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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筆有四忌論수필유사기론
- 수필은 사기다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Ⅰ.열며
글을 쓴다는 것에는 의미를 재구성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예술성이란 의미의 각색이다. 작가의 인식이 녹아 있는 메시지의 미적 조형성이 결국 본격수필의 격을 결정짓는 축이다. 이것은 단순한 직관이나 관찰로는 수필이 일상성을 못 벗어난다는 의미다. 문학성은 제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작가가 얼마나 개성을 참신하게 탄력적으로 발휘하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작가의 지적 치열성도 요구된다. 의미를 논리적으로 정돈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객관적 지식이 배제된 감성이 주된 역할을 해야 마땅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보면 좋은 수필을 쓰는 사람은 거의 계속 좋은 수필을 쓴다. 왜 그럴까? 이들은 적어도 수필의 본질적 요건을 안다. 이들은 본질이 아닌 것을 잘 피한다. 폭풍이 불면 고개를 숙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재앙을 잘 피해 나가야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본격수필 쓰기도 마찬가지라 본다. 무엇보다도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인식 활동이 수필가에게 필요하다고 하겠다. 본고는 ‘본격수필유사기本格隨筆有四忌’, 즉 본격수필은 네 가지를 기피한다는 관점에서 집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Ⅱ. 펼치며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詐欺다”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기’란 남보다 먼저 보고, 남보다 깊이 보고, 남이 드러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점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삶, 그리고 본질에 대한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빚어지는 ‘사기’다. 자의적인 뜻의 속임수가 아니라 예술의 창의적 속성을 강조한 말이라 하겠다. 필자는 감히 “수필도 사기四忌다”라고 말하고 싶다. 수필은 본질적 속성상 네 가지를 기피한다는 점에서 분명 사기四忌로 압축된다. 그 첫째가 ‘格弱’이고, 둘째가 ‘理短’이며, 셋째가 ‘才浮’이고, 넷째가 ‘意雜’이다. 이름하여 ‘본격수필유사기론本格隨筆有四忌論’이다.
첫 번째로 피해야 할 ‘격약格弱’이란 수필은 품위를 매우 중요시한다는 의미다. 수필에 있어서 품위는 작가의 인격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김광섭은 <수필문학소고>에서 “수필은 진실한 태도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격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격’은 품격을 말한다. 수필은 작가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품위를 잃으면 결정적인 타격이 된다. 따라서 수필은 작가의 자질이 중요시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시나 소설의 경우에는 생산적 상상을 통하여 허구적 언어로써 집을 짓기 때문에 작가의 인격적인 문제와 직접적인 상관성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지만, 수필의 경우는 생산적 상상으로 허구적 언어의 집을 짓는 게 아니라 심적 나상, 즉 마음의 옷을 벗는 것처럼 작가 자신의 신변잡사라든지 미묘한 심리 세계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수필의 소재나 제재 등의 취사 선택에 따라서 작자에게는 치명적인 내용이 될 수도 있다.
비구니가 사는 절에 반바지를 입고 경내를 거닐다 연세 지긋한 여승으로부터 혼이 난 적이 있다. 품위를 지키지 못한 탓이다. 욕망을 경계해야 하는 사람들이 수도하는 곳을 허연 살을 드러낸 채 어슬렁거렸으니, 욕을 들어먹을 만하다. 황송문은 ‘만약 아름다운 고궁 거닐기 위해서는 우선 옷부터가 우아해야 하고, 걸음걸이는 뛰어나 촐랑됨이 없이 여유 있고 점잖게 걸어서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요즘의 버릇없는 젊은이들처럼 배꼽이 환히 드러나 보이는 배꼽티를 입고 연인의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지르거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건들거리면서, 또는 껍을 씹기도 하고 뱉아 가면서, 그렇게 쑥덕거리면서 고궁 뜰을 내달리는 식으로 수필을 쓴다면, 우선 품위를 잃기 때문에 독자로부터 외면당할 뿐 아니라 그 천박스러움이 작가의 인격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게 된다. 미인도 상처가 나면,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 즉 수필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품위 있는 명작을 많이 읽어서 수양된 마음으로 품위 있는 인품을 길러가면서 품위를 잃지 않는 글을 쓰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라고 했다. 품위의 중요성을 지적한 말이다.
