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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창세 37장 – 41장
<37,1-36 요셉의 꿈과 형들의 악행 – 팔아버리자>
오랜 타향살이를 마치고 귀향한 야곱은 아버지가 죽은 뒤 가나안 땅 헤브론에 정착한다. 이제부터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툴레도트)"가 시작된다(2절).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도 벌써 열입곱 살이나 되었다. 그의 출생은 야곱 인생의 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할아버지 이사악과 아버지 야곱처럼 아이를 못낳은 여인 라헬에게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요셉은 선조들처럼 하느님 약속의 상속자가 될 것인가? 지금 그는 이복 형들의 양치기일을 돕는 보조 목자로 일한다. 그런데 그는 형들의 “나쁜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그가 실제로 있었던 진실을 전한 것 인지, 아니면 그가 비틀어서 잘못 전했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그와 형들 사이에 틈이 생긴다.
게다가 요셉은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을 가장 사랑했던 야곱은 늦둥이인 데다 어미마저 잃은 요셉을 더욱 이낀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37,3-4).
남다른 요셉의 사랑은 “긴 저고리”를 지어 입히는 것으로 표현된다(3절). 이 옷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어 ‘장식 달린 옷’ ‘여러 색깔의 긴 겉옷’ 으로도 옮긴다(2사무 13,18 참조). 이러한 아버지의 편애에 다른 형제들은 상처를 입었다. 아버지와 요셉이 한편이라면, 다른 형제들이 대척점에 선다. 그래서 그 형제들은 요셉에게 “정답게(살롬shalom)"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집안의 평화-shalom가 깨진 것이다.
이러한 불화를 더욱 악화시킨 일이 요셉의 꿈 이야기다. 꿈은 두 가지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꾼 이 꿈 이야기를 들어 보셔요.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 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 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37,6-7).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37,9).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에게 큰절을 하는 처음 꿈은 형들에게만 이야기한다.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요셉에게 절하는 두 번째 꿈은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야기한다.
꿈 풀이는 형들과 야곱이 하지만, 문제는 요셉이 이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떠벌림으로써 형들의 미움을 더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요셉의 우쭐거림과 미성숙이 드러난다. 그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자기 중심적으로만 이해하는 철부지로 무슨 일이 생길지 내다보지 못한다. 이 꿈을 이스라엘 역사와 연관시켜,“네가 우리의 임금이라도 될 셈이냐?"라는 형들의 격앙된 빈정거림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변화를 일으켰던 물음, 도대체 왕국이 있어야 되는가, 또 동생이 형제들 위에 앉아도 좋은가 라는 의문이 깃들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듯 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형식은 40-41장에서 다시 등장할 것이다.
현대의 뇌과학에서 꿈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지만, 아직 그 정체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고대인들에게 꿈은 매우 중요한 신의 통교 수단이었다. 앞의 선조 이야기에서 나온 꿈 이야기들(20,3; 28,12; 31,10-13)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요셉 이야기에 나오는 꿈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아닌,앞날에 대한 예지적 기능을 가진다. 형과 아버지의 격렬한 반발은 이 꿈에서 예시하는, 기존 질서가 뒤집히는 데 대한 불안과 적대감의 표출이랄 수 있다. 그렇지만 농부가 아닌 목자인 그들에게 왜 곡식단이 꿈에 나타났을까? 이 꿈이 지닌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등에 주목하지는 못한다. 다만 일찍이 꿈에서 하느님을 체험했던 야곱이 이를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남다르다(11절; 10절에서 죽은 요셉의 어머니를 거론하는 것은 의아하다). “그가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야기하자,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어 말하였다. “네가 꾸었다는 그 꿈이 대체 무엇이냐? 그래,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너에게 나아가 땅에 엎드려 큰절을 해야 한단 말이냐?”(37,10). 야곱은 이를 하느님께서 요셉을 택하신 표징으로 믿었는지 모른다.
