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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거제섬의 풍속과 생활상>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차례 : 1) 기성죽지사(岐城竹枝詞) 2) 가라곡(加羅曲) 3) 거제섬 풍속[巨濟島俗]
1) 기성(거제)죽지사[岐城竹枝詞]
죽지사(竹枝詞)는 악곡의 일종으로 남녀의 연애, 연정 또는 그 지방 풍속을 노래한곡을 말한다.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가창(歌唱)되는 12가사 중의 하나로써 〈건곤가乾坤歌〉라고도 한다. 이유원(李裕元)선생이 스스로 밝힌 글을 살펴보자.
"1881년 윤달 7월에 임금의 은혜를 질책하며 중용을 잃지 않아, 유배 가게 되었다. 한번 되돌아보지도 못하고 거제 귀양길에 올라 그 해 8월 그믐에 도착했다. 약 100일 후, 12월에 사면되어 1882년 1월에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그 동안 네 번이나 바꿔 타고 올라왔다. 슬프고 침울한 심정이었다. 그 곳의 일을 기억해 글을 지어 죽지사체를 바친다. 생각이 떠오른 24사 중 하나인 죽지사를 기술한다." [辛巳閏七月 恩譴配中和 未一望 移配巨濟 八月晦到 十二月宥還 壬午正月還家 于今四載之間 思之黯然 效竹枝詞軆 隨思隨書 追述其事]
다음 '거제죽지사'는 거제의 경치·인정·풍속 등을 외지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내용이다. 이 외에도 한시 형태로써, 거제 생활상을 읊은 장문의 글이 서너 편 더 전해지고 있다. 조선말기 거제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어, 읽는 내내 옛 거제도 풍습을 상상할 수 있다.
◯ "기성(거제) 죽지사(岐城竹枝詞)"/ 이유원(李裕元) 1882년 作.
선배 몇 사람이 이 땅에 앞서 귀양 왔었는데 옛 사당은 이미 훼손되었고 돌비석은 아직도 남아있다. 백년이나 뒤를 이어, 이제는 옛날 영광과 더불어, 괴로운 가을 석 달 동안, 까맣게 잊고 칩거 했다. 무심히 살펴보니 철비(鐵碑) 하나가 있는데 이것은 이전에 돌아가신 관리의 선정비라, 감당나무 그늘에서 미혹한다. 관민이 따로 위탁하여 물 뿌리고 청소하며 돌아갈 때는 우러러 사모하니, 배소로 가는 길이 지체되는 사유다. 갈도(해금강)는 경치가 수려하나 먼 곳에 있어 올 수가 없었는데 돌에 글이 새겨 있는 걸 탁본(탑본)하니 먹처럼 새까만 빛이 신묘하여 분별하기가 어렵다. 중국 진나라 서불 선박에 의해 새겨진 글씨로 천 년이나 되었는지 가히 의심스럽다. 붓의 털끝에 의지한 결과, 지나간 과거를 기록한 흔적이네.
