is there. When you build a Sangha that has happiness, joy, and peace, you'll see the element of holiness in the Sangha. King Prasenajit, a close friend and disciple of the Buddha, told the Lord, "When I look at the Sangha, I have faith in the Buddha and the Dharma." Looking at the monks and nuns who were calm, peaceful, joyful, and free, who walked, stood, and sat in mindfulness, he saw the Buddha and the Dharma in them. Dharma and Sangha are the doors through which we enter the heart of the Buddha.
승가의 구성원들이 화합하며 살아갈 때 그 승가는 성스러운 것이 된다. 교황이나 달라이 라마만 성스럽다고 생각하지 말라. 성스러움은 우리와 우리의 승가 안에도 있는 것이다. 공동체가 알아차리는 자세로 함께 걷고 좌선하고 숨 쉬고 먹을 때 성스러움은 바로 그곳에 있다. 행복, 기쁨, 평화가 깃들어 있는 승가를 세울 때 우리는 승가 안에서 성스러움의 요소를 보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친한 친구이자 제자인 프라세나짓[파사닉]왕은 부처님께 이렇게 말했다. “승가를 보니 부처님과 법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그는 차분하고 평화롭고 기쁨이 넘쳐흐르고 자유롭게 보이는 비구와 비구니들이 알아차리는 자세로 좌선하고 걷고 서는 모습을 보고는 그들 안에 부처님과 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법과 승가는 부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One day, the Buddha went with Ananda to a monastery in Koshala. All the monks had gone out on alms round except one monk who had dysentery. He was lying exhausted, his robes and bedding covered in filth. When the Buddha saw this, he asked, "Where have the other monks gone? Why is no one looking after you?" The unwell monk replied, "Lord, all my brothers have gone out on alms round. At first, they looked after me, but when I was getting no better, I told them I would look after myself." The Buddha and Ananda bathed the monk, cleaned his room, washed his robes, and gave him a fresh robe to wear. When the monks returned, the Buddha said, "Friends, if we do not look after each other, who will look after us? When you look after each other, you are looking after the Tathagata."'3
어느 날 부처님은 아난다와 함께 코살라에 있는 승원에 가셨다. 이질에 걸린 비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비구들은 탁발을 하러 나가고 자리에 없었다. 이질에 걸린 비구는 기진맥진한 채 누워있었고, 옷가지와 침구는 오물로 더럽혀져 있었다. 부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물으셨다. “다른 비구들은 어디에 갔느냐? 왜 너를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게냐?” 병든 비구가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나머지 비구들은 모두 탁발하러 나갔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저를 돌봐주었지만, 나아지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제가 이제는 홀로 견뎌보겠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과 아난다는 그 비구를 씻기고 그의 방을 청소하고 옷을 빨아주고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 나머지 비구들이 돌아오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벗들이여, 우리가 서로 돌봐주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를 돌봐주겠는가? 그대들이 서로를 돌봐주는 것은 곧 여래를 돌봐주는 것이니라.”(주3)
3 See p. 158, n. 3.
주3) 20장의 각주 3번을 보라. (여래는 부처님을 일컫는 칭호의 하나로 ‘진여(궁극적 실재)의 세계에서 온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There are true jewels and jewels that are not authentic. If someone gives spiritual teachings that contradict the Three Seals of impermanence, nonself, and nirvana, that is not authentic Dharma. When a community has mindfulness, peace, joy, and liberation, it is a true Sangha. A Sangha that does not practice mindfulness and is not free, peaceful, or joyful cannot be called a true Sangha. The Buddha also can be true or false. In the Diamond Sutra, the Buddha says, "If you look for me in forms and sounds, you will never see the Tathagata."
