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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몸씻기 마을굿
한탄강에 가을이 젖어들고 있었다. 찬 기운을 품은 물줄기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을 담고 맑게 흘러가고 있었다. 강변에는 가을꽃 들국화가 연보라, 진보라, 적보랏빛의 무늬를 수놓으며 끝없이 피어 있었다. 그 위를 바람이 스쳐가면 강변은 서로 얼굴을 비벼대는 들국화들로 보랏빛 물결을 일구었다. 가을은 강 언저리에만 와 있지 않았다. 북녘으로 갈수록 억세고 강해지는 산줄기에도 가을은 황금빛 색조로 내리고 있었다. 산에 먼저 가을이 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강물에는 어디에서부터 떠내려오기 시작했는지 모를 낙엽들이 드문드문 떠내려가고 있었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은 으레 한탄강가에서 고단한 다리를 쉬어서 갔다. 엎드려 강물을 마시기도 하고, 먼지 낀 낯을 씻기도 하면서 시름없이 강물을 바라보고 앉았다가 떠나가고는 했다. 북으로 가고 있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 움직임에는 거의 소리가 없었다. 후퇴하는 사람들은 발만 놀렸지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의 후퇴는 침묵을 낳았고, 후퇴의 침묵은 민첩성을 낳았다.
이학송 일행도 강가에서 다리를 쉬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빨며 먼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파르고 각이 진 산들이 첩첩이 이어지고 있었다. 북으로 올라올수록 산들은 많아져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옆에도 산, 산들에 갇히고 산들에 파묻히는 기분이었다. 땅덩이의 칠할이 산이라는 교과서적인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산 부자인 땅, 산 부자인 사람들. 넓지도 않은 땅에 산만 그리 많고, 나머지 삼할인 평지에서 나는 곡식마저 고루 나눠진 게 아니라 세습지주들의 착복이 계속되었다. 그러니 이 땅이 서민들이 삶이 얼마나 배고프고 고달팠으랴. 일 할도 못되는 소수의 삶을 호화롭고 기름지게 하기 위하여 구 할이 넘는 절대다수가 굶주리고 헐벗어야 하는 사회구조, 그게 어찌 인간세상일 수 있는가. 그 구조는 마땅히 뒤바꿔야 하고, 그런 계급은 마땅히 척결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니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이학송은 또 같은 생각에 빠져드는 것을 느끼며 얼른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생각은 분노와 함께 절망감을 가져오기 때문에 가능하면 피하려고했다. 다만, 이 길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이키기 위한 준비라는 것을 믿고자 했다.
이학송은 담배를 끄려다가 왼쪽 옆으로 앉아 있는 김미선에게 눈길을 멈추었다. 그녀는 마치 굳어진 듯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선이 가늘고 섬세한 그녀의 얼굴에는 곧 눈물이 될것만 같은 진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또 두고온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인가....... 이학송은 눈길을 약간 돌리며 생각했다. 당원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 그녀는 남 모르게 그 두 마음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녀는 지나가는 소리처럼, "아이들이 눈에 밟혀요" 하고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환하게 웃어버렸다. 마치 백치와도 같던 그 환한 웃음이 얼마나 쓰라린 어머니의 마음인가를, 그리고 그 마음을 덮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노력인가를 헤아릴 수 있었다. 동대문에서 마지막 취재를 하면서 한사코 신설동 쪽으로 쏠려가던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짐작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겪고 있는 갈등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는 충분히 감지할수 있었다. 그녀의 갈등은 자식들을 떼어놓고 서울을 떠나온 투철한 정신의 당원이기에 겪어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아픔이기도 했다.
"김 동무,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이학송은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마음 갉아먹는 생각을 더 못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아, 네에......" 그녀는 약간 당황한 빛을 보이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고는, "강도 꽃도 눈물나게 서럽네요" 하고는 엷게 웃었다. 그 웃음이 정말 서럽도록 외롭다고 이학송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슬프다'고 하지 않고 '서럽다'고 한 것이 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는 별다른 근거 없이 '슬프다'는 말은 서양 정서고 '서럽다'는 말이 우리의 정서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예, 해필 가을입니다." 이학송은 무심한 듯 대꾸했다. "저어, 혁명의 색깔은 붉은 색인데, 저 보라색은 무슨 색깔이면 좋을까요?" 살짝 턱을 받친 김미선은 들국화밭을 먼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요, 색깔이 곱긴 한데, 뭐랄까, 강렬성도 없고 너무 애상적이라서......." "전 말예요, 혁명을 완수한 다음 목숨을 잃은 전사들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색깔로 저걸 정했으면 좋겠어요." "그 이유가 뭔가요?" "저 색깔은 서럽고 한스럽거든요. 저 색깔은 억울한 일로 매를 맞은 사람의 피멍 같기도하고, 한의 색깔이 저럴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당원으로서 안 어울리는 말인가요?" "무슨 말씀입니까? 헌데, 김 동무는 한의 색깔을 보랏빛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저는 흰빛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네, 그래요. 원통한 감정들이 쌓이고 또 쌓이다 보면 하얗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허지만 한이란 게 무슨 형체가 있어야 말이죠. 이것도 다 괜한 소리죠." 김미선이 풀잎 하나를 뜯어 입술에다 물며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꼭 그렇게 생각해버릴 일이 아닙니다. 그럼, 정신이란 형체가 있는 것입니까? 또 사상이란 형체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 것들은 다만 우리가 형체가 있다고 믿자고 약속함으로써 형체가 있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약속에 따라 사상이라는 체계를 만들어 먼저 정신적으로 결속하고, 다음으로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면 그때 사상은 구체적 형태를 드러내는것 아닙니까? 한이란 무엇입니까? 아까 김 동무가 말한 대로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감정들이 쌓이고 쌓인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건 다름아닌 핍박받고 착취당하고 살아온 계급들의 체험이 응축된 수난사인 동시에 정신의 응결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지배받은 계급들끼리 통하는 사상입니다. 다만 그것이 정치이데올로기와 다른 점은 분석적 이론화와 실천적 논리화가 안 되었다는 점입니다. 체험적 사상의 덩어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혁명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인민을 주체로 삼고, 특히 기본계급을 중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그 체험적 사상의 덩어리에 분석적 이론화를 가하고, 실천적 논리화를 가하면 그들이 누구보다도 투철하고 열렬한 혁명세력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것이 바로 응축된 한의 폭발력입니다. 그러니까 한은 역사전환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그 증거로 갑오년 농민봉기는 동학사상을 불씨로 일어났고, 쏘련과 중국의 혁명성취도 그 불씨만 다를 뿐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을 단순하게 '정서'라고 파악하고 정의해 버리는게 소위 지식인들입니다. 그건 지식인들이 한의 생성과정과 그 본질을 모르고 그저 '감정적문제'로만 피상적으로 보기 때문에 저지르는 오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오류를 범하는데는 그들 거의가 지배계급 출신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학송은 손승호의 말을 생각해가며 맥을 잡아나갔다.
