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정공파의 "충북 괴산(槐山)" 시거(時居) 유래》
※ 의성김씨 괴정공파 "가례의절(김상근 저)" 참조
1519년(중종 14)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연루된 기묘사화로 인하여 대평(大坪) 송지촌(松旨村 : 지금의 합천군 대병면 성리)으로 경남 합천(陜川)에 거주하던 17세 윤우(允祐) 선조의 장남(長男) 관일(寬一) 선조는 후사 없이 절손(絶孫)되었다 윤우(允祐) 선조는 남해안에 왜구(倭寇)의 노략질이 심하고, 민심이 불안해짐에 따라 차남(次男)인 덕일(德一)선조로 하여금 이를 피해 선영(先榮)이 있는 경기도 파주(坡州)로 가도록 하셨는바 , 덕일(德一)선조는 조모(祖母) 명주최씨(明州崔氏) 및 외조부모(外祖父母)와 함께, 파주(坡州)로 이동하던중 조모 명주최씨(明州崔氏)의 득병(得病)으로, 목적지인 경기도 파주(坡州)까지 가지 못하고 충북 괴산(槐山)에서 시거(時居)하게 되었다. 또한 외조부모(外祖父母)께서 후사(後嗣)가 없이 세상을 뜨자, 충북 괴산군 문일광면 송평리 학령에 있는 16세 전(巓)선조의 묘소 우측에 안장하고 지금도 후손들은 전(巓)선조의 봉향(奉亨)시 함께 봉향(奉亨)하고 있으며, 괴정공파 장손(長孫)인 덕일(德一)선조의 후손(後孫)들은,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白雲), 괴산군 문광면 침곡(針谷), 원기(院基), 옥성(玉城)등지에 집성촌을 형성하며 거주하고 있다.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白雲門中) 외사리는 자연부락명 "배원"이라고 불리웠으며, 한자로는 "백운(白雲)"이라고 쓰고, 의성김씨 집성촌으로 이곳에 사는 김씨들의 문중을 "의성김씨 괴정공파 백운문중(白雲門中)"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이 곳에 "산막이 옛길"이 생겨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마을의 주민 대부분이 "의성김씨(義城金氏) 괴정공(槐亭公)파" 문중(門中) 구성원으로 조선 태종(太宗)17년(1417), 정유(丁酉)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3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수문전직제학(修文殿直提學),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 인천지군사(仁川知郡事)를 지냈으며, 세조(世祖)1년(1455년)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된 14세 괴정공(槐亭公) 숙검(叔儉)의 후손이다.
괴정공(槐亭公) 숙검(叔儉)은 고려말(高麗末) 계림윤, 밀직부사, 경상도도순문사겸 합포원수를 지내고 경상도 합천 삼가현(三嘉縣)에서 왜구 토벌중 전사한 공민왕12년(1363년) 봉익대부순성보리공신(奉翊大夫純誠輔理功臣) 2등에 녹훈된 12세 남파공(南坡公) 광부(光富)의 손자이다. 백운문중의 대외적인 파명(派名)은 “의성김씨 괴정공(槐亭公)파"이고, 9세 첨사공(詹事公/용비龍庇), 12세 남파공(南坡公/광부光富), 14세 괴정공(槐亭公/숙검叔儉)선조의 후손(後孫)으로서, 9세 기준으로 "첨사공(詹事公)파"이며 12세 기준 남파공(南坡公)파, 14세 기준으로는 괴정공(槐亭公)파에 속한다. 괴산의 집성촌중 문광면 양곡리의 "침곡(바느실)문중"과 함께 가장 번성했던 이곳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1970년대만 하더라도 100여호가 넘는 문중(門中)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그 절반도 안되는 정도가 거주한다.
白雲 義城金氏 世居地(백운 의성김씨 세거지)
(註) 鳳棲齋重修記(봉서재중수기)에 의하면 진사공 휘 克禮(극례)의 둘째 아들 휘 八及(팔급:1581~1673)선조와 참봉 휘 克孝(극효)의 셋째 아들 八垓(팔해:1627~1697)선조가 시거하였다. 봉서재는 영조45년 기축년(1769)에 건축하였으며 2001년부터 2002년에 걸쳐 괴산군청에서중수하고 2003년 3월 충청북도 문화재 21호로 지정되었다.