보물에는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는 법이다. 무상, 무아, 열반이라는 3법인과 모순되는 영적인 가르침은 진정한 법이 아니다. 알아차림, 평화, 기쁨, 해탈이 함께 하는 공동체가 진정한 승가이다. 알아차림을 수행하지 않고 자유롭지도 평화롭지도 기쁨이 넘쳐나지도 않는 승가는 진정한 승가라고 부를 수 없다. 부처님도 진짜가 있을 수 있고 가짜가 있을 수 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형상과 목소리로 나를 찾는다면, 결코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
Looking into any of the Three Jewels, you see the other two. Buddha, Dharma, and Sangha inter-are. If you look after the Sangha, you are looking after the Buddha. When your Sangha is happy and advancing in the practice, the holiness of the Sangha increases, and the presence of the true Buddha and true Dharma become clearer. When you walk in mindfulness, you are taking good care of the Dharma. When you make peace with another member of your Sangha, you are looking after the Buddha. Going into the meditation hall, offering incense, and tidying the altar are not the only ways to look after the Buddha. Taking someone's hand or comforting someone who suffers is also to look after the Buddha. When you touch the true Sangha, you touch the Buddha and the Dharma. The Dharma cannot exist without a Buddha and a Sangha. How could the Dharma exist if there were no practitioners? A Buddha is a Buddha when the Dharma is in him or her. Each jewel contains the other two. When you take refuge in one jewel, you take refuge in all three. This can be realized in every moment of our life.
3보중의 어느 하나라도 살펴보면 나머지 둘을 보게 된다. 부처님과 법과 승가는 상즉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승가를 돌보는 것은 곧 부처님을 돌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속한 승가가 행복하고 수행에 진전을 보일 때, 승가의 성스러움은 늘어나고 진정한 부처님과 진정한 법의 존재가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가 알아차리는 자세로 걷는다면, 그것은 곧 법을 잘 돌보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승가의 다른 구성원들과 평화롭게 지낸다면, 그것은 곧 부처님을 돌보는 것이다. 법당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불단을 청소하는 것만이 부처님을 돌보는 방법은 아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거나 위로해주는 일 역시 부처님을 돌보는 것이다. 진정한 승가를 접할 때 부처님과 법을 접하게 된다. 법은 부처님과 승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수행자가 없는데 어떻게 법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까닭은 그 안에 법이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보물 속에는 나머지 두 보물이 들어있다. 하나의 보물에 귀의하면 곧 3보에 귀의하는 것이 된다. 이는 우리의 삶의 매 순간에 실현될 수 있다.
Traditionally, we chant the Three Refuges three times. During the first recitation, we turn in the direction of greater mindfulness, understanding, and love. During the second recitation, we begin to embody the Three Jewels. When we recite the third time, we vow to help others realize the Way of Understanding and Love and become a source of peace.
전통적으로 삼귀의는 세 번 염송한다. 첫 번째 염송을 통해 커다란 사랑과 이해, 알아차림의 길로 들어선다. 두 번째 염송을 통해 3보를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 시작한다. 세 번째 염송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이해와 사랑의 길을 성취해서 평화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서원한다.
Our problems today are no longer as simple as those encountered by the Buddha. In the twenty-first century, we will have to practice meditation collectively — as a family, a city, a nation, and a community of nations. The Buddha of the twenty-first century — Maitreya, the Buddha of Love —may well be a community rather than an individual. Sanghas that practice loving kindness and compassion are the Buddha we need. We can prepare the ground for bringing that Buddha to life, for our sake and for the sake of countless others, by transforming our own suffering and cultivating the art of Sangha-building. It is the most important work we can do.
우리 시대의 문제들은 더 이상 부처님 시대의 그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명상을 공동으로, 즉 가족, 도시, 국가 그리고 여러 국가들과 함께 수행해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부처님 다시 말해 사랑의 부처님이신 미륵불(彌勒佛, Maitreya)은 개인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아마도 공동체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자비를 실천하는 승가가 바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부처님이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변화시키고 승가를 세우는 능력을 기름으로써 우리 자신과 무수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 부처님이 기운 차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Buddha is the teacher showing the way,
the perfectly awakened one,
beautifully seated, peaceful and smiling,
the living source of understanding and compassion.
완전한 깨달음 얻으시고
미소를 지은 채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앉아 계시며
이해와 자비의 살아있는 원천인
부처님은 길을 보여주신 스승님이라네.
Dharma is the clear path
leading us out of ignorance
bringing us back
to an awakened life.
무지에서 벗어나
깨어있는 삶으로
다시 인도해주는
법은 청정한 길이라네.
Sangha is the beautiful community
that practices joy,
realizing liberation,
bringing peace and happiness to life.
기쁨을 누리고
해탈을 이루며
삶에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승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라네.
I take refuge in the Buddha, the one who shows me the way in
this life.