꿈 이야기는 요셉과 형들 사이에 쐐기를 박아 놓았다. 그 뒤 이스라엘은 형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오라고 요셉을 보낸다. 요셉의 승락 “그러십시오(hineni: 제가 여기 있습니다)"는 앞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될 때 드러난다. 여기에서도 집안의 불화와 미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야곱과 요셉의 둔감함이 나타난다. 게다가 요셉을 보내는 스캠은 헤브론에서 먼 거리인데다 예전에 시메온과 레위가 학살극을 벌였던 ‘살인의 추억’ 이 생생한 곳이다. 요셉은 스캠에서 형들을 찾지 못하자 북쪽의 도탄(스켐에서 10킬로 정도 떨어진 곳)까지 올라가며 맡은 일을 책임 있게 수행하려 한다. 멀리서 오고 있는 꿈쟁이 요셉을 보고 형들은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민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37,19-20).
형제들은 요셉의 꿈의 실현을 어떻게 든 막아보려는 심산이다. 그러나 맏아들 르우벤이 그를 죽이지 말고( ‘피만은 흘리지 마라) 구덩이에 던져 버리자고 제안하여 그렇게 한다. 그는 요셉을 구함으로써 르우벤은 앞에서 저지른 비행인 아버지의 소실 빌하를 범한 것에 대한(35,22) 보상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다의 제안으로(26-27절),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을 받고 판다. 은전 스무 닢은 기원전 이천년대 전반부에 청소년 노예를 거래할 때 지불하던 몸값이었다는 주장이 있다(레위 27,5 참조). 도탄 주변에는 예전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 길앗을 거쳐 이집트로 가는 교역로가 발달되어 있었다. 이와 달리 미디안 상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꺼내어(28절) 그를 이집트로 데려가 팔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요셉의 말과 태도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그를 구덩이에 던진 후에 그의 형들이 태연하게 빵을 먹는 모습에서 타인의 고통에 냉혹한 그들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나중에 요셉이 주인으로 그들을 먹일 것이다.
뒤늦게 요셉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된 르우벤은 맏이로서 아버지 앞에서 요셉의 행방을 해명해야 할 책임을 느끼면서 부르짖는다(30절). 이제 형들이 요셉에게서 제일 먼저 벗긴, 편애와 미움의 표상인 그의 저고리(23절)가 요셉의 죽음을 거짓으로 알리는 도구로 이용된다(31-32절). 그들은 그것을 야곱에게 “아버지 아들”의 저고리인지 살펴보도록 제시한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지 자기 네 동생이 아닌 것이다. 눈먼 아버지를 속인 야곱은 자기 아들들의 거짓말을 알아채지 못한 채 속아 넘어간다. “야곱은 옷을 찢고 허리에 자루옷을 두른 뒤, 자기 아들의 죽음을 오랫동안 슬퍼하였다. 그의 아들딸들이 모두 나서서 그를 위로하였지만, 그는 위로받기를 마다하면서 말하였다. ‘아니다. 나는 슬퍼하며 저승으로 내 아들에게 내려가련다.’ 이렇게 요셉의 아버지는 그를 생각하며 울었다”(37,34-35). 자루옷은 초상이나 재앙을 당했을 때 애도나 속죄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맨살 위에 업던 자루같이 생긴 옷이나 천이다. 야곱은 울면서 저승(셔올-지하의 세계로 죽은 이들이 여기에서 단축된 삶을 영위함)으로 아들을 만나러 ‘내려가련다’고 말한다(35절). 요셉의 죽음은 야곱에게도 죽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살 보람과 희망을 앗아간 것이다. 한편 요셉은 미디안 상인들에게 끌려가 이집트로 내려가 종으로 팔린다. 이제부터 그의 삶은 ‘내려가는’ 인생이다. 집안에서 잊혀진 존재, 아니 죽은 존재로 완전히 새로운 처지에서 홀로 투쟁하며 고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38,1-30 유다와 타마르 - 나보다 더 옳다>
그런데 난데없이 유다 이야기가 이어진다. 38장은 본디 요셉 이야기에 속한 부분이 아니라 유다의 자손들에게 할애된 부분이다. 유다는 레아의 소생으로 야곱의 넷째 아들이다. 형 셋(르우벤, 시메온, 레위)이 모두 아버지의 눈 밖에 난 지금,유다가 실질적인 맏이 구실을 한다. 이미 앞에서 유다는 그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그런데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이 주목받다 사라진 지금, 그가 계속 열두 형제의 맏이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어찌된 영문인지 유다는 형제들과 떨어져 가나안 성읍인 아둘람(헤브론의 북서쪽 16킬로 떨어진 구릉지대)으로 내려간다(1절). 그는 가나안 사람의 딸을 만나 혼인하여,세 아들 에르, 오난 그리고 셀라를 낳았다.