중국의 시법에 '격약 불로' 格弱不老란 말이 있다. 수필은 품격이 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윤오영은 내용이 저속한 글을 속문이라 하고, 문장이 좋지 않아 표현이 졸렬한 글을 악문이라 했다. 속문과 악문이 결합된 수필을 맹수필이라 부르면 어떨까? 수필의 시대에 수필로서의 격을 갖추지 않은 맹수필류의 글이 넘치는 것은 아마도 수필에 대한 인식 부족 때문인 듯싶다. 수필이 대중화되는 추세에 따라 수필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은 좋으나 격이 낮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수필가도 예전에 비해 훨씬 많아지고 발표되는 작품도 많아지는 요즘에는 수필 외연의 확대보다는 수필의 본질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수필의 격이 낮아지는 요인은 수필가에게만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쓰는 사람보다 편집자, 독자, 비평가에게 더 책임이 크지 않을까. 특히 비평가의 책임이 막중하다 할 것이다. 수필의 격을 냉정하게 재단해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하리라 본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작품을 엄정하게 평가해서, 어줍잖은 작품을 써놓고 우쭐대지 않도록 비평가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피해야 할, ‘이단’理短이란 이치가 짧은 걸 수필은 기피한다는 의미다. 이는 수필가에게는 지성이 요구된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수필은 일단 교양인의 글이요, 지성인의 글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비평가인 알베레스는 수필을 가르켜 “지성을 바탕에 깐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라고 했다. 이 말은 백번 타당한 말이다. 짤막한 이 말에 수필의 본질적 요소인 ‘지성’과 ‘정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지적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다. 수필이란 마음의 자연스러운 표현이기 때문에 내적인 지, 정, 의가 외적인 진, 미, 선 또는 의, 인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을 통찰하고 달관하는 경지나 여과되거나 발효된 정서로서 얻어지는 손맛이나 에리한 비판정신이 빛나는 눈맛, 그리고 유머와 위트, 날카롭게 찌르는 풍자 등 지성이 세련되게 번득여야 한다. 짧은 산문 속에서 독자들이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든지 그 무슨 느낌을 받도록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흐뭇한 유머나 위트, 날카로운 지성적 통찰력과 찌르는 듯한 풍자, 또는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페이소스 등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비록 수필이 논리적인 논증 구조를 필요로 하는 성격의 글이 아니더라도 내용을 질서있게 배치해서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겠다.
중국의 시법에 있는 '이단 불심'理短不深이란 이치가 짧으면, 그 뜻이 깊지 못하니, 내용이 없는 부실한 글이 됨을 이르는 말이다. 사상과 철학 즉 정신적인 요소가 결여되면 결국 잡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수필은 신변을 수필적 소재로 하여 쓰되, 반드시 문학적 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 수필가의 개성적 시각이 없는 흔해빠진 일상사가 나열된 수필이 아직도 문학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는 현실은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중국의 시법에 나와 있는 두 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볼 때, 수필은 지식의 나열이나 사상의 조술에 진의가 있는 것도 아니요, 글로 씌어진 지식의 축적은 더더군다나 아닌 것이다. 또한 단순한 생활의 기록이거나 신변의 잡사를 보고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수필은 존재 의미를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세 번째로 피해야 할, ‘의잡意雜’은 집필 의도가 잡스러우면 안 된다는 뜻이다. 문학 장르는 모두 정서적인 감화를 목적으로 해서 쓰여지는 글이다. 수필은 자기의 박식을 선진하는 글도 아니요, 지나치게 아는 체 하면서 자기를 선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 글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목적이나 상업적인 목적으로 수필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깊은 우물에서 시원한 샘물이 길어 올리듯, 깊은 생각에서 수필다운 수필이 탄생된다. 생각이 깊지 못하고 천박하면 아무리 많은 글을 써낸다 하여도 질 좋은 비단 같은 언어가 짜여져 나올 리 만무하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깊이깊이 얘기하는 그 떨림과 울림을 수필에서 맛볼 수 있다면 이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이제는 연지 찍고 분 발랐다고 해서 무조건 미인이 아니듯이, 화려하게 치장을 했다고 해서 좋은 수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우리 주변에는 인격적인 성숙이 덜 된 수필들이 횡행한다. 마치 수필을 자신의 자랑거리를 전시하는 양 생각하거나, 술판을 방불하듯 자기 독선의 사설을 늘어놓기도 하고, 음담패설과 남의 약점을 볼모로 난도질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자식을 자랑하기 위해 수필을 이용하거나, 학식을 뽐내기 위해 수필의 주제와 별 상관없는 동서양 고전의 명언이나 명작의 명구를 인용하여 열거하거나 자선과 봉사 활동한 이야기를 도배하듯이 수필화하여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사람도 있다. 해외 여행담을 문학적으로 갈무리하지 않고 일기처럼 시간 순서대로 적어서 버젓이 수필이라고 작품을 발표하는 사람도 많다. 이는 인격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들의 배설 행위일 뿐이다. 