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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앞인도와 뒷몰이>의 줄거리:
우리에서 양들을 내어 놓고 목자가 앞서 가면 양들이 따라 가게 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경우에 양들을 앞서서 인도하지 않고 뒤에서 몰아간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이 뒷몰이꾼들이 바로 양들을 훔치고 죽이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양들이 앞설 경우 반드시 그 앞에는 멸망이 그 큰 입을 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인도와 뒷몰이
(요10:1~6)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앞인도와 뒷몰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앞인도와 뒷몰이.
앞에서 인도 하는 것과 뒤에서 모는 것을 뜻합니다.
4절에 보면,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온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아요. 그리고 우리가 얼마든지 뭐 그림 속에서 사진 속에서 봤던 것을 연상해 낼 수 있는 그런 말씀입니다.
목자가 앞에 가고 있고 양들이 뒤따라가는 그런 경우.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당연한 모습이 아니라는 거예요.
실제로 양을 이끌고 키우는 그 현장에 가보면 목자가 양들의 앞서서 인도하는 것보다는, 뒤에서 그 양떼를 몰아가는 그런 경우가 더 많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의 프레리, 대초원 아닙니까?
그리고 아르헨티나 팜파스 같은 곳, 이런 곳은 광활한 초원지대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경우, 이런 데서 초를 키우고 양을 키우고 해서 가축의 떼를 이동시킬 때는 주로 뒤에서 몰아갑니다.
그렇게 뒤에서 몰면, 막~ 앞을 향해서 소떼나 양떼들이 뛰어가게 되지요.
이런 경우가 더 많다는 얘기에요.
실제로 앞서서 이끌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미국영화 같은 데서 소떼를 몰 때도 말을 타고, 소떼 뒤에서 막~ 몰아가면 소떼들이 막 먼지를 일으키면서 뛰어가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비유적으로, 본문에 나오는 절도요 강도가 양들을 훔쳐갈 때 이렇게 뒷몰이로 훔쳐간다 이겁니다.
실제로 뒷몰이를 하는 카우보이들이 절도요 강도라는 얘기기가 아니라, 비유적 볼 때.
우리가 양이라는 것도 비유 아닙니까?
양인 우리들을 뒷몰이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절도요 강도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참 목자 되시는 주님과 그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참 작은 목자들은, 반드시 양떼에 앞서 가게 됩니다.
양을 앞세우는 몰이꾼과 양 앞에 서는 목자, 이 두 상태가 비유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에요.
몰이꾼, 절도와 강도의 역사가 아주 깊습니다.
양을 앞세우는 몰이꾼으로 비유될 수 있는 자들이 절도요 강도인데, 이 역사가 깊다는 거예요.
그 역사가 어디까지 올라가는가 하면, 어제도 우리가 같이 말씀을 나누었는데, 에덴동산까지 올라갑니다.
에덴동산, 할 때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뜻이고, 동산이라는 말은 울타리가 쳐져 있는 정원이라는 뜻이에요.
근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질 아니하고, 그 양의 우리를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를 절도요 강도라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양을 훔쳐서 우리 바깥으로 내갑니다.
이 절도요 강도의 역사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 바로 에덴동산, 울타리가 있는 정원이었다는 얘기에요.
그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양이었다 그러면, 사탄이 그 양을 울타리 바깥으로 끄집어내게 됩니다.
사탄이 유혹을 해서 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이 울타리 에덴동산이라는 에덴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울타리가 쳐져 있는 정원으로부터, 정원 바깥으로 에덴동산 바깥으로 훔쳐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참 목자이시고 그 뒤를 따르는 작은 목자들이 있는 것처럼, 이 사탄의 뒤를 쫓는 작은 사탄들과 사탄의 종들이 있다는 얘기에요.
이들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뒷몰이를 해 간다는 얘기입니다.
성경에는 없는 얘기인데 어떻게 뒷몰이라고 얘기할 수 있느냐?
앞서서 양을 이끄는 자와 뒤에서 뒷몰이를 하는 자의 차이.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양으로 비유된다면, 이들이 먹던 풀이 뭡니까? 뜯던 풀이 뭐에요?
