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좌)관악산 정상 비석에서 시계종주팀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우)관악산에서 내려와 남태령로를 건너면 바로 남태령 옛길 비석이 나오며, 이 길로 우면산으로 접어든다.
- 안양천은 시흥 목감동 630고지에서 발원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개웅산과 굴봉산 등으로 둘러싸인 오류골은 현재의 오류동 외에 천왕동·궁동·온수동·항동 일대를 전부 포괄했다. 이곳의 명물은 참외였다고 한다. 오류골 참외는 조선시대 궁중의 진상품으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개웅산 정상은 해발 130m에 불과한 구릉산지다. 정상엔 정자가 있어 주변조망을 가능하게 했다. 목감천이 흐르는 한진아파트 방향이 시계와 일치한다. 그쪽으로 하산이다.
목감천(牧甘川)은 안양천의 제1지류로서 경기도 시흥시 목감동에 위치한 630고지 계곡에서 발원해 안양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상류지역은 경기도 시흥시와 광명시를 경계로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울시 경계에 이르러 광명시 철산동과 구로구 구로동이 만나는 지점에서 안양천과 합류해 한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다.
목감천 발원지 부근에 조선시대 목암사(牧岩寺)라는 사찰이 있었으며, 사찰 경내에 감나무의 개량품종인 단감나무가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을 목암사의 목(牧)자와 감나무의 감(甘)자를 따서 목감리라고 불렀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도 목감천이라고 부른 것으로 전한다.
광명교 아래 목감천으로 접어들었다. 목감천을 따라 무려 3㎞ 가량을 내려갔다. 그러나 이는 곧 다가올 안양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목감천 좌우로 별로 볼 것도 없다. 그냥 흐르는 하천을 보거나 땅을 보며 걸을 뿐이다. 한마디로 무미건조한 길이다.
이어 개명교를 지나고 개봉1자연방류수문을 지나쳐 한강 제1지류인 안양천으로 내려갔
다. 한때 이곳도 난지도와 마찬가지로 오염과 악취로 악명이 높았던 하천인데, 지금은 시민의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자전거도로와 좌우로 야생화·조팝나무·개나리 등을 가로수로 심어 지겹지 않게 조성했다.
- 안양천은 한강 지류 가운데 중랑천 다음으로 규모가 큰 하천이다.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산 계곡에서 발원한 안양천은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백운산에서 발원한 왕곡천, 수리산에서 발원한 수암천, 삼성산에서 발원한 삼성천 등과 합류해 한강으로 흘러든다.
안양천 유역은 상류로부터 경기도의 의왕·군포·안양·부천·광명시 등 5개 지자체를 거쳐 흘러 내려오며, 서울로 들어서는 금천·관악·동작·영등포·구로·강서·양천 등 7개 구를 지나가는 큰 물줄기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편에는 “대천(大川)이 현의 서쪽 4리에 있으며, 과천현의 관악산과 청계산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흘러 양천현의 철곶포(鐵串浦)로 흘러 들어간다”고 해 큰 하천이란 의미의 대천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과천현편에서는 “현의 남쪽 14리에 인덕원천이 있고, 현의 서쪽 19리에 학고개천(鶴古介川)이 있다”고 하여 안양천의 상류를 ‘인덕원천’, 중류를 ‘학고개천’으로 각기 명칭을 달리했다. <여지도서> 과천현편에서는 “안양천이 현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사근천(沙斤川)과 인덕원천(仁德院川)이 금천에서 합류해 흘러간다”고 기록돼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기탄(岐灘)’으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안양천은 ‘대천’ ‘학고개천’ ‘기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름만큼 긴 안양천을 따라 계속 걸었다. 안양천은 총 길이가 35㎞ 정도로 알려져 있다. 목감천 합류 지점에서 시작해 석수역까지 총 8㎞ 남짓을 하천과 주변을 보며 걸었다. 그날 종주는 그걸로 끝이었다. 거의 하천에서 시작해서 하천으로 끝난 7구간이었다. 하천으로 걸으니 유독 더 길게 느껴져 무지하게 걸은 느낌이었다.