"어머, 굉장하시네요. 전 처음 듣는 얘기에요. 전 아무래도 엉터리 당원인가봐요. 그런 논리를 세울 수가 없고, 그런 논리를 들으면 금방 믿어버리고는 반박거릴 찾지 못하거든요." 김미선이 스스럼없이 웃었다. "원 별말씀을 다합니다. 그냥 저 혼자 생각일 뿐인 걸요." 이학송은 담배를 빼들었다. 그들의 뒤에서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이원조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어머, 저기 좀 보세요. 저 인민군 전사!" 밝은 음성의 김미선이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들국화밭이었는데, 한 인민군 전사가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고 있는 참이었다. "어떠세요, 제 눈에는 참 좋아 보이는데요. 혹시 전사와 저 행동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있을까요?" 좀 엉뚱하다 싶은 김미선의 질문이었다. "글쎄요, 저도 아주 좋아 보이는데요. 전사의 눈에도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고, 예쁜 건예쁜 게 아닐까요? 그런 걸 감상하는 건 전투의 긴장이나 피로를 풀기 위해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전사의 경우, 저 여유있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다 든든합니다. 후퇴를 하면서도 저렇게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건 우리를 얼마나 고무시킵니까. 저 여유는 단순한 꽃감상이 아니라 앞으로 얼마든지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 아닙니까? 만약 저 전사가 지금과는 반대로 꽃밭을 마구 짓밞으며 허겁지겁 강을 건너갔을 때, 우리는 그 겁에 질린 모습에서 뭘 느끼겠습니까." "맞아요, 맞아요. 이 동무는 무슨 문제든 답을 술술 풀어내는 마술사예요." 김미선은 마치 소녀처럼 좋아했다.
"발은 좀 어떠십니까?" "그냥 그렇지요 뭐." 김미선이 농구화를 만지며 얼굴을 찡그렸다. "항공! 항공!"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강둑에 앉았던 사람들이 재빠르게 양쪽으로 흩어졌다. 억새풀숲으로, 들국화밭으로 사람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며칠 사이에 사람들의 행동은 비행기의 빠르기에 맞춰 그만큼 기민해져 있었다. 비행기 편대가 쇠가 맞갈리며 굴러가는 그 소름기치는 폭음을 남기고 북쪽으로 날아갔다. 사람들은 금방 일어서지 않고 한동안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또 다른 편대가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다 짧은 시간에 얻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지금쯤 평양은 어찌되고 있을까요?" 김미선이 엎드린 채로 들국화 가지들 사이로 이학송을 보며 낮게 속삭였다. "글쎄요, 저 비행기들이 또 마구잡이로 폭격을 해대고 있잖겠어요?" 알싸할 만큼 진한 들국화 향기를 가슴에 담으며 이학송도 속삭이듯이 말했다. "우리가 비행기 한 대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조바심이 나고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아요." "누구나 똑같은 심정이지요." 이학송은 김범우를 생각했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현재의 전쟁상황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 미국에 대한 그의 견해와 판단은 역시 남다른 것이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몸을 일으켰다. 이학송 일행은 다시 북으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왜 이름이 한탄강일까요?" 엉성하게 엮어진 부교를 건너며 김미선이 물었다. "아마 무슨 연유가 있을 겁니다. 기구한 사연의 전설 같은 게." "달래강처럼 말인가요?" "그렇지요." "그런데 꼭 우리를 놓고 붙여진 이름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강을 건넌 사람이 옛날부터 한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청상과부가 된 여자, 소박맞은 여자에서부터 과거에 낙방한 선비, 패주하던 의병, 체포된 독립투사....... 셀 수도 없이 많았겠지요." "그렇겠네요." 강을 건넜고,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길은 끝없이 뻗어가고, 걷기가 바빴던 것이다. 철원은 산산이 부서지고 갈가리 찢기면서 불타고 있었다. 짙은 안개가 퍼지듯 연기로 자욱한 시가지는 불길에 휩싸였고,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은 서로 뒤엉키고 부딪치며 허둥지둥했고,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숨넘어가는 비명과 서로를 외쳐부르는 소리와 화염에 휩싸인 큰 건물 무너지는 소리와 쉴 새 없이 터지는 폭음이 뒤엉키고, 군인들이 떼지어 달려가고, 비행기들은 낮게 날며 숨돌릴 겨를 없이 새하얀 로켓탄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다 허물어진 벽에는 '서울시 인민위원회 동무들은 철원인민학교로 집합하라' 하는 종이가 너풀거렸고, 전봇대마다 '***동무, ***는 十月二日철원을 지나 평양으로 갑시다' '***가족은 흑교로 와주시오' '**야, 평양 대동강 다리에서 만나자' 하는 종이들이 붙어있는가 하면, 여기저기에 급히 쓴 글씨로 '**연락소'라는 종이쪽들이 나붙어 있었다.
해방일보 일행은 겨우겨우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북쪽 길목의 숲에 이르러 그들은 발길을 멈추어야 했다. 숲속에 은신한 군부대가 젊은 사람들을 가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병력보충이었다. 해방일보 일행도 한 줄로 서서 군인들 앞을 지나갔다. 군관의 손짓에 따라 젊은 기자들은 하나씩 줄을 벗어났다. 이학송은 여섯번째로 줄을 벗어났다. "어머, 안돼요" 하는 당황스런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낮게 들렸다. 그는 김미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세 명이 더 줄을 벗어나고 해방일보의 차례가 끝났다. 그때 한 사람이 군관 앞으로 다가갔다. 이원조였다. 그는 군관에게 신분증을 내보였다.
"저 기자는 보기보다 나이가 많소. 그리고 신문 발행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혁명일꾼이오. 군관동무의 선처 있기를 바라오." "기자 동무, 몇 살이오?" "서른여섯입니다." 이학송은, 에라 모르겠다 싶어 세 살을 더 올려붙여버렸다. 마흔은 말이 안되고, 서른여섯이면 마흔에 가깝다고 순간 판단했던 것이다. "보기보단 그렇소." 군관은 이원조를 힐끗 보고는, "이쪽으로 나오시오." 이학송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일행에서 떨어져나간 여덟 명의 기자들은 서울방위사단에 편입된다고 했다. 부대의 이름이 그렇듯이 그들은 진격해오는 적을 막아야 하는 최전선 부대였던 것이다. 다시 길 걷기가 시작되었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일행 여덟을 전투 부대로 떠나보낸 우울한감정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전 이 동무가 곧이곧대로 나이를 댈까봐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참 이상해요, 이 동무가 태연하게 서른여섯이라고 하는 순간 이 동무 얼굴이 정말 서른여섯살처럼 보이는 거예요." 쉬게 되었을 때 김미선이 감정을 눌러가며 가만가만 한 말이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저는 나이 많이 들어 보이게 하려고 저도 모르게 순간적인 표정변화를 일으켰을 것이고, 김 동무 눈은 또 김 동무 눈대로 착시를 일으킬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을 테니까요." "그건 너무 멋없는 과학적 분석이에요. 그냥 신기한 일로 뒀으면 해요." 이학송은 고개를 끄덕이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밤은 겨울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매운 바람이 일어나는 밤길 걷기는 이중으로 고역스러웠다. 밤길을 찾기도 어려운데다 걸을 때 난 땀이 쉴 때는 한기로 변했다.