이번 생에 가야할 길을 보여주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I take refuge in the Dharma, the way of understanding and of
love.
이해와 사랑의 길인
법에 귀의합니다.
I take refuge in the Sangha, the community that lives in
harmony and awareness.
화합과 깨달음 속에 살아가는 공동체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Dwelling in the refuge of Buddha, I see clearly the path of
light and beauty in the world.
부처님께 귀의하여 살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빛과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진 길을 봅니다.
Dwelling in the. refuge of Dharma, I learn to open many doors
on the path of transformation.
법에 귀의하여 살면서, 나는 변화의 길로 통하는 갖가지 문을
여는 법을 배웁니다.
Dwelling in the refuge of Sangha, I am supported by its
shining light that keeps my practice free of obstacles.
승가에 귀의하여 살면서, 나는 수행의 장애를 없애주는
그 환한 빛의 도움을 받습니다.
Taking refuge in the Buddha in myself, I aspire to help all
people recognize their own awakened nature and realize the
mind of love.
내 안에 있는 부처님께 귀의하며,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깨어있는 성품을 깨닫고 사랑의 마음을 이루도록
열심히 돕고자 합니다.
Taking refuge in the Dharma in myself, I aspire to help all
people grasp the way of practice and walk together on the
path of liberation.
내 안에 있는 법에 귀의하며, 나는 모든 사람들이
수행의 길로 들어서 함께 해탈의 길로 나아가도록
열심히 돕고자 합니다.
Taking refuge in the Sangha in myself, I aspire to help all
people build fourfold communities and encourage the
transformation of all beings.
내 안에 있는 승가에 귀의하며, 나는 모든 사람들이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세우고 모든 존재의 변화를 장려하도록
열심히 돕고자 합니다.
CHAPTER TWENTY-TWO The Four Immeasurable Minds
22장 네 가지 헤아릴 수 없는 마음[四無量心(사무량심)]
During the Buddha's lifetime, those of the Brahmanic faith prayed that after death they would go to Heaven to dwell eternally with Brahma, the universal God. One day a Brahman man asked the Buddha, "What can I do to be sure that I will be with Brahma after I die?" and the Buddha replied, "As Brahma is the source of Love, to dwell with him you must practice the 'Brahma Abodes,' (Brahmaviharas) or Four Immeasurable Minds — love, compassion, joy, and equanimity." Love in Sanskrit is maitri; in Pali it is metta. Compassion is karuna in both languages. Joy is mudita. Equanimity is upeksha in Sanskrit and upekkha in Pali. A vihara is an abode or a dwelling place. The Four Brahmaviharas are the abodes of true love. This address is much greater than a four-star hotel. It is a 1,000-star dwelling. The Four Brahmaviharas are called "immeasurable," because if you practice them, they will grow in you every day until they embrace the whole world. You will become happier, and everyone around you will become happier, also.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바라문교를 믿는 이들은 죽은 뒤에 하늘나라에 가서 우주를 창조한 신인 범천(梵天)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가기를 기원했다. 어느 날 한 바라문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죽은 뒤에 틀림없이 범천과 더불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에 부처님이 대답하셨다. “범천은 사랑의 근원이므로, 범천과 더불어 살고자 한다면 ‘사범주(四梵住, Brahmaviharas)’ 또는 네 가지 헤아릴 수 없는 마음[四無量心(사무량심)], 즉 사랑[慈(자)], 연민[悲(비)], 기쁨[喜(희)], 평정[捨(사)]을 닦아야만 한다.” 사랑은 산스크리트로 마이트라(maitra), 팔리어로는 메타(metta)라 한다. 연민은 두 언어 모두 카루나(karuna)라고 한다. 기쁨은 무디타(mudita)라고 한다. 평정은 산스크리트로는 우페크샤(upeksha)라 하고 팔리어로는 우페카(upekkha)라 한다. 비하라(vihara)는 사는 곳 또는 거처라는 뜻이다. 사범주는 진정한 사랑이 머무는 곳이다. 이곳은 4성급 호텔보다 훨씬 멋진 곳이다. 천 개의 별이 머물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범주를 ‘헤아릴 수 없는’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을 닦으면 온 세상을 다 포용할 때까지 그것이 우리 안에서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욱 더 행복해질 것이고,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 역시 더욱 더 행복해질 것이다.
