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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파랑새로 알았던 악어 다루기>의 줄거리:
벨기에의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동화극 <파랑새 L’Oiseau Bleu(1909)>로부터 유래하여 '파랑새'는 행복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이 극 속에서, 행복은 먼 곳이 아니라 늘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상징적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목말라하는 행복감을 가까운 곳이라고 해서 과연 느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우리가 주체인 한, 파랑새인줄 알고 추구하는 행복이 실은 악어라고 말이지요.
파랑새로 알았던 악어 다루기
(욥기 41:1~34)
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2.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3. 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하여 간청하겠느냐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4.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5. 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
6. 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
7.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
8.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
9.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파랑새로 알았던 악어 다루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파랑새로 알았던 악어 다루기’
1909년 벨기에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며 수필가였던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파랑새”라는 동화극을 썼습니다. 이 파랑새에 나오는 두 주인공 틸틸과 미틸 남매는 꿈속에 나타난 요술쟁이 할머니의 부탁을 받고 집을 나섭니다. 할머니의 아픈 딸을 위해서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남매는 요술쟁이 할머니가 준 신비한 다이아몬드 모자를 쓰고 기억의 나라도 가고 밤의 궁전에도 가고 온갖 신비한 곳들을 헤매었지만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합니다. 기나긴 꿈속 여행을 끝내고 잠에서 깨어난 남매는 파랑새가 결국 집안의 새장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행복은 막연한 미래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지금 존재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가까운 곳에서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이 찾아질까요? 행복을 상징하는 파랑새를 쫓는 행위에 빗대어 파랑새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지금 현재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신이 진정으로 잘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다른 일이 주어져도 또 다른 일이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직업을 바꾸어가는 심리적 상태를 파랑새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반대는 곧 지금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수로 지금 행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감은 지금 느끼는 것이지만 지금에 머문다고 해서 행복이 찾아지지는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오늘 본문이 바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파랑새로 상징하는 행복을 우리는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행복의 파랑새를 악어로 보고 계십니다. 본문에 리워야단이 언급되는데 악어를 일컫습니다. 좀 더 분명하게 의미를 살리자면 내가 주체가 되어서 찾으려는 행복의 주체는 파랑새가 아니라 악어라는 것입니다.
이 악어는 멀리서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집안 새장 속에 갇혀있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즉 동화에서 말하는 가까이 있는 행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우리가 주체로서 행복을 찾는 주도적 입장에 서있는 한 행복은 찾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한 행복은 파랑새가 아닌 거대한 악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41장에서 악어에 대한 이야기가 34절까지 나옵니다. 욥기가 대단원을 내리기 직전을 장식하는 말씀치고는 좀 더 지혜가 번득이고 위엄이 있으며 경외심을 자아내는 멋진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각자의 지혜를 자신하는 자들의 복잡한 변론을 보아왔기 때문에 마음이 통쾌해지고 무릎을 탁 칠만한 결론을 내려주시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웬 악어 이야기를 지난하게 늘어놓으시는 걸까요? 이는 악어사냥의 어려움을 통해 욥의 한계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악어를 사냥하기 어려운 이유와 그 몸통의 구조를 말씀하시고, 또한 인간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악어의 생태적 강인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인간보다 월등한 악어의 능력에 대해 말씀하시며 41장은 끝납니다. 결국 악어를 장악하고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길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구상의 70억 인구 중에 누가 악어를 사냥하고 싶어 하고 가지고 싶어 하겠습니까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삼라만상 중에 하나인 악어 앞에서조차 인간의 한계는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이를 지적하심으로 그 위대하심을 강조하시려는 것일까요?
주석서들은 그런 방향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마치 대학생이 유치원생들 앞에서 고차방정식 문제를 내밀며 으스대는 모습과 다름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악어만도 못한 것들이 어디서 까불고 있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악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동화에서 파랑새가 행복을 상징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악어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이 문제는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말씀해 오신 맥락을 생각해보면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앞서 하나님의 주체성의 그물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합화도 하나님이 입히시고 공중의 새도 하나님이 먹이십니다. 즉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주체성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주체가 된다면 하나님의 주체성의 그물망은 찢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동물들이 생래적으로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사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체적으로 개입하심으로 인한 결과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동물들이 100% 그랬던 것처럼 인간도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일 때에 창조의 목적을 온전히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인격적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스스로의 주체성을 억눌러야만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재앙이 있더라도 욥처럼 주춤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그 섭리하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 때에 마치 하마와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물이 소용돌이치고 요단강물이 입으로 들어와도 하마는 태연자약하고 유유자적합니다. 내 삶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주체성에 의한 일임을 인정하고 믿을 수 있다면 하마처럼 태연자약하고 유유자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주체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며 그 뜻이 이루어져 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이어서 본문의 악어 이야기는 인간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100% 자신의 주체성을 활성화시키며 살아갑니다. 나의 주체성을 활성화시키는 가운데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내게 돈이 없는 것이 유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판단기준으로 돈이 없는 것을 무조건 안 좋은 것으로서 판단합니다. 이렇게 판단하여 주체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찾아 헤매다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보고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입니다.