강원도를 벗어나 황해도 땅을 꼬박 사흘을 걸어 수안에 도착한 것이 시월 십일이었다. 수안도 중심가는 이미 불타버렸고 변두리의 오막살이들만 간신히 폭격을 면해 있었다. 크든 작든 간에 면단위 이상의 소재지는 비행기의 폭격으로 불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군사시설이고 민간인들의 집이고를 가리지 않는 인정사정없는 초토화작전이었다. 그들 일행은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인민위원회를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인민위원회는 텅 비어 있었고, 그들처럼 행여나 하고 찾아온 사람들이 실망스러운 빛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발길을 돌리는데 미군 정찰기 한 대가 제트기에 비해 너무 느리게 수안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정찰기를 보고도 땅에 엎드리거나 다투어 처마 밑으로 숨어들기에 정신이 없었다. 완전한 비행기 공포증이었다. 그들은 어느 빈 집에서 열 명 남짓한 부하들을 데리고 있는 군관을 만났다.
그에게서 벌써 오래 전에 미군들이 원산과 진남포에 상륙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일행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군의 상륙은 곧 앞길의 차단을 의미했다. 말뜻 그대로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동무들, 떠납시다, 북으로." 이원조의 말이었다. 그는 앞장을 섰다. 수안을 떠나 한 시간쯤 걸었을 때 길가에 질펀하게 널려 있는 시체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먼발치에서 볼 때는 후퇴하다 지쳐 죽어간 부상병들의 시체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까워져서 보니까 그건 미군들의 시체였다. 매복에 걸려 일개 소대가 몰살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백인, 흑인이 뒤섞여서 죽어 있는 모습을 그들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흥, 꼴들 좋군." 누군가가 말했다. "남의 땅에 왜 맘대로 들어와. 당해 싸지!" 여자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게 김미선인 것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이학송은 그녀가 당원이라는 사실을 문득, 그러나 처음으로 의식했다. 그는 굳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사람을 따라 걸음을 떼어놓았다.
염상진 일행 여섯은 옥산 뒤의 군당 집결지를 떠난 사흘 만에 담양 근방에서 북으로의 발길을 멈추어야 했다. 장성 갈재가 막히고, 순창쪽의 길도 완전 차단되었던 것이다. 그 양쪽길이 막혔다는 것은 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모두 봉쇄되어버렸다는 의미였다. 물론 위급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후퇴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북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적이 제아무리 기동성을 발휘해 모든 길을 차단했다 하더라도 깊은 산길까지 장악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도당이 후퇴를 중단하고 방향을 광주 쪽으로 되돌렸기 때문이었다. 삼십 대 가까운 차량행렬이 방향을 되돌렸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나서 한 걸음이라도 북쪽으로 발길을 옮겨서는 안될 일이었다. 도당이 없는 군당이 있을 수 없고, 도당이 후퇴를 중단한 것은 모든 하부조직도 후퇴를 중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군당조직을 양분시키는 무리를 해가며 그 지점까지 온 것도 도당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였다.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빨리 군당으로 되돌아가 미흡한 채로 남겨두고 온 입산자들의 조직화를 완결시키면서 도당의 새로운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염상진은 생각했다.
"군당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소." 염상진은 일부러 "군당으로 돌아갑시다" 하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야지요.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안창민이 표정 없이 말했다. 그 옆에서 이해룡은 입술에 잔뜩 힘을 넣은 채 입을 다물고있는 것이 꽤나 속이 상하다는 내색이었다. 강동기와 다른 두 사람은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군당 집결지를 떠날 때 안창민도 이해룡도 북으로의 후퇴를 마땅찮아했다. 하대치와 오판돌은 더 말할 것 없었다. 그러나 도당의 지시를 정면으로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자기 혼자서 후퇴하는 도당을 따라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군당위원장 하나가 군당의 핵심조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입산자들은 대충 읍, 면 단위로 분리해서 그 지휘책임을 하대치와 오판돌에게 맡겨놓고, 안창민과 이해룡을 나서게 했던 것이다. 다른 세명을 더 붙인 것은 신변안전을 겸해 하대치 쪽과 선을 댈 필요에 대비한 것이었다.
염상진은 발길을 되돌려잡으며, 군당조직부터 신속하게 빼돌린 것을 무엇보다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 조처를 하지 않고 떠났더라면 자신의 군당도 지금쯤 갈피를 못잡고 분산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지역당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모습을 사방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너 명씩, 네댓 명씩 덩어리를 이루어 북쪽 방향으로 계속 가는가하면, 방향을 돌려잡기도 했고, 또 어찌할 줄을 몰라 우왕좌왕하는 축들도 적지 않았다. 그는 그때마다 소속을 물었는데, 그들은 거의가 서로 다른 지역당이었고, 그렇다고 간부들도 아니었다. 소년티가 아직 남아 있는 십대 중반을 조금 넘겼을까 말까 한 젊은이들의 덩어리가 있는가 하면, 서너 가족들이 한덩어리를 이루고 있기도 했다.