이 마을은 괴산읍에서 동으로 약 삼십리 떨어진 君子山(군자산)을 案山(안산)으로 하고 저멀리 속리산을 근원으로 유유히 흐르는 달천강을 가운데 두고 강 서쪽으로 본래의 洞名(동명)은 봄이오면 배꽃이 만발하여 향기가 가득한 배원(梨園)이라고 하였다. 후일에 배꽃이 흰구름처럼순결함을 표현하여 白雲(백운)이라고 하였으며 1910년 이전에는 괴산군 東面(동면)소재지 역할도 하고 義城金氏(의성김씨) 백여호의 집성촌이며 西北(서북)쪽으로 봄이면 梧桐(오동)나무향기 가득한 양지 바른쪽 豊山沈氏(풍산심씨) 집성촌인 오향골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강 동쪽에는신라때 三省寺(삼성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절터와 지방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는당간지주만 있을뿐 국보급의 십오층 석탑은 일제때 강제로 반출되어 현재 소재도 묘연하며 이곳을 삼성동이라고 하고 또한 이곳에 원(국영숙소)이 있었다고 하여 下院里(하원리)라고도 하였다.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白雲(백운), 梧香(오향)골, 三省(삼성)마을을 합쳐 外沙里(외사리)라고하며 근래 행정부락단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西紀一九九四年 甲戌 流頭日 建立(서기일구구사년 갑술 유두일 건립)
의성김씨(義城(金氏) 400년 세거지(世居地)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白雲(일명:배원)門中"의 입향조는 의성김씨 19世 승사랑(承仕郞) 기남(起南)선조의 長子인 20世 진사공(進士公)극예(克禮)선조의 第二子 21世 장사랑(將仕郞) 팔급(八及) 선조와 20世 극효(克孝)의 第三子 21世 참판공 팔해(八垓)선조 이시다. 지금부터 약 400년전 조선(朝鮮) 광해(光海)2년(서기1610년)경에 진사공(進士公)극예(克禮)선조께서 거주하시는 괴산군 문광면 침곡(바느실)에서 극예(克禮)선조의 第二子 21世 장사랑(將仕郞) 팔급(八及)선조께서 먼저 이주하고, 후에 극효(克孝)의 第三子 21世 참판공 팔해(八垓)선조께서 이곳 배원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 입향조의 생몰연대(四寸之間) 21世 장사랑(將仕郞) 팔급(八及) :生 신사년(1581년) ~ 卒 계축년(1673년) 21世 참판공 팔해(八垓) : 生 정묘년(1627년) ~ 卒 정축년(1697년) 팔급(八及) 선조는 시조 의성군(義城君) 석(錫)의 20代 孫이며 9世 첨사공(詹事公) 용비(龍庇)의 12代孫으로 용비(龍庇)의 네 아들중 셋째인 10世 찬성공(贊成公) 英(영) 선조가 직계(直系) 선조이다. 12世 남파공(南坡公) 광부(光富)-13世 석포공(石圃公) 로(路)-14世 괴정공(槐亭公) 숙검(叔儉)-15世 부사공(府使公/月山) 안중(安中)의 6代孫 이다. 장사랑공(將仕郞公)의 묘소는 충북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점석(차돌배기)에 모셔져 있다. 팔급(八及) 선조는 상노(尙老), 첨추공 석로(碩老), 동로(東老), 율재공 명로(命老) 4 형제를 두었다 또한 백운종중(白雲宗中)의 구성원인 20새 第二子 옥이재공(玉怡齋公) 극효(克孝)선조의 第三子 21世 팔해(八垓)선조도 비슷한 시기에 입향한것으로 보이며, 후사가 없던 팔해(八垓)선조의 第四子 22世 성로(星老)선조의 아들로, 진사공(進士公)극예(克禮)-팔급(八及)- 명로(命老)선조의 셋째 아들(필항/必恒)이 양자 나갔으며, 또한 20世 통덕랑공(通德郞公) 극항(克恒)선조의 주손(胄孫), 역시 진사공(進士公) 극예(克禮)-팔급(八及)- 명로(命老)선조의 손자(태빈/泰彬)가 대를 이어 "백운문중"의 일원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서재 (鳳棲齋) 봉서재는 일명 백운서당(白雲書堂)으로 불리는데 현대식 초등교육이 자리잡기 전까지 주변지역의 어린이들을 위한 서당으로 사용되었다.
서당은 조선시대에 초등교육기관으로 관학(官學)이 없었기 때문에 한자(漢字)와 초급한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사학이다. 서당에서는 보통 『천자문류합(千字文類合)』같은 한자교습에서 시작하여 『동몽선습(童蒙先習)』과 『소학(小學)』을 거쳐 4서3경(四書三經)을 가르쳤으며 훈장(訓長)의 실력에 따라서는 그 수준을 더 높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일정한 수준을 배우면 더 좋은 스승을 찾아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으로 가서 배웠다.
