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근교 산에 올라보면 어디 할 것 없이 아파트천국을 이루고 있다. 보기에는 굳건해 보이지만 모래성 같은 대한민국을 느끼게 된다. 혹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항의할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두려워서 하는 말이다.
층간 소음은 지역 공동체의식 부재 결과_1
오늘도 우리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는 층간 소음 줄이기, 발코니나 계단, 복도, 승강기에서 금연하기, 위층에서 아래 화단에 담배꽁초 안 버리기, 애완견 안 짖게하기, 늦은 밤 세탁기, 피아노 사용금지 등 공동주택에서 지켜야할 여러 가지 사항들을 귀가 아프게 전달하고 있다. 그것도 감정이 사라진 기계적인 컴퓨터조음이다 보니 듣기에 따라서는 거북하기가 이를 데 없다.
민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관리사무소에서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방송만 내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귀가 아프도록 이렇게 들어야 하는 것들 가운데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파트 계단 창문 틈에 담배꽁초를 비벼 꺼놓는다든가, 승강기 바닥에 불이 붙은 담배꽁초가 그대로 타들어간 채로 버려져있다든가, 아파트 현관 계단에 위층에서 버려진 즐비한 담배꽁초를 보면 기가 막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눈앞에 안 보면 모르고 지날 수도 있는 일이다. 집안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어도 위층에서 울리는 소음이나 밖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는 아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모를 것이다.
층간 소음은 지역 공동체의식 부재 결과_2
몇 해 전 나는 이사를 가버릴까도 생각했다. 유치원생과 어린아이 둘이 있는 위층에서는 가끔씩 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리 심한 것은 아니었다. 오며가며 서로 인사하고 이야기도 하며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공을 차며 노는 것 같았고,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어 경고를 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인터폰을 하였더니 아이들이 없다며 다른 집에 알아보라는 것 아닌가. 자기들은 새로 이사를 왔다 하기에 궁금하기도 하여 인사차 방문하겠다고 하자 마지못해 그러라고 했다.
남자 주인과 첫인사를 나누는 동안 중고생으로 보이는 두 자매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정도 학생들이라면, 나는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법 없다'는 속담처럼 말이 통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천정이 무너질 듯 울리는 쿵쿵 소리에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놀라 터질 것 같다고 사정하면 자기네 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다 못마땅해 하며 불만을 갖고 술 취하면 내려와 행패까지 부리려 들고, 조금도 아래층에 대한 배려를 모르는 상 망나니였다.
그렇게 도를 닦는 마음으로 살기를 만 3년, 그네가 이사를 가던 날 나는 춤이라도 훨훨 추고 싶었다. 그 어떤 누가 새로 이사를 올지라도 그들보다야 낫겠지 싶었다. 어쩌면 그런 고행의 도를 닦으며 잘 참고 견뎌준 보상이 아니었을까. 새로 이사 들어온 위층 분은 칠십대의 두 노인만 살고 있어 절간처럼 더없이 조용했다.
이렇듯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에서는 무엇보다 이웃을 잘 만나야 할 것 같다고 생각된다. 층간 소음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우리 사회의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새로 지은 아파트에서는 건축법의 개정으로 어느 정도 그 피해를 줄일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래층을 배려하여 주의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본다. 아무리 뛰어다녀도 발뒤꿈치를 세우면 쿵쿵거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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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린이라고 하여 무조건 남에게 이해만 구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세살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옛말도 있듯이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싶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애완견 문제이다. 아파트 승강기를 통해 털과 배설물이 전파되는 것도 비위생적이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캉캉거리며 짖어대는 소음으로 온 아파트가 들썩일 때면 개사육장이 따로 없다. 누군가 찾아가서 항의하며 싸움이라도 대판 벌려야만 하겠는가. 그런 무례는 스스로가 알아서 처신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나는 잠에서 깨어보니 새벽 두 시였다. 창밖에서 애완견 짖는 소리가 그토록 날카롭게 들려올 수가 없었다. 오장을 도려내는 비수 같은 아픔이랄까, 도무지 잠을 청해보았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박차고 일어나 집안을 맴돌던 끝에 결전의 날을 세우고야 말았다.
경비실에 내려가 어느 집인지 찾아가서 조치를 부탁했지만 "아마, 주인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알아두었다가 내일 관리사무소에 보고해서 처리하게 하자며 함께 나섰지만 쉽게 그 집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파트동과 동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터라 소리의 울림은 듣는 방향에 따라 각각 달랐다. 간신히 알아내고 보니 예상한 대로 그 집은 주인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베란다 밖을 향해 애완견이 짖기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아파트는 전체 동이 울림현상으로 그런 난리가 없다.
지금 우리는 문명의 수혜 속에 각박한 삶을 살고 있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현대는 지난 70년대보다 더 혼탁한 사회가 되었다고도 말한다. 전에는 지역공동체였지만 지금은 개인 친목공동체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역공동의 이익을 위한 헌신의 모습은 사라지고 개인의 목적과 이익이 우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지만 공동주택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는 주민의 모임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은 '반상회'가 사라진지 오래고, 우리아파트의 경우는 '아파트대표자회의'만 유일하게 있을 뿐 '부녀회'나 그 어떤 주민회의가 열린 적도 십년 넘게 전무하다.
층간 소음은 지역 공동체의식 부재 결과_4 그러니 이웃을 알 수 없고, 소통의 시대를 외치고 있지만 벽에 갇혀 사는 형국이나 다름없다. 특히 아파트일수록 '반상회'와 같은 주민회의는 자주 열려야 하지 않을까. 이웃 간의 벽을 헐어야 한다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럴 기회가 사실 없는 것이다.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지혜가 필요한 때라고 본다. 행정당국에서는 '반상회'와 같은 주민회의를 부활, 권장하여 이웃 간의 훈훈한 마음을 서로 나누며, 인정과 우정이 넘치는 살기 좋은 그런 우리 동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