에덴동산 안에 있을 때나 에덴동산 밖에 있을 때나 육신이 먹는 양식은 똑같았어요.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과일을 하나님께서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에덴 밖으로 쫓겨난 뒤에도, 타락한 뒤에도, 육신의 양식은 육신의 음식의 재료는 변하지를 않습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의 양식입니다.
육신도 위가 있어서 위가 공복이 되면 허기가 져서 못 견디는 것처럼, 이 마음도 위처럼 공복으로 돼있기 때문에, 마음의 배가 비면 허기가 져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울증이고 괴로움이고 고통이고 허무함이고 그런 것이에요.
그러니까 마음이 채워져야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도 풀을 뜯어야 되는데, 에덴 이전에는 그 마음을 채우는 풀이 뭐였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서 에덴동산이었어요, 에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겁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채우고 하나님을 먹으면서 기쁘며 살던 곳인데, 에덴 바깥으로 쫓겨나면서 이 먹는 풀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제 먹게 되는 풀이 뭡니까?
바로 이 세상에서, 마음을 채우려고 그러는 거예요.
무엇으로 마음을 채우려 그럽니까?
사업을 잘해 가지고, 사업을 잘하는 어떤 성취욕과 더불어서, 사업이 잘돼서 나타나는 돈, 부수적인 결과인 돈을 많이 벌어서, 또 마음이 가득 차는 부자의 마음이 되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산다는 겁니다.
또 건강관리를 잘해서 오래오래 살고 싶은 그런 소원이 있어서, 마음을 채우고 살아갑니다.
성공하고 싶습니다, 형통하고 싶습니다, 대통령 되고 국무총리 되고 장관 되고 싶습니다, 과장이었던 자가 부장 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소원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이루어질 때마다 마음이 찬 듯해서 기뻐하면서 만족하면서 행복해 하면서 살려 그러고, 그 행복을 향해 계속 나가고 있습니다.
근데 이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또 야고보서 4장 4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이 나와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육신의 생각이 뭡니까?
‘내가 사업을 잘해야지’, 육신이 있기 때문에 하게 되는 생각.
생각이라는 게 뭐냐 하면, 사업 생각을 하면 그 사업을 내 마음이 지금 공복 안에 끌어 들여서 먹고 있는 겁니다.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먹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육신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들이 육신의 생각이라는 거예요.
육신을 생각하면 우리는 자꾸 정욕, 뭐 탐욕 이런 것으로만 생각을 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건전한 사업계획, 이렇게 육신의 생각, 육신이 있음으로써 할 수 있는 생각이 다 육신의 생각이고, 이 땅에 있는 것들, 육신이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들, 자식생각도 육신이 있기 때문에, 나라생각도 육신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 아닙니까?
이게 다 내 마음이 지금 그것들을 먹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모든 먹고 있는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하지 않고, 육신이 없어도 될 수 있는 영이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아니고, 육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그것을 마음으로 먹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바로 이러한 전제 하에서 오늘 본문을 봅니다.
자! 그러면, 왜 예수님이 ‘앞서 가신다’ 하는 이 말이 당연한 말이 아닌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원래, 근동지방에서 이 중동지역에서 목자들이 양 앞서서 가게 되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 드린 북미의 프레리나 뭐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같은 초원과는 달라서, 이런 초원지대에서는 목자가 뒤에서 몰고 소나 양들이 그냥 앞을 향해 가도 큰 위험이 닥치지 않습니다, 그냥 평평한 평원이기 때문에.
근데 근동지방에서 초원을 찾으려면, 절벽 위를 지나야 되고 바위틈을 지나야 되고 하는 이런 위험이 따릅니다, 목초지가 그런 곳을 지나야 찾을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양들을 앞세웠을 경우 어떤 일들이 벌어지냐?
양들은 그 특성이 절벽을 만나서 앞의 양들이 떨어지면, 그게 절벽인 줄 모르고 계속해서 앞의 양이 떨어지는 걸 따라 가면서 같이 떨어져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로 양을 앞세워선 안 됩니다.
그래서 목자가 앞서게 되는 것이에요.
이걸 비유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은 당연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양 앞에서 목자가 앞서서 인도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뒷몰이가 더 많다는 얘기입니다.