"이러고들 있지 말고 어서 소속 당을 찾아가시오." 염상진은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당에서 북쪽으로 가라고 혔는디요?" "당도 떴는디, 워디 있는지 알아야제라." "참말로 난리시, 앞질도 맥히고 뒷질도 맥히고. 인자 워째야 쓸까이." 모두가 이런 식의 대꾸였다. 그들은 선도 끈도 다 떨어진 상태였다. 염상진은 생각했다. 후퇴를 중단하고 발길을 되돌린 도당이 어디로 갔을 것인가를. 그건 결코 어려운 파악이 아니었다. 산이었다. 전쟁 이전의 상태로 환원하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그때의 투쟁선에서 안전지대를 골라 조직을 이동시킨 것처럼. 그 예상을 입증하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광주에서 엄청난 살육전이 벌어졌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석방된 우익계와 후퇴한 시당조직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이었다. 시당이 도당의 지시에 따라 그 동안 가두어둔 우익계를 석방하고 후퇴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단 심사를 거쳐 처단에서 제외시킨 그들에게 후퇴를 한다고 해서 잔혹행위를 가해서는 안되고, 불필요한 가해행위는 또 다른 보복행위를 유발시킨다는 판단 아래 내려진 결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익계는 풀려나자마자 그날 밤부터 보복행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급간부를 제외한 시당조직은 아직 멀리 가지 않고 무등산 골짜기에 머물러 있다가 곧바로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들의 의도가 거꾸로 나타난 데 분개한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다시 시내로 들이닥쳤다고 했다. 아직 군경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 싸움의 성패는 간단하게 가려진 셈이었다. 무장상태인 시당조직원들 앞에서 원시무장을 한 우익계가 당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도당과 시당의 조처와는 상관없이 우익계가 그 동안 갇혀 고생한 것만으로도 보복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을 서둘러댄 데서 비롯된 참극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간에 그 사건은 결과적으로 적들의 보복행위를 확대시킬 것이고, 또 이쪽에서 저지른 학살행위로 선전 이용될 것을 생각하며 염상진은 더없이 마음이 무거웠다. 그건 명분과는 별개로 빚어지고 있는 전쟁이 가진 광포성의 가속화였다. 그는 무등산으로 다시 물러갔다는 시당조직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려고 했다. 전에도 그랬듯이 시내가 너무 가까운 무등산에 도당이나 또는 많은 사람들이 오래 머무를 것 같지는 않았다. 무등산은 시내에서 너무 가깝다는 입지조건 외에도 산의 형태조건으로도 중요 조직이나 많은 투쟁력이 은신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무등산은 천 미터가 넘는 높이로나, 넓게 자리잡은 덩치로나, 온화하면서도 묵직한 생김으로나 이름 그대로 빼어난 산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산의 구조가 단순해서 그 속에 샛가지친 줄기들이 많지 않았고, 따라서 오밀조밀한 골짜기가 없었다. 거기다가 잡목이나 잡풀들마저 무성하지 않아서 어디에 비트 하나 안심하고 만들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무등산에 비해 백운산은 그 입지조건이나 형태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전부터 도당이 백운산에 자리잡았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도당은 다시 백운산으로 갈 것이 거의 틀림없었다.
염상진은 군경이 광주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버리고 산자락을 밟기 시작했다. 광주에 군경이 들어왔다는 것은 각 군단위에도 그들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산될 거라는 의미였다. 자신이 확인한 바대로 무질서하게 흩어진 하부조직들이 그는 걱정스럽기만 했다. 각 군단위가 모두 군경에게 장악당하게 되면 조직을 잃은 사람들은 이중, 삼중의 포위에 갇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태에서 우왕좌왕했다가는 개죽음을 당하기가 십상이었다. "우선 산으로 들어가시오. 산에서 어떤 읍, 면당이든지 조직을 찾아내도록 하세요. 그리고,그 조직을 통해서 당신네들 조직을 찾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염상진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이렇게 강조했다. 그는 각 읍, 면당에 한두 명씩은 박혀있을 야산투쟁의 경험자들인 구빨치가 이미 산속에 거점을 확보하고 조직수습에 나서고 있을 것을 확신했다. 그들은 다시금 더욱 빛을 발하는 보석일 수밖에 없었다. 염상진 일행은 창평의 야산굽이에서 이상한 말다툼을 하고 있는 네 젊은이를 만났다. 하나는 인민군이었고, 셋은 학생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인민군은 가슴에 *모양으로 탄알꿰미를 걸었는데 총이 없었고, 정작 총을 들고 있는 것은 다른 셋 중의 하나였다. 그러고 있는 모양도 야릇한데다가,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비에 인민군이 열세라는 것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염상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벌써, 셋이서 인민군의 총을 탈취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실례하겠소. 무슨 일이오?" 염상진의 목소리는 거칠고 위압적이었다. "누군디, 왜 그요?" 총을 든 젊은이가 조금도 달라지는 기색없이 염상진에게 눈길을 딱 고정시켰다. 그 당돌한 것 같기도 하고, 당당한 것 같기도 한 태도에 염상진은 어이가 없었다. 더욱이 그는 셋중에 키나 몸집이 제일 작았고, 얼굴까지 하얘서 그런 태도가 영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눈만은 예사롭지 않게 총기가 서리고 날카로웠다. "보아하니 학생 같은데, 그게 나이든 사람한테 쓸 만한 말버릇이라고 생각하시나? 행장을 차린 걸 보니 후퇴하려고 나섰던 모양인데, 어느 지방당 소속이오?" 일본군 배낭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그는 열일곱이나 여덟 정도밖에 안되어 보였지만 염상진은 당규에 입각해서 존대를 쓰고 있었다. "예, 광주시당인디요, 동무는 워디시다요?" 대답으로 끝나지 않고 되물어오는 그 다부진 태도가 눈 생긴 값을 한다 싶어 염상진은 빙긋 웃었다. "난 보성군당위원장 염상진이라 하오." "야아?" 젊은이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며, "그 모스코바 작은 스탈린으로 명난 염상진 위원장님이시라고라?" 믿을 수 없다는 듯 염상진을 올려다 보았다. "틀림없이 그분이시오." 염상진의 입장을 생각해서 안창민이 말했다. "아이고메 요거 큰탈나부렀네. 버리장머리 웂이 대헌 것 용서해주시씨요. 지넌 서중학교 세포책 조원제라고 헙니다." 젊은이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괜찮소." 염상진은 여전히 웃음을 띤 얼굴로 젊은이를 내려다보며 '서중학교 세포책 조원제'를 되뇌이고 있었다. "같은 사업하든 동무들이구만요. 싸게 인사디려." 조원제는 다른 두 명을 인사시켰다. 하나는 "뵈어서 영광이구만요" 했고, 다른 하나는 "존경하고 있습니다" 했다.
염상진은 도무지 쑥스러워 얼굴을 들고 있기가 어려웠다. "역시 위원장 동무께서는 보성 근방에서만 명이 난 것이 아니라 광주 학생들한테까지도 유명하시군요." 흡족한 얼굴로 싱글거리며 이해룡이 말했다. "그러먼이라. 화순군당위원장 먹장군 동무와 항꾼에 학생들 새에서는 너무 유명허시구만요. 화순군당의 그 역사 깊은 열렬헌 투쟁과 보성군당의 그 해방구럴 장악하고 벌인 치열한 투쟁은 학생덜의 투쟁의지럴 불타게 허고 강허게 맹그는 교훈이고 시범이었구만요." 조원제는 상기된 얼굴로 기운차게 말했다. "그건 다 불필요한 소영웅주의의 발상이오." 염상진은 자르듯이 말하고는, "그래, 인민군전사와 무슨 문제거리가 있소?" 그는 인민군을 쳐다보았다. "예에, 이 총알은 중대장 동무께서 제게 맡기시문서 끝까지 잘 보관했다가 반환하라고 했댔시요. 어드케 일이 잘못돼서 부대가 분산됐는데, 중대장 동물 찾아댕기다가 저 동무들을 만나게 됐디요. 기런데, 저 동무래 하는 말이, 자기는 총이 있고 나는 총이 없이 알만 가지구 있으니끼니 총알을 자기한테 넘기라는 거야요. 나는 군관 동무의 명령을 받은 거니끼니 죽어두 안된다구 허구, 저 동무들은 내놓으라 하구, 똑같은 입씨름을 하고 있었디요. 이 총알은 인민의 총알이니 내 맘대루 할 수 있는 개인소유가 아니지 않카시요?" 인민군은 또록또록하게 말했다.