The Buddha respected people's desire to practice their own faith, so that is why he encouraged the Brahman man in his own language. If you enjoy walking meditation, practice walking meditation. If you enjoy sitting meditation, practice sitting meditation. But preserve your Jewish, Christian, or Muslim roots. That is the best way to realize the Buddha's spirit. If you are cut off from your roots, you cannot be happy.
부처님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믿음대로 행하고자 하는 바람을 존중하셨기에 바라문을 그에게 익숙한 말로 격려해 주셨던 것이다. 걷기 명상을 좋아하면 걷기 명상을 수행하면 된다. 좌선을 좋아하면 좌선을 수행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의 유대교, 기독교 또는 무슬림교도로서의 근본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부처님의 정신을 실현하는 최상의 길이다. 사람이 만일 자신의 뿌리로부터 떨어져나간다면, 그는 행복해질 수 없다.
If you learn to practice love, compassion, joy, and equanimity, you will know how to heal the illnesses of anger, sorrow, insecurity, sadness, hatred, loneliness, and unhealthy attachments.
사랑, 연민, 기쁨, 평정을 닦는 법을 배우면, 화, 슬픔, 불안, 증오, 외로움과 여러 가지 건전하지 못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병을 치료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Some sutra commentators have said that the Brahma-viharas are not the highest teaching of the Buddha, that they cannot put an end to all suffering and afflictions, but that is not correct. One time the Buddha said to Ananda, "Teach these Four Immeasurable Minds to the young monks, and they will feel secure, strong, and joyful, without afflictions of body or mind. For the whole of their lives, they will be well equipped to practice the pure way of a monk."1 On another occasion, a group of the Buddha's disciples visited the monastery of a nearby sect, and the monks there asked, "We have heard that your teacher Gautama teaches the Four Immeasurable Minds of love, compassion, joy, and equanimity. Our master teaches this also. What is the difference?" The Buddha's disciples did not know how to respond. When they returned to their monastery, the Buddha told them, "Whoever practices the Four Immeasurable Minds together with the Seven Factors of Awakening, the Four Noble Truths, and the Noble Eightfold Path will arrive deeply at enlightenment."2 Love, compassion, joy, and equanimity are the very nature of an enlightened person. They are the four aspects of true love within ourselves and within everyone and everything.
사범주는 모든 고통과 번뇌를 종식시키지 못하므로 부처님의 최상의 가르침은 아니라고 말한 경전 주석가들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젊은 비구들에게 네 가지 헤아릴 수 없는 마음[四無量心(사무량심)]을 가르쳐라. 그러면 그들은 심신의 번뇌를 여의고 안온함과 힘과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평생 동안 청정한 비구의 길을 잘 걷게 될 것이다.”(주1) 또 한 번은 한 무리의 부처님 제자들이 외도의 사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수행자들이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 스승인 고타마는 사랑, 연민, 기쁨, 평정인 네 가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가르친다고 들었다. 우리 스승님도 그것을 가르치신다. 무슨 차이점이라도 있는가?” 부처님 제자들은 대답할 방도가 없었다. 그들이 사원으로 돌아오자 부처님이 이르셨다. “칠각지, 사성제, 팔정도와 더불어 네 가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닦는 사람은 누구나 깊은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주2) 사랑, 연민, 기쁨, 평정은 깨달은 이의 본성 그 자체이다. 그것은 우리와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사물 속에 있는 진정한 사랑의 네 가지 모습이다.
1 Madhyama Agama 86, Taisho 26.
주1) 대정신수대장경 26 중아함경 86
2 Samyukta Agama 744, Taisho 99.
주2) 대정신수대장경 99 잡아함경 744
The first aspect of true love is maitri, the intention and capacity to offer joy and happiness. To develop that capacity, we have to practice looking and listening deeply so that we know what to do and what not to do to make others happy. If you offer your beloved something she does not need, that is not maitri. You have to see her real situation or what you offer might bring her unhappiness.
