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김용순
“이대루 죽으면 워쩐다유? 나가서 뒷정리두 해야 하는디……·.” 팔순을 넘겼을 법한 할머니께서 회진하고 나가는 젊은 의사의 등 뒤에 대고 하는푸념이었다. 그러자 할머니의 이웃 병상에서 노인 하나가 의사에게 매달리는 푸념을 잘라버렸다. “정리할 게 뭐 있수. 가면 그만이지 뭐.” 듣고 보니 할머니에게는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다. 결혼하고 몇 달 지나서 집을 나간 남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6·25 전에 경비대에 들어가서 여태껏 소식이 없다. 차라리 전사통지서라도 받았더라면 체념하고 보훈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련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 행방불명이 되어 할머니를 평생 곤궁한 기다림 속에 가두는 것이다. 간호사가 와서 측정하는 할머니의 체온과 당뇨의 수치는 널뛰기였다. 그런 상태에도 입맛을 다시면서 00경로당 밥맛이 최고라는 말을 양념으로 섞었다. 그곳에서 점심 한 끼로 하루를 넘겨왔다고 했다. 침상에는 간호사만 몇 번 다녀갈 뿐, 문병 오는 이는 없었다. 한 번 떠난 뒤로 소식도 없는 남편에게서 얻은 아들마저 과분하다고 저세상으로 갔다니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일찌감치 새서방 찾아갈 일이지 무얼 바라고 이제까지 기다리셨어요?” 답답하여 불쑥 던진 내 말이었다. “오빠가 지키구 있는디 워딜 간다유? 그러고도 아들이 있었잖유?” 돌아오는 대답 또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보훈대상자로 신청하자 남편은 ‘행방불명자’라는 답변으로 그마저 거절당했다. 행방불명, 여러 개의 물음표가 매달린 답변이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라서 경비대에 있다가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추측도 안겨주고 경비대에 입대한 일이 없다는 말로도 들리고……·. 근거도 없고 증인도 없는데, 어떻게 유공자로 인정해 주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 나간 뒤로 편지 한 장 없었으니 무엇을 근거로 대며 군번도 없이 어느 골짜기에 묻혔을 테니 증인을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우리는 근거라는 장난꾼에게 우롱당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억지로 표정을 꾸며서 가짜를 진짜로 만드는가 하면 진짜를 가짜로 바꿔치기하는 게 근거라는 것 아닌가. 아무튼 할머니로서는 살아생전에, 그림자로 남은 남편을 유공자로 떳떳이 내놓고 싶을 것이다. 그것이 이날까지 목에 걸고 다닌 멍에이자, 죽기 전에 풀고 가야 할 숙제다. 잠을 못 이루고 뒤채는 할머니의 머리맡 창문에는 별이 촘촘히 들어와 박힌다. 모두가 진주알처럼 눈방울이 초롱초롱하다. 내가 증언해 주마고 나서는 그런 눈빛들이다. 잠도 안 오고 답답해서 창문을 여니 비단실 같은 바람이 목을 스친다. 고운 새싹이 한창 돋아날 때이다. 밤하늘의 별이 아니라고 해도 할머니가 기다리는 그분의 영혼에서 돋아난 새싹은 속삭이리라, 여기에 그 용사가 묻혀 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