거제도는 집집마다 푸른 대나무와 배롱나무 꽃이 만발하고 누런 유자가 반쯤 익었을 때에는 아름다움을 뽐냄이 가득하다. 이달 5일에 장사배가 항구에 머문다니 광주리를 기울어 잡어와 새우를 바꾸어 얻어야겠다. 채소밭엔 섣달 달빛이 눈 속에서 새롭고, 섬섬옥수 청실을 여자아이에게 보내니 치마 걷어 매양 가슴에 끼워 놓고는 늙은이나 젊은이나 어른아이 없이 함께 시름만 같이 할 뿐이다. 바다 그물(고망)을 가로 세로로 해면에다 넓혀 놓으니 푸른 비늘 큰 입을 가진 물고기가 어장 속에 돌아다닌다.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해도 물에 몸을 던져 노력하지만 이로부터 부잣집 장사만 좋았다 나빴다 한다. 소는 풀어 놓고 흩어진 채로 기르고, 노루와 사슴을 소중히 여기며 담장을 만들려고 골짜기 골짜기마다 돌을 쌓고 비바람에 자나깨나 근심하고 잘 몰라서 피하며, 석양이 내릴 때까지 내려와 한가한 잠을 잔다. 양곡배가 겹겹이 바닷길을 덮고 내주(서남쪽 해안)로부터 소식 전하니 낮 동안은 서로 떠들썩하다. 후한 이익을 위해 앞서기를 다투니 도리어 얻지 못하게 되어도, 지방관은 흩어지는 걸 막고 저녁밥을 가로챈다. 모두에게 땅을 나눠주니 물가 백성들이 존경하고 경서를 읽는 서생이 편안하여 자손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농사와 어업 외에도 감자농사에 힘쓰며 혹은 산 앞쪽 위에서 칡뿌리를 캔다. 마을 문은 열어놓고 사람이 다니도록 비워두며, 풍속은 조용해, 수확이 적어도 마음을 편안히 한다. 좋은 의복과 토삼으로 원기가 왕성하여 거제민은 풍토병을 가벼이 여기며 고향에서 늙어간다.
[先輩幾人謫此土 遺祠已毁石猶覩 後進百年今與榮 蟄居頓忘三秋苦 料外審看一鐵碑 先君曾是棠陰迷 另囑官民勤灑掃 歸時瞻仰故遅遅 葛島奇觀遠莫致 搨來石刻墨光秘 可疑千載秦徐船 其果投毫過去誌 家家綠竹紫薇花 半熟黃柚滿眼奢 五日市船門港泊 傾筐換取雜魚鰕 菜田臈月雪中奇 纖手靑絲送女兒 褰裳每向胸中揷 老少同愁尊曁卑 罟網縱橫海面張 靑鱗巨口散漁塲 不計萬錢投水盡 從玆出沒富家商 放牛散牧尊獐鹿 疊石爲墻在谷谷 風雨畫宵避莫知 夕陽不見下閑宿 米舶重重蔽海門 萊州消息日相喧 厚利爭先如不獲 漫充官長攫爲飧 錫土無非河姓尊 一經安有敎兒孫 魚農以外藷農務 或上山前採葛根 里門不閉虗人行 風俗淳淳歲少康 多服土蔘元氣健 居民凌瘴老於鄕].
◯ 다음은 1928년 7월15일 동아일보 거제 미풍 양속편을 소개한다. "거제도에는 30여년 전에 다른 곳에서 보던 풍속이 많이 남아 있다. 홍수나 화재 등 불의의 재변으로 주택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동리 사람들이 혹은 기둥 혹은 문짝 혹은 장판 혹은 돌적이까지 힘 닷는대로 가지고 가서 품삯 한 푼 받지 않고 새집을 지어 준다. 강 너머 강시(강屍)를 두고도 가진 향락(享樂)을 홀로만 하면 족한 줄 아는 다른 곳 사람이 들으면 별천지라 하겠다. 소나 말 같은 가축도 농번기 외에는 모두들 다 내어 놓고 찾는 일이 없다 한다. 물론 각기 소유권은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야생을 시켜도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하니 백주시장에 소도둑이 횡행하는 다른 곳 사람들이 꿈이나 꿀 일일까?"
◯ 1759년 거제부읍지(巨濟府邑誌) 풍속(風俗)편에는 "거제풍속은 검소하고 솔선함을 자랑할 만하다[俗尙儉率 觀風案]하였다.
또한 거제는 바닷가인지라, 귀신을 많이 숭상한다. 마을마다 무당이 있으며, 음력2월이 효과가 좋다고 더욱 심하게 두려워한다. 그리고 대지(땅)를 위해 무당이 제사를 지낸다. 매양 큰 대나무를 가지고 다니며 낚싯대로 춤을 춘다. 신의(신에 의지)라 말하며 사람들이 신과 함께 한다. 어부는 배 젖는 장대로 두 번 흔들어 빌고는 술잔을 들이키며, "신령한 바다뱀이 있어, 무사항해를 빌고, 또한 돛대로도 점칠 수 있다"한다.