"그게 사실이오?" 염상진은 조원제에게 물었다. "예." "조 동무는 총알이 하나도 없소?" "한 서른 발 있구만요." 조원제는 씨익 웃었다. 자기 욕심을 시인하는 그 웃음이 어찌나 천진하고 솔직해 보이는지 염상진도 마주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눌렀다. "그것이면 우선 급한 대로 됐고, 차차 구해 쓰도록 하는 게 좋겠소. 저 전사 동무한테 무리하게 총알을 요구하는 건 저 전사 동무가 명령 불이행 과오를 범하게 만드는 것 아니겠소? 어떻게 생각하오?" "논리는 분명 그런디, 이 정신웂는 판국에 중대장 동무를 찾으란 보장이 웂고, 못 찾게 되면 저 총알은 무용지물잉께요." "동무는 그런 걱정까지 마오. 내래 결사적으루 중대장 동물 찾아내고 말 테니끼니." 인민군 전사가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그가 총알을 빼앗길까봐 그러기보다는 정말 중대장을 못 찾게 될까봐 그런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염상진은 생각했다. "전사 동무의 말이 맞소. 꼭 중대장 동무를 찾아서 그 총알을 전하도록 하시오." 염상진의 말이었다.
"위원장 동무,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줘서 고맙시요. 안녕히 가시라요." 경례를 붙인 전사는 황급히 돌아서더니 뛰기 시작했다. 낙오된 저 젊은이가 낯선 땅에서 과연 중대장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염상진은 멀어져가는 전사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중 몇 학년이오?" 이해룡이 조원제에게 물었다. "사학년이구만요." "흥, 사학년!" 이해룡은 어깨를 들먹하며 코웃음을 웃고는, "총 들고 그러지 말고 공부나하는 게 어떻겠소?" 귀여운 아이 보듯 조원제를 쳐다보았다. "날보고 그런 말 허지 말고 동무나 총 우리헌테 넴기고 집에 가서 쉬는 것이 으쩌겄소? 빨치산 환갑나이 폴세 지낸 것 같은디." 조원제가 야무지게 쏘아붙였고, 그들 일행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이해룡은 무색함을 면하려는지 누구보다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스물다섯 살 나이를 빨치산 환갑이라고들했다.
"광주에 군경이 들어왔고, 시당이 무등산으로 빠졌다는 건 알고 있소?" 염상진이 정보제공을 겸해 확인하고 있었다. "알고 있구만요." 조원제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내 생각으론 도당은 백아산 쪽으로 이동할 것 같고, 시당에 선을 댈라면 우리가 가는 길목이니 동행해도 좋겠소." 염상진의 보호의식 발동이었다. "말씀 고맙구만요. 근디 즈그덜언 딴 디로 붙었으먼 쓰겄구만이라. 셋 다 집이 요 근방잉께요." "그럼 그렇게 하시오. 연고지를 낀 투쟁이 불리할 때도 있지만 유리할 때가 더 많으니까." "근디, 한 가지 의문이 있구만요. 공산당은 그 조직을 자랑허고, 조직 웂는 공산당은 존재헐 수 웂다고 알고 있는디, 요분 후퇴럴 당허고 봉께 선이란 선은 다 뒤죽박죽이 되어 끊기고 헝클어지고 혀서 혼란이 말이 아닌디, 대체 요것이 워치케 된 일이당가요?" "그게 전쟁이라는 거요. 전쟁이 야기시키는 돌발상황은 조직을 얼마든지 혼란에 빠뜨릴수 있는 일이오. 그걸 불가항력이라 하오. 그러나, 조직의 힘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혼란을 얼마나 신속하게 수습 정비하느냐 하는 문제로 연결되오. 불가항력적 상황에 부딪쳐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진 모양을 보고 우리 조직에 대해 회의할 게 아니가 그걸 수습정비해 나가는 신속성을 보고 우리 조직이 불변하게 가지고 있는 위대성을 확인하도록 하시오. 현상태의 혼란은 일단계로 열흘, 이단계로 닷새, 합해서 보름이면 완전히 수습될 것이오. 어디서든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주시해보시오. 건투를 빌겠소." 염상진이 팔을 뻗쳤다.
"잘 알겄구만요. 작은 스탈린이라고들 혀서 키도 작으신 줄 알었등마......" 조원제는 악수를 하며 키가 큰 염상진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염상진 일행은 광주를 서쪽으로 두고 담양군 남면을 지나 무등산 뒷골인 화순군 이서면으로 접어들었다. 아직 치안대 청년들이 대창이나 낫을 들고 검문하는 마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염상진은, 어서 산으로 들어가 당신들 조직을 찾으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멀잖아 면단위까지 밀어닥칠 경찰병력을 앞에 두고 원시무장으로 검문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부질없는일이었다. 화순군으로 들어서자 지리가 환해 염상진은 걸음이 한결 수월해지는 느낌이었다.
조계산을 가운데 놓고 동으로 백운산, 서로 무등산, 남으로 모우산을 잇는 지역은 지난 야산투쟁이 중심지였다. 그 네 개의 점안에 장흥군, 화순군, 보성군, 승주군, 광양군이 포함되었고, 구례군과 곡성군 일부분이 걸렸다. 도당이 후퇴를 중단하고 발길을 되돌린 이상 유격투쟁은 본격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다시 그 지역이 핵심투쟁지가 될 도리밖에 없었다. 염상진은 숨을 있는껏 들이켠 채로 어금니를 맞물었다. 그리고 먼 하늘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색씨,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유. 동네 처녀들이 다 시집간 것 모양으로 낭자머리를 올린다고 허니 색씨도 그리 허고 봅시다." 주인아주머니가 마을 갔다 돌아오자마자 순덕이를 불러 말했다. 순덕이는 아주머니의 손에 나무비녀가 들려 있는 것을 보며 어색스럽게 웃었다. "얼굴언 그대론디 낭자만 틀어올린다고 눈쉑임이 될께라?" 순덕이는 근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아주머니의 그런 마음씀이 더없이 따스하고 고마웠다. "사람한테 치장이란 것은 묘해서 낭자머리를 틀면 우선에 십 년은 더 나이들어 뵐 것이유. 그 서양것들이 용하게도 처녀들만 골라낸다니, 고것이 머리 모양새 보고 그러는 것 아니겄수. 그 식별하는 것이야 애초에 못돼묵은 조선놈들이 가르쳐줬을 것이고. 그러니 좀 우습지만 깨끗헌 몸으로 심 중위님을 만나자면 낭자를 틀어야 될 것 아니유." 주인여자가 달래듯 하는 부드러운 눈으로 웃었다.