맏아들 에르의 아내도 가나안 여자 타마르였다. 이 점에서 유다는 가나안 여자와의 혼인을 극구 거부하던 선조들의 예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맏아들 에르가 주님 보시기에 악하여 자식 없이 죽고 만다. 유다는 에르의 동생인 오난에게 과부가 된 형수와 혼인하도록 이른다. 이와 같이 누군가가 지식 없이 죽었을 때 그의 형제가 그 과부와 혼인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낳은 맏이를 고인의 아들로 간주하여 고인의 후손이 이어지게 하려는 규범을 수혼법(Ievirate)이라 부른다(신명 25,5-10). 만약 이를 거부하면 모욕을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오난은 이를 받아들인 척 형수와 한자리에 들면서도 수태가 되지 않게끔 정자를 바닥에 쏟아버렸다. 아이를 낳아 그가 형의 아들로서 상속자가 되어, 자기 몫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겉으로만 의무를 지키고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 이기적인 오난도 주님의 심판을 받는다(8-10절). 유다는 두 아들을 잃었다. 어쩌면 그제서야 그도 아들(요셉)을 앓은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아무튼 그는 셋째 아들인 셀라가 클 때까지 며느리를 친정으로 올라가 지내게 한다(11절). 그는 며느리 탓으로 아들들이 죽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셋째 아들을 지키려 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유다의 아내까지 죽었다. 하지만 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가장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고, 또 과부인 며느리를 돌보지도 않았다. 타마르와 장성한 셀라를 혼인시키지 않았고 그럴 뜻도 없었다. 타마르는 이를 알았다. 시아버지가 움직이지 않자, 며느리가 자신의 목숨과 명예까지 내놓고 과감하게 나선다. 타마르가 시아버지의 씨를 받으려 한 행동은 죽은 남편의 상속자를 낳으려는 비상 수단이었다. 그래서 타마르는
그때까지 입고 있던 과부옷을 벗고 너울을 쓴 뒤 길가에 나가 앉았다. 아내의 공식적인 애도 기간을 끝내고 팀나(아둘람에서 북동쪽으로 7krn 지점)로 올라가던 유다가 먼저 수작을 건다. 유다는 타마르를 몸파는 여인으로 생각했다. 타마르는 관계를 갖기 전에 인장과 줄,지팡이를 화대의 담보물로 달라고 요구한다(17절). 이런 것은 유력한 남자들이 지니는 물건으로,후에 아이를 낳을 경우 그 아버지를 밝히기 위함이다. 타마르는 나중에 자기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로 이를 쓰려고 한다. 유다는 고대 근동의 관습대로 새끼 염소 한 마리를 화대로 주겠다고 하나(판관 15.1 참조), 결국 거짓말이 된다(37.31에서도 염소 피는 거짓의 도구가 된다). 유다는 뒤늦게 자신의 소유물을 찾기 위해 친구 편에 화대를 보내지만 자기와 관계한 신전 창녀의 소재를 찾지 못한다.
