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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에 부딪힐 때에
4: 1- 23
여러분께서 아주 뜻있는 일, 좋은 일, 귀한 일을 시도했다가 예기치 않은 반대에 부딪혀서 당황하신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이 4장의 말씀에 귀가 솔깃할 것입니다.
옳은 일을 하는 데는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야합니다.
우리 옛 속담에도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일에도 항상 어려움과 마귀의 방해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방해 받을 각오, 욕먹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못합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왕의 허락을 받아 백성들과 함께 협력하여 일하는 데에도 예기치 않은 큰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반대라는 것은 대개가 어떤 일에 실패했을 경우에 일어나기 보다는 성공하였을 때에 일어납니다.
또 그 일이 뭔가를 이루어나갈 때에 대적하는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깨닫는 사람보다는 못 깨닫는 사람의 수가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려해도 다 이해하고, 협조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부족하기 때문에도 그렇고, 마귀의 역사로 인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 반대라는 것이 일하는 데에 필요하기도 합니다. 반대와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일하는 사람이 조심하게되고,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게하는 좋은 협조가 되기도 합니다.
만일에 느헤미야가 하는 일에 모든 사람이 다 돕고, 이해하고, 따르고 했다면 이 일의 가치도 별 것 아니었을 것이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 성벽은 쌓아져도, 그보다 더 중요한 신앙회복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반대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백성들이 한 마음이 되고, 더 열심히 일을 하게도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반대가 일어나는 것은 다 옳고, 바른 일이라는 논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반대가 일어날 때에 과연 바로되지 못한 것은 없는가 먼저 자신과 자신의 일을 살펴보아야합니다.
그런 다음 느혜미야와 같이 그 모든 반대와 비판을 수용하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1절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느4: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느4: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실은 산발랏이 비웃는 듯한 이 질문들과 도비야의 조롱은 느헤미야와 그 백성들이 가지고 있을 불가피한 약점들에 대해 일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 말은 어떤 것입니까?
1. 이 미약한 유다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이 유다사람들은 사실 미약하고, 그 하는 일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2.스스로 견고케하려는가?
그 둘레가 2마일 반 이상이 되는 성벽을 어떻게 이 사람들로 중수하게 하려하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 성벽은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한 일입니다.
3. 제사를 드리려는가?
이 미친사람들이 그저 기도드린다고 성벽이 다시 세워질 것을 생각하는가?
4.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아니, 저들이 하루에 이 성벽을 다 쌓을 것 처럼 일하는데, 얼마나 갈 것인가?
5.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다 불타버린 벽돌과 보잘 것 없는 재료를 가지고, 저 어마어마한 공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도비야는 말하기를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한 술 더 떠서 조롱했습니다.
이들은 반대를 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인 비난과 조롱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일, 옳은 일에 이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반대자, 비판하는 자들이 되지 않아야합니다.
.그런데 이 산발랏과 도비야의 비판은 실은 저들이 하는 성벽 재건하는 일이 기어이 성사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이루어지면 어떻게 하나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마귀가 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방해하고, 비난하는 일을 합니까? 저들은 압니다. 결국은 저들나라는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서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그래도 방해하고 미혹해서 끝까지 제 수입을 보려고하는 것입니다.
이를 알아야합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런 방해를 이겼습니까?
첫째로, 그는 보복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조롱이나, 방해를 받을 때에 우리가 가장 먼저하게 되는 일이 방해하는 사람들을 마 받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과 꼭 같은 천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고, 이 일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기어이 형통케 하실 것을(2:20)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느헤미야는 기도했습니다.
그는 항상 그래왔듯이 이 일에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일부러 닫아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그는 주님께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했습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었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조롱하는 무리들을 하나님의 대적으로 아시고, 하나님께서 보복하실 것을 아뢰었습니다. "주의 앞에서...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대적하고, 방해하는 일을 하지 맙시다. 느헤미야의 기도 같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어서 꼭 세상에서도 그 댓가를 치르게 됩니다. 사람을 대적하는 일도 두렵거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보응이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히는 것이 바로 주님을 괴롭히는 것이 됩니다.
셋째로. 느헤미야는 그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대적들의 조롱하는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에 기도한 이후에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누워서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느4: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이에'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원수들의 핍박을 하는 이 일로 오히려 그 백성들의 마음은 더 하나가 되고, 각자가 맡은 일을 더 성심껏하게 되므로 그 성의 높이가 반이상이나 올라갔습니다.
방해받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어떤 것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모든 것이 합력해서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은 협력하여 같이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6절에 "전부가 연락되고" 성벽이 서로 연결된 것을 말합니다.
"백성들이 마음믈 들여...역사하였음이라":충성을 다했습니다.
혼자서 이 성벽을 쌓을 수 없습니다. 대적들이 한 마음되는 것을 흐트려놓으려고, 비난과 조롱을 했지만, 느헤미야의 그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으로 이를 다 이겨 내었고, 오히려 대적이 있음을 알므로 더 단합하게 된 것입니다. 방해 때문에 느헤미야와 그 백성들이 하나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만난 당면한 문제는 환난이나, 핍박이나, 대적들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치가 문제입니다. 원수가 비웃고, 방해하는 것 보다 더 두려운 일은 우리가 하나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느4: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느4:7)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느4:8)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느4:9)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느4: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느4:11)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육 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느4:12) 그 대적의 근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고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느4:13) 내가 성 뒤 낮고 넓은 곳에 백성으로 그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게 하고
(느4:14) 내가 돌아 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느4:15)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느4:16)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느4: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느4:18)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느4:19) 내가 귀인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역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나뉘어 상거가 먼즉
(느4:20) 너희가 무론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느4:21) 우리가 이같이 역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었으며 (느4:22)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하고 (느4:23)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
느헤미야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큰 일을 시도하면서 기도했고, 진행하면서도 기도했습니다. 또 일이 진척이 보일 때에도 기도했습니다. 일에 방해군이 나타나서 욕을 하고, 비난을 하는 현실에서도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만하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전력을 다했습니다. 자신의 할 일을 전념히고, 최선의 노력을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제 백성들은 힘을 모아서 성이 반이나, 쌓아져 갔습니다.
