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채마밭에 상추와 봄배추 모종을 냈다. 모종 다랑이를 일궈 퇴비를 뿌리고 들깨, 도라지 따위의 씨앗을 뿌릴 작은 이랑 다섯을 만들었다. 부드러운 흙이 곱게 단장을 한 가지런한 모습이 보기에도 좋다. 한나절의 일치고는 꽤 흔적을 남긴 셈이다.
시장기가 느껴졌다. 어느새 정오가 넘은 시각. 몇 차례 물을 마신 것 말고는 먹은 것이 없으니 어찌 출출하지 않을까. 무엇으로 점심을 할까?
집으로 오르는 길섶에 민들레가 눈에 띄었다. 아주 양지바른 길목의 민들레는 벌써 꽃을 피운 녀석도 있다. 짧은 꽃대를 올려 고운 햇살 아래 노란 꽃을 피워 올렸다. 큰 포기의 민들레는 아직 꽃대를 올리지는 않고 있다. 여린 잎새들이 제법 무성하다. 봄이 무척이나 늦게 찾아드는 외딴 산촌에도 봄의 빛깔과 기운이 가득하다.
그렇지. 오늘 점심은 비빔밥으로 하자. 야생의 나물 비빔밥. 오라, 야생초 비빔밥이 좋겠다. 농원의 여기저기에서 자라고 있는 풋것들로 비빔 거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아침에 해 놓은 밥이 있으니 그 위에 얹어 비빌 거리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 첫 번째 비빔 거리가 바로 민들레 잎새가 되는 것이다.
테마는 바로 민들레로 정해졌다. 민들레 야생초 비빔밥. 붕어빵이 어디 붕어가 있어서 붕어빵인가. 붕어처럼 생긴 모습만으로도 붕어빵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가. 화살촉같이 생긴 민들레 잎새가 오늘의 테마다. 여기에다가 몇 가지의 야생의 비빔 재료를 더하면 된다.
그리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도 않다. 우선 민들레 잎새 여남은 잎을 땄다. 하루가 다르게 통통해 지고 있는 달래를 지나칠 수 없다. 이 녀석은 두세 뿌리만 캐도 된다. 통통하게 살이 붙은 달래 뿌리에서는 야생의 자극적인 내음이 물씬하다. 옳지. 밭 가장자리 저만치에 있는 고들빼기의 잎도 서너 장 따서 넣어야겠다. 아마도 쌉싸래한 맛이 독특한 풍미를 가미해 줄 것이다. 여기에다 나물 밭에서 크고 있는 참취와 참나물 대여섯 장씩을 뜯어서 넣으면 나름대로 비빔밥의 구색도 맞추고 푸짐함도 한껏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차. 돌나물을 빠트릴 뻔했군. 돌나물 서너 줄기가 야생초 비빔밥 재료의 마지막 포인트가 됐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해. 아니 충분 그 이상이다.
자주 내린 봄비 덕분에 졸졸거리며 흐르는 도랑물에서 모다 한 움큼이 되는 나물들을 씻었다. 봄의 도랑물은 뼛속까지 차갑다. 물기를 머금은 나물들은 되살아난 듯 싱싱하다. 나물을 씻고 나서 얼어붙은 듯 차가워진 손을 말리며 언덕 위에 파릇하게 솟아오르고 있는 온갖 풀싹과 나무들의 새순들을 바라본다. 바구니에 담겨있는 것과 같은 것들 말고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화사한 봄빛에 저마다의 새로운 빛깔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새잎이 보송보송한 머위도, 제법 키를 키운 부추도 있다. 달래 대신에 넣으면 좋을 것 같은 두메부추의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예쁜 새잎 순을 올린 원추리, 나무 그늘 아래 무성하게 솟아오른 미나리냉이도 있다. 논 가 도랑에서 크고 있는 돌미나리도 좋지. 잎새의 크기가 아직은 조금 작은 곰취나 곤달비도 그만이다. 호미만 들면 바로 캘 수 있는 냉이도 있고 먹기에 마침맞은 개망초도 지천이다. 연둣빛 새 빛을 쏟아내고 있는 홑잎나무의 여린 잎도 넣지 말란 법이 있을까. 줄기를 밀쳐 올리기 시작한 싱아, 아직은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왕고들빼기, 어수리도 별미의 야생초 비빔밥 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들에서 자란 풋것들이 너무나 거칠다 싶으면 채마밭에서 키우고 있는 상추나 치커리와 같은 조금은 더 부드러운 것들을 섞어 넣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내일의 비빔 거리로 남겨두어도 될 듯싶다. 민들레, 달래, 고들빼기, 곤달비, 참나물, 돌나물. 이들만으로도 오늘 점심의 한 끼는 풍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 칼로 썰어서 부피를 줄였지만 그래도 큰 대접이 흘러넘쳤다. 밥은 조금이지만 푸짐한 야생의 푸성귀가 대접 가득하게 수북하다. 고추장과 들기름을 넣고 비비기 시작, 비빔밥의 참맛은 한데 비벼도 제각각의 맛이 되살아나는, 뒤섞어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어울림에 있지 않던가. 그래서 젓가락으로 비벼야 비빔밥의 제맛이 난다고들 하지. 그런데 조금은 거친 야생초들의 비빔밥은 숟가락이 아니고서는 그들을 다잡기가 여의치가 않다. 누군가의 앞에서는 새침을 떠는 올드미스도 비빔밥을 비빌 때면 무식하게도 큼직한 양푼 그릇에 숙녀의 매너를 파묻어 버리는지를 야생초 비빔밥을 비비면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큼직한 양푼 그릇이 아니고서는 이리 삐쭉 저리 삐죽 솟구쳐 오르는 거친 야생의 잎새들을 비비기가 쉽지 않다.
