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궁리를 한다.
유인규
‘아, 개학이다. 학교 가기 싫어. 그래도 가야지 네가 선생인데.’
한 광고에서 시작한 이 유머는 시리즈로 발전했다. 병원 가기 싫다는 의사, 교회 가기 싫다는 목사 등으로. 그러고 보면 어른이라고 일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50세 부서장인 나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궁리를 한다. 정확하게는 놀 궁리. 생각해 보면 항상 똑같았다. 뭐하고 놀지.
철이 안 들었던 아주 오래 전에도, 철이 들었다고 착각했던 얼마 전에도, 철이 들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은 지금도 항상 똑같았다. 뭐하고 놀지. 어떻게 더 잘 놀지.
‘우리는 늙어서 놀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놀기를 멈추어서 늙어간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묘비명으로 유명한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다. 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호르몬의 변화나 근육량의 유지보다 중요하다. 나는 놀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고, 이 말에 따르자면 어쩌면 평생 늙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잘 놀기가 그렇다고 거창하거나 시끌벅적하게 놀기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주어진 환경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진심으로 놀기.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도 잘 놀았다. 외롭지만 씩씩하게 이런 뜻이 아니다. 주변의 기대치를 만족시키면서도 스스로 요령껏 잘 놀았다는 쪽에 가까웠다. 학생때는 책상에 앉아 필기하는 자세로 놀았다. 공책위에 빽빽하게 이름이 적힌 야구선수들이 야구경기를 했고, 만화 드래곤볼의 주인공들은 무술대회를 했다. 공부를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방문을 빼꼼 열어보던 엄마는 아들의 모습에 흐뭇해했겠지만 사실은 공부하는 게 아니었다. 엄마 미안해.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안타깝게도 의미 없는 회의가 많다. 내 노트에는 각종 도형과 화살표와 중요해 보이는 단어들이 빼곡히 적히지만 사실은 머릿속 나의 세계에서 작동한 이런저런 놀궁리의 결과물일 뿐이다. 사장님도 미안해요. 회의에서 어떤 중요한 이야기가 오갔냐고 나에게는 묻지 마세요.
돌아보면 항상 주어진 환경이라는 것이 있었다. 학교 안에서, 회사 안에서.
학교를 그만둘 용기도 없고 회사를 뛰쳐나갈 배짱도 없으니, 제약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적당히 노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 놀궁리의 크기는 결국 그 정도였다. 거대한 규칙 안에서 애쓰는 조그만 변칙.
아쉬운 점은 가족만큼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봤어야 했는데 생각해보니 비슷하게 접근해버렸다는 것이었다. 맞벌이로 아내가 육아에 고생할 때도 종종 야근 핑계를 대고 혼자 놀았다. 아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외벌이가 된 후에는 이상한 보상심리로 피곤하다는 둥 미래를 구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둥 이유를 대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돌아보면 요령껏 놀 궁리가 선을 넘는 순간들이었다.
지난 주말에 아내와 가구박람회를 살펴보고, 다음날은 일이 있어 근교에 들렀다가 예전에 예매해둔 공연을 함께 봤다. 아내는 싫은 건 아니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주말내내 함께 붙어있으니 피곤하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 주위에 꼰대가 없으면 내가 바로 꼰대라더니, 아내입장에서 보면 내가 가족이라는 주어진 환경인 걸까? 지켜야 할 거대한 규칙 같은.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주어진 환경이라고 부를 것들이 점점 사라져간다. 망망대해가 펼쳐지는 중이다. 제약없이 마음껏 놀 궁리를 펼쳐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아이러니 한 것은 전에는 궁리의 사이즈가 작았는데, 이제는 궁리를 크게 할 의미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천천히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자고 생각한다. 그저 카페 같은 곳에 함께 가서 있으면서 각각 책을 읽고, 각각 핸드폰을 보고, 그러면서 중간중간 얘기를 나누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제는 각자에게 남아있는 주변의 기대치는 많지 않으니까. 서로의 기대치만 조금씩 맞춰가는 걸로.
오늘도 궁리를 한다. 이제는 둘이 함께 오랫동안 잘 놀 궁리.
그럼에도 아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계속해서 혼자 잘 노세요.
첫댓글 글을 고쳐야 하는데 고쳐야 하는데, 일주일 내내 어깨만 무겁다가 조금 늦게 고쳐서 올립니다.
*** 집 나간 주제. 흐름과 정돈. 척추 같은 키워드.
모두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것 같은데. 글로 옮기는 건 또 좀 다른 얘기네요.
고쳐 쓸 때마다 글이 하는 말이 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은 아마 내 생각이 그 순간까지도 아직 정리가 안 되었기 떄문.
그리고 착하디 착한 에세이가 나오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네요.
계속해서 생각을 하고 사유를 하는데 어떻게 착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모두 생각처럼 다 된다면 세상에 어려운 게 하나도 없겠죠. 그 마음 너무나 잘 압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사유를 하면 착한 에세이가 나온다기 보다,
좀 더 정돈된 명확한 문장들을 쓰기 위해 사유를 하는 거거든요.
사유의 목적이 철학적이라거나 무게가 있는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도 있겠지만,
우선 상황과 마음을 정확하게 쓰기 위해 거듭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세이가 착한 마음을 쓰는 장르는 아니에요.
다만, '글쓰기'라는 행위가 경험과 사람을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 보고, 그걸 정리하는 일이기에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좋은 사람이란 또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가능성을 만들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글을 쓰며 제가 가장 많이 달라진 건
좀 더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고쳐 쓸 때마다 말이 달라질 수 있어요. 말씀해 주신 것처럼 정리가 안 된 것도 맞고요.
그럴땐 고칠 수 있을 때까지 고치는 것이고요.
끝까지 정리가 안 되는 주제는 묵혀두고 더 시간을 들어야 되는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인규님이 이런 과정을 거치고 이렇게 생각이 든 것 자체가
너무 기쁩니다.
글쓰기의 고락을 느끼고 계신거예요^^
주제가 하나로 모아져 더 집중이 잘 됩니다. 놀고 싶어서 궁리하는 마음 크게 공감이 갑니다. 우리는 노년에도 잘 놀 수 있는 좋은 것을 이미 선택한 것 같습니다. 글쓰기... 더할 나위 없는 놀 거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