“석 달"(24절)은 타마르가 임신한 사실을 겉으로 알아볼 수 있는 시기이다. 셀라와 혼인하게 되어 있던 과부 타마르의 임신은 “창녀질”한 결과로 전해진다. 시아버지 유다는 간음한 며느리를 끌어내어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한다(24절). 간음죄에 대한 처벌로서 초기 이스라엘에서는 화형법이 시행된 듯 하나 후대에는 사제의 딸이 음행했을 경우에만 화형에 처했고(레위 21,9) 그 밖에는 돌로 쳐죽였다(신명 22,24: 요한 8,4-5). 이때 타마르는 자신에게 아이를 갖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인장 등을 ‘살펴보도록’(이 단어는 요셉 이야기에서 중요하다) 청한다. 아버지 야곱(“살펴보다 .. 37.32-33)과 달리 유다는 증거를 살펴보고 즉시 진상을 깨닫는다. 그리고 고백한다. “그애가 나보다 더 옳다”(26절). 타마르가 속임수를 써서 간음죄를 지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욕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다가 막은 집안의 미래를 열기 위한 의로운 행위였다는 것이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중적 가치기준을 지녔던 유다는, 시아버지로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불의와 잘못을 용기있게 공적으로 인정한다. 이 고통스러운 죄의 고백을 통해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변화되기 시작한다. 앞에서 요셉의 옷으로 아버지를 속인 그는 지금 며느리에게 속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우친다. 나중에 요셉이 속임수를 쓸 때, 유다는 또 다시 자신의 잘못을 깨닫
고 기꺼이 종을 지원할 것이다(43,9: 44,32).
타마르는 쌍둥이 페레츠와 제라를 낳는다. “타마르가 해산할 때가 되었는데, 그의 태 안에는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그가 해산할 때, 한 아기가 손을 내밀었다. 산파가 붉은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고서, ‘얘가 먼저 나온 녀석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아기가 손을 도로 집어넣고, 그의 동기가 나오니, 산파는 ‘아니, 네가 틈을 비집고 나오다니!’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 이름을 페레츠라 하였다. 그다음 그의 동기 곧 손에 붉은 실을 매단 아기가 나오자, 그 이름을 제라라 하였다”(38,27-30).
페레츠는 ‘틈, 돌파구’라는 뜻으로 룻을 통하여 다윗이 태어난다. 그는 다윗의 선조가 된다. 레베카가 받은 주님의 신탁이(25.23) 다시금 구현된다. 쌍둥이의 출생은 마치 자신의 불의를 인정한 유다에게 보상으로 요절한 두 아들을 되돌려 주는 듯하다.
본래 유다와 타마르 이야기는 다윗 왕조를 낳은 유다 지파의 기원을 설명하는 기원 설화였으리라고 추정된다. 이스라엘의 가장 오랜 노래로 믿어지는 드보라의 노래(판관 5장)에 아직 유다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유다 지파는 레위, 시메온 지파와 같이 비교적 늦게 이스라엘의 부족 공동체에 합류한 것 같다. 그러나 유다의 아들 페레츠족에서 다윗 집안이 유래하였기(룻기 4,18-22; 1역대 2,5-15) 때문에 유다 지파는 구원사 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요셉 이야기에 삽입되면서 장차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중심 세력이 되는 유다와 요셉(에프라임과 므나쎄) 지파의 배경 설명은 밑에 깔린다.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은 중심 모티브를 통해 앞뒤로 흘러간다. 상대방을 속이는 도구로 쓰이는 요셉의 긴 저고리(37장)와 타마르의 너울(38장)과 요셉의 옷(39장), 범죄의 증거물을 ‘살펴보는’ 야곱(37장)과 유다(38장), 유다의 유혹(38장)과 주인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는 요셉(39장)이 서로 대조를 이루면서 이야기의 긴장을 높인다.
