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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향문학 통권12호의 씨리즈 입니다
Memory3
작은 형님은 집념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마치 성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1부 말미에서 해군에 입대하기 전 잠깐 소개한 대로 보통 다부진 사람이 아니었다. 청소년 시절 아버지의 모진 잔소리와 견디기 힘든 농사일을 묵묵하게 견뎌내었다. 훗날 회고하기를 아버지 밑에서 그 모진 고통과 어려움을 견뎌서인지 사회생활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추억하듯 웃음기 어린 말을 가끔 하곤 했다.
작은 형님은 1979년 말(末) 35개월간 해군에서 병장 만기로 국방의 임무를 마쳤다. 그리고 아주 잠깐 고향에 머물렀다.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고 앞날을 계획하지만, 마땅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처마 밑의 갓 머리가 둥근 노란 백열등은 어디서 날아왔는지 온통 날 파리가 들끓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파리약을 안개같이 뿌연 하도록 뿜었어도 얼마 가지 못했다. 찬바람이 불어오기 전까지 이러한 현상은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저녁을 물린 마루청은 공기의 비중이 그날따라 조금 무거워 보였다. 두 부자(아버지와 작은형)는 작심한 듯 마주 앉았고 아버지는 큰아들이 선물로 준 상아 파이프를 천천히 입에 물었다. 필터도 없는 담배를 파이프에 끼우고 불을 붙인다.
“어찌하려느냐?” 아버지가 먼저 말씀을 꺼내셨지만, 표정은 무거웠다.
“,,,,,,,,,,” 작은 형은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은 듯 잠시 고개를 숙였다.
“네 형과 동생은 도시에서 생활하게 하고 너는 나와 함께 농사를 짓도록 하자” 아버지께서 작은 형에게 이렇게 제안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형은 여러 자녀 중 일머리가 가장 두드러진 것이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기운을 쓰는 것도 아버지 마음에 들었고 일에 대한 욕심도 아버지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는 애초부터 농사를 짓게 할 마음이 없었다. 물론 체질상 농사가 맞지 않기도 했지만, 큰아들만큼은 도시에서 생활하기를 원하셨고 고된 농촌 생활을 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시골에서 공부하기란 환경이 여간 열악한 것이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전기(電氣)가 (큰형님의 청소년 시절) 들어오기 전으로 밤이면 촛불도 아닌 호롱불을 밝히고 생활했다.
방안은 온통 화석연료 타는 냄새와 그을음이 얼굴을 거뭇하게 했다.
큰형님은 같이 놀자고 찾아오는 친구들을 피해 빈집을 도서실 삼아 공부하고 때가 되면 어머니께서 도시락을 준비하여 몰래 건네주었다.
작은 형은 신체적인 피지컬도 좋아 어렸을 때부터 육상에 소질을 보였다. 신등면 체육대회에서 단거리 장거리 가리지 않고 항상 1등이었다. 중고등시절은 제법 큰 대회까지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렇게 부자(父子) 사이에 결코, 가볍지 않은 기류가 형성돼있었다. 아버지 성격상 무슨 일을 하기로하고 얼마 못되어 금방 물러서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줄 알기 때문에 작은 형은 신중했다.
“아버지! 저는 좀 더 넓은 곳에서 꿈을 펼쳐보고 싶습니다.”
작은 형은 오랜 침묵을 깨고 뜻밖의 말을 했다. 그동안 누구에게 자신의 속을 내비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말을 아꼈다.
아버지는 적잖이 놀라신 듯 눈을 있는 대로 치켜뜨고 올려다본다. “꿈이라니? 농사일이 힘들어서 그러냐?”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말이 답답하고 막연하게 들렸는지 언성이 높아진다. 그래서일까 대화의 간 극은 좁혀들지 않았다.
“일은 어디서든 다 힘들다. 물론 농사는 다른 것에 비해 더욱 힘들겠지. 너는 도회지에서 성장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배움이 많은 것도 아닌데 무슨 꿈을 펼친다는 거냐?”
아버지는 확실히 작은형을 대하는 것이 전하고는 달랐다. 군대 가기 전에는 권유하거나 아들의 생각을 존중하여 의견을 수렴하는 경우는 아예 찾아볼 수 없었는데 지금은 나지막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저 아래 웃 서마지기와 도랑 옆 논들 하며 전답들은 모두 네 것이 되지 않겠느냐.” 아버지의 회유는 점점 더 구체적으로 이어졌다.
이쯤 되면 뜻이 확고히 서지 않은 이상 흔들릴 만도 한데 작은 형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들에게 확답을 듣고 싶어서 재차 다그치는 아버지를 향해 돌아온 대답은 “죄송합니다. 아버지”라며 단호하고 짧은 말이었다.
이후로도 아버지의 회유는 몇 번 더 이어졌다.