- [ 8구간 ]
석수역~호암산~장군봉~삼성산~관악산~연주대~남태령~우면산~양재천~한국트럭터미널 21.2㎞
최근에는 한번 걸었다 하면 20㎞는 예사로 훌쩍 넘긴다.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에 구간을 종주할 때마다 첫인사로“오늘은 몇 킬로미터 정도 예상됩니까?”라고 묻는 게 정례화되다시피 했다. 그만큼 많이 걷는다는 얘기다.
이날은 기존 동행 멤버에 25시산악회 회원까지 합쳐서 종주를 시작할 때의 인원과 비슷한 21명이나 됐다. 출발부터 사람들로 북적북적했고 호암산·삼성산·관악산·우면산 등 4개의 산을 넘는다는 말에 다소 힘이 빠지는 듯했다. 그래도 걷는 게 일이다.
- ▲ (좌)우면산 등산로는 잘 닦여 있고, 숲도 우거져 각종 새소리에 딱따구리 나무 쪼는 소리까지 들린다.(우)둑 위로는 야생화와 가로수 등이 아름답게 정돈된 양재천을 서울시계종주팀이 걷고 있다.
- 석수역에서 오전 9시에 모이기로 했으나 많은 인원이 참석한 관계로 출발이 20분쯤 지연됐다. 석수역에서 내려 육교로 바로 1번 국도를 건너 호암산까지는 불과 1㎞ 정도밖에 안 됐다. 호암산 입구엔 등산안내판이 있어 등산로를 상세히 안내하고 있다.
산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제는 신록이 왔구나’를 직감할 수 있었다. 파릇파릇한 나뭇잎들이 등산로를 가득 덮었다. 보기만 해도 상큼한 세상이다.
호암산은 관악산의 끝봉우리에 속하는 산으로 봉우리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虎巖山)이라 불린다. 호암산과 관련된 일화는 조선 건국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복궁 건설 당시 호랑이 모습의 괴물이 궁궐 건설을 방해해 밤에만 나타나 건물을 무너뜨리자 그 남쪽의 산에 있는 호랑이를 제압하고자 시흥에 있던 호암사를 산 위로 옮겨 호압사(虎壓寺)라 고치고, 산 정상에 방화(防火)의 상징인 해치를 세우고 한우물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한우물 주변에 있는 호암산성은 통일신라시대 당군을 축출할 때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됐다고 한다.
마침 ‘뒷모습은 40대, 앞모습은 50대, 마음은 30대’인 65세의 전윤정 대장이 한 말씀 하신다.
“서울시계종주하면서 참 많이 배워요. 서울에 수십 년을 살면서 전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산을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됐고, 산과 관련된 역사도 많이 배웠어요.”
정말 마음이 젊은 분이다. 요즘도 매주 한두 번씩, 한 달에 최소 일고여덟 번씩 산에 간다
고 자랑한다.
- [ 서울시계(市界)종주 7·8구간 ]
- 서울 남서·남동쪽 하천·산 두루 섭렵
하천 따라 10여㎞, 산길로 20㎞…발원지 우물·유물 확인하며 걸어
- ▲ 1.서울시계종주팀이 비를 맞으며 안양천을 걷고 있다. 이날 안양천만 8㎞ 남짓 걸었다. 2.한우물 옆 50m 거리에 있는 석구상. 원래 경복궁의 방화를 목적으로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한우물 발굴 결과 석구지라는 비석이 나와 석구상으로 확인됐다. 3.우면산 등산로에도 호젓한 길이 많다.
- 호암산 ‘한우물’은 국가사적 제343호
호암산 정상 조금 못 미쳐 국가사적 제343호인 ‘한우물 및 주변 산성지’에 도착했다. 등산로 가는 길에 있는 사적지는 뒤늦게 발굴한 ‘제2 한우물과 옛건물터’라고 소개하고 있다.
연못에는 물도 없고 주변에는 성터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약 50m쯤 내려가니 통일신라시대 조성했다고 알려진 한우물 유적지가 나왔다.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신기한 연못이라고 한다. 이런 연못이 대개 하천이나 강의 발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복개돼 그 흔적을 찾기도 쉽지 않지만 한우물은 삼성천의 발원지다.