결국 유다와 타마르 이야기는 속고 속이는 과정 가운데 한 집안의 미래가 어떻게 마련되는지 보여준다. 둘의 죽음과 둘의 탄생 가운데 타마르와 주님이 계신다. 타마르는 시할머니 레베카처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존 관습에 과감히 도전하였다. 자기를 내놓아 유다 지파의 미래를 연 그는 후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길이 기억된다(룻4,12; 마태 1,3). 아울러 주님은 사람의 기존 윤리와 생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당신의 약속을 조용히 실현하신다. 이사악과 야곱이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약속의 상속자가 되었듯이, 가나안 여자 타마르도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39,1-23 요셉이 받은 유혹과 감옥 생활 - 나와 함께 자요>
다시 무대는 이집트로 바뀐다. 이집트로 내려온 요셉은 파라오 왕의 경호대장 포티파르에게 팔렸다. 그는 주인의 눈에 들어 “그의 집과 모든 재산의 관리인”으로 세워졌다(5절). “주인이 요셉을 자기 집과 모든 재산의 관리인으로 세운 뒤부터, 주님께서는 요셉 때문에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주님의 복이 집 안에 있는 것이든, 들에 있는 것이든 그의 모든 재산 위에 미쳤다”(39,5).
그가 이렇게 자리잡게 된 것은 온전히 주님(야훼) 덕분이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고" (2.3절),그의 손을 통해서 하는 일마다 잘 이루어 주셨으며(3절),요셉 때문에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던 것이다(5절). 라반에게 야곱이 그러하였듯 요셉도 그와
연관된 이를 잘 되게 하는 복의 원천이 된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은 그의 출중한 외모에서도 나타난다(1사무 9,2의 사울; 16,12의 다윗). 아름다운 외모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표지이지만, 또한 그것으로 인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이성의 유혹을 받거나 나르시스처럼 스스로 자기 아름다움에 도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셉은 주인뿐 아니라 주인 아내의 눈에도 들었다. 그런데 그녀의 의도는 달랐다. 주인 아내는 노골적으로 눈길을 보내며 “나와 함께 자요”라고 명령한다(7절). 약자를 자기 마음대로 부리려는 강자의 폭력이다. 그들은 약자의 삶을 거침없이 파괴하려 한다. 그러나 무력한 종 요셉은 강력한 안주인의 요구를 분명하게 거절한다. 그 이유는 자신을 신뢰하는 주인을 배신할 수 없다는 신의와 책임감,그리고 자기와 함께 해 주셨던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제가 어찌 이런 큰 악을 저지르고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9절). 요셉은 이제 와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거론한다. 자기만 알던 철부지가 주변 관계와 사리를 분별하며 하느님을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그래도 주인 아내의 요구가 끈질기게 이어지자, 요셉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함께 있지도 않”을 만큼 철저히 피하였다(10절).
“하루는 그가 일을 보러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11절)라는 말은 그가 잠시 후에 벌어질 사건에서 죄가 없음을 알려주는 상황 설명이다. 주인 아내가 요셉의 옷을 잡고 “나와 함께 자요”라고 명령했을 때,요셉은 거절의 말을 하는 대신 즉시 옷을 둔 채 밖으로 도망쳤다. 자기 삶을 그녀의 손에 맡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반면에 그녀의 손에 잡혀 있는 요셉의 옷은 곧 그의 운명이 그녀의 손아귀에 달려 있음을 뜻한다. 처음부터 주요한 소재로 등장했던 요셉의 ‘옷’ 은 야곱에게 제시된 거짓 증거처럼(37,31-33) 여기서도 결정적인 거짓 증거로 쓰인다. 유혹에 실패한 주인 아내는 요셉의 옷을 근거로 하여 하인들과 주인에게 요셉을 모함한다. 여기서 요셉의 신원은 “히브리 녀석, 히브라 종”(14.17절)으로 규정된다. 그녀는 요셉을 얽어맬 뿐더러 그런 종을 집안에 들였다고 주인까지 은근히 비난하여 그의 분노를 키운다. 주인은 요셉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감옥에 가두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그런데 그 감옥은 임금의 죄수들만 갇혀 판결을 기다리는 구류 감방이었다. 요셉은 다시 구덩이로 내려가게 된다. 세 번째 내려감이다(도탄의 구덩이, 이집트,감옥).
