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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제가 한 강의입니다.
성남광주지구 성령기도회 강의
2019년 3월 1일 14시 모전동성당
회심한 사람들
0. 회심: conversion
Con (...과의 관계에서, 함께)
versio (돌다, 변화하다)
누구와 함께 방향을 바꾸고 변화하는 것.
I. 복음 말씀 묵상: 회심의 네 가지 요소
1. 복음봉독: 마르 1,14-20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2, 묵상
1)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신다. 요한이 체포된 이유는 왕의 윤리적 행동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루카 3,18-20) 이 사실이 예수님을 겁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도래의 상징으로 여긴다. 우리는 이처럼 오늘날 자행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폭력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방식을 식별할 수 있는가?
2)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셨다. 단순히 그 나라가 오심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안고 있고 신비도 설명하셨다. 그 신비의 대부분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이 원하는 것에 대해 답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버린 사람들에게만 드러난다.
3)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다음의 네 가지 단면을 갖는다.
- “때가 찼다!” 유대인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메시아의 때는 오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도래로 이미 시간은 완전히 준비되어 있었다.
-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오는 것인데, 이미 와 있던 것을 인간이 자신의 눈으로 보려 했으니 못 보았던 것뿐이다. 그 나라는 우리의 인생 속에 우리의 희망 속에 이미 씨가 뿌려져 있었기에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다. 특별히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느님의 약자와 빈자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표징이다.
- “회개하여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것으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들의 삶과 내 영 안에 존재함을 깨닫는 일이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형식을 바꾸어야 한다. 특히 바리사이들이 강조하는 형식주의적인 신앙이 아니라 세상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형제들 사이에서 발견해 내는 일이 진정한 회개이다.
- “복음을 믿어라!” 우리가 믿고 있던 것이 많이 있다. 그런데 복음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는 마음만이 아니라 새롭게 선포되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면 오로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선포하는 새로운 메시지는 늘 도전이다.
4) 복음 선포의 첫 목적은 그것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처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고 이미 그분에 대해 듣고 있었다(요한 1,39; 루카 5,1-11). 그분과 함께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도와줄 기회를 갖는 것이었고 자신들이 살던 방식과 다르게 새로운 무엇인가를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비록 어부라는 비천한 출신인데도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첫 사랑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세상의 어떤 질서로도 할 수 없는 사람 사랑을 보았던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사랑 안에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모든 이와 형제자매 공동체를 추구할 수 있었다.
3. 개인의 삶에서
1) 요한의 박해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도 공권력이라는 거대한 벽이 자행하는 폭력에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
2)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이 말씀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II. 회심한 사람들
A. 성 베드로
부르심: 1) 공관복음의 부르심 : 마태 4,18-22와 병행구
2) 요한복음의 부르심 : 1,35-42
3) 마르 14,22-33 :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말씀 - 첫 번째 부르심으로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부르시는 예수님: 마태 5,1
- 이 고기 낚는 이야기가 부활 이후에도 : 요한 21,1-19
- 이 두 고기 낚는 이야기 사이에 베드로가 회심하는 과정이 들어있음
: 고기 낚는 것이 그의 소명임을 알려주는 과정들임
2. 몇 개의 에피소드 - 교육
1)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마태 14,22-33
2) “그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마태 15,15
3)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마태 18,21
4) 성전세: 마태 17,24-
5)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으니: 마르 10,28
3. 몇 개의 에피소드 – 결심 – 그와 관계를 맺기 시작함
1) 이름을 지어주심 – 마르 3,16
2) 신양고백: 마태 16,16
3) 사탄 : 16,33
4) 여기서 지내면 : 마태 17,4
5) 약속 :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 마르 14,29-31
6) 선택됨 : 겟세마니 : 마태 26,35
7) 잠 : 마태 26,40
8) 말코스 : 요한 18,10
9) 부인 : 맹세까지 하면서 : 마태 26,73
: 천벌을 받겠다고까지 맹세하면서 : 26,74
4.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 요한 21
5. 2베드 1,3- : 말년의 그의 권고
B. 복자 샤를 드 푸코
복자 샤를 외젠 드 푸코(Charles Eugene de Foucauld, 또는 샤를 드 푸코)는 1858년 9월 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불행히도 여섯 살이 되던 1864년 부모를 차례로 잃고 고아가 되어 외조부인 드 모를레(De Morlet)에게 맡겨졌다. 여기서 그는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촌 누이 마리(Marie)를 만났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와 예수회가 운영하는 낭시(Nancy)의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학업에 성실치 않아 성적이 부진했고 또 엄격한 규율 생활을 싫어해 기숙사를 도망쳐 나왔다. 그는 퇴학과 함께 신앙마저 잃고 16세 이후부터 세속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1876년 육군 사관학교와 1878년 기병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한 그는 로렌(Lorraine) 지방과 알제리 북동부 지역에서 복무하였다. 하지만 방탕하고 멋대로 행동하던 그는 1881년 계급을 박탈당했다가 다시 회복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군대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깨닫고 제대한 후,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 탐험을 시작하였다. 그는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Alger)에서 1년간 그 지방 언어와 관습을 배운 뒤 사막에서 유대인 랍비의 시종으로 가장하고 2년 동안 생활하였다.