아버지는 어느덧 농기계의 도움 없이 농사를 짓기에는 세월이 너무 깊었다. 자녀들은 다 장성하여 각자의 길을 가고 있으니 그나마 작은형에게 기대가 컸었나 보다. 작은형은 한 달 정도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날 저녁 부자(父子)는 지난번같이 마주 앉았다. 아버지는 작은형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남았는지 중간중간에 혹시나 하고 눈치를 살폈다. 아들로부터 확고하여 움직이지 않는 뭔가를 발견하셨는지 더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만 사회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임할 것을 당부하셨다.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부지런하면 먹고산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버지는 게으른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아침 늦게 일어난다든지 하릴없이 멍하니 있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 덕분일까? 자녀들은 한결같이 사회생활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밑에서 미리 힘듦을 겪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왔어도 그것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나 보다. 이유를 아버지 덕분으로 돌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왜 어려움이 없었겠나 하지만 더 큰 어려움을 미리 경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은 형은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지만, 몸을 의지하여 맡길 곳은 큰 형님댁 말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큰 형님댁은 당시 어린이 대공원 후문이 가까운 중곡동에 살고 있었는데 메모리1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제일 교포인 사촌 누나가 1년 동안 한국어 공부를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할 무렵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번에는 사촌 형이 누나의 자리를 대신했다. 큰 형님댁에서 1년을 머무르게 되었다. 작은 형도 비슷한 시기에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왔다.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물론 세 명의 어린 조카들도 엄마의 손길을 많이 필요로 할 시기였다.
어느 날 우연히 큰형님은 대문을 마주 보고 있는 앞집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근래 못 보던 사람들이 많이 보이네요.” 앞집 주인 홍씨가 먼저 말을 건넨다. 그는 언제나 두껍고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있는데 시력이 상당히 나빠 보였다.
그렇게 두꺼운 안경알을 한 사람은 그때까지 거의 못 본 것 같다.
“제일 교포인 사촌 동생과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동생입니다.” 홍씨는 흥미로운 듯 가족사를 묻기 시작했다.
“일본에도 연고가 있습니까?”
“네, 오래전 숙부님 한 분이 일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그럼 그 자녀들인가요?”
“네”
“그런데 왜 나오게 되었어요?”
“모국어를 배우기 위해 우리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홍씨는 교포인 사촌 형이 흥미로운 듯 콧잔등으로 밀려 내려온 안경을 눈 가까이 바짝 끌어올린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어도 우리나라 사람과 별 차이가 없음을 알고는 이내 고개를 돌린다.
“그럼 전역한 동생은 직장을 잡았나요?”
“아 아닙니다.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전공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특별한 기술은 없습니다.” 홍씨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갑자기 아랫입술을 쭉 내밀기도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궁금증을 일으켰다.
참다못한 형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디 마땅한 데라도 있을까요?” 홍씨는 인중이 코밑에 닫도록 두 입술을 모아 앞으로 내밀고있었다. 처음 보는 행동으로 나름 자기만의 긴장을 해소하는 방법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긴장하면 나오는 어색한 행동들이 있는데 지금 홍씨의 표정이 바로 그런 것 같았다.
“글쎄요. 자리가 있기는 한데,,, 그런데,,” 홍씨는 말끝을 흐렸다.
“,,,,,,”
“하는 일에 비해 급여가 너무 적습니다.”
큰형님은 귀가 번쩍했다.
“무슨 일인데요?”
“동대문시장 새벽 장사입니다.”
“새벽 장사라뇨?”
큰형님은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은 워낙 유명하여 잘 알고 있었지만, 새벽 시장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누구나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분야가 아니면 잘 모를 수밖에 큰형님은 20대 중반부터 68세에 은퇴할 때까지 평생을 금융업에 종사했다.
버스나 전철의 첫차가 운행하기도 전 매우 이른 시간에 생산자로부터 물건을 받아 소매(小賣)업자들에게 넘기는 일을 일컬어 새벽시장이라고 했다.
“동생과 한번 의논해 보지요”
큰형님과 작은 형은 홍씨의 새벽시장을 두고 얘기를 나누었다.
“새벽 아주 이른 시간부터 움직여야 한단다. 괜찮겠냐?”
작은 형은 몹시 절박했다. 연로하신 아버지의 권유도 뿌리치고 올라왔는데 하루 이틀 시간만 보내고 있으니 답답하다 못해 절박했으리라.
“예, 한번 해보겠습니다.”
얼마후 큰형님은 앞집 홍씨를 만나 동생이 출근할 수 있도록 도움을 구했다. 정상적인 새벽시장은 중곡동에서 버스나 전철의 첫차를 탄다 하더라도 동대문까지는 제시간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작은 형은 새벽 첫차를 이용했다. 버스를 타고 전철도 갈아탔다. 작은 형이 출근한 곳은 알고 보니 홍씨의 가게였다. 얼마 전 점원이 그만두어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는데 마침 이웃집 청년이 일자리를 찾고 있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 잠시 머뭇한 것은 자신의 가게라고 한다면 큰형님이 괜히 자존심 상해 할까 봐 나름 신경이 쓰였나 보다. 거리상 정상적으로 출근이 어려움을 알고 조금 뒤에 준비해도 괜찮은 일을 맡겼다.