2) 가라곡[加羅曲]
◯ "가라곡(加羅曲)" / 김진규 1690년 作. 伯氏復佔畢淸陰乇羅歌 咏耽島風俗以示 余亦用其韻賦裳島之俗而名其曲曰加羅 백형이 '탁라가'를 지은 점필재 김종직을, 나무그늘 아래서 떠올리며, 탐라(耽羅 제주도) 풍속을 이와 같이 읊었다. 나 또한 상도(상군, 거제도)의 풍속을 그 운에 부쳐 쓰니 명칭에 그 곡(曲)을 '가라곡(加羅曲)'이라 하였다.
[거제(裳郡) 백성 풍습으로는 쉬이 친해지기 어렵고 탐라(濟州)보다 누추하고 보배가 적다. 어리석고 완고하여 교묘하게 남을 속임이 이제 풍속이 되어있다. 또한 유민이 많아지고 토착인은 많지 않다. 밤낮으로 바람이 배를 달리게 하여 왜인에 대비하고 여덟 진영이 한 섬을 빙 둘러 있고 백성은 대부분 물가에서 거주한다. 태평성대가 백년이나 계속되어 해안 경비가 필요 없고 이층 다락배가 오히려 절로 항구 앞에 늘어선다. 선비 학자는 단순하고 거친 풍습으로 인해 많지 아니하며 고을 문묘는 비록 있다 해도 심히 처량하다. 북학 실학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부질없이, 다른 고을에다 동당(東堂)을 세운다. 통영서쪽을 보니 멀리 구름 사이 배가 가는 조릿대 같고 익숙한 전투를 연연히 알고 있는 바가 오래다. 군인들을 배불리 먹이고 재주를 시험하고 십일이 지난 후, 뱃가에서 시장을 여니 삼남에서 모여든다. 겨울인데도 어부는 모두 탄식해 마지않고 배 출입은 매서운 바람과 물때에 맞춰서 정박한다. 섬 둘레 고기잡이는 모두 세금을 내야하며 넓고 아득한 바다 이곳저곳에는 한가할 틈이 없다. 무당과 박수가 떠들썩하게 잡가를 부르고 신당이 집집마다 관계하지 않는 곳이 없다. 비록 질병에 대해 말을 하더라도 모두 귀신에 씌었다하고 설령 곳간 창고가 있다해도 모름지기 다시 채우지는 못한다. 층층히 겹친 물결처럼 일백명 장골이 겹겹이 둘러싸인 산과 같아 이런 세상살이에는 천 가지가 다 험난한 길일 것이다. 요즘엔 평지에도 위태로운 길이 많은데, 바다 섬이 펼쳐있어 왕복하기에는 그만이다. 늦가을 잘 익은 유자에 서리 내리니 대바구니에 가득 채워 서로에게 이어진 뱃길로 남양 큰 바다를 건너간다. 초라한 초가집을 다가가 바라보니 빈 나무만 남아 있어 심히 생각건대, 권세가 집에서 야릇한 향내를 즐기기 때문이리라. 가라산 꼭대기에 에워싼 망대가 저녁 안개를 헤치고 봉화를 처음 올리기 시작한다. 