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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 계간시평(여름호)〉
세잔의 사과와 시인의 사과,
고유한 오브제로 현현되는 시적 자아의 진실
신수진
0. 세잔의 사과
프랑스 상징주의의 거장 모리스 드니는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세 개 있는데, 첫째가 이브의 사과이고, 둘째가 뉴턴의 사과이며, 셋째가 세잔의 사과라고 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브의 사과는 기독교적 유혹과 원죄였지만, 뉴턴에게는 신의 동산에 떨어진 이성과 과학의 발견이었고, 세잔에게는 완전무결해보였던 이성과 전통을 거부하고 현대미술을 개시한 사건이었다.
신과 영웅의 이야기를 그리거나 왕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던 당대에 조롱을 받았던 폴 세잔은 사과 한 알로 파리를 정복할 것임을 선포한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순간마다 변화하는 세계의 인상이었고 오직 그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빛에 몰두했다. 그러나 세계는 빛으로만 이루어진 대상이 아니며 실체를 지닌 존재이기도 하므로 세잔은 색채와 형태를 탐구할 수 있는 사과를 그렸고 행동 속에서 감각한 것을 실현하고자 했다.
세잔은 미술의 본질을 기하학적 구조로 인식했고 사과 한 개도 보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았다. 세잔은 존재가 지닌 특성을 재현하기 위해 각기 다른 시점에서 본 것들을 한 장면에 완성함으로써 원근법과 명암법을 폐기했다. 3차원의 실재를 2차원의 평면에 그럴듯하게 옮겨내는 이 기법들은 시각적 환영에 불과할 뿐 아니라 단 하나의 보는 눈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눈은 카메라 렌즈처럼 보지 않고 두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본다. 그렇게 세잔 이후 미술사는 외면의 묘사가 아니라 내면의 조형으로 바뀐다. 시점의 이동과 변화로 피사체를 분할해 대상화했던 세잔의 실험은 입체주의 피카소에게 계승된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주체가 대상을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서 여러 시점들을 한 캔버스에 고정시킨 세잔의 그림처럼 여기 꽃과 꽃병 그리고 동화책 정물들이 놓인 시가 있다. 시인이 비치하고 관찰하고 현현하는 것은 자신이 고안한 고유한 오브제들 이를테면 꽃과 같은 것들인데 이 정물을 통해 시인은 자아를 발명하고 응시하고 대화한다.
1. 허공의 꽃무덤을 조형하는 자아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를
기다리며 꽃을 꽂았다
어떻게 꽂아야
질서가 있는지
어디를 잘라야
꽃들의 리듬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꽂았다
물컹하거나 풋내가 나거나
비린내가
나는 꽃들을
이름은 모르지만
꽃인 것들을 꽂았다
꽃병이라는 곳에 꽃을 한 무덤 꽂고
죽어버린 날들보다 슬펐다
얼마나 자주 목도했던가
나의 죽음을
그렇다고 이 꽃들을
나에게 바칠 수는 없다
이제 조금 더 명랑해지기로 했고
잊고 있던 동화책들을
다시 펼치기로 했는데
옛날 옛날 나는
어느 동화 속 어두운 숲에
자라는 축축한 이끼
결코 날이 밝지 않을 것을
모르는 척
그저 계속해서 꽂는
허공의 손짓이었을 뿐
―성미정, 「꽃병이라는 곳에 꽃을 한 무덤 꽂고」, 문장웹진 2021년 4월호.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와 같은 시구들은 ‘나’를 관찰하고 배치하는 화자의 구상과 전시를 보여준다. 꽃들이 가득한 이 정물화에서 가위는 서걱거리고 꽃들의 물기는 흥건하고 풋내는 가득 퍼진다. 어떤 “질서”와 “리듬”에 의해 꽃들은 진열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을 알 수 없는 ‘나’는 물컹하고 비린내 나는 꽃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꽂”고 만다. 그것은 내가 기획하거나 의도한 것이 아니므로 진짜 나의 뮤즈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꽃병 안에 꽃을 한 무덤 꽂고 죽어버린 날들보다 슬펐다”고 고백된다. 여기서 꽃의 오브제는 “한 무덤”의 죽음으로 화한다.