나는 작은형과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내가 잠든 사이 출근하여 아침에는 거의 만날 일이 없었다. 아니 집안 모두가 곤히 잠든 시간 조용히 대문을 열므로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어도 작은 형은 한결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날의 일들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기록의 습관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해마다 일곱 권 이상의 다이어리를 남겼다. 그러고 보니 작은형은 오래전부터 기록을 남기는 것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철쭉으로 유명한 황매산을 다녀와서도 기행문을 남겼고 말이 필요 없는 남한 제일의 명산 지리산을 다녀와서도 그리고 어느 겨울 눈 덮인 한라산을 친구와 단둘이 다녀와서도 기행문을 남기기를 잊지 않았다.
작은형은 당시 초저임금으로 요즘 같아선 있을 수 없는 봉급이었다. 생존권을 보장하는 기본 급여가 정해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근로계약서 같은 것도 없었다.
은행에 적금을 넣고 싶어도 교통비와 밥값을 제외하면 빠듯했다.
한마디로 저축은 꿈도 꾸지 못했다. 6개월이 지난 이후에 비로소 홍씨의 실체를 알았다. 말도 안 되게 낮은 임금으로 종업원을 고용하고 불만을 얘기하면 그만두게 하고 또 다른 사람을 채용하고 돈에 있어서는 그렇게 냉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최대한의 노동을 강요했다. 약속한 3개월 이후 조정하기로 한 약속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지키지 않았다. 이 업계가 다 그러한가 하고 나름 알아봤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형의 봉급과는 적어도 배 가까운 차이를 보였다.
큰 형님도 동생이 급여와 상관없이 너무도 성실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그때부터 동생을 무한 신뢰했다.
반년 동안 동대문으로의 새벽 출근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홍씨와 더 이상 함께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부지런한 동생을 위해서 큰형님은 새로운 일자리를 모색했다.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묵묵히 인내할 줄도 아는 자신의 동생에게 어떤 일이 가장 적합할까? 큰형님은 고민이 깊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형님의 금융 고객으로부터 느닷없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두말없이 우리 회사에 채용하고 싶소, 하는 것이 아닌가. 사전에 별도의 부탁이나 언질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아마 큰형님의 고객도 언제나 한결같으신 큰형님을 보고 생각이 깊었나 보다.
또 그렇게 작은 형은 큰 형님의 소개로 우리나라의 굴지의 토목건설사 가운데 하나인 ‘삼부토건(土建)’으로 취직이 되었다.
동대문시장하고는 전혀 다른 직종이었다. 그렇게 직장을 따라 작은형은 서울 큰 형님댁에서 대구로 옮겼다.
말로만 듣던 토목 건설현장이다. 우람한 중장비의 크르렁하는 굉음은 마치 성난 사자의 울부짖음 같았다. 뿜어져 나오는 엔진의 배기는 언제나 생기가 넘쳤다. 무시무시한 장비들은 쉬지 않고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각부서의 인원만 해도 일 백 명도 더 되는 것으로 보아 공사 규모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토목공사현장은 함께한 동료들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팀원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약속된 기간에 완공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반드시 어딘가 하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농촌에서 농사일로 다져진 몸은 오히려 토건과 잘 맞았다.
다들 부지런한 사람들만 모인 중에서도 작은형은 단연 돋보였다.
아버지를 닮아 무슨 일이든 일에 대한 이해가 특이할 만큼 빨랐다. 거기에 몸동작도 민첩한 것이 마치 운동선수 같았다. 매사 적극적인 태도 덕분이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체를 총괄하는 현장 소장으로부터 반장에 가까운 대우가 주어졌다.
명절과 휴가가 다가오면 소장은 그 많은 직원 중에 특별히 작은형만 별도로 불렀다.
“부모님께 빈손으로 가지 말게나”
하고 아무도 모르게 금일봉을 주셨다.
한번은 소장님이 형을 밖으로 불러내어 자신의 속내를 내비친 적이 있었다.
“노기사! 많이 힘들지?”
“괜찮습니다.”
“자네 언제 입사했나?”
“올해 이 년 차 접어들었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구먼”
“그때가 대구 현장이었지 아마?”
“네 맞습니다.”
“토목은 처음이라 기대는 안 했는데 의외였네”
“아, 아닙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자네에게 속으로 늘 고맙네 생각한다네”
현장에서만 뵙다가 밖에서 만난 소장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현장에서의 소장은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늘 현장의 안전 수칙을 귀에 따갑도록 강조하셨고 또 토목기술은 둘째가라면 서운해하실 분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소장을 두려워하고 한편으론 존경해 마지않았다. 칭찬이 인색하기로 소문난 분에게 기분 좋은 말을 들으니 어색했다. 마땅히 할 것을 한 것뿐인데 부담감만 가중되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 야간 대학이라도 다녀 보는 게 어떻겠는가?”
“네? 야간 대학이요?”
“응 자네가 원하기만 하면 내가 시간을 조율해보겠네”
회사에서 이러한 특혜를 주는가 하여 동료들에게 확인해 본 결과 아무도 그런 제안은 받은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고 한다. 어쩌면 소장님이 자신의 재량으로 배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해 주는 지도 모를 일이다.
‘왜 소장님이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하셨을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형으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자 소장님은 답답했는지 또 형을 찾는다.
