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로이츠나에(Robinson Kreutznaer). 다니엘 디포(1660~1731)가 쉰아홉 살이던 1719년에 쓴 소설 『로빈슨 크루소』 주인공의 원래 이름이다. 디포는 소설 첫 머리에 크루소의 원래 성이 ‘십자군에 참가한다’는 뜻의 ‘크로이츠나에’라고 밝혀, 양가집에서 태어난 로빈슨이 영적인 여행을 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눈길을 100년 앞으로 돌려 조선을 보면 『홍길동전』을 만날 수 있다. 許筠(허균, 1569~1618)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홍길동전』은 적, 서자 신분차별을 고발하며 율도국을 정벌해 이상정치를 편다는 것이 골자다.
중세에서 근세로, 근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멀리 떨어진 영국과 한국에서 등장한 두 편의 소설은 당시 독자들에 높은 인기를 끌었다. 로빈슨은 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을 이룩한 전형적 영국인의 모습을 하고, 홍길동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휼하는 의협심을 발휘한 덕분일 것이다.
◆‘모험과 실패=성공의 어머니’ 가르치는 『로빈슨 크루소』
먼저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여행을 따라가 보자.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요크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기이하고 놀라운 생애와 모험(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 Mariner)’이다. 제목 자체에서 ‘이상한 모험’을 예상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알렉산더 셀커크(Selkirk)라는 스코틀랜드 선원이 칠레 앞바다에 있는 후안페르난데스 제도의 한 무인도에서 4년 동안 표류했던 실화를 바탕에 깔고 있다. 무역업을 하다 파산해 감옥까지 갔다 온 디포는 셀커크 이야기와 산업혁명을 앞두고 식민지 개척에 적극 나섰던 당시 상황을 엮어 출세작을 만들었다.
중류 가정에서 태어난 로빈슨은 안정된 생활을 하라는 아버지 말을 어기고 가출해 선원이 됐다. 아프리카 연안에서 무어인에게 붙들려 노예가 되지만, 탈출해 브라질 농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고 흑인 노예를 구하러 아프리카로 간다. “나는 내 첫 번째 화물 값의 네 배 넘는 돈을 벌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성공과 번영이란 오용하면 종종 크나큰 역경의 원인이 되는 법이다. … 사업이 번창하고 재산이 불자 내 머리는 또다시 감당할 수 없는 사업 구상과 계획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사업의 명수들조차 빈번하게 파산하게 만드는 그런 계획들 말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말이 씨가 됐는지 아프리카로 가는 도중 배가 난파해 혼자 무인도로 쓸려갔다. 태양 위치로 볼 때 자신이 있는 곳이 ‘북위 9도22분’쯤 되는 곳이라 여기며 장장 28년 2개월19일을 지냈다. 섬을 떠나 35년 만에 영국에 돌아와 고향에 가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다른 가족도 두 누이와 형님 한분의 자식 두 명을 빼놓고는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것으로 여겨져 남겨진 유산도 하나 없었다. 하지만 로빈슨의 모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우연하게 목숨을 구해준 선장의 도움으로 다시 재기해 큰돈을 번 뒤 인도와 중국으로 다시 모험을 떠난다.
◆도적 두목과 ‘정복왕’이 된 서자 홍길동
로빈슨이 현재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실패를 각오하면서 집을 나가 모험을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홍길동도 가출을 한다. 하지만 길동의 가출은 조선의 엄격한 적, 서자 차별이란 신분제 벽에 좌절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가출한 로빈슨과 다르다.
상황은 이렇다. 세종 즉위 15년 되던 해, 재상 홍문이 잠깐 낮잠을 자다 용꿈을 꾸었다. 태몽임을 직감한 그는 대낮에 안채에 가서 정실부인에게 달려들었다가 점잖치 못하다는 핀잔을 듣고 돌아 나왔다. 그때 마침 몸종 춘섬과 마주쳤다. 그렇게 吉童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서자로 태어났다.
가출한 이유가 다르듯 가출한 뒤 행적도 달랐다. 신분제의 멍에를 떼어낼 수 없었던 길동은 집을 나와 도적의 두목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을 살린다’는 活貧黨(활빈당)이라 불렀지만, 도적은 도적이었다. 나라에서 체포령이 내려지고, 아버지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자 축지법 둔갑술 분신술 등을 동원해 포도대장 이업을 혼내주고, 임금에게 병조판서 벼슬과 벼 삼천 석을 받아 도적 삼천 명을 이끌고 망망대해에 떠있는 제도로 떠난다.
가출과 무인도 생활 뒤의 결말도 비교된다. 로빈슨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길동은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뒷날 제도 부근에 있는 평화로운 율도국을 점령한 뒤 스스로 왕이 되었다. 신분차별 없는 태평세대로 다스리다 일흔 둘에 왕위를 큰아들에게 물려주고 일봉산에서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羽化登仙, 우화등선) 하늘로 올라갔다.
◆같은 듯 다른 로빈슨과 길동
로빈슨은 무인도에 혼자 낙오된 뒤 좌절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삶을 개척한다. 칼로 나무에 날자를 기록하고, 염소를 사냥해 길들이며, 안전을 위한 방벽을 만들었다. 보리 이삭을 발견해 농사를 지으면서, 성경 읽기로 마음을 다스리는 ‘근대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도구를 다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과 근면과 창의력에 의해, 특히 도구만 있으면 원하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로빈슨의 이런 정신과 생활태도가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는 게 크게 기여했다고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시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홍길동은 허전함을 남긴다.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바꾸려는 의지와 실천이 보이기는 하지만, 전면대결이라기보다 한발 비껴나 있다. 스토리의 중심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SF영화 같은 홍길동의 異蹟에 놓여 있다. 이는 허균이 역적모의 혐의로 능지처참 당한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홍길동전』과 『로빈슨 크루소』는 300~400년이 흐른 지금에도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밝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실패를 각오하고 모험하도록 하기보다 온실 속에서 생명력 떨어지는 화초로 남으라고 부추기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이다.
모험은 보다 나은 것을 찾도록 긍정적 비교를 함으로써 함께 잘사는 긍정적 되먹임(Feedback)의 패치워크(짜깁기, 접붙이기)를 가능하게 한다. 반면 온실 속 화초는 나보다 나은 사람을 질투하는 부정적 비교로 불행을 초래하는 되먹임으로 충돌과 공멸로 이어진다. 『홍길동전』과 『로빈슨 크루소』를 비교하며,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발전하려고 하는 진취적인 사람, 황량한 환경에서도 노력과 근면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아가는 자세를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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