꽃은 단 며칠간에 불과할 관상용 필요를 위해 본래의 토양에서 뽑힌 채 꽃병 안으로 이식된다. 마치 계속해서 살아갈 것처럼 잘린 뿌리로 물을 빨아들이고 마치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향기를 내뿜으며 극대화된 꽃의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나’는 삶을 가장한 꽃을 무덤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치환한다. 꽃꽂이를 실패하듯 자신의 죽음을 자주 목도해왔다는 화자의 절망과 환멸은 잊고 있던 명랑과 동화를 상기하게 한다.
이 생명연습 속에서 자아의 구현과 존재적 확립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가능하다. 그것은 “결코 날이 밝지 않을 것을 모르는 척” 끝없이 허공을 꽃꽂이하는 “어느 동화 속” “이끼”처럼 가장 어둡고 내밀한 곳에서 자라나는 자아다.
빛이 없을수록 온도가 낮을수록 번지는 이 낮고 고요한 목소리는 시인이 당도하고자 하는 경사진 세계를 닮아있다. 생명력을 탈각한 꽃의 무덤으로 하나의 동화적 자아를 꿈꾸었던 것처럼 이제 시인은 “기울어진 세계에서 이름 따위 아무려면 어때 소녀이면 어때 노파이면 어때 열 마리 미친개이면 어때 천사이면 어때”(「기(旣)울어진 소녀들의 세계」)라고 노래한다. 아무려면 어떠한가. 흔한 묘비명 하나 없는 이 자아는 그늘진 지형과 축축한 습도를 내적 환경으로 보존해가면서 무성한 이끼들을 탄생시키고 있기에 그야말로 꽃무덤의 범람이기에.
2. 웃음과 눈물로 땅 밑에서 꽃 피우는 자아
살다가 마지막 가면 모두 검은 흙에 들어
꽃 피우는 일에 종사했으면 좋겠다
나는 아마도 후미진 땅에 침침한
풀꽃이나 몇 점 밝히고 말겠지만,
부자나 권력자들은 역시나 더 환한 곳에
너른 땅을 차지하고서 땀 흘려
꽃 피우는 노동에 몰두했으면 좋겠다
그이들의 부와 힘은 사후에도 그이들의 것
움켜쥐고 독점하며 거칠 것 없이,
시들어 검은 가지들을 펑 펑 살려내겠지
나는 즐거운 이분법으로 사방 천지
코로나처럼 만발한 복사꽃 벚꽃들 아래
고와라 좋아라 눈 감고 지나가며,
땅 밑에서 울려 나오는 웃음소리를 듣는다
아, 그이들이 정말 힘을 다해
꽃 피우는 행복에 매진했으면 좋겠다
우리도 땅 밑에 가면 조그만 흙을 얻어
사월이면, 꽃 세상에 한 줌 월세로
참여하고 싶다 땅 위와 한 치도 다름없이
불평등할 땅 밑에서, 그러나 모두 함께
조금도 성내지 않으며 콧노래하며
―이영광, 「사월」, 현대시 2021년 4월.
온통 절망과 희망으로 뒤범벅된 이 노래에는 사후에 “모두 검은 흙에 들어 꽃 피우는 일에 종사”하면 좋겠다는 기원이 꽃비처럼 흩날린다. 그곳에서도 “나는 아마도 후미진 땅에 침침한 풀꽃이나 몇 점 밝히고 말겠지만” “부자나 권력자들은 역시나 더 환한 곳에 너른 땅을 차지하고서” 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팝콘처럼 꽃망울이 펑펑 터지는 눈부신 꽃동산의 풍경이 서늘한 인공낙원의 조감도로 변환되는 순간이다.
“그이들의 부와 힘은 사후에도 그이들의 것 움켜쥐고 독점하며 거칠 것 없이” 온갖 시들고 죽어가는 가지들을 살려내는 무소불위의 능력은 찬란하지만 슬픈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사기·조작·매수·투기·비리·위조·날조·횡령을 비롯해 온갖 편법·불법·범법을 넘나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확장되어가는 그네들의 힘은 직계존속에게 증여되는 진화 양상과 막대한 국가사안으로까지 발전되어 많은 국민들에게 분노를 안겨주곤 한다.
