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05호 구미쌍암고택을 설명할 차례인데, 그 바로 옆에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1호 해평동북애고택이 있고, 또 비저정문화재로서 그 집을 지은 6형제의 초상화가 전해오고 있으므로, 3건을 묶어서 한꺼번에 설명한다.
쌍암고택은 1755년(영조 31) 문성공계 안렴사공파 선산종회 인재공(현)파 17세 농수공(聾睡公) 최광익(崔光翊)이 지으신 살림집이고, 북애고택은 1788년(정조 12) 농수공의 차남 최승우(崔昇羽)가 지은 살림집으로 둘 다 대지가 1,300평 정도 되는 대단한 장원이다.
원래는 그와 같은 장원이 여섯 개가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지금은 쌍암고택과 북애고택만 전해오고 있는데, 쌍암고택에는 현재 26세 최열씨가 살고 있고, 북애고택은 빈 집으로 전해오고 있다.
80년대 말 무렵 구미에서 살 때 쌍암고택을 방문하여 최열씨로부터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쌍암고택을 농수공이 지었으며 장남 화은공(花隱公) 최성우(崔成羽)가 상속을 받았다.
그런데 훗날 동생 최승우가 북애고택을 짓자 형수가 새집에서 살고 싶다하여 서로 집을 바꾸었다고 한다.
YouTube를 검색해 보면, 쌍암고택과 북애고택 종손들이 출연하여 고택의 내역을 설명하는 TV방송이 있는데, 매우 자세하게 잘 설명하고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이 굳이 덧붙여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YouTube를 캡처 편집하여 설명을 대신하겠다.
첫댓글 쌍암고택 소재지인 해평에선 '선산종회'란 명칭은 사용하지 않으며 입향조 검재공의 후부인인 '해평김씨' 후손 8개파를 통틀어서 흔히 '해평파'라고 칭합니다.
영조조 때 6형제중 4째이신 '휘 광익(光翊)'선조의 호는 '농수(聾睡)'가 아닌 '농수재(聾睡齋)'입니다.
북애고택 건립 당시(1788년)에 농수재공의 차남인 '승우(昇羽)'의 나이가 19살(1870년생)이었던 바 본인이 지은게 아니고 아버지인 농수재공이 지어셨다고 보는게 맞다고 생각됩니다.
집을 다 짓고 나서 새집인 북애고택에는 형인 '성우(成羽)'가 입주한 것은 맞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후손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해평종회로 고처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하게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개 호를 부를 때 뒤에 齋나 堂을 붙이기도 하고 떼고 부르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농수공의 경우 초상화에는 농수재라고 적혀 있으나 <가경보>에는 농수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가경보>는 농수공의 아드님들이 만드신 족보이고 원본이므로 금석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올리신 동영상중 고택설명을 하시는 분중 첫번째 분은 양 고택의 후손은 아니면 '인재공(휘 晛)' 종손이신 '최세훈'종친이시며,두번째 설명하는 젊은 사람은 북애고택 주손인 '최우석' 종친입니다.
쌍암고택은 과거 대지가 2,200여평이었지만 주변이 짤려 나가서 현재는 1,500여평으로 줄었으며 이웃의 북애고택은 과거에는 약 3,000여평이었지만 역시 몇 부분이 짤려 나가서 현재는 2개의 지번으로 약 2,100여평입니다.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릴 때는 북애고택의 서쪽에 '화도댁'으로 불리었던 고택이 한채가 더 있었으나 주인이 유지가 어렵자 헐어버렸습니다. 과거에는 그 집을 포함하여 해평마을내에 그런 규모의 고택이 9채가 들어서 있었으나 동학혁명 후 급하게 몰락하여 오늘날엔 두 채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래 전에 최열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억을 더듬에가며 동영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