공통적으로 100% 주체성이 활성화된 상태에서 사람들은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것을 결정하고 그것을 얻으려고 살아갑니다. 마음이 채워져야 만족과 기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건강이 최고다, 나는 희생하더라도 내 자녀는 잘 되어야 한다, 나라가 평안해야 모든 것이 잘 될 수 있다.’라고 하는 조건들을 생각하며 이루어서 행복을 획득하려고 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거대한 악어를 맨몸으로 통제하고 포획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체가 될 때에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삶에 주체가 되었을 때에 일어나는 공통적 특징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려고 만족거리와 기쁨거리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것이 바로 거대한 악어를 집안에 들여놓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은 행동으로 보십니다. 악어는 혼자서 포획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혹시나 포획하더라도 악어는 결국 우리를 상하게 하고 잡아먹고 말 것입니다.
어제 문재인 대통령이 지금 G20회의를 위해 독일에 갔습니다. 그 바로 전에는 미국에 가서 정상회담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 한반도의 문제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에 대해 미국이 동의했습니다. 또한 지금은 미군사령부가 주관하는 전작권도 빠른 시일 내에 환수하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어느 편도 아니지만 이러한 사실 자체는 6.25이래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북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ICBM을 쏘아 올렸습니다. 자연히 독일로 가는 문재인 대통령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이나 UN도 김정은이 설치고 있는 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제는 ICBM의 개발을 거의 마쳐서 자타가 인정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다탄두 미사일까지 개발한다면 미국의 본토방어도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정치권에서는 서로의 트집을 잡기위해서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야당이고 여당이고 힘을 합쳐서 대통령을 밀어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치 당파싸움을 하다가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했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북한을 통제할 수도 없고 중국과 러시아는 더욱 통제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미군을 남한에서 몰아내고 남한을 제2의 북한으로 만들겠다는 꼼수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악어입니다. 군사진영에서는 같은 편에 서있는 것 같지만 일본도 마찬가지이고, 심지어 미국의 트럼프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악어와 같습니다. 오늘 욥기서 41장에 비추어 볼 때에 문재인 대통령은 악어들이 우글대는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십자가복음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일수록 태연자약하고 유유자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긍정적인 주체적 역사가 이 땅에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악어들이 우글대는 G20회담에서 태연자약하고 유유자적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십자가를 붙잡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그 악어들을 누가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개인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건강 자녀 등의 문제는 모두 악어입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머리카락 빠지는 것조차 통제할 수 없는 악어입니다. 이러한 악어들이 우글거릴수록 신앙인들은 하마처럼 태연자약해야 합니다. 소용돌이치는 강물 속에서 태연자약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국가적인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내외에서 설교를 듣는 분들이 태연자약 유유자적 마음을 하늘로 보낸다면 하나님께서 문재인 대통령이 아닌 우리를 봐서라도 악어들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주체성은 70억 인구수로 나눈 만큼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미물일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에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관계하시는 것처럼 여겨주십니다. 온전히 나의 주체성을 부인함으로 하나님의 주체성이 들어오신다면 내가 대한민국의 사람이라는 관계로부터 김정은을 통제하실 수도 있으실 것이고, 푸틴이나 시진핑도 통제하실 것이고, 아베와 트럼프도 통제하실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십자가복음으로 사는 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주체성이 긍정적으로 역사하셔서 모든 악의 무리들을 통제해 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어들을 통제하시는 최종목적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에 전쟁과 국제정세의 요동침이 방해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평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붙잡고 태연자약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이런저런 문제가 많지만 우리가 만져서 행복으로 바꾸려는 것은 파랑새가 아니라 악어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상황이나 사건 중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해서 악어를 파랑새로 바꾸겠다는 말입니까?
이 악어들이 넘실대는 세상에서 하마의 태연자약함과 유유자적을 십자가를 붙들고 이루어낼 때에,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이 임하셔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당신의 계획을 수행해나가시는 플랫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주체가 되어서 이루고 찾으려는 행복은 파랑새가 아닌 악어입니다. 그 악어를 다루는 길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을 따라 하늘로 보내어 유유자적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쉬운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이유는 내 스스로 악어를 파랑새인줄로 알고 쫓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유유자적 태연자약하여 하나님의 주체성만이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진정한 주체화는 하나님의 대타자를 인격화하는 것 뿐입니다. 오늘도 말씀의 인격화 한가지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