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에 수록한 강원도회원 특집>
건망증 유감
심지향
며칠 전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래전 인편에 건강이 많이 안 좋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나에게도 지난 몇 년 동안 힘들고 아픈 시간을 보냈기에 안부를 챙기지 못했다. 아니 내 삶이 너무 벅차서 잊고 살았다. 전화기에 그 친구의 이름이 뜨는 순간 가슴이 요동을 치며 숨이 막힐 만큼 반가움이 밀려왔다.
서로 소식이 끊어졌던 저간의 일들을 주고받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힘들었던 이야기에 같이 울고 웃으며 그간의 격조함을 풀었다.
친구는 가족이 모두 잔인하고 포악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점령당했고. 죽음에 이를 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지금도 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나도 말기 신부전과 치매로 와병 중인 남편을 삼 년 동안 집에서 모시고 수발하는 동안 심신이 모두 탈진되었고 결국 남편은 작년에 하늘로 떠나시고. 나에게는 공황장애라는 무섭고 고통스러운 질병이 찾아왔다. 꾸준히 병원 치료를 받는 중 일 년이 지난 지금은 택시와 승강기를 혼자 탈 수 있고 낯익은 사람들 모임엔 갈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 친구는 원주에 살고 나는 동해에 있으니 조만간 중간지점인 강릉에서 만나기로 했다.
몇 년을 바깥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다 보니 요즘 부쩍 깜박깜박 잊어버리는 것들이 많다. 가까운 최근의 일은 망각하고 오래된 과거의 일들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제 일처럼 뚜렷해지는 일. 왠지 두렵다. 현재보다는 지나간 옛날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고, 그때 그 시절 있었던 집안 대소사를 가족들과 다르게 기억되는 일들도 있다.
대가족 살림에 겨끔내기로 돌아오는 집안 대소사도 막힘 없이 치러내던 지난날의 나는 간 곳이 없고, 조금 전에 통화 한 휴대전화를 어디에 뒀는지 몰라 허둥대며 찾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외출할 때 가방 속에 휴대전화 대신 tv리모컨을 챙겨와서 난감한 일도 있고, 심지어는 한 손에 전화기를 들고 있으면서 잃어버렸다고 찾기도 한다. 메모지에 적어가지 않으면 마트에 가서도 필요한 물건을 빼놓고 사 오기가 다반사(茶飯事)다.
기억의 회로가 가끔 오작동을 일으키기도 하는가 보다. 때로는 엉뚱하게도 일그러진 기억에 갇혀 어느 것이 진실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이 모든 것이 가장 두려워하는 치매 증상은 아닐지 심히 걱정스럽다. 어느 날 문득 나에게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몰라보는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 상상하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오래 달린 낡은 수레가 여기저기 삐걱거리며 어긋나기 일쑤이듯, 내 머릿속도 세월만큼 낡아졌는지, 아는 지인을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도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거나, 누군가 내 휴대전화의 번호를 물어도 가물가물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특히 모임이나 약속을 잊지 않으려고 달력에 동그라미를 표시해 놓고 정작 달력 보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기도 한다.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을 듯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병원에 가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 검사를 했더니 나이에 맞게 별다른 이상은 없단다. 그래도 심혈관계 성인병 유병자이니 두뇌를 쓰는 활동을 많이 하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며 정기적으로 병원 진찰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집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의사 선생님이 듣기 좋게 에둘러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정신 바짝 차리고 실수하지 말자고 혼자 다짐을 해봐도 그런데도 자주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리고 찾느라 애를 쓴다.
그래서 어느 분이 일러준 방식대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소리 내어 스스로 각성시키는 말을 한다. 오늘은 *월 *일 몇 시에 어디에서 무슨 모임이 있고 누구와 약속이 있는지 내 귀에 소리로 각인을 시킨다. 그렿게 조심을 하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실수를 하고 말았다.
지난 주말 인천에 사는 아들네 가족이 다녀간 뒤치다꺼리를 하고 잠시 쉴 겸 차를 한 잔 마시려는데 전화가 왔다. 어제저녁 문학회에서 시화전 및 시 낭송이 있는 행사에 작품만 내놓고 참석하지 못했는데 문학회원이 고맙게도 카톡에 행사 사진을 올렸다고 했다.
그런 저런 사정을 아는 그분이랑 어제가 입추라고 이제 더위도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고 한참이나 찜통 같은 더위를 성토하고 소소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tv체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무료함을 달래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아차, 오늘 점심 약속이 있는 걸 깜빡 잊었다. 이십여 년 동안 이어 온 친목계 정해진 모임 날인데. 건망증이라기엔 너무 심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진다.
이럴 때마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 스위치가 하나씩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돌이켜 보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길을 헤매며 갈팡질팡했던 날들이 기억의 갈피마다 장막을 치고 나를 힘들게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잘못 살아온 내 삶이 나에게 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갈수록 망각 속으로 스러지는 모든 것이 안타깝고 아쉽지만 한편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아픈 일들도 뜬금없이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와 바로 어제 일처럼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마음을 아프게도 한다.
이러다 정말 치매가 오는 건 아닐까? 제발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미래는 알 수가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환자는 행복하고 가족은 지옥에 빠지는 무서운 병이 치매라고 한다. 자식들과 주위에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사는 날까지 품위를 지키며 살다 가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 전 세계가 건망증에 걸렸는지 잠시 주춤한 듯하던 코로나19 변이바이러스가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덤비기 시작했다. 지난 이 년 동안 지구탄생 최초로 전 세계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공포와 대공황 속에 전 인류가 입을 막고 살아야 하는 현실을 맞닥트리고 수많은 일자리와 귀한 생명을 잃었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참상을 잊기라도 했는지 자유분방한 활동이 넘쳐나면서 감염 확진자가 십 사만 명이 넘었다.
외출할 때 반드시 써야 할 필수물품인 마스크를 깜박 잊고 승강기를 타려고 하다가 아차,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 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스크를 벗을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방역 마스크를 듬뿍 사 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