"그래야제라." 순덕이는 풀죽은 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심재모를 생각하자 또 눈물이 솟구쳤다. 그런 그리움의 눈물만이 아니었다. 서러움의 눈물이었다. 심재모가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리고, 그 허망하고 야속함은 버림받았다는 비참한 서러움이 되었다. 그 뒤로 심재모만 생각하면 서러운 눈물이 지체없이 솟기고는 했다. 그러나 그 서러움에는 자신의 신세 기구함에 대한 아픔이 있을 뿐 심재모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심재모는, 다섯 장의 손수건과 함께 생전 처음 써서 보낸 연애편지의 내용처럼 변함없이 자신의 마음을 이끄는 '등대'였다.
"요거이 무슨 생판 난린지 모를 일이네. 사람들이 대중없이 죽고 다치는 난리에다가, 배곯고 애끓는 뒷난리 참아내기도 힘이 부치는 판에 요건 또 무슨 변고여. 인민군허고 싸우겠다고 이 땅에 들왔으면 쌈이나 고이 할 일이지 어째서 그 악독한 일본놈들도 안하던 짓을 즈덜은 하는 것인지 몰라. 이 땅 여자들이 즈덜 첩도 아니고 종도 아닌 세상에. "머리를 빗질해서 몇 번이고 낭자를 틀었다 풀었다 하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며 순덕이는 두려움과 분함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말은 틀림없는 말이었다. 그건 여자들이 치러야 하는 새로운 난리였다. 그 난리는 이틀 전에 한바탕 벌어졌다. 미군들이 지나가며 변두리 마을에서 분탕질을 쳐 여자들을 범한 사건이 생겼다. 그날 밤에 처녀 둘이 목을 매 죽어버렸다. 그래서 더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다음날 '몸씻기 마을굿'을 벌인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굿을 조용히 치른 것이 아니라 미리 소문을 내 여자들을 불러모았던 것이다. 다른 예사굿도 아니고 그런 험한 꼴 당하고 이름조차 처음 듣는 굿을 한다는데 구경을 오지 말라고 해도 갈 판이었다. 순덕이도 주인아주머니와함께 그 마을을 찾아갔다. 해가 뉘엿뉘엿해지는 속에 칠팔십 명의 여자들이 모여들었다.
'몸씻기 마을굿'은 어스름이 내리면서 쌍을 이루고 선 당산나무 아래서 시작되었다. 당산나무 주위에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남자들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남자는 꼭하나, 하얀 수염이 긴 영감님이 풀기 선 흰 두루마기에 망건을 쓰고 당산나무 밑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무당이 요란한 풍악소리에 맞추어 춤을 한바탕 추었다. 그리고 돼지머리가 차려진 상 앞에서 짤막한 주문을 외웠다. 그 많은 여자들이 당산나무 아래 둥그런 빈 터를 남기고 겹으로 에워싸며 있었지만 작은소리 한 가닥 내지 않고 긴장되어 있었다.
"오너라, 나오너라, 죄 없이 벌받은 우리 불쌍헌 죄인들 나오너라아!" 무당이 컬컬한 소리로 외치며 큰 쥘부채로 하늘을 쳤다. 당산나무 가까운 집에서 여자들이 줄지어 나왔다. 당산나무를 겹으로 에워싸고 있던 여자들의 얼굴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려졌다. 그리고 모든 여자들이 다 함께 놀라는 소리들을 짧게 토했다. 한 줄로 서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여자들은 모두 흰 치마저고리를 입었는데, 머리에는 삼베자루를 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삼베자루는 목밑까지 내려왔고, 앞을 볼 수있도록 작은 구멍 두 개씩이 뚫려 있었다. 소리없이 걸어온 여자들은 당산나무 아래 줄을 맞춰 섰다. 모두 열아홉이었다. 그때까지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영감님이 느리게 몇 걸음을 옮겨 굿상 앞으로 나섰다. "이 불초한 몸이 이 자리에 선 것은 학식이 많아서도 아니요 덕망이 높아서도 아니올씨다. 금번, 세월이 하 수상하고 어지러운 난중에 처하여 우리 마을이 당해서는 안될 청천벽력같은 우환을 당하매 나이 최연장자로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죄를 대신하여 이 자리에선 것이올씨다. 우리 마을이 당한 우환은 벌써 다 아시는 고로 재언할 필요가 없는 일이고, 오늘 이 기막히고 통분할 마을굿을 하지 아니치 못할 연고만 간명하게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자고로 남자는 지조요, 여자는 정절이라 하여 그것을 목숨처럼 존귀하게 보존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네 법도요 미풍양속으로 귀히 여겨왔습니다. 하여, 정절을 함부로 더럽히는 방탕한 여자는 사람대접을 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의 엄한 규범이올습니다. 음녀와 탕녀는 마을돌림으로 매타작을 당해 죽어야 했고, 그리 죽기가 무서우면 손수 목숨줄을 끊거나 야반도주를 했던 것은 모두가 두루 아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허나, 정절이 더럽혀졌다고하여 다 똑같은 것은 아니올씨다. 정절이 더럽혀졌되 거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 법이니, 앞서 말한 인륜도덕을 깨치는 죄를 범하는 것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음탕한 짓을 자행한 경우가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생명을 내걸고 정절을 지키려 했으나 여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낼 도리가 없는 강압으로 정절을 더럽히게 된 경우올씨다. 이 두 가지는 천양지차라, 마땅히 구분되고 식별되어 다루어져야 하는 것인즉, 두 번째 일이 여자들의 본의로 저질러진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그 죄를 뒤집어쓰고 목숨을 끊는 것은, 그런 횡액을 당한 것만도 천추의 한인데 거기에 더하여 분통한 죽음까지 해야 함은 만고에 없는 억울함이고, 그런 비통함을 막지 않고 보고만 있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만행이올씨다. 더욱이 금번 일은 난중에 일어난 난이라, 자고로 난은 남자들의 책임하에 있는 일이니 금번 당한 우환의 책임도 전적으로 남자들에게 있음을 부정치 못할 바이올씨다. 이치가 그러하매 남자들은 금번 당한 우환의 책임을 통감할 일이지 그 처의 정절이 더럽혀졌다 하여 하등의 시비를 할 명분도 이유도 없음입니다. 이에 함께 당한 우환은 함께 풀어 그 일을 잊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즉, 오늘 이리 몸 씻는 마을굿을 함께 올려 천지신명께 죄를 빌고 그 용서를 받자와 우리 다 함께 우환으로 입은 상처가 덧나지 않고 아물어 새 광명으로 살기를 축수하려는 바이올씨다.
