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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10
믿음의 유산을 지키기 위하여 / 오세원 목사
정권이 바뀌면 기업들이 긴장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력에 의해 기업이 흥왕 할수도 있
고 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5공화국 전두환정부 후반기인 1985년도에 국제그룹과 삼호그룹이 해체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특히 국제그룹사건은 매우 유명한데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 '부실기업 정리'라는 미명 아래 희생됐다는 분석이 업계에서는 정설로 돼 있습니다.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정치자금 헌납을 거부하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모임에 늦게 나타나거나 1985년 총선에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결국 '괘씸죄'에 걸렸고, 결국 그룹 해체로 이어졌다는 분석입니다. 이후 양정모 회장은 정부를 상대로 국제그룹 해체가 부당하다며 위헌소송을 벌여 1993년 승소판결을 얻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예로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의 경우 좌파정권이 들어서면서 대표적으로 희생이 된 기업가로 꼽습니다. 당시 김우중 회장은 대기업 회장 중에서 골프 안치는 걸로 유명한 인물로 인정받았습니다. 다른 기업가들이 골프치러 갈 때, "그 시간에 공장 한 바퀴 더 돌겠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쓴 분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유사한 얘기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열왕기상 21장에는 포도원을 갖고 있던 나봇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얘기는 언제 이야기인가?
나봇은 어떤 사람인가?
나봇이란 이름의 뜻은 “뛰어난 사람”입니다.
좋은 이름입니다. 당시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포도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왕궁 곁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 이유는 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사실 아합 왕은 그냥 탈취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대토로 주거나, 아니면 값을 잘 매겨서 돈으로 구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보통 사람들 같으면 왕이 갖고 싶어 하는데,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더 좋은 것으로 바꾸거나 값을 쳐서 주고 사겠다고 하시는데 왕의 뜻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청와대 곁에 좋은 농장이 있었습니다. 지금 박대통령이 산책을 하다가 그 농장을 보고 청와대 가까이 있어서 시간이 있을 때 나가서 채소도 심고 가꾸면 좋을 것 같아서 비서에게 시켜서 농장을 팔 것을 제안 받았다고 합시다. 아니면 그 보다 더 좋은 농장을 거리가 다소 멀기는 하지만 멀리있는 더 넓은 농장을 바꾸자고 제안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소시민 같으면 대통령이 원하시는데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값을 정당하게 매겨서 사겠다고 하는데 팔거나 대토로 바꾸는 것에 대해 허락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아합 왕은 좋은 왕이었습니다. 왕의 권력으로 얼마든지 강권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포도농장 주인 나봇이 줄 수 없다고 했을 때 심히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이세벨이 남편 왕이 근심스런 모습을 보고 이유를 물었더니 사실 그대로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세벨 왕비는 곧바로 교묘한 술책을 부립니다.