“생각해 봤는가?”
“예기치 못한 제안이어서,,,” 형은 말끝을 흐렸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곰곰이 잘 생각해보게”
작은형은 소장님의 말대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소장이 생각하기에 작은 형은 평생 토목 기사를 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었다. 대학까지 나온 전공자보다도 오히려 더 나은 면이 많았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대학을 나왔냐 아니면 고등학교만 겨우 졸업했는지를 두고 연봉에도 큰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진급 부분도 차별을 두었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토목학과 야간 대학이라도 졸업하면 앞으로 회사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청년임을 감지한 때문이었다.
작은형은 소장님의 심중을 알고부터 고민에 고민을 더했다.
본인도 처음 1~2년간은 일을 익히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토목 일은 어느 정도 본인의 체질하고도 잘 맞았다. 3년 차로 접어들자 약간의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유는 위험하고 힘든 일은 본인이 훨씬 더 많이 하고 봉급은 고졸이라는 이유로 대학교를 나온 사람보다 못한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어쩌면 형의 이런 마음을 눈치를 채고 소장이 먼저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아뭏든 비슷한 시기에 소장의 제안과 형의 고민이 맞아떨어졌다.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보자면 대학 졸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군입대 하기 전 일 년을 공부해 보지 않았던가? 기초가 많이 부족한 것을 깨닫는데, 그쳤다. 두려웠다. 일보다도 훨씬 더 부담으로 다가왔다. 공부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직장 생활을 할 것인가? 공부에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모처럼 찾아온 두 갈래 길에서 형은 고민이 깊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언젠가 넓은 곳에서 꿈을 펼쳐보고 싶다며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마저 뿌리친 것은 그냥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삼부토건에서의 3년은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토목과 건축 분야는 비록 전공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자다운 일이었고 살면서 한 번쯤 경험할 수있는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작은형은 삼부토건에서의 경험들을 자주 소개했다.
아무리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능력이 있어도 평범보다도 못한 시골의 초라한 고등졸업장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실감했다. 그래서 소장님은 야간 대학이라도 다니기를, 바랬고 이렇게 성실한 사람이 평생 자기 옆에 있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
그렇게 작은형은 삼부토건에서 4년을 지낸 다음 다시 서울로 상경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연합철강 대리점의 영업부서로 입사를 마쳤다.
연합철강은 어떤 연고로 어떻게 연결이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작은 형이 서울로 다시 올라올 무렵 큰 형님은 중곡동에서 이사하여 봉천동에 살고 있었다. 큰형님은 돈이 잘못 엮이어 인생의 큰 풍파를 겪고 있었는데 아마 본인의 인생에서 첫 번째 시련이고 어쩌면 가장 큰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그 여파는 실로 고통스럽고, 그리고 오래도록 큰형님 가정을 괴롭혔다.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은 아직 어린 나도 모든 것을 접어두고 빨리 산업전선으로 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학업 중간에 아르바이트라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지만, 예상한 대로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때도 제일 고생이 심한 분은 형수님이셨다.
그렇게 큰 형님은 약 3년여 동안 고생하시더니 어려움에서 점차 벗어났다.
속으로 몇 번이나 주저앉고 싶었지만 결국 다시 일어나 정상에 우뚝 섰다.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 당시 나와 작은 형은 봉천동 큰형님 댁에서 조금 떨어진 곳 단칸방에서 함께 생활했다.
큰 형님은 봉천동에서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 잠실로 이사했다.
작은 형에게 철강(鐵鋼) 즉 ‘쇠’는 처음이어서 모든 것이 새로웠다. 철강은 겉보기에 모두 같은 것 같으나 종류가 실로 다양했다.
작은 형은 일요일도 없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회사에서의 자신의 지경(地境)을 넓혀갔다.
손에는 항상 다이어리가 마치 자석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을 부지런히 다녀 본 결과 철의 다양한 용도에 다시 한번 놀랐다.
‘철은 쓰이는 곳이 이렇게도 많구나’
어느 날 문득 돈을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사업은 무엇이 있을까? 하고 고민에 사로잡혔다. 돈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기는 하는 것일까?
열악한 환경에서 조그만 기계들을 놓고 다양한 제품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 참 신기했다. 철판이나 둥글게 말린 코일이 들어와 기계들을 거치면 그것이 건축자재가 되기도 하고 전자부품이 되기도 하고 또 자동차부품으로 구성의 한 부분이 되기도 했다. 점차 주변을 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졌다. 작은 형에게 휴식이란 말은 그저 사치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해있는 곳들을 찾아 유심히 살폈다.
규모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제조 과정들을 눈여겨보았다.
삼부토건에서도 그리고 연합철강 대리점에서도 그 어떤 위치에서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대리점에서는 영업실적은 좋았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탁월했다. 어느 순간부터 다른 동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차이가 났다.
그래서일까. 진급도 빨랐다. 어려웠던 형편은 조금씩 나아짐을 느꼈다.