이러한 일은 이 불초한 몸의 생각이 아니오라 저 옛날부터 우리 조상님네들이 행해오신 방책인즉, 국난을 당할 때마다 무수한 인명이 상하는 참극 외에도 금번과 똑같은 우환을 여자들이 겪지 아니할 수 없었으매, 일찍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오늘과 같은 굿을 올렸던 것이올씨다. 오늘 여자분네들을 널리 오시게 한 소이는 이 기막히고 통분할 굿을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여자분네로서 진정한 마음으로 위로를 하여주시옵는 한편 저분네들이 몸을 씻고 정절을 되찾는 증인이 되어달라는 뜻이올씁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난이 계속중이오매 다 같이 경각심을 갖고 우환을 막고 피할 방책을 강구하라는 뜻도 합하여 있습니다. 이 불초한 몸은 여기서 말을 거둘까 합니다." 비장감이 서리고 분통함이 밴 노인의 말은 한 겹씩 내리고 있는 어둠을 뚫고 퍼졌고, 당산나무를 에워싼 많은 여자들은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박히는 것을 느끼며 자신들이 바로 삼베자루를 쓰고 있는 여자들로 변하고 있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주문과 함께 무당의 춤이 한판 어우러졌다.
"어허어! 천지신명을 위시하야 우리를 지키시고 살피시는 제신들께 죄를 고하야 사함받을 몸씻기를 떠나는 판에, 모두모두 마음 정히하여 내 뒤를 따르렷다!" 무당이 둘러선 여자들을 제압하듯 쥘부채를 휘둘러 둘러보면서 엄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예에에-" 눈치 빠르고 비위 좋은 여자들이 대답을 길게 늘였다. "어찌 이리 대답이 다 안 나오고 이런고! 마음 정히 하여 내 뒤를 따르렷다!" 무당의 힘찬 되풀이었다. "예에에-" 여자들은 다 같이 입을 모았다. 무당은 숙달된 솜씨로 사람들의 마음을 한묶음으로 엮고있었고, 모든 여자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려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가세가세 죄진 몸 씻으러, 천지신명 제왕제신 자비롭게 굽어살펴, 인간중생 온갖 죄를 용서하고 거두시니, 죄를 씻자 몸을 씻자 염수로 먼저 씻고 청정수로 거듭 씻자......" 무당이 앞장서가며 주문을 외웠고 삼베자루를 쓴 여자들은 합장을 하고 뒤를 따랐다. 이어서 그 뒤를 실이 풀려나가듯 여자들이 한 줄로 섰다. 그 긴 행렬은 발소리도 숨소리도 내지 않고 점점 진해지고 있는 어둠 속을 흘러가고 있었다. 마을을 감돌아흐르는 강가의 모래밭에서 무당이 발길이 멈추었다. 모래밭 건너편은 나지막한 등성이가 강물과 맞닿아 벽을치듯 하고 있었다 그 지점에서 물길이 휘돌아 흐르며 모래밭을 일구어 놓고 있었다. 무당의 손짓에 따라 삼베자루를 쓴 여자들이 모래밭에 줄지어놓인 커다란 통들 앞으로 가서 섰다. 그 통들은 제각기 그 크기나 모양새가 좀 달랐다. 나무로 만든 것도 있었고, 양철로 만든 것도 있었다. 그 통들 옆에는 바가지가 두 개씩 놓여 있었다. 계속되는 무당의 손짓에 따라 뒤따라온 여자들이 모래밭에 반원을 그리며 겹으로 서 나갔다. 마을을 등지고 선 여자들의 반원은 맞은편의 등성이와 함께 이어져 동그라미를 이루듯하고 있었다. 여자들의 반원그리기가 끝나자 무당은 강물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쥘부채를 활짝 펼치며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렸다. 무당은 하늘을 우러르고 주문을 외며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렸다. 무당은 하늘을 우러르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무당의 고개가 하늘을 향하여 젖혀진 것과는 삼베자루를 쓴 여자들의 고개는 깊이 떨구어졌다. 어둠이 내리고있는 먼 하늘에는 별들이 갓 돋아나기 시작했고, 강변에는 물 흐르는 소리만 어둠 저편에서멀고 여리게 들리고 있었다. 주문을 끝낸 무당이 여자들 쪽으로 돌아섰다.
"천지신명을 위시하야 제왕제신께 아뢰온 바로 죄인들의 뜻을 가상히 여기사 면죄를 나리기로 하셨으니 죄인들은 천지신명과 제왕제신이 내려다보시는 가운데 정히 몸씻기를 시작하렷다!" 무당이 접은 쥘부채로 삼베자루 쓴 여자들은 한일자 쓰듯 한 동작으로 가리키며 호령했다. "소금을 통에 붓고, 물을 떠다 반씩 채울 일이다!" 무당의 지시에 따라 삼베자루 쓴 여자들이 일제히 바가지를 하나씩 들어올려 거기에 든 소금을 통에 쏟았다. 그리고, 그녀들은 두 손에 바가지를 하나씩 들고 강가로 나갔다. 무당은 요령을 한들며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고, 여자들은 강물을 떠다가 통에 부었다. 한 번,두 번, 세 번...... 여자들의 모래 밟는 소리가 그녀들의 흐느낌처럼 어둠에 스미고, 물 쏟아붓는 소리가 그녀들의 통곡처럼 어둠을 흔들었고, 요령소리와 주문은 그녀들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듯 쉼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 떠나르기가 열 번을 채웠을 때 무당의 요령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뚝 멎었다.
"좌로 쉰네 번, 우로 쉰네 번, 합하여 백팔 번을 착실히 하여 염수를 만들렷다!" 무당의 요령소리가 다시 울리고, 삼베자루 쓴 여자들은 다 같이 허리굽혀 통 속의 물을 왼쪽으로 휘저어 둘리기 시작했다. 어둠은 차츰차츰 짙어져가고, 통마다 물이 휘도는 소리가 그녀들의 울먹이는 기구처럼 어둠 속을 흐르고 있었다. 삼베자루를 쓴 여자들이 하나, 둘 허리를 펴기 시작했다. 무당의 요령소리와 주문이 한결 빨라졌다. 마지막 여자가 허리를 펴는것과 함께 요령소리와 주문이 멎었다.