이세벨은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인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다음,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위증을 시키게 하여 그와 아들들을 돌로 쳐 죽이게 하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왕비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어떤 형벌을 받을지 알기 때문에 잘못된 줄 알면서도 거절하지 않고 왕비가 시킨 그대로 시행하였습니다. 왕비 이세벨이 대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봇은 죽었고 그 포도원은 아합이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의 시각과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나봇이 자신의 죽음으로 바꿀만큼 소중한 것이었는가? 라는 점입니다. 그 포도원이 무엇이 그렇게도 중요하다고 자기 목숨과 바꾸었을까요? 물론 그렇게 죽을지 몰랐기 때문일 것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 죽었습니다. 그러면 나봇이 왕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단 한가지였습니다. 그 이유를 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조상의 유산이 뭐길래, 왜 그것을 그렇게 팔거나 바꾸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진실한 여호와 신앙인을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 제거해 버린 독선적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세벨이 나봇을 죽이기 위해 꾸민 내용이 10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돌로 쳐죽였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저주했습니까? 왕을 저주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조상의 유산을 돈많이 준다고, 더 좋은 땅 준다고 바꾸거나 파는 것은 결단코 바람직하다고 여기지 않은 믿음 좋은 반응을 보인 나봇인데도 그를 죽일 때 사용한 것은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한 것은 몰염치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이런 우를 범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래 형식과 내용이 나란히 갈 때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가지 형식과 내용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올바른 형식은 그에 걸맞는 내용으로 해서 가치 있는 것이 되고, 건강한 내용은 적절한 형식을 통해서 현실화 구체화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회에서의 율법 규정들 역시 살아있는 신앙심으로 해서 의미있게 되었고 신앙심은 율법의 준수를 통해 그 표현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은 신앙심 부재가 율법을 살인의 도구로 전락시킨 경우를 보여줍니다. 이는 곧 형식에 의한 내용의 잠식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신앙생활의 양식은 언제나 내제된 신앙심을 담는 그릇으로서만 진정한 가치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내용이 말라버린 채로 외형만 남은 신앙생활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다른 목적에 사용되는 도구로 전락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도 해치는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봇은 조상의 유산을 말씀대로 순종하여 지키기 위한 행동을 했고, 그것이 순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이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를 아합왕에게 보내어 잘못을 질책하고 그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게 하였지만 재앙은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합왕이 철저하게 회개함을 보시고는 그 재앙을 아합왕 시대에는 내리지 않고 후대에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첫째 나봇의 순교정신입니다.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나봇의 신앙심을 배워야 합니다. 나봇은 아무리 큰 권력 앞에서도 옳고 그름에 대하여 확고한 의지를 갖고 옳음에 대한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아합왕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왕의 명령 거절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봇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포도원을 양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그는 담대하게 거절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옳은 것은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봅니까? 아무리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옳은 것은 옳다고 끝까지 주장하며 죽음을 각오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왠지 타협하는 신앙이 많은 것 같지 않습니까?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는 신앙,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세상 시류에 편승하여 적당하게 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싶어 하는 불신앙의 모습은 없습니까?
적어도 나봇은 자기가 가진 재산을 통해서 다가오는 시험을 권력 앞에서, 그리고 어느 것에도 유혹받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신앙양심을 지켰습니다. 옳은 것에 대해 굽히지 않고 지켰습니다. 이 정신이 곧 순교정신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순교자기념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생각하며 우리의 신앙을 추스르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죽으면서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이 현대의 순교입니다. 지금이 바로 순교정신을 통해 영적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순교정신으로 순교자의 피로 된 신앙입니다. 이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고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다가 다 넘어집니다.
우리는 너무 작은 것에 쉽게 무너지고 주저앉게 되고 타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기독교가 기독교로서의 가치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여호와께서 금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정신을 갖고 있는 나봇, 우리는 여호와께서 금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시행하도록 동조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허용해버리는 모습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어느 정도 시행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주일성수, 십일조생활, 서로 봉사하는 생활, 작은이들의 벗이 되는 생활 등을 위해 왕의 명령까지도 거절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나봇의 정신을 갖고 참 믿음을 갖고 승리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나봇의 순교정신에서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신 분깃을 생명 걸고 지키려는 삶이었습니다.
사실 포도원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선조들로부터 받은 땅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그래서 나봇은 비록 왕의 강청이지만 포도원 양도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신앙이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잘 지켜야 합니다.
창세기 25장에 보면 에서가 자기에게 주신 장자의 분깃을 대수롭게 여겨 배고픔을 참지 못함으로 팟죽 한 그릇에 동생 야곱에 팔아버린 것이 치명타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생각되는 모든 분깃, 예컨대 생명, 직분, 사역, 건강, 재물, 자녀 등은 말씀을 근거로 하여 생명걸고 지켜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생명걸고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예배드림, 헌금드림, 기도와 찬양드림과 섬김과 봉사, 전도와 선교, 교육 등을 위해서도 우리는 생명 걸고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상들이 물려준 믿음의 유산, 저는 개인적으로 어머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믿음의 유산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목사의 직을 위해서는 생명걸고 순교자 정신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 어떤 일로도 포기하거나 나태하거나 타협하는 것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생명 걸고 지켜야 할 것이 믿음의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믿음보다는 현실론에 빠져서 물질을 지키려고 하고, 자신의 지식이나 취미나 건강을 위한 운동 등을 지키려고 하다가 오히려 하나님 뜻을 져버리는 일이 발생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자녀들의 신앙생활도 공부에 밀리면 안 됩니다.