한우물 인근에는 돌해치가 있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우물과 함께 방화의 상징인 해치를 세움으로써 경복궁의 화기를 막았다고 한다.
1989년 서울대박물관에서 한우물과 호암산성 유적을 발굴할 때 우물에서 ‘석구지(石狗
池)’라는 새김글이 발견됨으로써 지금까지 해치로 알려졌던 석조물이 ‘돌개’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현재 이정표에도 석구상(石狗像)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 장군봉을 지나 장군능선을 따라 국기봉에 다다랐다. 지나가는 등산객은 깃대봉이라고도 했다. “관악산에는 봉우리에 국기가 꽂힌 봉우리만 12개나 된다”고 덧붙였다. 종주를 좋아하는 등산객들은 12개의 깃대봉을 찾아 완주하곤 한다.
국기봉을 지나 콘크리트 도로가 삼성산 정상까지 포장돼 있다. 삼성산 정상은 군부대와 군사시설로 접근금지 상태. 삼성산은 관악산 연주대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능선의 한 봉우리다. 즉 삼성산은 관악산의 한 지능선에 속하는 산이다.
삼성산은 신라의 고승인 원효·의상·윤필 세 대사가 산의 중턱 삼막사 부근에 초막을 짓고 수도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또 고려 말에 지공·나옹·무학 등 세 고승이 이 산에서 수도했다 하여 산 이름이 삼성산이 되었다고 한다. 삼막사는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가 중수해 서산·사명대사 등이 수도한 도량으로 유명하며, 삼막 중에서 일막과 이막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지금 삼막사만 남아 있다.
삼성산 정상 군사시설물에 조금 못 미쳐 왼쪽으로 빠지는 등산로가 관악산 본능선으로 가는 길이다. 이제부터 관악산 능선으로 올라탄 셈이다. 관악산은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솟구쳐올린 산이다.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 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옛 지도에 그냥 ‘관악’으로 많이 나온다. 악(岳) 자체가 산(山)을 뜻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산’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관악산은 옛날부터 개성 송악산(松岳山), 가평 화악산(華岳山), 파주 감악산(紺岳山), 포
천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도 오악(五岳)의 하나였다. 수십 개의 빼어난 봉우리와 바위,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어우러져 철 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했다. 관악산이 바위가 많고 골이 얕아 남성산이고 백호산이라 불리는 반면, 마주보는 청계산은 골이 깊은 여성산으로 청룡산이라 한다.
관악산은 남성산, 청계산은 여성산
관악산은 그 북쪽 기슭 낙성대에서 출생한 고려의 강감찬 장군과 관련한 전설도 많이 지니고 있다. 그가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 산을 오르다 칡덩굴에 걸려 넘어져 벼락방망이 대신 이 산의 칡을 모두 뿌리째 뽑아 없앴다는 전설도 있고, 작은 체구인 강감찬이지만 몸무게가 몹시 무거워 바위를 오르는 곳마다 발자국이 깊게 패었다는 전설도 있다.
관악산은 풍수로 보아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이다. 조선을 개국하고 왕궁터를 정하면서, 관악산을 정면으로 하면 궁성을 위압해 국가가 평안치 못하다는 무학대사와 남쪽에 한강이 있어 무방하다는 정도전의 주장이 양립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어쨌든 ‘불산’이라는 데는 의견을 같이했다고 한다.
- ▲ 관악산기상관측소.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반 관람을 허용한다.