진정한 사랑의 첫 번째 모습은 마이트리, 즉 남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려는 의도와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을 갖추려면 깊숙이 들여다보고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알아차려야 한다. 연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연인에게 주는 것은 마이트리가 아니다. 연인이 처한 상황의 본질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준 것이 도리어 불행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In Southeast Asia, many people are extremely fond of a large, thorny fruit called durian. You could even say they are addicted to it. Its smell is extremely strong, and when some people finish eating the fruit, they put the skin under their bed so they can continue to smell it. To me, the smell of durian is horrible. One day when I was practicing chanting in my temple in Vietnam, there was a durian on the altar that had been offered to the Buddha. I was trying to recite the Lotus Sutra, using a wooden drum and a large bowl-shaped bell for accompaniment, but I could not concentrate at all. I finally carried the bell to the altar and turned it upside down to imprison the durian, so I could chant the sutra. After I finished, I bowed to the Buddha and liberated the durian. If you were to say to me, "Thây, I love you so much I would like you to eat some of this durian," I would suffer. You love me, you want me to be happy, but you force me to eat durian. That is an example of love without understanding. Your intention is good, but you don't have the correct understanding.
동남아시아에는 두리언(durian)이라고 부르는 가시가 많은 커다란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는 중독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 과일은 향이 몹시 진해서 과일을 다 먹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그 냄새를 맡으려고 껍질을 침대 밑에 두는 사람도 있다. 나는 두리언이 풍기는 냄새를 끔찍이도 싫어한다. 한 번은 베트남의 내가 몸담고 있던 절에서 염불을 하고 있는데, 불단에 두리언이 올려져있었다. 나는 목탁과 커다란 주발처럼 생긴 종을 치면서 법화경을 독송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 나는 종을 불단으로 가지고 가서 두리언을 덮어놓고 나서야 그 경전을 독송할 수가 있었다. 나는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나서 두리언을 덮어놓은 종을 치웠다. 그런데 누가 “스님, 제가 스님을 무척 존경하고 있으니 이 두리언을 좀 드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곤혹스러움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나를 사랑하고, 그대는 내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대는 내게 억지로 두리언을 먹게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해 없는 사랑의 본보기이다. 의도는 좋다 해도 올바른 이해가 결여된 것이다.
Without understanding, your love is not true love. You must look deeply in order to see and understand the needs, aspirations, and suffering of the one you love. We all need love. Love brings us joy and well-being. It is as natural as the air. We are loved by the air; we need fresh air to be happy and well. We are loved by trees. We need trees to be healthy. In order to be loved, we have to love, which means we have to understand. For our love to continue, we have to take the appropriate action or non-action to protect the air, the trees, and our beloved.
이해가 결여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의 요구, 갈망, 고통을 알아차리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깊숙이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은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사랑은 공기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공기의 보살핌을 받는다. 우리가 건강하게 잘 지내려면 신선한 공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나무의 보살핌을 받는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나가려면 나무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보살핌을 받고자 한다면 사랑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이해를 해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의 사랑이 지속되게 하려면 공기와 나무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적절하게 행동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아무 짓도 하지 말아야 한다.
Maitri can be translated as "love" or "loving kindness." Some Buddhist teachers prefer "loving kindness," as they find the word "love" too dangerous. But I prefer "love." Words sometimes get sick and we have to heal them. We have been using the word "love" to mean appetite or desire, as in "I love hamburgers." We have to use language more carefully. "Love" is a beautiful word; we have to restore its meaning. The word "maitri" has roots in the word mitra, which means friend. In Buddhism, the primary meaning of love is friendship.
마이트리는 ‘사랑’ 또는 ‘자애(慈愛)’로 옮길 수 있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위험스럽다는 생각에 ‘자애(慈愛)’라는 말을 선호하는 법사들이 일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말이 병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그것을 고쳐야 한다. 사람들은 “난 햄버거를 무척 좋아한다(I love hamburgers).”와 같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식욕이나 욕망의 뜻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우리는 말을 좀 더 신중하게 쓸 줄 알아야 한다. ‘사랑’은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니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 ‘마이트리’라는 말은 ‘미트라’에서 나온 것인데, 미트라는 ‘친구’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가진 주요한 의미는 바로 우정이다.