물론 모두가 군자연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인격적 만남이 수필이라는 공원에서 조화를 이뤄야 하지 않겠는가. 수필이 그러하지 못할 때에 그 독자성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며, 독자를 유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필이 피해야 할 ‘재부才浮’란 재주를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훌륭한 수필가는 글재주꾼을 말함이 아니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문과 지志를 겸비해야 한다. 문이 없는 지는 거칠고, 지가 없는 문은 황홀할 따름이다. 요즈음도 이상 야릇한 제재, 특이한 제재를 찾아 헤매며 고심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이는 좋은 수필을 쓸 수 있게 하는 올바른 처방이 되지 못한다. 제재란 물론 주제에 기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가 빈약한 상태에서의 제재 편중주의는 재사의 문인, 장색적 수필가를 낳게 한다고 지적한 황송문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알멩이 없는 상태에서 제재를 선택하여 기묘하게 다듬어 놓은 것은 글재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재주를 부리면 안 된다는 말과 관련하여 수필 창작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허구’의 수용 문제다. 어떤 이는 수필에 허구가 절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수필에 허구가 끼어들면 그건 소설이지 수필이 아니라고까지 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지나친 억지라는 걸 알 수 있다. 수필가는 소설가가 즐겨 쓰는 그런 허구를 차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수필을 쓰는 사람은 사실을 바탕으로 수필을 쓰기 마련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소설가처럼 그렇게 허구를 끌어들이지도 않는다. 수필에는 허구가 절대로 끼어들어서는 안 도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만일 수필에 허구가 끼어들면 그것은 거짓이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수필가가 거짓말을 쓸 수도 없고 또 써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도 얼핏 들으면 일리 있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런데 허구는 거짓인가 하는 문제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fact'와 'reality'는 엄연히 그 성격이 다르다. 허구가 사실은 아니기는 해도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수필이란 사실을 얘기하기 위해서 창작하는 것도 아니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다. 수필이란 사실이건 허구이건 삶의 진실을 창작하거나 읽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작가가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쓰되 그 사실 이상의 어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거짓이 아닌 허구적 방법을 차용할 수도 있다. 이것이 필자가 말하는 부분적 수용론이다. 이러한 경우, 분명히 허구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허구는 소설가가 즐겨 다루는 그런 허구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처음부터 상상의 집을 지어나가지만, 수필가는 사실적인 이야기를 쓰되 질서화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차용하는 허구임으로 문학의 본질상 이 점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문학은 진실을 말하기 위해 사실에 근거하거나 허구를 차용할 수 있는데, 소설은 주로 허구를 차용하고 수필은 사실에 근거할 따름이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여러 요건이 요구되는데, 수필은 특히 사실을 근거로 진실을 추구하는 게 특징이라는 것이다.
Ⅲ. 나가며
독자들은 이 논고를 통하여 수필이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네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은 수필에도 나름의 작법이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면서도 그 붓을 끌고 가는 주제의식, 즉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지시에 의해서 쓰여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수필을 가리켜 이야기에 앞선 사색이라고도 하고, 철학적 깊이에까지 이르는 관조의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가 짧아서는 안 된다는 말과 통한다. 그러면서도 문장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는 ‘의도’가 잡스러워서 안 된다는 것과 통한다. 수필이 문학의 장르인 이상 문학 일반론을 무시할 수 없다. 수필은 ‘재주’를 부려서 되는 글이 아니다.
아무튼 수필은 삶의 이삭줍기다. 한 알의 보리나 밀을 가지고 천하 대소사나 우주의 진리를 애기할 수 있는 수필은 우리들 인생의 길동무다. 그 길동무는 고아하고 담박하여 품위를 잃지 않는다. 이는 수필이 ‘품격’을 유지해야 된다는 의미다. 사소한 신변잡사 가운데 파생되는 기억의 부스러기 하나를 보면서 열 가지 백 가지, 우주 천주의 섭리를 말하기도 하는 그것은 완성을 지향하는 미완의 글이다. 잎새 하나의 흔들림을 보고도 자연의 이법을 볼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 길동무의 발걸음은 끝이 없다. 어쩌면 수필이라는 인생의 길동무는 성속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살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삶의 질을 높여주며, 그렇게 높아진 삶을 우리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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