범죄스릴러 장르보다 더한 반전을 보여주는 정교하고 예술적이며 호러블한 현실을 보면서 시인은 불평등한 땅 속에서 모두가 콧노래를 부르며 꽃을 심는 섬찟하고 기이한 사후 모형을 설계한다. 한 번도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한 무서운 천재들이 청문회에서 국회에서 선거장에서 기억상실증을 비롯한 메소드 연기를 펼친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들만이 가졌던 무법의 힘과 천문학적인 돈의 출처에 깊은 슬픔을 느끼지만, 생업에 시달려야 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오랜 편견과 기득권에 맞서 싸울 분노조차 허락되지 않기에 대부분의 경우 허탈한 자책과 무기력한 자조로 끝나고 만다. 땅에서 모든 것을 잃고 난 자들은 가끔 하늘로 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한 뼘 공중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미련하게 착하게 살면서 폐지 줍는 노인만 봐도 죄책감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대가가 따르지 않아도 옳은 일을 자처하면서 그렇게 정당한 세상을 만들어가면서 어른인 것이 미안하지 않은 세상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 의해서라도 그 꽃길이 조성되길 바라마지 않으며 “아, 그이들이 정말 힘을 다해 꽃 피우는 행복에 매진했으면 좋겠다”고 한 번 더 빌어본다.
“땅 위와 한 치도 다름없이 불평등할 땅 밑에서” “울려 나오는 웃음소리”는 죽음으로도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노여움이 바뀌어가는 눈부신 삶에 대한 서러움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환청이다. 땅에서 들려오는 그 복음은 가난과 그로 인한 복이 영원히 슬픔을 공전할 것임을 되뇌는 동주의 기도처럼 눈물겹다. 사월의 현기증 한복판에서 자아의 꽃잎들은 어지럽게 흩날린다.
3. 눈을 멀게 하는 어머니와 분열하고 증식하는 쌍둥이 자아
아픔과 슬픔처럼 닮아서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상현달과 하현달은 어둠의 방향이 다른데도
엄마는 매번 똑같은 옷을 두 벌 샀다
그럴 바에야 그림자를 입고 다닐 거예요,
그대부터 우린 서로 달라지는 게 지상의 목표가 되었다
동생이 폭식을 즐기면
나는 거식이 즐거웠다
동생이 심장에 불을 가져다놓으면
나는 배꼽에 얼음을 채워놓았다
참다못한 엄마는 우리를 사진관에 데려가
하나의 액자 속에 나란히 앉혀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터지고 빛이 둘을 묶어놓는 동안
나는 몰래 한쪽 눈을 감았다
너는 도대체가 말을 듣지 않는구나,
엄마가 나의 감은 눈을 칼로 긁어낼 때
일란성 아픔과 슬픔 사이에
불구의 형제가 하나 더 태어났다
―길상호, 「쌍둥이」, 애지 2021년 봄호.
어머니도 구별하지 못하는 쌍둥이 형제의 유전적 유사성과 둘을 언제나 함께 있는 존재로 나란히 두고자 하는 어머니의 양육 태도는 ‘나’의 아이덴티티를 부정하는 심각한 위협이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일련의 인생이라면 나와 동일한 존재, 엄밀하게 말하자면 동일하지 않지만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출발선부터 경기의 출전 명분과 의의를 박탈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제물처럼 언제나 나와 붙어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나의 대체가능성, 교환성, 무의미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몰래 한쪽 눈을 감고 어머니는 “너는 도대체가 말을 듣지 않는구나”라는 말과 함께 “나의 감은 눈을 칼로 긁어”낸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일란성 아픔과 슬픔 사이에 불구의 형제가 하나 더 태어”난다. ‘나’에게 상해가 가해질 때 또 다른 ‘나’가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 애초에 “아픔과 슬픔처럼 닮아”있던 일란성 쌍둥이라는 것 역시 ‘나’의 분열된 자아로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
자신 안에는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어떤 자아들이 있고 그 자아들은 의도와 관계없이 무성하게 자라나며 마치 타인처럼 통제되지도 않는다. 나의 기원이 되는 어머니조차 그런 나의 근원에 대해 결코 알 수 없으며 나를 가장 잘 안다는 이유로 가장 가까이에서 오직 나에 의해서 행해져야할 자아정체성의 탐구 과정을 서슴없이 규정하고 조정하는 자가 될 확률이 높다. 분열과 증식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를 조형해가는 ‘나’의 분투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세계의 표상으로서 어머니의 대립 양상이 이 시에는 있다.