주님께서는 이 감방에서도 요셉과 함께 계셨다. 그래서 요셉은 전옥의 눈에 들어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하게 되었다. 요셉은 포티파르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여전히 모든 일을 충실하고 지혜롭게 처리하는 관리인이 된다. 이렇게 역경을 묵묵히 참으며 어느 처지에서 하느님을 경외하고 모든 일을 잘 이루는 사람인 요셉의 모습은 흔히 지혜문학에서 소개하는 현인을 연상시킨다.
요셉은 한낱 히브리 종에 불과했다. 요즘말로 불법체류자와 가장 가깝다. 그러니 그가 도움을 받을 길은 전혀 없었다. 그가 의지할 수 있고 그를 도와줄 수 있는 단 한 분은 조상들의 하느님이셨다. 요셉은 낯선 땅의 종이 되어서야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자신이 모든 일을 잘 할 수 있는 근원이 하느님이심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그분은 주인 아내의 모함에서 요셉을 직접 구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절망과 고난의 현장인 그 감옥에서도 그와 함께 계셨다. 요셉은 불평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묵묵히 견디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이라도 항상 번영과 영광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언제 어느 처지에서든 하느님을 놓지 않는 일, 그분께 대한 믿음을 앓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 바라고 바랐더니 나에게 몸을 굽히시고 내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어" (시편 40,2)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40,1-41,57 시종장과 파라오의 꿈을 풀이한 요셉 - 그 꿈 풀이는>
1) 두 시종장의 꿈을 풀이하다(40,1-23)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는 무언가 새로운 상황의 도래를 암시하는 시작 어구이다(1절).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에 파라오의 두 시종장이 투옥된다. 그들을 시중들던 요셉은 어느 날 밤 꿈을 꾼 그들이 근심하는 모습을 본다(6절). 그들은 감옥에 꿈을 풀이해 줄 사람이 없어 근심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 서는 꿈과 그 해석을 매우 중시하였고 해몽을 특별한 기술로 생각하여 이를 전문으로 하는 관리가 있었다. 그러나 요셉은 하느님만이 꿈을
풀이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꿈 풀이 능력은 하느님의 은혜로 받은 지혜였다(8절).
헌작 시종장의 꿈은 다음과 같다.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었네. 그 포도나무에는 가지가 셋이 있었는데, 싹이 돋자마자 꽃이 피어오르고 포도송이들이 익더군. 그런데 내 손에는 파라오의 술잔이 들려 있었다네. 그래서 내가 그 포도송이들을 따서 파라오의 술잔에다 짜 넣고는, 그 술잔을 파라오의 손에 올려 드렸네”(40,9-11).
그리고 제빵 시종장도 자신의 꿈을 말했다. “나도 꿈에 보니 내 머리 위에 과자 바구니가 세 개 있었네. 제일 윗 바구니에는 파라오께 드릴 온갖 구운 빵이 들어 있었는데, 새들이 내 머리 위에 있는 그 바구니에서 그것들을 쪼아 먹고 있었네”(40,16-17).
헌작 시종장의 꿈에는 파라오에 대한 그의 지극한 정성이 표출된다. 요셉은 그의 꿈을 좋게 풀이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억울한 처지와 결백을 주장하며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호소한다(14절). 반면에 지극히 건조한 제빵 시종장의 꿈은 부정적으로 풀이한다. 그 시종장은 파라오가 먹을 빵을 새들이 먹도록 방치해 둔 것이다. 요셉이 말한 사흘 후,파라오의 생일에 그들의 운명은 하나는 복직되고 하나는 죽는다는 요셉의 풀이대로 결정된다. 하지만 복직된 헌작 시종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요셉은 다시 잊혀진다(23절).