- 그래서 불의 산인 관악산의 불기운을 끊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숭례문 바로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연못뿐 아니라 서울의 모든 성문 현판이 가로인 데 반해 숭례문은 세로로 되어 있다. 이는 이 불의 산에서 옮겨 붙을 서울의 화재를 막기 위해서였다. ‘예(禮)’는 오행의 ‘화(火)’가 되고, 또 오방(五方)으로 보면 ‘남(南)’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숭(崇)’은 불꽃이 타오를 상형문자이기에 ‘숭례(崇禮)’는 세로로 세워야 불이 타오를 수 있고, 또 타오르는 불을 막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관악산 주봉 연주대 직전에 관악산기상관측소가 있다. 매일 오전 11시에서 오후 4시까지 누구나 견학할 수 있다고 한다. 조금 더 가면 연주대 포토존이 나온다. 많은 등산객이 여기에서 연주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바로 앞에 보이는 연주대 암벽은 10여 개의 창을 모아 세워 놓은 듯한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다. 그 위로 아슬아슬하게 암자가 자라 잡고 있다. 고3 수험생 학부모들이 전국의 기도발 잘 받는 장소 중의 하나로 꼽는다. 학부모들이 수시로 합장하고 기도 올리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전철 사당역 방면으로 시경계를 따라 하산한다. 가는 길에 한반도 모양을 닮은 바위가 눈에 띈다. ‘지도바위’라고 이정표가 설명하고 있다.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관악산에는 남근바위, 독수리바위, 불꽃바위, 거북바위, 관음바위 등 온갖 형태의 바위가 있다. 정말 기암절벽의 화산을 실감케 하는 산이다.
남태령으로 내려섰다. 남태령로엔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왕복 8차선은 될 법하다. 서울 방향으로 조금 올라갔다가 횡단보도로 건너 우면산으로 들어갔다. 우면산 들목 직전에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과 과천시를 가리키는 안내판이 있고, 바로 옆에 커다란 남태령 비석이 서 있다.
“남태령 옛길은 한양에서 삼남(三南:충청·전라·경상도)으로 통하는 유일한 도보길이었다. 이곳을 지나 수원·안성을 거쳐 남쪽으로 갔으며, 반대로 과천에서 이 고개를 넘어 사당, 동작, 흑석동을 거쳐 노들나루(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에 이르렀다. 원래 이 고개는 여우고개(狐峴·호현)로 불리었는데,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능원으로 행차할 때 이 고개에서 쉬면서 고개 이름을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임금께 속된 이름을 아뢸 수 없어 남태령(남행할 때 첫 번째 나오는 큰 고개)이라 아뢴 이후 남태령이라 부르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남태령 비석에 있는 문구다. 이 비석을 지나 우면산 아늑한 등산로로 걸었다. 깔끔하게 단장한 등산로다.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가끔 눈에 띈다. 산악자전거 타기에도 딱 좋은 길이다.
우면산은 소가 졸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면산 북쪽 기슭에 있는 대성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 한반도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중국의 고승 마라난타가 주석한 터로 알려져 우리나라 불교 전래의 성지로 주목받고 있는 절이다.
서울시경계는 우면산 정상으로 향하지 않고 헬기장에서 오른쪽 양재천 방향으로 빠져 서초구 우면동 식유촌길로 내려온다. 단독주택단지를 지나 양재천으로 내려섰다. 양재천 진입 직전의 비닐하우스촌이 서울시 보금자리주택 건립 예정지라고 한다. 여기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상전벽해로 변화가 예정돼 있는 셈이다.
이젠 이날의 마지막 구간인 양재천으로 접어들었다. 양재천엔 청둥오리와 학이 자맥질을 하며 놀고 있다. ‘언제적 양재천인지’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그만큼 깨끗해진 것이다.
양재천은 관악산에서 발원한 물이 여러 개의 작은 지류와 만나고, 청계산에서 발원한 여의천과 합류해 탄천으로 흘러들어가는 한강의 제2지류다. 즉 한강의 제1지류가 탄천이고, 탄천의 제1지류가 양재천이다.
양재천(良才川)의 이름은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곳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휴식을 취한 후 먼 길을 떠난다 하여 지어진 말죽거리란 지명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원래 양재천에는 용 10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하늘로 승천하다가 그 중 1마리가 임신한 여자를 보고 놀라서 양재천에 떨어져 죽고 나머지 9마리만 하늘로 올라갔다 해서 양재동 옆산이 구룡산이 됐다고 전한다.
양재천을 지나 한국트럭터미널 주변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6시30분이 다 되어서였다. 호암산~삼성산~관악산~우면산을 거쳐 양재천까지 꼬박 9시간 이상을 걸었다. 힘든 종주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