4. 눈물과 핏방울로 권태를 관통하는 자아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누구를 지배하지도 않는다
꿈결 같은 생활이 여기에 있다
강자한테 덤비고 약자한테 함부로 하지 않는다
꿈속 같은 생활이 여기에 있다
누구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꿈의 생활이 여기에 있다
(중략)
사람들 만나 떠들고 술 마시는 게 점점 귀찮아진다
내가 하는 말이 귀찮아지듯이 그들이 하는 말이 귀찮아진다
내 부모형제가 귀찮아진다
같이 밥 먹는 게 귀찮아진다
그들이 나의 말, 나의 생활을 재미없어하듯이
나는 그들의 말, 생활이 재미없다
재미없는 정도가 아니고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언어관과 정치관이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
―박용하, 「생활의 실패」 부분, 현대시 2021년 4월.
권태는 욕망이나 열정이나 애착이 소거된 상태에서 느끼는 싫증과 지겨움 그리고 무료함이다. 따분함, 심심함, 지루함 등의 권태적인 심리는 규격화되고 획일화된 삶이 끝없이 반복되는 근대적 메커니즘의 대표적 증상으로 이해되어 왔다. 중세까지 이 권태의 감정은 나태함과 게으름이라는 퇴폐로 치부되어 죄악시되었다. 피터 투이도 권태 ―그 창조적인 역사에서 시공간의 표준화와 조직화의 문명에 의해 권태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이상의 수필 「권태」에서 주인공은 하루 동안 시골 작은 마을에서 마주친 모든 사물과 생명이 반복과 본능만으로 삶을 영위한다고 느끼고 변함없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권태는 우울하고 답답한 기분으로 시작했다가 무기력과 허무주의라는 실존적 자각으로 나아간다.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왜소한 자아에서 기인하는 ‘형이상학적 권태’의 두려움과 허무를 경계하라고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강박에서 벗어나 거리두기와 여유로서 느긋하고 행복한 권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나’는 지배와 피지배, 대항과 복종, 사랑과 미움이 없는 생활을 꿈같은 것으로 여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길항 관계도 작용하지 않는 평등하고 자유롭고 안정적인 생활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이 진공 상태를 지향하는 화자에게는 “우상은 멀어지고 우애도 빛을 잃고 거창한 꿈 없이 나는 내 발 위에 서 있”는 그런 현재를 목도하고 난 뒤의 자괴감과 허탈함이 있다. 한때 노력하고 성취하며 이룩하고자 했던 꿈에 대한 회의에 빠지게 되자 순식간에 나의 시공간은 다른 것으로 변질된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나누던 대화가, 애틋했던 가족이, 함께 했던 식사가 귀찮아지고 재미없으며 반감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배반과 실망으로 점철된 나날을 통해 ‘나’는 이제 “아주 딴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으로 권태를 견디어본다. “일생을 걸어도 바뀌지 않을 나와 일생을 걸고 바꿔가야 할 내가 식탁과 침대를 오가고 햇빛과 달빛을 오(「나에게」)”간다. “내 밖으로 걸어 나간 눈물”과 “내 밖으로 뛰쳐나간 핏방울”만이 결국 자아를 바로 세울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5. 삶의 페달을 추동하는 자동기계의 자아
지하생활자, 굼벵이의 7년은 지축 쪽
23.5°기운
순응의 자세임을 알겠다
그는 미라 되기 전 우화를 시도할 것이며
인간의 불가능을 실현한 족속으로
호모 사피엔스 보고서에 기록될 것이다
“알 하나 꼬리 가진 올챙이로 네 발 짐승으로 두 발로 달리다 세 발로 버텨야 한다는 것 자판기에서 한나절 치의 인스턴트 한 끼를 공급받고 다시 달려야 한다는 것 간단없는 노동과 교환되는 탁발은 계속된다 해도 삶의 페달 멈춤 없이 밟고 밟는다”는
우리들의 보고서
―김추인, 「머리 검은 ‘빨간 피터의 보고서’」 부분, 영화가있는문학의오늘, 2021년 봄호.
