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구청 기독신우회 메시지
일자: 2023년 10월 25일 수요일
제목: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https://youtu.be/WjpjiPt7f6s?feature=shared
설교 준비를 위한 묵상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는 구원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영상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오늘 10월 24일까지 일곱 개의 영상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구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사실 그것은 톰 라이트 자신의 신학을 정리하고 종합한 것이다.
참고: 톰 라이트의 영상 – 구원에 대한 새로운 설명 #1~#7
https://youtu.be/deW_4Aq4JUY?si=NNiifFV5R0pfkJOP
지난 주 목요일 저녁에 나는 신우회원들과 함께 서울시공직자연합예배에 참석했다.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열린 이 예배에서 설교자는 ‘천국은 정말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그 내용은 여러 사람의 임사체험자들의 이야기와 자신의 경험에 대한 간증과 같았다. 사후세계가 있으니 오늘 우리의 전도와 헌신이 영혼들의 구원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깨닫고 최선을 다하자는 취지의 설교였다.
참고 자료: 서울시공직자 연합예배
https://cafe.naver.com/sddjesus/312
https://youtu.be/RVeMpmKP54w?si=d4Ch3wlL58qlwlrI
나는 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인(動因)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신우회 예배나 교회의 선교활동이라면 그것은 어떤 이유여야 할까? 사후에 들어갈 세상이 있으니 그 세상을 준비하는 것이 선교에 대한 우리의 동인이 되어야 할까?
이번 행사에 참여하고 나서 나는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대한 고민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무엇일까? 톰 라이트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설정하고 구원에 대하여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물론 사후에 들어가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도 구원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의 다름이 아니다. 내가 최근에 교회에서 설교 시간에 다루고 있는 주제인 ‘우리가 받은 이 큰 구원’도 이 문제에 대한 것이다.
지난 시간에 나는 ‘구원에 대한 두 가지 오해’라는 제목으로 신우회 예배 설교를 했다. 그것은 톰 라이트의 영상 1번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나는 구원을 사후에 영혼이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힘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널리 알려진 개념이지만 결국 그런 오해는 성경이야기의 전체 주제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별히 나는 지난 시간에 주기도문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오해하여 영혼이 들어갈 내세의 세계를 하나님 나라 곧 천국으로 이해하면서 이 세상의 삶에 대한 평가를 절하하면서 살아온 나의 과거를 반성했다.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진짜의 세계가 저 앞에 있는데 낡고 퇴색하며 없어질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서야 되겠는가! 이런 생각을 톰 라이트는 도피주의적인 관점이라고 정의했다.
이 세상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은 어떤 것일까? 도피주의적인 관점은 이 세상을 불에 타서 없어질 곳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이며,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이 장차 완벽하게 고치실 대상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 세상의 관리자이자 이 세상에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소임을 받은 대리인이다. 이것은 성경이 들려주는 명백한 이야기이며 메시지다.
그렇기에 성경이 들려주는 구원은 인간과 세상을 죽음에서 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점이 톰 라이트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즉,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고 육신은 땅에 장사되는 것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를 설명하는 말이다. 구원이란 도리어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바라는 구원을 이렇게 표현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20~21
썩어짐의 종노릇이란 바로 죽음에 이르는 삶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해방되는 것은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본래 맡아서 할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는 것은 그저 쉬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찾고 본래 만들려던 나라를 만들어가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해방된 나라에서 누리는 영광의 자유다.
그러면 인간의 본래적 소명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를 맡아 다스리고 관리할 대리인의 임무다. 인간은 하나님의 처소로 인도되어 거기서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살았다. 그는 하나님처럼 모든 짐승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고 낮과 밤을 부르셨으며,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셨고, 땅과 바다를 부르셨던 것처럼 아담이 짐승들을 향하여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 이는 아담이 맡은 임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아담이 있는 곳은 에덴동산이다. 그곳은 하나님이 거니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거처다. 하나님이 본래 하늘에 계시고 땅을 인간에게 맡기셨다면, 에덴동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거룩한 자리이며, 하늘의 뜻이 땅에 계시되고 그 뜻이 거룩한 대리인들의 순종을 통해서 온 땅에 펼쳐지게 될 바로 그 센터였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는 방식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주시리로다(시편 37:4).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 27:4).
이런 고백들은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배반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다. 이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해야 할 인간이 스스로 그 영광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 나타내는 일에 실패한 것이다. 즉, 자신의 소명을 저버리고 대리인으로 살기를 거절한 것이다. 그 결과 땅이 저주를 받고 가시와 엉겅퀴가 났으며 피조세계는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그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셨다. 그 말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서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 자리를 떠났는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 자리를 떠났다고 책망하셨다.
아담 부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나서 자신들이 벗었음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뭇잎으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렸다. 그들은 전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기 2:25). 그러나 이제 달라졌다. 그들은 부끄러워한다. 훗날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했다(히브리서 12:2).
어떤 삶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평생을 허비한다. 그러나 어떤 삶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다.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는 삶이 있으며 가난하여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소임에 충실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삶이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점에서 좋은 본보기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전서 6:8~10
참고: 성도의 노래
https://youtu.be/LHGmka0Bhdw?si=NLSzJxZpjITOu7Co
어떤 일을 하는 동인(動因)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자. 오늘 우리가 신우회의 일원으로 모여 예배하고 옳은 일에 자신을 바치는 행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 일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수많은 동인 중에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움직이는 가장 큰 동인은 무엇인가? 그 동인은 정당한가? 착각에 빠져 그릇된 열심으로 평생을 바칠 수도 있지 않는가? 그것에 대하여 모파상의 진주목걸이라는 소설이 들려주며, 히루 오노다라는 일본인 장교는 29년 동안 필리핀의 정글에서 자신의 끝나지 않은 전쟁을 수행했다.
이번 신우회설교에서 나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제목으로 잡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동역자를 부르셨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교회에 편지했다. 이번 주일 설교에서 나는 교우들에게 같은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세 사람을 소개했다. 그들은 사무엘이며 이사야, 그리고 예수님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신다.
사도 바울은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교회는 아담처럼,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불러내신 사람들이다. 마태도 예수님을 소개할 때 호세아의 예언을 인용하여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을 사용하였다(마태복음 2:15, 호세아 11:1).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소명을 발견한다. 그 소명(召命, vocation)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의미는 직업(職業)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셨고, 이스라엘을 부르셨고, 그리고 계속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가신다. 그곳은 에덴이며 성막이며 성전이며 약속의 땅이다.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모델공동체가 세워진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며 그들의 땅은 하나님의 복이 온 땅으로 흐르는 센터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된다.
이런 꿈과 소명과 비전에 대한 확신이 우리를 주님의 대리인으로 헌신하게 하며, 우리가 맡은 일에 대하여 열심을 낼 수 있는 동인(動因)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우리가 되자. 매 순간 주님 앞에서 주님이 주신 약속을 의지하고 우리가 받은 소명을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실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곳마다 다시금 열정이 샘솟듯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 위에 세워질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