요셉 이야기에서 꿈은 짝을 이루어 등장한다. 첫 번째 꿈 이야기(37,5-11)에서 꿈을 꾼 이는 요셉이나, 풀이한 이는 빈정거리는 형들과 아버지였다. 높은 직위와 관련된 그 꿈으로 인해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요셉은 죽을 위기에 몰리다가 종으로 팔렸다. 두 번째로 나오는 두 가지 꿈에서 요셉은 해몽가로 등장한다. 예지적 꿈을 꾼 두 시종장 중 하나는 다시 임금의 사랑을 받고 하나는 죽는다. 꿈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치명적 결과를 일러준다. 그것이 생명의 하느님, 미래를 관장하시는 하느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요셉의 처지는 잘 풀릴 듯 보이다가 다시 실망스런 처지로 바뀐다.
2) 파라오의 꿈을 풀이하다(41,1-57)
그로부터 이 년이 흘렸다. 파라오는 꿈을 꾼다. “그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잘생기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나일 강에서 올라와 갈대밭에서 풀을 뜯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못생기고 야윈 암소 일곱 마리가 나일 강에서 올라와, 강가에 있는 그 암소들 곁으로 가서 섰다. 그러고는 이 못생기고 야윈 암소들이 잘생기고 살진 그 일곱 암소를 잡아먹는 것이었다. 파라오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다시 잠이 들어 두 번째 꿈을 꾸었다. 밀대 하나에서 살지고 좋은 이삭 일곱이 올라왔다. 그 뒤를 이어 야위고 샛바람에 바싹 마른 이삭 일곱이 솟아났는데, 이 야윈 이삭들이 살지고 여문 그 일곱 이삭을 삼켜 버리는 것이었다. 파라오가 잠에서 깨어 보니 꿈이었다”(41,1-7).
그의 꿈에 나타난 암소와 밀은 목축과 농경을 겸하던 이집트 경제의 대표적인 표본이다. 7이란 숫자는 이집트와 동방에서 완전한 축복이나 저주를 뜻하는 상징수이다. 파라오의 두 번째 꿈에서 이삭을 바싹 말렸다고 한 샛바람은 동풍이다(6절). 팔레스티나에서는 동쪽 시리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동풍(sirocco)이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기에 농작물을 해친다. 그래서 성경은 샛바람을 파괴의 상징으로 쓴다(탈출 14,21; 이사 27,8; 호세 13,15: 이집트에서는 남쪽의 사하라에서 사막 바람이 불어오므로 마파람으로 되어야 옳다). 파라오는 꿈을 꾼 뒤 그것이 불길한 내용임을 직감하고 마음이 불안하였다(8절). 파라오는 신의 지상 대리자이기에,그의 꿈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극히 중요한 것으로 다루어졌다. 그래서 이집트의 “모든 요술사와 모든 현인”이 불려와 갖가지로 해석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꿈을 풀이하지 못하였다(8절).
그제서야 헌작 시종장은 자기 잘못을 깨닫는다. 비슷한 꿈 사건이 생기자 한동안 잊었던 “젊은 히브리인” 해몽가 요셉을 기억해 낸다(9-13절). 기억을 통해 상황은 역전된다. “파라오는 사람들을 보내어 요셉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들은 서둘러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어,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런 다음 요셉은 파라오에게 들어갔다”(41,14).
