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년 당최조 금마저 정착부터 계산해도 서기 2000년은 1330년 이후다. 금마저로 내려온 사람이 당최조, 그리고 형제와 사촌까지라고 본다면 후손이 엄청난 숫자일 것이다. 논의(論議)의 편의를 위해 금마저 정착 최씨 중에서 완산주 주민으로 편입되어 완산주에서 계속 살았던 최씨와 684년 금마저 소요사태로 남쪽 지방으로 사민(徙民)된 최씨로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본관 도입은 금마저 소요사태 이후 일이므로 남쪽으로 사민된 최씨는 완산최씨가 아니다. 고구려 유민을 사민한 지역 역시 매우 민감한 지역이었을 것이므로 본관 분정에서 우선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그 지역을 관향(貫鄕)으로 본관을 분정 받았을 것이다. 물론 사민된 사람 중에 최씨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증거는 없고 또 신라 본관은 귀족을 제외한 나머지는 흐지부지되어버렸으므로 이들 중에서 신라 호족(豪族) 혹은 그 정도 영향력을 가진 가문이 나오지 못했다면 당시 본관이 그대로 전해 왔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초기에 본격적으로 본관을 분정할 때 되살아났을 가능성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완산주 이남을 관향으로 하는 최씨 중에서 2015년 현재 인구 만 명을 초과하는 본관은 주로 전라남도에 분포하고 있는데, 탐진최씨가 89,943명으로 가장 많고, 화순최씨가 38,604명으로 다음이며, 낭주최씨가 17,205명이다. 그 외에도 인구 만 명이 안 되는 본관이 여럿 있다. 탐진최씨는 최씨 중 5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큰 본관이므로 역사도 매우 깊을 것이다.
탐진최씨 시조 최사전(崔思全, 1067~1139)은 상약원 직장 최철(崔哲)의 손자, 장작감 최정(崔靖)의 아들인데, 의술로 조정에 진출하여, 고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으로 공신에 책록되었고, 병부상서를 지낸 후 삼한후벽상공신으로 수태위,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다고 한다. 화순최씨는 완산최씨에서 나누어졌다는 기록이 있어서 족보를 만들 때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강희보』<변오고증>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문성공계를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낭주최씨는 최지몽(崔知夢)이 시조인데, 본래 최씨가 아니었지만 고려 태조가 해몽(解夢)을 잘한다고 해서 최지몽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최씨가 되었다고 하므로 금마저에서 사민된 최씨는 아닌 것 같다.
완산최씨에서 다른 지역 본관으로 분정된 가문은 없을까? 대표적 사례로 강릉최씨(江陵崔氏)가 있다. 강릉최씨 시조는 최흔봉(崔欣奉), 최필달(崔必達), 최문한(崔文漢) 세 분인데 그중에서 최흔봉은 본시 전주최씨이므로 전주계 강릉최씨로 분류된다. 최필달은 경주최씨, 최문한은 강화최씨(江華崔氏) 후손이라 한다. 그리고 황주최씨(黃州崔氏), 흥해최씨(興海崔氏), 곡강최씨(曲江崔氏)도 전주최씨에서 분화했다고 하는데, 곡강최씨는 흥해최씨의 한 분파(分派)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전주최씨에서 계열이 나누어지기 이전에 떨어져 나갔다고 전해오는 본관들이다.
그 외에도 문열공 후손이라는 본관으로 양천최씨(陽川崔氏)와 초계최씨(草溪崔氏)가 있는데, 양천최씨 시조 최원(崔遠)은 고려 충정왕(1349~1351) 때 밀직부사를 지냈다고 한다. 초계최씨 시조 최용궁(崔龍宮)은 고려 충렬왕(1274~1308) 때 팔계군(八溪君)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또 사도공 후손이라는 본관으로 영천최씨(永川崔氏)가 있는데, 시조 최한(崔漢)은 사도공 10세손 최식(崔寔)의 차남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공 후손에서 최식을 찾을 수 없고, 또 고려말 화약(火藥)을 발명하여 왜구를 물리친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이 최한의 7세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최무선은 사도공의 17세손인 셈인데 사도공이 1125년 무렵 출생으로 추정되므로 두 분 간격 200년 정도에 자그마치 16세대가 흘렀다면 한 세대 평균 12.5년에 불과하여 성립되지 않는다.
『동국여지승람』에 전주의 속현 성씨로 우주최씨(紆州崔氏), 이성최씨(利城崔氏), 두모최씨(豆毛崔氏)가 있으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이들도 전주 일원에서 세거해 온 당최나 토최(土崔)와 같은 혈통일 가능성이 매우 크고, 지금은 확인할 수 없는 전주최씨 어떤 계열로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