이 때에 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대적들이 모여서 무력으로 훼방을 하려고 합니다.
(느4:7)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느4:8)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산발랏과 도비야는 자신들 뿐 아니라, 여러 이웃 나라와 힘을 합해서 예루살렘을 치려고 합니다.
이 때에 백성들의 마음은 다시 흐트려집니다.
그들은 기운이 다 빠졌습니다.
마귀 전략 가운데 중요한 것이 김 빼기 작전입니다.
어떤 의로운 일을 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와서 한참 그일에 대해서 헐뜯습니다. 열심히 주를 섬기려고하는데, 누군가 와서 "그런 일 한다고 밥목여주나?"합니다.
반대나 조롱이나, 비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만 한 마음이면 되는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백성들이 힘이 빠질 뿐 아니라, 이제 낙망까지 합니다.
아, 이제는 할 수 없다. 우리에게 이 일은 너무 벅찬 일이었어! 이 사역을 중단할 수밖에 없어!
또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느4:11)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육 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이 대적들이 이제 비난이나,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막으려 할 때에 이들은 지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4절에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두려워말라 한 말씀을 보면 그들이 두려워한 것입니다.
이럴 때에 느헤미야는 어떻게 대처합니까?
첫째로, 여전히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느4:9)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어떻게 현실이 어려워도, 느헤미야는 기도합니다. 비난이 왔을 때에도, 무력으로 달려들 때에도 그는 크고 두려우신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들어지는 같지 않을 지라도, 기도하는 데, 형편이 더 어려워도 기도할 수 있습니까? 끝까지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역사합니다.
둘째로, 느헤미야는 현 상황에서 인간으로서의 할 일을 최선을 다하여 합니다.
(느4:9)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기도하면서 파수군을 둡니다.
(느4:13) 내가 성 뒤 낮고 넓은 곳에 백성으로 그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게 하고
성의 취약지구에 보초를 서게합니다.
(느4:16)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백성의 일부분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경계합니다.
(느4:18)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한 손에는 연장을, 한 손에는 칼을 듭니다. 전쟁의 나팔 부는 자는 느헤미야 곁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느4:22)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하고
밤에는 파수하고, 낮에는 일합니다.
(느4:23)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 무장한 옷을 벗지 않고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다 지켜주시니, 염려할 것도, 아무 준비할 것도, 방어할 것도 없습니까?
우리의 잘못된 깨달음은 신앙생활을 이상한 것으로 만들고, 세상에 비난 받도록 하는 것이 됩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않는 사람 보다 기도 했기 때문에 더 성실하고, 열심히 일합니다. 기도와 일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은 일하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너의 모든 생활을 기도로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다 되는데, 믿음없이 기도않고, 병원가느냐?
기도하면 밥 안 먹어도 배도 부르고, 잠도 자지 않아도 피곤치 않고, 공부 안해도 하나님이 알아서 우등생되게 하느냐?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맡긴 사람은 아무 것도 않는가?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공부도, 사업도, 직장도, 가정살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으로 일한다면 얼마나 바로하며, 잘 하겠습니까?
무디 묵사님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데, 배에서 불이 났습니다.
이 때 무디 목사님의 명성을 아는 어떤 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불이 났습니다. 기도 좀 해 주십시오." 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아니오, 물동이를 가져와요. 불을 꺼야지요. 불을 끄면서 기도해야합니다."했습니다.
불을 끄면서도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면서 의뢰하면서 자기 행동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의 최선의 행위를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더 잘하도록, 이전에는 거짓되게 했고, 제힘으로 하령고 했던 것을, 욕심으로 하려고 했던 것을 이제는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던 일을 더 잘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느4:14) 내가 돌아 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모든 것을 다 제 위치에서 하도록 하고는 바라보는 것은 자신들의 방비한 모든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을, 그 문제들을 바라 보게 하지 않았습니다. 원수가 어떻게 강할지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묵상한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여러분에게 크십니까?
당신의 하나님은 과연 세상에 어떤 정도로 크십니까? 어떤 세상의 권력이나, 힘 보다도 다 크신 분으로 믿습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열 두 정탐을 가나안에 보냈습니다. 그 때에 열 정탐군은 (민13:28)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민13: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민13: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민13: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민13: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사람들을 보았을 때에 같이 보지 않았습니다.
(민14: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민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여호수아 갈렙은 그 땅의 거민들이 장대하고, 강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이 더 크심을 믿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여호아가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말라! 했습니다.
두려우신 하나님입니다.
누구를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않고, 환경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고, 별 것아닌 사건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되, 이 크신 하나님께 경외하는 두려움을 가져야합니다. 이분을 존경하며, 이분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달라집니까?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기운이 빠졌던 백성들이 이 느헤미야의 권면과 느헤미야의 말에 순종하므로
(느4:16)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그 때부터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바라 본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기억한 이후부터, 하나님의 크심과 두려우심을 본 이후부터 이들은 담대해졌습니다.
다시 역사하고, 방어합니다.
이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 힘을 냅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