자! 이걸 전제로 할 때, 앞서는 것과 뒷몰이의 차이가 어떻게 나는 거고, 어떤 의미를 갖는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 이후에 에덴에서 쫓겨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육체의 생각이 담겨져 있어요.
아! 이 세상에서 내가 이런 일을 잘해서 하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내가 명품 아파트에서 살면 좋겠다, 명품 옷을 입으면 좋겠다, 명품 차를 타면 좋겠다, ㅇㅇ 하면 좋겠다, ㅇㅇ 하면 좋겠다.
이 땅에 갖게 되는 소원들이 마음에 차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과 기본적으로 원수가 되어 있는 상태에요.
근데 이 상태에 있는 양들을 뒤에서 몰아붙여서 양 스스로 앞을 향해 가게 하면,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아파트를 십년 안에 40평짜리로 옮겨야지라고 생각했는데, 교회에 가보니까 그 아파트 갖는 것을 십년이 아니라 오년 만에 할 수 있다 얘기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 봉사하고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므로, 그런 이 세상의 축복이 앞당겨질 수 있다.
그렇게 더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게하고, 더 몰입하게 하고, 더 추구하게 합니다.
세상이 담겨져 있는 양들을 뒤에서 몰아붙이면, 이 양들은 세상적인 목표를 향해서, 이 땅에서 이룰 꿈과 비전을 향해서 더 앞으로 더 열심히 뛰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하나님과의 간격을 점점 더 멀리 만들어 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훔쳐내 가는 것입니다.
점점 더 먼 곳으로 훔쳐가는 것이에요.
예수님 잘 믿으면, 예를 들어 카네기가 어렸을 때부터 헌금하는 십일조 주머니를 갖고 다녔으니까, 여러분도 어렸을 때부터 십일조 습관을 잘 가지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축복을 주실 날을 꿈꾸면서 십일조 생활하면서 앞을 내다보고 앞으로 가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을 향해 달려가게 합니다.
이게 바로 뒷몰이꾼이고 이게 바로 절도고 강도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카네기가 십일조를 어렸을 때부터 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우리도 십일조 내면 카네기처럼 이 땅에서 부자 될 수 있다고 설교한 모든 목사님들, 그리고 저 자신도 뒷몰이꾼으로서 절도요 강도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돼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기쁨과 만족함을 금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땅에 있는 것으로 기뻐하려 하고 만족하려 하느냐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에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등록된 것으로 기뻐해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귀신들이 항복한다는 것은 영적인 승리에요.
근데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라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한에 있어서는, 영적인 일이라도, 영적인 역사라도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땅은 기쁨과는 관계가 없는 곳이라는 거예요.
기쁨을 금하는 게 아니라 기쁨의 처소가 잘못 됐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기뻐하려 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기쁨은 하늘에 있다는 겁니다.
이 땅은 성공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은 우리의 인생이 형통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은 성공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근데 전부 이 땅에서 성공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양들을 앞세워 가면서, 뒤에서 격려하고 몰아붙입니다.
‘성공할 수 있다, 성공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오래 살 수 있다, 잘 살 수 있다!’ 몰아붙여버립니다.
이게 바로 절도요 강도라는 거예요.
말씀드렸듯이 신천지에서 육신의 영생을 얘기합니다.
하하~! 이건 뭐 뺄 수도 없고 박을 수도 없는 그런 이단이지요, 아주 완전한 이단입니다.
하여간 정통교단에서도, 기존 교단 안에서도 강단에서, 어떡하던지 우리의 마음을 이 땅에 붙이도록 만드는, 우리의 인생의 이 땅에서의 인생의 미래를 바라보도록 하면서, 이 땅에 마음을 붙이도록 하는, 모든 희망과 소망의 명분하에서 되는 모든 설교가, 다~ 절도요 강도의 설교입니다.
분명히 여러분 아셔야 돼요.
하여간 이 땅에서 어떻게 잘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 땅에 마음을 붙이게 하는 것은, 다~ 절도요 강도입니다.
만족하세요! 기뻐하세요! 행복하세요!
기쁨과 행복과 만족을 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천국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지금 기뻐하라는 거예요, 지금!
무엇으로?
지금 하늘로 기뻐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1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으로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 주님이 앞서 가십니다.