그렇게만 임해준다면,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오래가지 못했다. 회사를 박차고 나온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만류했다. 사회경험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큰형님도 잘 되는 것보다 못 되는 경우를 많이 보고 또 듣고해서였을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꼭 사업을 해보고 싶으면 사회경험을 좀 더 쌓은 다음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다들 한마디씩 거든다. 특히 철강회사 대표와 임원들은 누구보다 아쉬워했다.
작은 형은 도대체 무슨 결심을 했을까?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에 아무도 몰랐다. 말을 하지 않으니 모를 수밖에 토건에서 건축과 건설을 배웠고 철강에서 제조업의 흐름을 어느 정도 깨우친 것 같다. 평소 아버지의 말씀대로만 하면 다른 사람들 처럼 제조업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부지런함은 누구보다 자신 있어 하지 않았던가.
철판 영업을 하면서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철판의 주요 사용처가 워낙 광범위하여 건축, 토목, 자동차, 선박, 전기, 전자등 우리 생활뿐만 아니라 생활 외적인 것까지 연결이 안 되는 곳이 없었다.
그렇게 작은 형은 연합철강을 그만두고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하여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한 가지 일을 구상했다. 바로 프레스 사업이었다.
어디서 사용했는지 낡고 낡아 고철 덩어리 같은 조그마한 기계를 한 대 구비 했다.
마침 그 무렵 주변에서 혼사 이야기도 설설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 시흥동 어느 허름한 지붕이 얕은 천막에서 기계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것도 온전한 천막동이 아니고 한쪽 면은 어느 빌딩의 바깥 벽을 허락 없이 기대어 의지하고 있었다. 물론 바닥은 콘크리트가 아니고 그냥 맨흙이었다. 첫인상은 피난민 수용소와 별반 다를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곳이 여기보다 나아 보였을 정도다.
그 무렵 고향이 같은 먼 친척 누나로부터 큰 형님에게 작은형 혼사 문제로 연락이 왔다. 친척 누나는 오래전 고향에서는 드물게 서울로 시집을 왔다. 수도권과 많이 떨어진 고향에서 서울로 시집, 장가를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마침 누나가 사는 가까운 이웃 가운데 말의 억양이 자신의 고향과 비슷한 한 가정이 살고 있는데 확인해 보니 함양군의 ‘남사’라는 마을을 고향으로 두고 있었다.
그 가정의 자녀들 가운데 유독 한 처자를 볼 때마다 동생인 작은 형이 생각났다고 한다. 그것도 간절하게 속에서 솟구치듯이 떠올라서 누나는 용기를 내어 먼저 큰 형님을 찾아 왔다.
“오빠! 동생 만나는 사람 있어요?”
“왜 무슨 일로?”
“참한 처자가 하나 있어요.”
큰형님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처자의 나이와 성씨등 이것저것 궁금한 부분들을 물었다.
“참 좋네. 자네가 수고 좀 해주게”
큰형님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친척 누나는 달력을 찾았다. 날짜들을 가리키는 친척 누나의 손은 어지러웠다. 두 사람의 만남을 위해 큰형님과 친척 누나는 위의 대화보다도 더 오래도록 달력의 날짜를 가지고 얘기한 것 같다. 마침내 적당한 날을 선택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큰형님과 형수님이 처자의 부모님을 맞이했다. 처자는 그 집안의 장녀로 동생만 두고 있었다.
처자의 아버지는 작은형의 직업이 무엇이냐 물었다. 조그만 사업을 한다고 말하고 정확하게 일의 종류도 말하지 못했다. 형편없는 기계를 그것도 한 대 겨우 놓고 하는 것이 너무 초라해서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나 보다.
작은 형은 자신의 일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있는 사람인데 이때만큼은 그렇지가 못했다. 어디 결혼이 용기와 자신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도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 삶의 남다른 열정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첫 만남은 그렇게 친척 누나의 간절한 바람대로 서로 좋은 인상을 남기고 헤어졌다.
몇 일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처자의 아버님이 형의 사업장을 보고 싶어했다.
많이 난감했다. 말이 사업이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분들이 보기에 비젼은 커녕 당장 생계조차 걱정되 보였을 정도였다.
‘언제까지나 숨기고 있을 것인가. 혹 나의 볼품없는 사업장이 마음에 걸리면 그래서 일이 잘 못 되기라도 한다면’ 이때 작은 형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용기를 내어 맨땅에 지붕과 삼면이 천막으로 어두컴컴하게 둘러 쌓여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한편 마음속에서 희비가 엇갈렸으리라.
다행히 어른은 사업장 규모나 겉모습을 보러 간 것이 아니었나 보다.
책임감과 부지런함으로 똘똘 뭉친 차돌 같은 사람은 무쇠보다 더 단단하게 보였다. 그리고 보이는 모습보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에서 확신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서 일하려면 적적하겠구먼” 짧게 한마디를 하시고
그날 바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사주시고 가셨다.
그것은 결혼을 허락한다는 무언의 약속과도 같았다.
하지만 작은 형은 한 가로이 데이트를 하며 한자리에 오래 머무를 사람이 아니었다. 바빠서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결혼했다.