We all have the seeds of love in us. We can develop this wonderful source of energy, nurturing the unconditional love that does not expect anything in return. When we understand someone deeply, even someone who has done us harm, we cannot resist loving him or her. Shakyamuni Buddha declared that the Buddha of the next eon will be named "Maitreya, the Buddha of Love."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사랑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마음을 품으면 이 멋진 힘의 근본을 키울 수 있다. 어떤 이를, 심지어 내게 해를 끼친 사람을 깊이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음 겁(劫)에 오실 부처님은 ‘마이트레야(Maitreya, 미륵불), 즉 사랑의 부처님’이라는 칭호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The second aspect of true love is karuna, the intention and capacity to relieve and transform suffering and lighten sorrows. Karuna is usually translated as "compassion," but that is not exactly correct. "Compassion" is composed of com, ("together with") and passion ("to suffer"). But we do not need to suffer to remove suffering from another person. Doctors, for instance, can relieve their patients' suffering without experiencing the same disease in themselves. If we suffer too much, we may be crushed and unable to help. Still, until we find a better word, let us use "compassion" to translate karuna.
진정한 사랑의 두 번째 모습은 카루나, 즉 고통을 줄이고 바꾸고 슬픔을 덜어주려는 의도와 능력이다. 카루나는 대개 ‘연민’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다. '연민(compassion)'은 com(함께)과 passion(괴로워하다)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본다면, 의사는 환자와 똑같은 질병에 걸리지 않고서도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 지나치게 많이 괴로워하다가는 힘이 다 빠져 남을 도와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좀 더 나은 말을 찾기까지는 카루나의 번역어로 ‘연민’을 쓰기로 하자.
To develop compassion in ourselves, we need to practice mindful breathing, deep listening, and deep looking. The Lotus Sutra describes Avalokiteshvara as the bodhisattva who practices "looking with the eyes of compassion and listening deeply to the cries of the world." Compassion contains deep concern. You know the other person is suffering, so you sit close to her. You look and listen deeply to her to be able to touch her pain. You are in deep communication, deep communion with her, and that alone brings some relief.
연민의 마음을 기르려면 마음을 집중하는 호흡, 귀 기울여 들음, 눈여겨보는 수행을 해야 한다. 법화경에서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울부짖음을 귀 기울여 듣고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수행을 하고 있는 보살로 그려지고 있다. 연민 속에는 깊은 관심이 들어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람 곁에 앉는다. 그 사람의 아픔을 헤아려보려면 귀 기울여 듣고 깊숙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때 두 사람은 속마음이 통하고 깊은 영적 교감을 갖게 된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생기는 법이다.
One compassionate word, action, or thought can reduce another person's suffering and bring him joy. One word can give comfort and confidence, destroy doubt, help someone avoid a mistake, reconcile a conflict, or open the door to liberation. One action can save a person's life or help him take advantage of a rare opportunity. One thought can do the same, because thoughts always lead to words and actions. With compassion in our heart, every thought, word, and deed can bring about a miracle.
연민의 마음이 담긴 말 한 마디, 행동 또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상대방은 고통이 줄어들고 기쁨을 얻게 될 수도 있다. 한 마디 말이 위로가 되고 자신감을 주고 의심을 물리치고 실수를 피하고 분쟁을 해소하고 해탈문을 여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행동 하나가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고 그 사람의 모처럼의 기회를 이용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한 생각 역시 똑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생각은 반드시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민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 생각, 말, 행동 하나 하나가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법이다.
When I was a novice, I could not understand why, if the world is filled with suffering, the Buddha has such a beautiful smile. Why isn't he disturbed by all the suffering? Later I discovered that the Buddha has enough understanding, calmness, and strength; that is why the suffering does not overwhelm him. He is able to smile to suffering because he knows how to take care of it and to help transform it. We need to be aware of the suffering, but retain our clarity, calmness, and strength so we can help transform the situation. The ocean of tears cannot drown us if karuna is there. That is why the Buddha's smile is possible.
사미승 시절에 나는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는데, 부처님은 저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계시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부처님은 그 많은 고통 중에도 불안해하시지 않는 것일까? 나중에서야 나는 부처님이 충분한 이해, 평정, 힘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때문에 부처님은 고통에 압도당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고통을 보살피고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고통에 미소를 지어 보이실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을 알아차려야 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 본질을 명백히 이해하고 평정과 힘을 갖추고 있어야 상황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 카루나가 있는 이상 고해에 빠져죽으란 법은 없다. 그 때문에 부처님은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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