"염수에 몸씻기를 시작할 것인즉 속곳 입은 죄인은 없으렷다!" 무당의 호령에 삼베자루 쓴 열아홉 여자들이 허리를 반으로 굽혔다가 폈다. "되었다, 통 안으로 얌전히 들어앉으렷다!" 열아홉 여자는 신들을 벗고 통 안으로 들어갔고, 소금물 속으로 몸을 앉혔다. 무당은 다시 쥘부채를 활짝 펼치며 하늘을 우러러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어느 때 없이 어기찼고, 가락의 폭이 높고 깊으면서도 애절감이 줄줄이 넘쳐흘렀다. 반원을 이루고 선 여자들은 그 뜨겁고 간절한 주문에 휘말리며 요행히 자기를 피해간 우환을 다행으로만 여기는것이 아니라 삼베자루를 쓴 채 소금물 속에 들어앉아 있는 여자들의 분한 아픔을 가슴 저리게 느끼며 이 굿으로 그녀들이 마음병을 앓지 않기를 빌고 있었다.
"어허! 천지신명 제왕제신께서 굽어보시는 가운데 초벌죄는 씻었으니 다음은 청정수 씻기니, 통 안에서 나오렷다!" 열아홉의 여자들이 통 밖으로 벗어났다. 소금물에 흠뻑 젖은 치마들은 무겁게 처져내리며 그녀들의 아랫도리 부분부분에 달라붙고 있었다. "청정수로 거듭 씻어 심신에 죄가 티끌로도 남지 않게 할 것이니, 물이 목에 찰 때까지 들어가고, 천지신명 제왕제신께 아뢰올 동안 머리까지 풀풀 세 번씩 담글 일이렷다!" 다시 울리기 시작한 요령소리를 따라 열아홉 여자가 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 희끄무레하게 드러나는 그녀들의 모습이 시나브로 시나브로 물속으로 잠겨들어갔다. 요령소리가 급해지고, 커지면서 주문이 시작되었다. 물이 목에까지 차오르는 지점은 물살이 제법 셌고, 물때가 낀 강바닥의 돌들은 맨발인 발바닥으로 밟기에는 미끄러웠다. 그러나 여자들은 온 힘을 다리와 발가락에 모아 똑바로 서려고 안간힘하며, 세게 흐르는 물살에 자신들의 몸에 묻은 그날의 더러움이 씻겨져나가고, 분함과 원통함도 씻겨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자들은 제각기 삼베자루 뒤집어쓴 머리들을 물속 깊이 넣었다. 그리고 숨이 차서 더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무엇인가를 질정없이 그러나 간곡하게 빌고 있었다. "어허허! 청정수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씻어내었으니 몸도 마음도 말끔하니 되었도다. 나오너라, 당신(堂神)께 절올리러 가자!" 무당이 요령을 경쾌하게 흔들었다. 주문도 신명나는 가락을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강가로 나올 때처럼 무당을 따라 한 줄로 서서 당산나무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둠은 짙을 대로 짙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당산나무 아래 줄맞춰 서고, 걸판진 풍악소리에 맞추어 무당의 신바람 도지는 춤이 한바탕 어우러졌다. 두 개의 촛불이 펄렁이다가 자지러들고, 다시 일어나 펄럭거렸다.
"천지신명과 제왕제신께서 죄를 말끔히 사하시와 새 몸과 새 마음을 나리시니 여기 읍한 열아홉 목숨은 그 뜻 높이 받자와 실하고도 실하게 살아가야 하렷다!" 온몸이 물에 젖은 채 합장을 하고 선 열아홉 여자는 일제히 허리를 깊이 숙였다. 무당은 상에 놓였던 사발을 왼손에 들고, 솔가지를 오른손에 들고 돌아섰다. 그리고 솔가지 끝에 사발의 물을 찍어 첫 번째 여자의 삼베자루 쓴 머리에 뿌리고, 다시 찍어 마주댄 두 손바닥위에 뿌렸다. 그 예식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차례로 치러졌다.
"새 몸과 새 마음을 나리신 천지신명과 제왕제신의 하해와 같은 은공감읍하고 그 뜻을 귀히 받들 것을 약조드리는 뜻으로 사배를 올리렷다!" 열아홉 여자는 제각기 정성스러운 몸짓으로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네 번씩의 큰절이다 끝나자 다시 풍악이 울리고 무당이 춤을 추었다. 굿을 마감하는 춤이었다. 춤이 끝나자 삼베자루를 쓴 여자들은 처음처럼 줄지어 당산나무 아래를 떠났다. 그때 마침 순덕이는 길을 틔워주는 목에 서 있어서, 줄지어 지나가는 그녀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억누른 울음소리가 느닷없이 가슴을 치며 울음을 솟기게 해 순덕이는 입술을 물고 그 울음을 코로 흘러내고 있었다. 열아홉 중에 처녀가 몇이고 부인네가 몇인지알 수 없는 채로 생전 처음 본 그 굿이 그렇게 서럽고 기막힐 수 없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덕이는 내내 울먹였다. 그리고 학처럼 생겼던 그 영감님의 말이 자꾸 귀에 맴돌았다.
"이만하면 낭자 모양은 됐으니, 어디 좀 봐유." 주인여자는 순덕이를 돌려앉혔다. 순덕이의 둥글넓적한 얼굴에 낭자머리는 어울렸고, 나이도 분명 더 들어보였다. "시잡간 여자로 보이기는 해도 그 얼굴이 그래서는 색에 미친 그것들 눈 속이기가 쉽덜않겠구먼유. 낭자도 머리 빗지 말고 벗대로 틀고, 얼굴에 검댕이도 좀 칠허고, 옷도 누데기를 입어 그놈들 눈에 정내미 떠어지게 허고 있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구먼, 생각이 어쩌요?" 순덕이는 이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삼베자루를 뒤집어쓰고 그런 굿을 당하고 싶지 않았고, 심 중위를 다시 만날 때까지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신은 처녀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심재모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떠난 것은 전쟁이 너무 갑자기 터져 그럴 경황이 없었을 뿐이지 자신이 싫어서가 아니라고 순덕이는 굳게 믿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 또한 굳게 믿었다. 심재모가 떠나버린 것을 알았을 때 그 허망하고 막막함이란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죽어버릴까도 몇 번 생각했다. 전쟁이 터지자 심재모는 집으로 돌아가라며 여비와 가는 길을 세세하게 가르쳐주었지만, 그건 심재모의 속 편한 소리였고 자신은 도저히 그냥 집으로 돌아갈 처지가 못되었다. 심재모와 결혼을 해서 돌아가면 더없이 당당하겠지만 그냥 갔다가는 아버지한테 다리몽뎅이 부러지고 어머니한테 머리채 끄들릴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동내사람들 손가락질과 나쁜 소문으로 시집가기는 아예 틀린 일이었다. 그래서 주인아주머니에게 통사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덕 좋은 주인아주머니는 점잖았던 심재모도 생각하고 해서 부엌일이나 거들며 함께 살아보자고 했던 것이다.
순덕이는 낭자머리를 한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미친년, 천리 밖 타향에서 요게 무신 천주악이여,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