한 점 무사히 전하여 천리에 알리고 봉래궁궐 아래서 보아도 의심치 않는다. 고래는 전설상의 교룡같이 큰 허물인데도 화살촉 띠를 두르고 마도의 바람을 쫓아 바다를 떠다니고 있다. 비로소 깨달으니 "굵고 검은 줄이 이어진다"는 말이 헛된말이 아니다. 통발로 둘러싸인 대나무 통이 제각기 다르니 어찌 쓰는지? 노의 삐걱 젖는 소리가 잡구(雜謳)노래 같다. 많이 채취해서 돌아와 "바다 해조가 많다"한다. 밭에서는 거름쳐서 고맙게도 수확이 넉넉하지만 금년엔 어찌 다시 세금독촉에 곤하지 않을까? 대나무 숲 갯가에 어린아이가 스스로 헤엄치고 있어 살펴보니 "물 깊이 들어가야 살찐 복어(전복)를 잡아 올릴 수 있다"한다. 목숨 걸고 바다를 항해하는 너희는 능히 그렇게 잘하는데도, 대개는 "고을 관아문의 권위를 위해 채찍으로 때린다"한다. 무더위 유행성 열병으로 집에 거처 하지 못하고 도망다닌다. 비릿한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습기 찬 구름이 고고히 뽐낸다. 남쪽 변방엔 자고로 일찍 죽는 사람이 많고 살펴보면 거주민들은 흰털과 검은털이 적어 보인다. 운반선은 장차 대나무 무성한 물가를 굽이쳐 흘러 가야하니 배 젖는 장대로 두 번 빌고는 이별의 술잔을 들이킨다. 선상에서 말하기를 "신령한 뱀이 있어 거래가 좋을꺼라"하며 "돛대로도 점칠 수 있다"한다.]
[裳郡氓風不可親 陋於耽羅薄於珍 頑嚚巧詐今成俗 多是流民少土人 颿風日夜備倭人 八鎭環居一島濱 聖代百年無海警 樓船猶自港前陳 儒士無多仍鹵莽 校宮雖在劇凄凉 不見有人能北學 空聞他邑設東堂 統營西望簇雲帆 習戰年年久所諳 試藝饗軍經十日 傍船開市會三南 冬來漁子最堪歎 出入嚴風積水間 環島漁磯皆有稅 滄溟處處亦無閑 喧喧巫覡雜歌呼 神幕家家無處無 唯言疾病皆由鬼 縱有兪倉不復須 百丈層波萬疊山 此中行路險千般 如今平地多危道 海島飜看易往還 柚熟深秋正着霜 滿籠相續渡南洋 漸看白屋餘空樹 遙想朱門賞異香 加羅山頂望㙜圍 烽火初傳夕霧披 一點平安千里報 蓬萊闕下看無疑 鯨魚之大過蛟龍 帶鏃漂從馬島風 始覺巨緇非妄語 區區那用筩兼筒 櫓聲咿軋雜謳歌 采采歸來海藻多 佇得糞田收穫足 今年那復困催科 竹浦泅人自小兒 沒深方得鰒魚肥 輕生蹈海胡能爾 多爲縣門鞭撻威 瘴癘炎蒸無處逃 腥烟四起濕雲高 南荒從古人多夭 眼看居民少二毛 運舶將關竹浦隈 篙二禱罷飮離杯 謂言船上靈蛇在 可卜帆檣好去來]
3) 거제섬 풍속[巨濟島俗] / 다음 글은 1691년 김진규 선생이 거제민의 모습을 보고 작성한 글이다.