학원공부와 과외공부와 입학시험 때문에 주일성수가 밀리고 신앙수련회가 밀리고, 성경학교가 밀린다면 우리는 현실중심의 타협적인 세속화된 신앙입니다. 나봇의 순교정신이 아닙니다.
사실은 신앙생활을 해보면 순교자로 죽는 것보다 순교자로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순교자가 쉽게 배출되지 않습니다. 순교자적 정신으로 사는 삶도 어려운데 생명을 내어 놓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기독교가 존재하는 근거는 순교자들의 피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각 나라마다 복음이 전해진 경로를 보면 반드시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흐르지 않는 곳에는 복음이 더디게 퍼집니다. 그리고 쇠하여 갑니다. 한국교회가 128년 전에 복음이 들어보면서 그동안 흘린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 한국교회가 왕성하게 부흥되었다면, 지금의 한국교회의 쇠함은 순교자의 피가 흐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순교자적 정신을 갖고 신앙을 지켜나가는 성도들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생명 모두를 한국에 바치겠습니다.”
양화진의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있는 루비 켄드릭의 묘비명입니다. 1907년 이 땅에 처녀선교사로 와 숨진 그가 미국의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선교한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2년 전 순교자 기념주일 때 동영상으로 보여드렸던 짐 엘리엇 선교사의 순교이야기를 기억하시겠습니까? 미국의 항공선교사로 에콰도르의 아우카족 선교를 위해 갔다가 살해당한 선교사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해치는 원주민들을 죽일 수 있는 권총을 주머니 속에 갖고 있었지만 원주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원주민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당할 때, 권총을 사용하지 않았고 끝내 죽임을 당했습니다.
후에 짐엘리엇 선교사의 아내가 간호사로 훈련을 받고 그 부족에 들어갔습니다. 여자는 죽이지 않는다는 전통을 갔고 있었던 아우카 족은 그 여인을 받아들였고, 그녀는 5년 동안 자신의 남편을 죽인 부족을 위해 열심히 선교했습니다.
어느 날 한 부족원이 그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백인으로써 왜 우리를 위해 이렇게 도와주고 있습니까?”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당신들은 5년전에 내 남편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러분에게 찾아왔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우카 족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 밀림 속에 수백개의 교회가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짐 엘리엇 선교사가 휘튼 대학교에 다닐 때에 그의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겨놓았습니다.
“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못한 것을 바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여러분의 삶은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영원하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주님 한분입니다. 구원입니다. 천국입니다.
히브리서11장은 믿음장으로 믿음을 아름답게 지켰던 사람들의 이름이 아벨과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무려 17명을 거명하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한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5-38절)
빌립보서1:27-29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의 신앙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복음의 신앙을 위해 합력하십시오.
대적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대적들에게는 멸망이 기다리지만 극복하고 승리하는 우리들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로마에 가서 참수형을 당한 사도 바울, 십자가에 거꾸로 순교하신 베드로, 목이 헤롯에 의해 잘려나간 세례요한,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하여 수많은 순교하신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 또한 나봇의 순교정신을 계승하여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주님 중심의 삶을 사십시다. 세상풍조에 휩싸여 쓰러지거나, 출세지상주의로 살면서 하나님을 팔아먹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독야청청 푸르른 나무처럼 늘 푸른 신앙이 되십시오. 싱싱하고 생명력있는 신앙으로 승리하는 믿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