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3-03
연 리 지 (連理枝)
박병민목사(새터공동체)
3월 초순의 어느 날, 바람 부는 언덕에 오르고 보니 옷을 엷게 입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눈앞에서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흔들거린다. 바람을 맞으며 언덕길을 따라 계속하여 산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나무에 잎이 돋으려면 아직도 한철 가까이는 더 보내어야 될 것같이 쌀쌀한데, 깊숙이 오르면 오를수록 다가드는, 그 사이가 비좁게 서있는 나무들은 점점 나를 가리워간다. 어떤 나무들은 넝쿨처럼 그것들끼리 서로 뒤엉킨 것들도 보인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저 먼 동네에 사는 홍형이 전하여주므로 다시 떠오르게된 “연리지(連理枝)”를 나무들 사이에서 연상해 보았다.
그 예전에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후한서(後漢書)》채옹전(蔡邕傳)이라는 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단다. 후한 말의 문인인 채옹(蔡邕)은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채옹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삼 년 동안 옷을 벗지 못하고 간호해드렸다. 마지막에 병세가 악화되자 백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 않고 보살피다가, 돌아가시자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함께 살았다. 그 후 옹의 방 앞에 나무 두 그루의 싹이 나더니 점점 자라서 가지가 서로 붙어 성장하더니, 나무 결이 이어져 마침내 한 그루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채옹의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와 자식이 한 몸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연리지(連理枝)는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으로 효성이 지극함을 나타내는 것을 비유한 말이었다. 그러다가 현재에는 남녀 사이, 혹은 부부애가 진한 것을 비유하여 말한다.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당의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뜨거운 사랑을 읊은 시 ‘장한가(長恨歌)’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次恨線線無絶期(차한선선무절기)
이 한은 끝없이 계속되네.
여기에서 비익조(比翼鳥)라는 새는 암컷과 수컷이 각각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서, 그 짝을 만나서 함께 하여야 만이 날수 있다는 새로써, 연리지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공동체(共同體)라는 말을 생각해본다. 말 그대로 “함께 하나인 몸”이라는 뜻이다. 공동체의 이상은 부부사이 일 것이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마태복음 9:15). 그리고 여럿이 함께 사는 말 그대로, 어떠한 공동체이다. 성서는 이것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같은 말을 공동번역성서에서는 더 드러나게 말한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시편 133:1). 연합(聯合)하여 동거(同居)함이 공동체이다.
공동체 이야기
자 립(自立) 혹은 자 활(自活)
말로만 전하여 듣고, 가까이 같은 군내(郡內)에 있는데도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 금산밀알의 집이 바로 그렇다. 나는 밀알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무슨 일을 하게되면 그 하는 일 이름에 “밀알”이라는 말을 넣었으면 했었다. 지금 생각하여보니 아주 작으나마 땅의 흙을 파고 그곳에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우리들이기에, 그 이름은 더욱 가깝게 와 닿는다. 어릴 때에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이 이웃에 살고 있다. 그 동창생의 부군(夫君)되시는 분은 내조를 받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일을 많이 하고 계신다. 면내 적십자사 일을 하시는 그 분께서는, 그 일의 일환으로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셨다. 그 모임에 밀알의 집과 우리 공동체의 사람들을 초청해주셨다. 그 곳에서 나는 십여 년 전에 만남이 있었던, 밀알의 집을 이끌어 가시는 전도사님을 다시 뵐 수 있었다. 그 다음 모임에는 비가 내리는 날이어서 집 밖의 모임을 가질 수 없었다. 밀알의 집에 가서 노래부르는 모임을 갖자고 전도사님께서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가볼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전도사님과 이야기 중에 나는 다음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들은 장애인들이 같이 살면서 각자가 하여야되는 집안 일들이 나름대로 정하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혹시 어느 누구라도 혼자서 지내게 될 경우 스스로 사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렇다. 자립(自立) 혹은 자활(自活)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 될 것이다.
이웃 인근에서 막 시작하게 되는 어느 기업체(企業體)의 이사님께서 이 선생님과 같이 우리 집에 들르셨다. 전후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거처 할 곳이 없으신 이 선생님을 그분이 전에 운영하던 공장건물에서 계시게 하셨지만, 지금의 장소에서는 계실 곳이 마땅하지 않아, 면사무소에 들려 도움을 구하였더니, 그곳에서 우리의 모임을 안내하여 주시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선생님은 우리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낮에는 1킬로미터 남짓 되는 그 작업장에 나아가 일을 하고 계신다. 나는 이사님에게서 명함(名銜)을 건네 받았다. 그런데 그 곳은 지을작(作)의 “작업장(作業場)”이 아니었다. “플라스틱분쇄업체 충청수지”라는 말과 뒷면에는 “사단법인 폐자원 재활용협의회”라고 쓰여져 있었다. 나는 그 명함의 말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곳은 플라스틱을 모아다가 파쇄하는 곳이었다. 옛날 얘기 중에 도공(陶工)이 잘못 만들어진 그릇을 망치로 사정없이 부서뜨리는 모습을 우리는 테레비에서 볼 수 있었지만, 요즈음처럼 소비가 극심한 세상에는 무엇인가를 짓고 만들어 가는 작업장(作業場) 뿐만이 아니라, 부스고 깨뜨려서 원료로 새롭게 재생하는 분쇄업(粉碎業)이 필요하구나하는 아이러니 한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도 인근에 있는 “만나”라는 제분업체에 우리 선생님들을 취업시켜보고자 애써본 때가 있었다. 그리고 걷기 운동을 하기 위하여 마을에 내려갔다가 어느 분을 만났다. 그 분께서 우리 집이 비어있는 어느 틈에, 집에 왔다 간 때가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단순한 일을 하고 있는 공장을 운영하시는 분인데, 그 일거리를 우리들에게 맡겨보고자 찾았었더라 는 이야기였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된다.
자립(自立)이나 자활(自活)은 우리 삶의 서서 걷기이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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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박영근
이헌철
박주홍
지명수
정무래
박종만
어귀녀
박병민.진선미.한솔.진솔
* 03년 2월 20일에 대한적십자금산군제원지구(회장:유상현)에서는 금산밀알의집. 새터공동체 그리고 이웃 장애인 여러분을 초대하여주셔서 점심식사와 그 후에 재미있는 모임의 시간을 가져주셨습니다. 군북교회(한성국목사)와 구상교회(홍성진목사)가 같이 하여 주셨으며, 이 모임을 매주 목요일에 갖기로 하였습니다. 3월 6일, 13일에 모임이 있었습니다.
* 03년 3월 3일에 제원교회 조종국 목사님과 논산의 대둔산 수락랜드의 도움으로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목욕을 하고, 점심식사를 같이하였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성남교회안수집사회.세상을아름답게만드는사람들(5인).박종덕(김광섭).예전교회.김기홍.어귀녀.정무래.세상을아름답게만드는사람들(2인).지명수.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0인).세광교회.대전노회.주식회사EG(이광형).만나교회(전남홍외5인).이헌철.대덕교회.박종만.진명구.채윤기(박현실).이건희.대전일보(김세원외1인).벧엘교회(3인).옥천동부교회.되살미사랑나눔봉사대(김장섭외2인).박세아.김중현.대덕교회(이중삼.정진일).금산읍교회(김철우외2인).그리스도의집.오정교회여전도회협의회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