“섬의 풍습이 심히 천하다. 지역이 협소하고 조가 귀하다. 비록 풍년에도 값이 비싸지만 지역에 시장이 없어 생선을 잡아 육지에 내다 판다. 고로 섬에는 생선을 잡아도 심히 귀하다 타향의 풍속이 가히 다르며 어려워도 마땅히 타향에서 거주하는 이를 찾는구나 풍년이 들어 조가 옥같이 깨끗하나 바다가 둘러싸여 있어도 식사 땐 생선이 없다. 교역할 때는 서로 속이며 말하고, 귀천에 관계없이 예절이라곤 참으로 없다 섬사람은 인색하고 거짓말을 잘해 대체로 매매할 때는 함께 참여하여 기약한다. 기한이 되어도 그 값을 잘 갚지 않는다. 거제 풍속은 귀신을 숭상한다. 말하자면 2월이 효과가 좋아 더욱 심하게 두려워한다. 서로 다투는 걸 좋아하여 형제끼리도 쉽게 다툰다. 대지(땅)를 위해 무당이 제사신을 지낸다. 매양 큰 대나무를 가지고 다니며 낚싯대로서 춤을 춘다. 신의(신에 의지)라 칭하면서 신과 함께 한다. 밭에 거름을 줄 때 다 해조류를 사용한다. 치우친 외딴 점은 진도와 한가지다. 거칠고 잔인한건 고성(固城)이 더 심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2월 달을 꺼리며 육친의 정을 밤새도록 나눈다. 신에 의지해 낚싯대를 손에 쥐고 신을 부른다. 밭은 모름지기 좋은 똥으로 갈아야 한다. 끝내는 어찌 더럽다 한탄하리. 충신은 스스로 사사로움 없이 살아야하는 것을.. 메벼(재래종)를 재배하고 먹는다 섬의 풍속은 오히려 돌아가신 부모를 봉양하니 이웃 사람들이 제사 음식을 보내온다.”
[島俗陋甚 地狹粟貴 雖豐年價高 地無市 捕魚出賣陸地 故島中魚産甚貴 可異他鄕俗 難宜逐客居 年豐粟如玉 海遶食無魚 交易言皆詐 尊卑禮甚踈 島人性吝且詐 凡於買賣 皆預爲期 而到期不償其價 土風尙鬼 而言二月有神 尤極忌畏 俗好訟 骨肉輒相爭 土巫祀神 每持大竹竿而舞 稱以神依而降 糞田皆用海藻 僻絶同珍島 荒殘劇固城 人多二月忌 訟昧六親情 神託持竿降 田須糞藻耕 終然何歎陋 忠信自平生 島俗猶追養 隣人饋祭餘]
● 그리고 이학규 선생이 19세기 초반, 거제도로 왔을 때, 거제부민의 갓과 의복은 물론 음식까지 중국 광동성 남방식 문화를 널리 애용하고 있었는데, 그 문화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갓과 의복을 보니 백월(중국 광동 지방)과 같을 뿐만 아니라, 천리 양락(양의 젖으로 만든 음식)의 추한 것에 웃으니 그 얼마나 오래된 일이었더냐.”[不翅若百粤之視冠裳 千里之笑羊酪者 幾數千秊矣]고 적고 있다.
● 특히 이학규가 유배생활을 하던 19세기 초는 조선왕조 세도정치로 국정은 극히 어지러웠고, 지방에서는 수령과 아전, 토호들의 착취가 날로 심해져 삼정(三政)이 문란하였으며, 그에 따라 백성의 생활도 도탄에 빠졌다. 선생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서 24년 동안(김해 거제 등) 유배 생활을 겪는다. 물론 그 역시 같은 배경 하에서 비참한 양반의 처지로 전락하였으며, 그의 집안 또한 정치적․경제적 고통을 겪게 된다. 이는 봉건 지배계급 내부의 심각한 모순과 갈등이 고질화함에 따라 소수의 문벌 귀족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현상이었다. 이 와중에 억울하게 유배 생활을 했던 이학규는 유배지에서의 체험에 기초하여 당대 사회 현실의 구조적 병폐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가짐으로써 부패한 관리들의 실정을 낱낱이 포착하고 기록해 나간다. 이는 조선조 비판적 지식인의 현실 체감과 적극적인 문학 의식의 한 표명이었고 궁벽한 유배지에서 부른 ‘역사의 노래’였다.
<거제 유배지로 향해 가면서[向移配巨濟]> 이유원(李裕元).1882년 作.