탐험 생활 중 사막의 광활함에서 느낀 고독과 그 안에서 알라 신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는 무슬림의 순박하고 투철한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1886년 10월 사촌누이로부터 소개받은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의 앙리 위블랭(Henri Hublin) 아빠스와의 영적 대화를 통해 고해성사를 보고 교회와 화해하면서 성체를 모셨다.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인 푸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도와 금욕의 삶을 시작했고, 위블랭의 지도를 받으며 봉쇄생활을 하던 중 은수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다.
그는 1890년 성지순례를 하던 중 나자렛에서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하여 마리 알베릭(Marie-Alberic)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곧 시리아에 있는 아크베(Akbes)의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으로 옮겨 그곳의 허름한 거처에서 1896년까지 지냈다. 1892년 수도서약 후 절대적인 청빈과 자기희생, 절제와 고독을 추구하던 그는 1896년 알제리의 스트라우엘리(Straoueli) 수도원을 옮겼다. 늘 더 큰 고독과 기도와 절제의 삶을 살고자 했던 그는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고 트라피스트회를 떠나 1897년 팔레스티나의 나자렛으로 가서 클라라회 수녀원의 문지기로 살며 1900년까지 밤낮으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의 생활은 가장 비천한 노동, 경건한 독서, 성경 공부, 기도로 이어졌다. 나자렛에서 스승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자신의 성소를 확인한 푸코는 1900년 파리(Paris)의 수도원으로 돌아와 사제품을 준비한 후 1901년 6월 6일 비비에르(Viviers)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품을 받은 푸코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이끌려 모로코와 알제리 국경 근처 베니 수도원(Beni-Abbes)의 은수처로 들어갔다. 그는 사막의 무슬림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는데, 그 방법은 설교가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관상과 사랑의 삶을 통해서 자신 스스로 ‘보편적인 형제’인 하느님의 사람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과정은 후에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예수 성심의 형제회’(La Fratermite du Sacre-Coeur de Jesus)라고 이름 붙인 은수처에서 늘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오랜 시간 동안 조배를 했다. 1905년 그는 사하라 사막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알제리 남부의 도시인 타만라세트(Tamanrasset) 근처 아하가르(Ahaggar, Hoggar) 산에 은수처를 마련한 후, 그곳에서 11년 동안 생활하면서 선교사들이 올 때를 대비하였다. 그는 투아레그족(Tuareg)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들의 관습과 언어에 대해 배웠다. 또한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과 정성을 다해 사람들을 섬기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푸코 신부는 유럽으로 돌아가 군종신부나 위생병으로 참여할 것을 생각했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의무임을 깨달아 아프리카에 남았다. 그러나 그는 1916년 프랑스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 여파로 12월 1일 타만라세트에서 사누시파(Sanusiyah) 무슬림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푸코 신부가 사막에서 죽은 후 그의 영적인 영향은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는 사막에서의 고적한 삶을 통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하느님을 깨닫는 행복을 누렸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비그리스도교 대중 안으로 파고들어 간 선구자였다. 그래서 그를 일컬어 ‘사막의 은수자’, ‘사하라의 사도’라고도 한다. 그의 좌우명은 ‘예수 사랑’(Jesus Caritas)이란 두 단어였다.
그는 생전에 제자를 두지는 않았지만, 그의 영향으로 ‘예수의 작은 형제회’(Little Brothers of Jesus, 1933년)와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Little Sisters of Jesus, 1939년)가 설립되었다. 이들에 의해 푸코 신부가 행한 새로운 형식의 관상 기도가 널리 알려졌다. 그것은 세속에 살며 실천하는 관상생활로 침묵 중에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나누고 복음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사도직이다. 그래서 그들은 빈민 지역이나 공장이라는 ‘사막’으로 가서 덕과 관상 기도의 모범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보여주고 있다. 샤를 드 푸코 신부는 2005년 11월 13일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복되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이 세상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제 영혼을 바치옵니다.
하느님은 내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C. 11월 23일-2월 28일
- 섭리가 이겼다
- 그럼에도 나는 또 그렇게 나를 살 것이다
- 나는 늘 그렇게 밖에 판단하지 못하도록 타고 났다. 이는 부족함이기보다 경고이고 초대이다. 겸손으로
- 늘 나는 늦게 알아 실수하고 실패하지만 하느님께서 그 빈자리를 늘 메우셨고,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히 다르게 하셨다. 요나의 경우처럼
- 결국 맡김이 문제이지 해냄이 문제가 아니다. 그분은 텅빈 충만, 존재하게 하는 없음이시다.
우리 일을 하느님께서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일을 한다. 우리는 그분의 도구일 따름이다.
III. 결론
: 이해하는 것만큼 알고, 아는 것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만큼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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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감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 할 자격도 없는 비천한 저의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