신접살림은 시흥동 시내도 아닌 어느 산 및 그리 크지 않은 아니 조그마한 주택에서 시작됐다. 연탄을 사용하는 단칸방으로 조그마한 부엌과 화장대도 놓을 수 없는 좁은 방 하나가 전부였다. 오래전 일지만, 그 당시에도 너무나 형편없는 살림이었다.
어쩌면 결혼 이후부터 본격적인 레이스(race)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안정은 많은 변화를 안겨주었다. 오로지 일에 대한 한가지 생각으로 집중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의 출발은 부지런함이나 성실함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당장 자재(철판)를 구매해야 하고, 그리고 그 과정도 다 돈이었다. 자재(철판)대금 운송, 큰 기계가 없어 1차 가공인 스리팅(slitting)은 다른 곳에서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작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원도 한명 두명 거느리게 되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건설 경기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더불어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사람 구하기도 힘들고 그동안 잠잠하던 물가와 임금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종업원은 임금이 높은 곳을 찾기 마련으로 한곳에 정함이 없었다. 오늘 출근했어도 다른 곳에서 높은 금액을 제시하면, 다음날 한마디 말도 없이 발길을 끊었다.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이미 다른 곳으로 출근한 것이다.
거의 모든 면에서 열악한 상황들은 일하고 돈을 못 받고 물건을 납품하고 돈을 떼이고 혼란의 혼란을 거듭했다. 하여 대부분 현금거래이거나 아니면 담보를 제공해야 겨우 소재(자재)를 허락할 정도였다. 더러 어음거래도 이루어졌지만, 공신력이 있는 회사의 것은 그만큼 리스크(risk)가 낮아 통용이 잘 되어도 이름 없는 출처가 불분명한 것은 온전하게 사용될 리가 없었다. 어쩌다 안전하지 않은 회사의 어음들을 잔뜩 받아들었다가 명기된 날에 은행과의 채무 약속 불이행한 것이 바로 부도이다. 한때 사회적인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어렵게 어렵게 자재를 구매하여 납품하고, 그리고 결재를 어음으로 받았는데, 그런데 약속한 날짜에 입금되지 않았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사람도 있었다. 고의로 부도를 내었을 가능성이 다 분했다.
어느 날 큰형님은 자기 동생이 혼자서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 몹시 궁금하여 회사를 방문했다. 그전부터 몇 번 찾아가고자 했으나 작은 형이 극구 원치 않아서 가보지 못했는데 시간이 더 지체되기 전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하는 동생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큰형님은 적잖이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 깨끗하고 쾌적한 사무실에 비해 새까만 기름으로 온몸에 먹칠을 한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못해 슬픔으로 와 닿았다.
자신이 도울 수만 있다면 차라리 장갑을 끼고 돕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하겠는데 그럴 수도 없고,,,
나는 학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집에 있는 것이 조금씩 부담으로 와 닿았다. 그렇다고 마땅히 출근할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겨울 방학에 네 작은형에게 가서 일 좀 도와주고 오너라” 큰형님은 자신의 동생이 늘 마음 아프게 남아 있었는지 나에게 작은형이 고생하는 모습들을 떠올리며 나에게 힘껏 도와 줄 것을 마치 주문하듯 말했다.
그리고 큰형님은 자세하게 위치를 알려 주었다. 생소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도로마다 눈이 수북하게 쌓여 차도 사람도 빙판으로 인해 조심조심했다. 물어물어 겨우겨우 찾아갔다. 거지 움막같이 초라한 어느 천막 출입문 앞에 섰다. 안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둔탁하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낯익은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형이었다. 형광등은 모두 꺼져있고 30w 백열등 하나가 기계 옆에 대롱대롱 위태롭게 매달려있었다. 백열등의 불빛은 희미했다. 그리고 힘겨운 작업자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기계가 쿵하고 내려올 때마다 진동으로 그림자가 흔들렸다. 한동안 뒤에서 인기척도 없이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데 눈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사람들은 다 퇴근하고 홀로 남아 못다 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형님! 저 왔습니다.” 일에 열중하느라 잘 듣지 못했는지 아무 반응이 없다. 한 걸음 더 다가가 조금 큰 소리로 부르자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왔냐?”
“네”
그리고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무 말이 없자. 괜히 민망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는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작업복은 챙겨왔냐?” 얼떨결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챙겨오지 못했습니다.”
“,,,,,,,,,,”
그날 자정이 넘도록 둘이서 밀린 작업을 했다. 밖은 영하의 추운 겨울로 바람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쉴새 없이 움직였더니 오히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만하고 내일 하자”
집으로 가기를 권했지만, 그러나 좁은 단칸방은 형님과 형수님 두 사람만 있어도 좁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공장 안에 딱 한사람 누울만한 공간이 있었다. 물론 연탄을 피우지 않아서 훈기라고는 없었다.
그래도 그곳이 편하다고 생각되어 안심시킨 다음 형님은 집으로 들어가게 했다.