南州移配自西州 서주로부터 귀양가 남주로 옮기니
草草行裝被放流 초초한 행장으로 내쫓겨
千里脩程知不遠 천리 수양길이 먼 줄 몰랐더니
抄秋移發到中秋 초가을에 시작해 가을이 깊었구나
六十一年渡錦江 61년에 금강(비단강)을 건너
山城遙望樹雙雙 산성에서 멀리 바라보니 나무들은 쌍쌍히 서 있고
兒時▼(禾/尸/羊)卒今頭白 어린시절이 끝나 이제 머리 희어져
以爾看吾恨一腔 너가 나를 헤아리니 한이 하나 비는구나
聖天門店尙依然 성천문 앞 상점은 오히려 여전한데
匹馬蕭蕭奈可憐 한필의 말이 쓸쓸하여 어찌나 가련한지..
玉玦任他人指點 옥결 찬 관리가 타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西來遠客又南遷 멀리 서쪽에서 온 객이 또 남쪽으로 옮겨 가네
完山城外市橋連 완산(전주) 성밖의 저자거리에 다리가 이어지고
慙愧題名南大川 책 제목이 남대천이라 부끄럽고 괴롭구나
父老歡迎如昨日 동네 어른들이 환영한게 어제 같은데
威儀不是舊旬宣 위엄 있는 거동은 아니나 무릇 예로부터 선정이 두루 미치었다네
智異伽倻翠接光 지리산 가야산이 잇달아 경치가 푸르고
望望厚繐出尋常 두터운 삼베를 아득히 바라보니 보통 경지 벗어나네
從此迨迨嶠外路 이로부터 도달하자 산길 밖에서
始看高低長樷篁 비로소 높낮이를 헤아려보니 길게 대나무 숲이 모여 있구나
咸陽市上柿新紅 함양 저자거리에 감나무 새 꽃잎
言語衣冠異土風 말과 의관 등의 지방 풍습이 다르구나
喚鵝亭子緣蒼壁 (산청)환아 정자는 푸른 암벽으로 인하여
神筆猶傳韓石翁 뛰어난 글씨를 가히 전하니 한석봉 옹이라..
<진주>
晉陽城下水東流 진양 성(城) 아래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있어
矗石䧺盛一巨樓 촉석은 우뚝 솟은 바위, 커다란 누각 있다네(촉석루)
波激義岩紅不泐 세찬 물결은 (논개의 충절이 깃든)의암(義岩)을 영원히 추모하리라
乍看靑黛雨中愁 비로소 청대를 바라보며 빗속에서 시름겨워하네
[주] 청대(靑黛)라는 이름의 유래는 예전에 사람들이 푸른색을 띠기 때문에 눈썹을 그리는데 썻기 때문에 청대라고 하였다. 여귀과에 속하는 일년생 풀인 쪽.
<고성>
行行纔人固城府 가고가다 재능 많은 사람이 사는 고성부에 이르러
童叟遮前不可數 아이와 노인이 앞을 가려 셀 수조차 없구나
復邑於吾何有頌 나를 따라 고을읍으로 돌아가니 무슨 칭송이 있겠는가
笑他片石路傍樹 우습도다! 돌조각, 길가의 가로수..
<통영>
三道舟師統制營 삼도 수군(주사) 통제영
空中櫓出大船橫 공중에 큰 망루 드러나더니 큰 배가 (바다를)가로지르네
將軍暇日行過路 장군이 틈을 내어 길을 지나 다니며
十里轅門闐甲兵 십리에 걸쳐 진영의 문에는 갑옷 입은 병사가 가득하구나
內洋初渡可投鞭 내양(內洋)으로 처음 바다를 건너려니 엄청 군사가 많아
山徑回回遮後前 산길을 돌아 도니 앞뒤가 막히어 보이질 않은데
水環如島還非島 섬처럼 물이 둘러싸기도 하고, 섬은 아닌데도 물이 돌며 흐른다
一幅岐城望裏全 한 폭의 거제는 온통 내 눈에 들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