밥알이 드문드문 좀처럼 보이지 않는 야생초 비빔밥은 비빔밥이라기보다는 야생초 비빔이라고 해야 더 옳을 듯싶다. 하지만 그 맛은 어떨까. 온갖 것들이 한 데 뒤섞여서 각각의 향기와 풍미가 느껴진다. 퓨젼(Fusion)의 신비, 풋풋한 어울림의 향취, 보일 듯 말 듯, 잘 보이지 않는 숨김의 매력과 미학이라고나 할까. 언뜻언뜻 느껴지는 각각의 야생초들의 맛과 내음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함이다.
야생초 비빔밥의 백미는 그것을 먹는 중에서보다는 먹고 나서의 느낌이라고 해야 할 것만 같다. 개운하고도 상큼한 맛. 서로가 한데 어울려 풍겨낸 독특한 향내가 오랫동안 입안에 남아 있는 듯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배는 부른 느낌. 마치 한 잔의 고상한 차를 마신 기분이라고나 할까. 선식(仙食)을 한 듯 산뜻하다. 자연의 축복이 따로 없다. 자연을 곁에 두고 있는 산촌농원에서 새봄이 가져다주는 남다른 특권을 누린 것만 같다.
그런데 오늘 점심의 야생초 비빔밥은 그 운치가 실제의 맛보다는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즐겁지 못했기 때문이다. 눈을 즐겁게 만들면 한층 더 분위기를 띄울 수가 있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무엇인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렇지. 온갖 풋 내음이 물씬 풍기는 야생초 비빔밥에 샛노란 민들레 꽃 한 송이를 풀어 넣는 것이다. 아니면 언덕바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참꽃잎 몇 개를 비빔밥 위에 고명으로 얹는 것이다. 옥매화 분홍 꽃잎이나 자주색 제비꽃 두세 송이를 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옮겨심기하다가 남겨놓은 봄 도라지나 더덕 한 뿌리를 찢어 넣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게 금상첨화가 아니고 무엇일까?
이상은 20년 전쯤 『당신이 축복입니다』라는 월간잡지 2007년 5월호에 실었던 글입니다. 이맘때쯤이면 즐길 수 있는 이곳 산촌농원의 별식 하나에 관한 기록입니다. 산촌농원에서 시골살이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렇듯 채마 텃밭을 가꾸거나 야생의 먹거리 채취를 통해서 제철 음식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조달하는 가장 대표적인 제철 먹거리라고 하면 이곳에서 손수 재배한 고추, 배추와 무 따위로 담그는 김장입니다. 그 이듬해 봄까지 먹는 필수 먹거리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봄부터 이어지는 이곳 제철 음식의 종류는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가장 먼저 가장 먼저 봄나물을 선사하는 냉이 된장국이나 냉이 파스타를 시작으로 겨울을 난 시금치로 만드는 김밥, 쪽파 파전을 만들어 먹을 수 있습니다. 나물로는 가장 먼저 솟아오르는 산마늘(명이나물) 장아찌를 담그고 곧이어 채취할 수 있는 눈개승마, 섬쑥부쟁이(부지깽이나물), 고사리, 그리고 참취와 곰취 따위는 산채(山菜)로 바로 먹을 수도 묵나물로도 만들어 이듬해 정월 대보름에 나물밥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습니다. 두릅과 엄나무 순도 그 향미가 독특한 야생의 먹거리입니다.
4월과 10월에는 표고덮밥, 6월 말 감자 철에는 등심 스테이크의 호사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7월부터는 찐 옥수수는 물론이고 방울토마토와 오이, 상추, 블루베리 따위를 섞어서 만드는 그리크 샐러드(Greek Salad)를 즐길 수 있습니다. 한여름철에는 주먹토마토로 토마토 파스타를, 피망과 파프리카 등로 채소 덮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습니다.
철을 이어 나무나 줄기에 달리는 땅딸기, 앵두, 오디, 복분자딸기, 매실, 자두, 살구, 보리수, 개복숭아와 복숭아, 블랙쵸크베리(아로니아), 체리, 산포도와 머루 포도, 알프스오토메와 루비에스 등의 미니사과, 황금배, 꽃사과와 아그배, 모과 따위의 것들을 채취할 수 있습니다. 하기야 이것들 이외에도 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연이 주는 귀한 먹거리입니다. 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025.4.19.)
첫댓글 순우 농원을 보니 삶의 훈훈함과
넉넉함을 물씬 느낌니다.
각박한 도시생활과는 확연히
다르고요
맑은 공기 흠뻑 마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산야초 비빔밥'이 봄날에 정말 어울리는 글입니다. 나래실 편지로 보내 주는 순우님의 글 항상 감동을 줍니다. 다시 나래실의 편지를 기다려 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