사방은 고요했다. 한기(寒氣)가 살을 파고든다. 몹시 고단했는데, 그런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몸을 공처럼 돌돌 말아 최대한 웅크렸다. 얼굴과 머리를 무릎 사이에 집어넣어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冷氣)는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아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은 것 같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형님이었다. 날이 밝았다. 마당에는 응달져 눈이 그대로 쌓여있었다. 봄의 따스한 기운이 불기 전에는 왠지 녹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양옆으로 수북한 눈을 보니 더욱 춥게 느껴졌다. 공장 바닥은 추위 덕분에 마치 콘크리트처럼 딱딱하여 오히려 좋았다. 밤새 얼어 구부러진 몸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따스한, 햇빛이나 난로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은 없었다. 어제 벗어놓은 장갑을 다시 찾는다. 뻣뻣하게 얼어있었다. 언 장갑을 끼면 맨손으로 있을 때보다 더욱 시렸다. 잠시 후 손등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어느새 굳었던 몸은 정상으로 회복되었고 이마에는 어제 못다 흐른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컥컥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입에서는 뜨거운 입김이 마치 용광로의 냉각수같이 뿜어져 나왔다.
회사의 주요 생산품은 건축자재가 대부분이었고 거래처는 그리 크지 않은 중소기업 정도였다. 내가 처음 작은형님의 사업장을 방문한 것은 형님이 결혼하고 약 1년 정도 지난 후였다. 한 대밖에 없던 기계는 3대로 늘었다.
하나같이 오래되고 형편없이 낡아 있었다. 직원은 두 사람을 두고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조금 위였다. 다들 학교는 무슨 이유인지 정상적으로 다니지 못하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집을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약간의 음지가 느껴졌다. 추위와 함께 항상 잔업이 뒤를 따랐다. 직원들은 가불이 다반사였고 월급을 받은 다음 날은 어찌된 영문인지 출근을 하지 않았다. 전화도 없었다. 형님의 이글 그리는 눈빛을 보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 몇 사람 안 되는 적은 수의 직원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출근했어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듣기 싫은 소리를 하거나 기분 나쁜 말을 하기라도 한다면 다음날 출근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12월을 보내고 해가 바뀌어 새해 일월이 되었다. 작은 형수님은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밥 먹는 시간도 아끼려고 형님은 형수님에게 밥을 해서 아예 공장으로 나르도록 했다. 형수님은 배가 만삭이 다되도록 양손에 준비한 저녁을 들고 공장까지 걸어오셨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길도 미끄러운 데다 예정일이 다가오자 형수님은 몸을 가누기조차 버거워했다.
그렇게 해산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형수님은 친정에서 조용히 출산준비를 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노상(路上)과도 같은 공장 생활을 해서일까. 지금까지 보낸 겨울 중에 가장 춥게 느껴졌다. 형수님은 오랜 진통 끝에 무사히 순산했다.
아들이었다. 첫 출산으로 아들을 낳았다. 득남 소식을 주인집 아주머니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전화기가 널리 보급되기 전으로 세입자들은 주인집을 통해서 소식을 전달받곤 했다.
그렇게 아들은 지금까지의 어렵고 힘들었던 삶에 대한 보상과도 같았다. 형님은 출산 다음 날 오후에 어렵게 시간을 내어 다녀왔다.
아직 강보에 싸여 눈도 뜨지 못하고 잠들어있는 핏덩이지만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내 생명의 연결고리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자신이 비로소 부모가 되는 순간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이다.
아내를 향해 애쓰고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 한마디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다음 날 날이 밝기도 전에 공장으로 달려왔다.
조카가 태어날 무렵 어쩌면 형님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수금이 잘되지 않아 모든 것이 막혀있었고 다음 달 어음 만기가 도래할 때까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지금 하는 일은 짧게는 4개월 어떤 것은 6개월 즉 반년이 지나야 겨우 수금을 한다는 얘기다. 그것도 발행자가 약속을 지켜야 가능했다. 심한 것은 6개월이 넘는 것도 있었다.
그당시 형님은 멍하니 감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연합철강 철판 영업을 하던 시절 문래동 일대를 헤집고 다녔다. 쓸만한 고철 중에서 제품이 몇 개 정도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어 그냥 고철처리 하기에 아까운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후판들이 많이 유통되고 있어서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했다.
자재를 저렴하게 구매해서 가공 후 비싸게 파는 것. 누군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수년간 건축자재를 납품해온 메인 거래처에서 한 가지 제안이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단품들만 납품했는데 이번에 특정 제품을 아예 조립 완성해서 포장 납품하기를 제안했다. 그렇게 하려면 지금과는 다른 여러 가지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우선 장소가 비좁았다. 긴 각 파이프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절단하려면 넓은 야드(yard)가 필요했다. 물론 야드뿐만 아니라 넓은 실내도 필요했다. 적어도 제품의 완성은 실내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설비들과 기술자도 더 필요했다.
고객사에서 자재를 제공해준다거나 건설공사 같이 중간에 기성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협력사에서 자재와 설비를 다 준비하고 완성하여 납품하면 그만이다. 당시 형님의 처한 상황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그림의 떡이다. 완성품 천대를 제작하려면 족히 4개월은 걸렸다. 재료 신청에서 입고, 제작 마지막으로 수밀 테스트와 도장 건조 포장까지. 그리고 완성 납품하도록 약 4개월 동안 인건비와 매달 임대료와 유틸리티비용과 원자재비용 등 어느 것 하나 4개월 후로 미룰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형님은 몇 날 며칠을 도면과 함께 계산기를 들고 씨름했다.
