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국연(國聯)과 한국독립문제 12월 3일
미국 뉴욕 타임즈 통신은 호주대표 제한(制限) 승인론을 반대하되 유엔이 남한정부를 전국을 대표하는 정부로 승인하느냐 또는 부분적으로 승인하느냐 함에는 위험한 사능심(事能心)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고로 미국은 남한정부를 한국정부로 공인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하여 12월 2일 발 통신은 한국문제는 명춘 2월 뉴욕에서 열리는 총회에 상정될 것같다하고 우리 위원단의 1인인 김활란박사가 이대통령에 보낸 보고에도 연기설(延期說)이 있다.
유엔위원들의 감시 하에 투표하여 국회를 조각하고 법적으로 국회로 승인까지 하였으며 이제 북한은 유엔 감시와 투표를 거절하고 단독 소련지원 하에 북한정부를 세워 비법(非法)으로 만들어 놓고 법적으로 된 남한정부를 반대하니 국제에 합의가 어디 있는가 의심스럽다.
미국은 다시 모든 문제를 12월 11일까지 토의하고 12일에 휴회하기를 제의하였고 또다시 소총회 존속여부를 토론하여 소련 블럭 6개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년간 더 연장하기로 미안(美案)이 가결되고 또 한국문제는 북한에도 유엔 감시 하에 선거를 실시하여 이북대표도 요청하자하고 남북을 통일케 함이 한국평화뿐 아니라 문득 세계평화를 위함이라 하여 한국문제를 미연시킴은 천만부당하며 만일 미연 된다면 유엔 한국위원들의 한일이 다 말살 될 것이라고 주장한고로 유엔에서는 1947년 11월 14일에 우리 국회를 인정하였고 1948년 1월 26일 소총회의 결의도 있어 우리 국회가 합당한 국회이며 우리 정부가 정당한 정부로 인정되었고 동 10월 13일에 한국 유엔 위원단이 총회 제출된 보고서도 다 확실한 증거이거늘 어찌하여 한국문제를 상정치 않고 미연 혹 연기라 함은 유엔 위신상 불가하다 아니할 수 없다고 여론이 많다.
동 5일 파리 통신에는 대국(大國)의 거부권행사를 제한하자는 영미불중(英美佛中)의 제안은 접수되었다 하여 또 동 6일에 한국문제가 드디어 상정되었다는 장면 씨의 공전(公電)이 왔다. 7일 발 파리통신은 소련 휘하에 있는 북한정권을 승인하자는 소련 제안이 부결되고 따라서 북한정권을 재청하자는 제안도 31대 6으로 부결 되였다고 동 안에 찬성투표한 나라는 체코슬로바키아 등 국이다.
그 다음 정위(政委)에서 미군점령지에서 권한 있는 대한민국대표들을 회의에 참석케 하자는 미중호(美中號) 삼국대표의 제안이 39대 6으로 가결 되였다. 그리고 한국정부 부인행동은 유엔에 대한 치욕이라고 뉴질랜드 대표가 소(蘇)의 불룸을 통전하였다. 현재 극동정세가 커다란 변천과 곤란을 야기 시키고 있다는 미대표 멜레스 씨의 보고에 인하여 드디어 한국문제를 토의하기로 결정하였고 영국대표도 대 소(蘇) 공격을 여(如)하였다.
금 6일에 미중호(美中濠) 삼국대표는 5개조의 사항을 00하여 유엔정위(政委)에 제출하였는데 여하
1. 유엔한국위원단의 보고를 접수할 것
2. 대한민국 정부를 전 한국정부로 인정할 것.
3 한국소규모의 국방군을 구성하여 외군을 철퇴케 하고 남북을 통일케 할 것.
4. 국군에 별(別) 유사한 군사단체를 해체할 것.
5 외군의 철수는 대 한국위원단과 대한민국 정부협조 하에 가급적 속히 실시할 것을 제의하였고 또 장면(張勉) 위인(委人)은 정위(政委)에 변권(辯權)을 얻어 일장(一場)의 한국 사정을 통론하였고 중위원(中委員) 유(劉)경락 씨도 한국선거공정을 말하였다.
또 이어서 미중호(美中濠) 3국 대표는 한국에 대한 공작으로 가급적 속히 미소양군 철수시키기 하여 새로운 한국위원단을 설치하자고 공동제안으로 정위(政委)에 제출함으로 정위에서는 차를 수리하고 투표한 결과 39대 6으로 가결된 후 동위원회에서 소련 점령하 북한대표도 초청하자는 소련 제안은 34대6으로 부결되고 신한위원단은 금월 30일 내로 한국으로 출발예정
8일 하오 유엔 총회 정치위원회는 남한의 대한민국정부를 정식 정부로 승인하고 한국의 통일을 위하여 활동하는 새로운 유엔한국위원단을 구성하자는 미중호(美中號) 3국 결의안을 41대 6으로 가결되고 한편 동정치위원회에 유엔 신한위(新韓位)를 즉시 폐지하자는 소련 제안을 42대 6으로 부결 되였다. 유엔 가입 정식신청은 이대통령이 장면위인(張勉委人)에게 훈령하고 신한위 지명한 나라는 호백중불인비토(濠白中佛印比土) 등이다.
이 길보를 받은 남한 각지에서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높이 게양하고 감격에 넘치는 웃음과 노래로 가득하였다. 그리고 금 12일에 다시 유엔총회로 모여 또 한국문제를 토의한 결과 정위의 제출된 한국승인결의안은 토의하여 48대6으로 가결되고 한위승인반대인 소련제안도 46대6으로 부결되고 총회는 동일 오후 5시에 폐회하니 곧 12월 12일이다. 신한위원단 1949 1월에 도착되었고 또 1949년 4월 5일에 다시 뉴욕에서 개회하고 거부권 문제와 이(伊) 식민지 등을 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