요셉은 파라오 앞에 나선다. 파라오가 ‘너는 듣기만 하면 풀이한다고 들었다’ 하자, 요셉은 “저는 할 수 없고 하느님께서 파라오께 상서로운 대답을 주실 것”이라고 지혜롭게 답한다(16절). 요셉은 꿈을 꾸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상기시킨다. 이집트에서는 다른 여러 신들을 섬기고 있었기에, 요셉이 하느님을 언급한 것이 파라오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파라오의 꿈 이야기를 듣고 즉각 풀이한다. 파라오의 꿈 두 가지는 요셉의 꿈과 마찬가지로 모두 미래에 닥칠 한 가지 사항을 가리킨다. 곧 보잘 것 없는 것(기근)이 강한 것(대풍)을 이기리라는 것이다. 동시에 두 시종장의 꿈처럼 행운과 불행을 각각 예시한다. 또한 같은 내용이 반복됨으로써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일러준다. 요셉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앞으로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는 바를 파라오께 알려주시는 것”이라고 세 차례나 밝힌다(25.28.32절). 이집트 땅에서도 풍요와 기근을 관장하시며 앞날을 열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파라오의 꿈 내용은 불길하지만, 하느님께서 이를 일러주시는 뜻은 이에 대처하라는 가르침이다. 예고된 재앙에서 살아날 길이 있다. 요셉은 구체적인 대처 방안까지 현명하게 제시한다. 요셉은 자기 자신를 추천하지 않고 파라오에게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33절)을 가려내어 일을 맡기라고 그의 권한을 존중한다. 파라오는 자신이 그토록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꿈을 요셉이 밝히고 그 해결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자,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그 일을 맡아 줄 것을 부탁한다. 파라오는 요셉을 “하느님의 영을 지닌 사람”으로, 곧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만이 그분이 일러주신 그 일을 감당할 능력을 가졌다고 판단한것이다(38-40절; 예레 1,10 참조). “파라오는 자기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처럼 하느님의 영을 지닌 사람을 우리가 또 찾을 수 있겠소?’ 그런 다음 파라오는 요셉에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 주셨으니, 그대처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또 있을 수 없소”(41,38-39).
파라오는 즉시 요셉을 자기 다음 가는 자리에 앉히고 이집트를 다스리게 한다. “이제 내가 이집트 온 땅을 그대 손 아래두오"(41절).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의 말이 곧 법이었다. 파라오의 선포로 요셉은 파라오 다음 가는 고관이 되었다. 파라오가 요셉에게 그러한 권한을 부여하는 공식 절차는 임명(41절), 인장 반지를 끼워 주고,아마 옷을 입히며 금목걸이를 걸고 병거에 태워 행렬할 때 “무릎을 꿇어라” 하는 공적 예식(42-43절),새로운 이름차프낫 파네아라고 부여하여 그의 신분을 높이고(45절),사제 포티 페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맞이하고, 전국을 돌며 그의 지위를 확인하는(46절)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셉이 받은 새 이름 ‘차프낫 파네아’는 이집트어로 “신께서 말씀하신다: 그가 살고 있도다” 또는 “생명의 창조주”라는 뜻이다. 그의 장인이 된 포티 페라는 태양신 레를 섬기는 온(On,헬라어로 헬리오 폴리스,이집트어로 아누) 신전의 사제이다. 또한 그의 아내가 된 아스낫도 이집트의 여신 ‘네잇(Neith)에게 속한 자’ 라는 뜻의 이름이다. 이렇게 하여 팔레스티나에서 양을 치던 열일곱 살짜리 목자 요셉은 포티파르 집안과 감옥의 관리자를 거쳐 서른 살에 이집트 온 땅의 관리자가 되었다(41,41). 그의 새 이름은 그가 받은 새로운 신원을 상징한다. 이제 팔자를 바꾼 그는 ‘히브리인’ 이라는 정체성을 버렸는가?
그러나 요셉은 아스낫을 통해 낳은 두 아들에게 하느님을 기억하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붙인다. “요셉은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고생과 내 아버지의 집안조차 모두 잊게 해 주셨구나.’ 하면서, 맏아들의 이름을 므나쎄라 하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내 고난의 땅에서 나에게 자식을 낳게 해 주셨구나.’하면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프라임이라 하였다”(41,51-52). 요셉은 떠나온 집안마저 잊으려 했는지, “모두 잊게 해 주셨구나” 하면서 큰아들을 므나쎄라 부른다. 고난의 땅에서 번성하게 해 주신 하느님을 기억하며,둘째 아들에게는 “낳게 해 주셨구나”라는 뜻으로 에프라임이라 짓는다. 이처럼 요셉은 이집트 환경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함께 계시는 야훼 하느님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여전히 그분을 믿고 있었다.
요셉은 7년 대풍에 모든 양식을 거두어 저장하였다. 이어서 7년 기근이 들자 저장해 놓은 곡식을 팔아 뭇 생명을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