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인 북아일랜드에서는 독립을 주장하는 구교 세력과 영국과 가까운 신교 세력의 갈등이 뿌리깊이 남아있다. 매년 7월 중순에 1690년 보인전투에서 구교 제임스2세 왕에 맞서 승리를 거둔 신교 윌리엄 오렌지 공을 기념하기 위해 신교 세력들이 `오렌지 행진'을 벌인다. 이를 기화로 양측이 충돌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1998년 평화협정을 이후에는 신.구교를 대표하는 2개 정당이 연합정부를 구성해 자치권을 행사하며, 대립을 평화적으로 해소하려고 애쓰고 있다.
1915년의 충돌은 유혈사태를 낳았고, 긴장이 고조되어 전쟁에 가까운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삼아 데이빗 린 감독이 만든 회심의 역작 <라이안의 딸>이 인상적이다. 그의 작품 중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지바고>에서 한껏 서사극을 펼치는 역량이 축적되었고 이 영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관객도 평자들도 반응이 좋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를 묻는 기자에게, <라이안의 딸>을 꼽았다.
걸작임에는 틀림없다. 모리스 자르의 음악도 일품이지만, 로버트 볼트의 시나리오도 매우 좋다. 그의 아내인 사라 마일즈가 여주인공 역으로 나온다. 다시 시골학교에 부임한 은사와 결혼하지만, 불만으로 가득찬 삶을 벗어나려고, 적의 장교와 밀회한다. 동네 사람들의 사교장이었던 선술집을 운영하는 라이안이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무장저항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밀회를 눈감아주던 마을 사람들도 이제는 참을 수 없다고, 라이안의 딸에게 린치를 가하고 추방한다. 아버지는 대신 당하는 딸의 수모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신부역을 맡은 트레버 하워드의 연기도 매우 좋다. 제2의 제임스 딘이라 불리우며 기대를 모았던 크리스토퍼 존스도 볼 수 있고, 온 주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여주인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저능의 추남 존 밀스를 기억하는 팬들도 많다. 옥의 티는 두 가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절벽을 올라오면 바로 쾌청한 날씨인 것이 현실감이 떨어진다. 여주인공의 은사이자 남편은 백년 전 문화수준으로 볼 때 엄청난 고전음악 애호가인데, 그가 듣는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은 1960년대 유명 오케스트라의 솜씨이고 스테레오 녹음이지, 1915년의 유성기가 낼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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