앞서서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어디로 따라가야 됩니까, 실제로?
주님이 가십니다,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가십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가십니다.
주님이 계속 앞서 가십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죽음에서 부활로 가십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십니까?
승천하셨습니다.
자! 앞서가는 주님을 따라 가는 자들이 양이에요.
오늘 그 음성을 듣는다고 그랬어요, 또 절도요 강도가 오면 음성을 듣지 않는다고 해요.
이 음성을 듣지 않는다는 게 실제적으로 어떤 것이냐?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잘 믿고 교회 충성하고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자손들이 잘 되게 하고, 건강하여 장수하게 하고, 하는 일이 다 잘되게 해 주실 겁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는데 ‘아멘~ 아멘~’ 소리가 나오질 않아요.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에서 뭔가가 부족한 거 같아요, ‘이거는 아닌데…?’
나도 당장 돈이 없으면 걱정에 사로잡히고, 당장 몸에 병이 나면 아파서 쩔쩔매고 세상이 온통 흑색으로 변하는 그런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그렇게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산다는 설교가 뭔가 마음에 부족해요.
그런데 어떤 목사님 설교를 듣다 보니까, 십자가에서 죽고 이 세상을 떠나자 그러는데, 현실적으로 내가 그렇게 할 수는 없는데도 그 말씀이 댕겨요!
이게 바로 양이라는 거예요.
현실적으로 내가 세상을 벗어날 수도 없고, 돈이 없으면 걱정에 사로잡히고, 그리고 몸이 아프면 불평이 많아지는 그런 주제에도 불구하고, 이 몸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고 하늘나라로 간다는 그 설교가 이상하게 마음에 댕겨 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앞서가신 주님, 부활하신 다음에 이 세상에서 한바탕 벌렸으면 좋잖아요.
근데 왜 앞서가시면서 하늘로 올라가 버리셨습니까?
그 주님을 따라가자는 얘기를 하는데, 현실적으로 내가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붙어요.
그 말씀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요.
이게 바로 양이고 이게 바로 음성을 듣는 자들이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하십시다!
이 땅은 기쁨과 관계없는 곳이에요.
지금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곳이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곳이 아닙니다.
성취를 향해 달려가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참 목자 되셔서 우리 앞서서 가셨습니다, 십자가로 가셨어요.
왜 십자가로 가십니까?
우리 마음속에 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땅에서 성공을 하겠다고, 성취감을 누리려고 땅을 생각하며 땅을 마음에 품고 먹고 씹고 있으니까, 그 땅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으라고 십자가를 통과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을 향해 갈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앞서 가신 것이에요.
나는 세상을 담고 있는데 ,뒤에서 몰아붙이면서, ‘이룰 수 있다! 네가 마음에 품고 있는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뒷몰이꾼들, 이제는 분별합시다.
아무리 우리 목사님이라도, 자꾸 내 마음을 이 세상에 붙여서 떨어지지 못하게끔, 격려하고 위로하고 소망을 준다는 명분하에 하는 그런 모든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들, 죄송하지만 절도이고 강도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하는, 자꾸 이 세상에서 소망과 이 세상에서의 비전과.
교회도 그래요, 자꾸 이 세상 안에서 부흥할 것을 꿈꾸자고 얘기해요.
교회가 날개를 펴고 날 것을 꿈꾸자고 얘기합니다.
이 땅에서는 귀신이 쫓겨 나가는 것조차도 우리가 그것으로 기뻐할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꿈꿀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을 따라서 하늘을 따라 올라가면, 남아 있는 이 몸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뜻이지, 우리가 마음에 품을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앞서서 인도하시는 참 목자 되시는 주님과 그의 뒤를 따르는 작은 목자들이 있고, 세상을 품고 있는 양들을 뒤에서 몰아붙여서 세상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하는, 뒷몰이꾼인 절도와 강도들이 있습니다.
구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나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길을 내 달리는 이 죽음의 삶을 중단하게 하시고, 십자가로 죽음으로 부활로 승천으로 내 앞에 앞서가신 주님만을 따라가는, 주님의 참된 양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지금 하늘에서부터 내게 주어지는 기쁨을 갖고, 당장 내 삶이 에덴으로 변하는 역사를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