봉서재는 조선 정조 2년(1778)에 조선 홍문관직제학( 弘文館直提學)을 지낸 의성김씨 김전(金巓)의 사우로 처음 창건된 것으로 전하며, 1915년 중수되었다. 건물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기와집으로 홑처마 팔작집이다.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 양측에 방을 두었다. 1999년 건물과 기단,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현재는 방학철을 이용한 한자교육과 의성김씨종중의 제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槐山 陽谷 義城金氏 世居碑(괴산 양곡 의성김씨 세거비)"
義城金氏 世居地 槐山郡 文光面 陽谷里(針谷)는 莊子先生이 살았다고 口傳되어오는 의성김씨 세거지 괴산군 문광면 양곡리(침곡)는 장자선생이 살았다고 구전되어오는
莊子峯下에 約五百年을 宗族의 歷史와 傳統을 脈脈히 이어오고 있다 入鄕祖 장자봉하에 약오백년을 종족의 역사와 전통을 맥맥히 이어오고 있다 입향조
諱 德一(副司直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는 乙卯士禍(一五一九年)의 政亂時 陜川으로 휘 덕일(부사직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는 을묘사화(일오일구년)의 정란시 합천으로
移住하셨다가 坡州先塋을 守護次 祖母 淑夫人 明州崔氏의 등에 엎혀 이곳을 經由中 이주하셨다가 파주선영을 수호차 조모 숙부인 명주최씨의 등에 엎혀 이곳을 경유중
祖母의 得病으로 因하여 始居하였다. 光海君 丙辰年 卒하시니 墓는 이곳 鷹幕嶺에 조모의 득병으로 인하여 시거하였다. 광해군 병진년 졸하시니 묘는 이곳 응막령에
모셔졌다. 新羅 敬順王 第四子 諱錫(義城君)은 公의 十七代祖요 諱 龍庇(高麗 金紫 모셔졌다. 신라 경순왕 제사자 휘석(의성군)은 공의 십칠대조요 휘 용비(고려 금자
光祿大夫 太子詹事)는 九代祖이며 諱光富(南坡公 高麗兵部尙書)는 六代祖이고 諱路 광록대부 태자첨사)는 구대조이며 휘광부(남파공 고려병부상서)는 육대조이고 휘로
(石圃公 文科 司農卿 贈戶曹判書)는 五代祖인데 李太祖 革命後 吏曹參議 除授를 (석포공 문과 사농경 증호조판서)는 오대조인데 이태조 혁명후 이조참의 제수를
屢次不應하고 忠臣不事二君의 氣槪와 淸操를 지키어 坡州 交河에 隱居하셨다. 누차불응하고 충신불사이군의 기개와 청조를 지키어 파주 교하에 은거하셨다.
高祖 諱叔儉(槐亭公)은 甲科登第 直提學에 이르고 曾祖 諱安中(月山公)은 고조 휘숙검(괴정공)은 갑과등제 직제학에 이르고 증조 휘안중(월산공)은
仁川都護府使요 祖考 諱巓(松亭公)은 甲科登第 弘文館直提學에 이르셨다. 인천도호부사요 조고 휘전(송정공)은 갑과등제 홍문관직제학에 이르셨다.
先考 諱允佑는 折衝將軍 行義興衛 大護軍이며 公의 子 諱起南(承仕郞)의 長子 선고 휘윤우는 절충장군 행의흥위 대호군이며 공의 자 휘기남(승사랑)의 장자
諱克禮는 進士요 次子 諱克孝는 將仕郞 贈刑曹參議요 三子 諱克和는 文科及第 휘극예는 진사요 차자 휘극효는 장사랑 증형조참의요 삼자 휘극화는 문과급제
正郞이고 四子 諱克厚는 修義副尉며 五子 諱克恒은 通德郞이시다. 정랑이고 사자 휘극후는 수의부위며 오자 휘극항은 통덕랑이시다.
以後 祖上의 蔭德과 士大夫家門의 곧은 氣象으로 代代孫孫 學問과 孝行을 繼承하여 이후 조상의 음덕과 사대부가문의 곧은 기상으로 대대손손 학문과 효행을 계승하여
오늘날 七星外沙里를 비롯 京鄕各地에 子孫이 繁昌하고 있으며 再選된 金煥黙 오늘날 칠성외사리를 비롯 경향각지에 자손이 번창하고 있으며 재선된 김환묵
槐山郡守는 地域民의 두터운 信賴를 얻고 있다. 最近 半世紀에 數十名의 碩博士를 괴산군수는 지역민의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다. 최근 반세기에 수십명의 석박사를
輩出하여 學問探究와 素質啓發로 各界各層에서 卓越한 能力發揮로 이웃의 龜鑑이 배출하여 학문탐구와 소질계발로 각계각층에서 탁월한 능력발휘로 이웃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제 宗中의 衆志로 碑를 세워 子孫萬代에 繁昌하기를 懇切히 祈願한다. 되고 있다. 이제 종중의 중지로 비를 세워 자손만대에 번창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一九九九年 四月 日 竪 後孫 金煥哲 謹撰 後孫 金文洙 謹書 천구백구십구년 사월 일 수 후손 김환철 근찬 후손 김문수 근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