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균진사 김치영 지묘
배 공인 청주한씨 부좌
1. 출생과 대통 계승, 그리고 세상을 떠남
지금의 우의정(右揆) 김상공 상로(尙魯)에게 어진 아들이 있었으니, 이름은 치영(致永)이고 자(字)는 중사(仲思)이다. 무신년(1728년, 영조 4) 6월 18일에 태어났다. 공의 둘째 형님이신 판서공 취로(取魯)께서 거두어 뒤를 이을 후사(양자)로 삼으셨다.
나이 15세에 청주 한익모(韓翼謩)가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23세에 상사(上舍,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신미년(1751년) 정월 8일에 감기(상한병)에 걸려 일어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3월 7일에 수주(隨州) 쌍부(雙阜) 판서공 묘 아래 손향(巽向, 남동향)의 언덕에 장사지내었으니, 이것이 군의 일생이다.
2. 성품과 도량, 그리고 겸손한 학행
군의 용모와 풍채는 후중하고 기국과 도량은 깊고 멀었으며, 함부로 웃지 않았다. 언어는 반드시 이치에 맞았고 사람을 대함에는 신의가 있어 한 번 한 약속을 번복함이 없었으며,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양어머니) 홍부인(洪夫人)께서 군을 얻어 자식으로 삼으신 뒤 그 외로움을 잊으셨다.
홀로 비단옷을 입는 화려한 가문에서 자랐으나, 시골 아이처럼 겸손함(守拙)을 지켰다. 가문이 대대로 귀하고 드러나 사촌 형제들이 한창 과거와 벼슬의 공명으로 서로 기대하고 권하였으나, 군은 홀로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였으며, 가끔 신발을 방 안에 숨겨 두어 오직 남들이 자기가 집에 있음을 알아챌까 두려워하였다. 책상에는 주자(朱子)의 책들을 쌓아 두고 《소학(小學)》을 펼쳐 읽으니, 그 문을 들여다보면 적막하여 사람이 없는 것 같았으나, 가만히 그 뜻을 살피건대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바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이미 판서공의 뜻에 부합하여 여러 조카 중에서 뽑혀 자식이 된 것이었다.
3. 임금의 칭찬과 요절에 대한 탄식
주상 전하(영조)께서 친히 신임 진사들을 불러 접견하실 때, 그의 말과 용모를 들으시고 시신(侍臣)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시기를,
“김치영의 용모와 위풍이 매우 뛰어나니, 김씨 가문에 과연 훌륭한 아들이 있구나.”
라고 하셨다. 임금과 어버이에게 칭찬을 받음이 이와 같았으니, 그 사람됨을 능히 미루어 알 수 있다. 태어나 시운을 만나지 못하고, 그를 빼앗아 감(죽음)이 이처럼 빠르니, 하늘에 물어볼 수도 없구나!
4. 부인 청주 한씨의 행적과 순절
군의 아내는 나고 죽음이 모두 군보다 1년 뒤였다. 처녀 시절에는 몸가짐이 장중하여 멀리 나가는 일이 없었다. 어릴 때 성품이 조금 급하였으나, 그 아버지가 눈짓으로 단속하면 곧바로 고치고 뉘우쳤다. 재물과 장식물에 대해서는 담박하였다. 시집와서는 안팎과 순서의 분수를 밝혀 시부모의 마음을 매우 얻었다. 군이 세상을 떠난 뒤로부터 죽음으로써 맹세하여, 겨우 기년(1년)을 넘기고 마침내 지하로 남편을 따라가니, 때는 임신년(1752년) 2월 1일이었다.
5. 숙부 판결사공의 슬픔과 총평
판결사공(判決事公) 성로(省魯)께서 그를 자식처럼 여겨 슬픔이 창자에 사무치고 가슴을 치며 열 번 통곡하는 애통함을 나타내셨고, 무릇 염습하는 모든 도구를 반드시 친히 맡아서 처리하시며 수고롭다 여기지 않으셨다. 이로부터 부인의 도리를 다시 볼 수 없게 됨이 이와 같았다.
숭정기원후삼계유 (1753 영조29년) 2월 일립
정헌대부 병조판서 한익모 찬
※ 훼손된 글자는 문맥을 이해하여 삽입하고 글쓴이는 장인 한익모로, 설립일은 사후 1년뒤로 함.
그 이유로는 김상로가 우의정이 된시점이 1752년이고 한익모가 판서가 된 년도가 1753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