“인스턴트 한 끼”와 “간단없는 노동”이 계속된다 해도 삶의 페달을 밟아나가는 이 보고서에는 사회 시스템의 거대한 톱니바퀴 사이에서 점점 작아져 이제는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된 자아가 있다. 교환가치가 없어진 그레고리 잠자가 벌레로 변신하자 가족에 의해 방 안에 유폐되었다면 지금 여기의 카프카들은 스스로 안에서 나오지 않는 셈이다. 이 미시적 자아들은 자동기계가 되어 멈추지 않고 삶의 페달을 밟는다.
“지하생활자”이자 “굼벵이” 그리고 “올챙이”처럼 “순응의 자세”로 살아온 자동기계들은 사실 현실에서는 거창하고 합리적인 매뉴얼대로 해야 한다는 세뇌된 학습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삼포세대는 이제 득도세대로 바뀌었다. 이불 밖은 위험하고,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고, 오늘 할 일은 내일 하면 된다. 이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을 혐오하고(왜 아파야해? 마이 아파) 아등바등 노력해봤자 별로 나아질 것 없다는 것을 안다. 과거엔 ‘하면 된다’를 머리맡에 붙여놓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무모하리만치 가공할 노력으로 삶에 덤벼들었다면 이제는 ‘되면 한다’는 쿨한 태도로 삶을 즐긴다. 불굴의 의지로 능력주의의 신화를 써내려가는 영웅이 되길 원치 않으므로 빠르게 실패와 포기를 인정하는 것은 무한 경쟁과 극대화된 효율성의 시대에서 비껴서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를 고민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 또한 비슷하다. 시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라는 것은 별로 유용하지 않다. 시라는 장르의 특성이 모호성과 다의성을 발생 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시인의 의도를 궁극적으로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시의 의미는 각각의 독자들에게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6. 시인의 사과
오브제가 사진처럼 보일 정도에 도달했던 당대 정물화의 수준에서 볼 때 세잔의 그림은 재현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었다. 어떤 사과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어떤 사과는 옆에서 바라본 채로, 어떤 사과는 어제의 탐스러움으로, 어떤 사과는 오늘의 시듦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세잔은 하나의 소실점을 고정한 채 세계가 불변하는 것처럼 정교하게 복원하는 대신 방향과 시간에 따른 순간들을 모두 그림으로써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작동시켰던 것이다.
시인 역시 시적 자아를 시라는 장르 안에 구축할 때 오브제와 구도를 선택한다. 이때 하나의 소실점을 갖고 박제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움직이는 시선과 그에 따른 자아의 변화를 겪는 비정형의 존재다. 이를 위해 세잔은 원근법과 같은 회화의 전통 원리를 과감히 버리고 한 캔버스에 여러 시점을 도입함으로써 입체성을 잃은 그림을 그렸지만 도리어 그것이야말로 그럴듯한 이미지가 아닌 실제의 모습이기 때문에 진실에 이르렀다. 시인이 남기고자 하는 것도 이상적인 외연이 아니라 이토록 핍진한 내면일 것이다. 원근법으로 세계를 조작해내지 않고 불안한 두 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를 그려내면 실패작처럼 보이는 작품이 되지만 그것이 진짜 시선과 내면이라는 것은 역설적 진실을 보여준다.
3차원의 현실이 2차원의 원고지에 옮겨질 때 시적 자아는 사라지고 오브제만 남는다. 그러나 그렇게 사라진 자아 즉 실재처럼 보이도록 극화된 특성이 사라진 그 모습이 진짜 우리의 모습이다. 실체는 사라지고 표상만 남아있는 시들은 비틀리고 끊어지고 겹쳐진 채 놓여있다. 어제의 사과와 오늘의 사과 그리고 내일의 사과들은 테이블에서 쿵쿵 굴러 떨어지고 단단하게 익어가며 제각각의 각도에서 빛을 반사한다. 비평은 가장 가까이에서 그 무수한 반란과 탄생을 계시처럼 듣는 자가 되어 이토록 이상하고 불편하고 아름다운 시의 음성을 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