제품의 원가를 산출하기 위함이었다.
견적서 제출 기한이 다가왔다. 약속한 날짜에 맞추어 고객사 담당 차장에게 전달했다. 물론 여러 업체가 경합을 벌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못하겠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식의 터무니없는 가격은 오히려 회사 이미지만 실추시킬 뿐 아무 득이 되지 않는다.
“오늘 H사에 견적서를 제출했습니다.”
직원들을 모아 놓고 다소 긴장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큰 프로젝터는 처음이었다. 개인이나 회사가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려움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을 형님은 잘 알고 있었다.
“사장님! 어떻게 가능성은 있어 보이세요?”
직책을 맡은 과장이 대표인 형님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다들 걱정 어린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만약 우리 회사가 하게 된다면 지금 있는 인원으로는 일주일 가운데 절반은 자정이 넘도록 일을 해야 되고 나머지 날도 저녁 9시 이전에 퇴근하기는 어려웠다.
인원과 설비, 장소등 어느 것 하나 충족된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대표가 회사의 여건을 무시한 채 할 수 있다고 무리하게 욕심을 부렸다가는 괜히 낭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종업원들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지 어떤 이는 한숨을 연거푸 토해낸다. 벌써 시작하기도 전에 압박을 받는 것 같았다.
웃음기 잃은 무표정한 얼굴과 한숨은 분위기를 한층 더 무겁게 했다.
하지만 형님은 이러한 직원들의 염려와 걱정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견적가를 일부러 높게 적어 내어 거절 의사를 표하고 싶었는데 그것은 왠지 일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중간중간,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처음 맞닥트린 일로 마음고생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삼 일 후 고객사의 기술개발 담당자가 아무 연락도 없이 갑자기 회사로 방문했다.
“노사장님! 사장님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말은 짧았다. 표정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처럼 보였다.
“,,,,,” 형님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심의 결과와 발주서를 전달하는 담당자에게 염려스러움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이때 형님은 철판 영업을 박차고 나와 매우 노후 된 기계를 놓고 일을 시작한 지 불과 이년 정도이고 자신의 나이 이제 겨우 서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우리 회사가 선택되었습니다.”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전체 오더는 2000세트로 당초 계획보다 훨씬 늘었다.
직원들은 내심 우리가 하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들이다. 기존 하는 일도 지금 인원으로 부족한데 하고 걱정부터 앞섰다. 어떤 이는 입이 주먹만 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김계장은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설비들을 적어주세요.” 하고 담당자에게 지시한다. 주저앉아서 한숨만 쉰다고 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날로 바로 자재 구매 요청에 따른 발주서를 띄웠다. 물론 전량은 아니었다. 우선 500대분을 주문했다. 다 들어 올 정도로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장소가 협소하여 쌓아놓을 데도 없었다.
작은 형수님은 갓난이를 앞으로 하여 업고 전(前)같이 양손을 무겁게 하고 저녁 찬을 날랐다. 집에서 1호선 석수역까지는 버스 정류장 두 구간 거리는 족히 되는 거리였다. 이 시기에 우리 회사는 허름한 천막동에서 벗어나 석수역 근처로 옮겼다. 가운데가 네모지게 뚫려있는 큰 시멘트 벽돌로 블록을 쌓아 만든 공장이었다. 지붕은 슬레이트로 되어있으나 원 바탕색은 한 뼘도 남아 있지 않고 까맣게 탈색되다시피 되어있었다. 바닥은 에폭시 페인트를 칠했는지 아니면 원래 콘크리트로 아무것도 칠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은 아니지만 11월의 해는 금방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어둠과 함께 으스스한 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갓난이는 엄마 가슴에 얼굴을 옆으로 하여 곤히 잠들었다. 도착할 즈음 웅성웅성 아저씨들의 떠드는 소리에 깬다. 여전히 엄마의 두꺼운 외투가 머리를 덮고 있어 캄캄하고 답답하다. 몸부림을 쳐보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제야 찡찡대기 시작한다. 쩝쩝 아무렇게나 앉아서 팍팍 숟가락으로 긁어대는 아저씨들을 보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기도 한다. 잠시 후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형수님은 빈 통을 챙겨 들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새벽부터 움직인 형님의 몸은 저녁 무렵이면 많이 지쳐있었다. 그래도 엄마 품에 새록새록 잠들어있는 간난 아들을 보면 타우린이 가득한 자양강장제 음료를 마신 것보다도 훨씬 더 새 힘이 솟았다. 볼에 입을 맞추기도 하고 자신의 뺨을 갖다 대기도 한다. 이럴 때 자식은 피곤한 부모에게 마치 동력과도 같았다. 오늘 작업은 언제 끝날지 어제처럼 자정을 넘길지 잘 모른다. 엄마 품에 있는 갓난이는 오늘도 큰 역할을 했다. 지치고 고생하는 아빠에게 새로운 기운을 북돋아 줬으니 남은 시간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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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시대적 이야기가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