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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현대인을 위한 복음
질문 20.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제목: 그리스도인과 국가
요한계시록 7:9~12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설교를 위한 묵상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께 충성을 바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과 국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국가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두 관계가 명확하게 설정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국민의 의무를 바르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설교에서 나는 지나간 과거에 선배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국가에 대하여 어떤 이해를 가지고 살았는지를 돌아보고 오늘 우리가 국가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설교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큰 뜻 아래서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일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설교 개요
1. 그리스도인과 국가
2. 하나님 나라와 국가
3.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
4. 다같이 춤추는 하나님 나라
1. 그리스도인과 국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국가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를 사랑할 것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과 국가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나라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나라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나라가 어려울 때 일어나 자신을 바칩니다. 그런 일이 일제 강점기 때에 있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삼일만세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사실 삼일만세운동은 대종교와 기독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헌신한 독립만세운동입니다. 그때 우리 조상들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장하고 선포했습니다. 삼일만세운동은 비폭력 평화시위였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몽둥이와 칼과 총으로 우리 조상들을 때리고 찌르고 죽였습니다. 제암리에서는 일본 경찰이 마을 사람들을 교회당으로 몰아넣어 불질러 죽였습니다. 이것을 본 외국의 선교사들은 그 참혹한 사건을 사진에 담아 온 세상에 알렸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세상은 제국주의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제국주의는 국가간에 약육강식의 원리가 적나라하게 작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세계 여러 나라의 반응을 개의치 않고 잔인하고 무도하게 우리 조상들을 억압하고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때 감옥에서 우리 선배 그리스도인들은 일본 경찰의 고문과 압박을 받았습니다.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일본 경찰에게 고문을 당했는데 일본 경찰들은 감옥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인용하여 책망하고 비난했습니다. 마치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가 성경을 인용한 것처럼 일본 경찰들은 우리 조상들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 인용한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1~2
일본 경찰들이 이 구절을 들이대며 그리스도인들을 꾸짖었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이 정하신 것인데 왜 권세를 거슬러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냐는 것입니다. 만세운동과 같은 불법적인 일은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국가 권력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므로 거기에 대항하거나 불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이와 동일한 주장을 펼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운동을 하던 우리 선배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고문하던 경찰입니다. 그 당시의 경찰은 독재자들의 개처럼 맹목적으로 복종했습니다. 그때 독재자들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와 양심적인 주장들을 불법으로 간주했습니다. 독재자들은 경찰을 통해서 민주화운동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서 13장을 들이대면서 국가권력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을 따르는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경찰과 독재시절의 경찰들이 성도들에게 들이대던 대로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일본의 총독이든 독재권력자들이든 다 하나님의 사역자이므로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바른 길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국가는 어떤 것입니까? 그리스도인과 국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2. 하나님 나라와 국가
그리스도인과 국가의 관계는 곧 교회와 국가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 나라와 국가의 관계가 명확해지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국가는 어떤 관계일까요? 우선 기억할 점은 그 둘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지으셨고 그것을 다스리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국가들은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많은 국가와 민족과 방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온 세상이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으므로 모든 나라들이 복음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시편에도 하나님은 자기 아들들에게 세상 나라들을 유업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시편 2: 8). 이 말은 세상 나라들이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천하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 천하만민이 하나님의 계획과 관심 가운데 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다같이 일어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세상이 올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 7:9~10
이 말씀들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온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과 방언들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 나라들이 모두 회복되어 바르고 경건하고 평화롭고 번영하여 결국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계획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마치 모두 제사장처럼 흰 옷을 입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물론 그들은 환난을 이기고 어린 양의 피로 자신을 씻은 사람들입니다(계 7:14).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국가와 가정 같은 공동체를 잘 돌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국가에 충성하는 이유는 국가 그 자체에 최종적인 권위와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기 때문이며 결국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으로 회복되고 완성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과 역사에서 확인하는 것은 국가는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나라들은 흥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하며 건국되기도 하며 패망하기도 합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세워지지 않았지만 결국 패망했습니다. 바벨론과 앗시리아, 그리고 헬라제국도 패망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조선부터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이 땅에 있었습니다. 고려와 조선도 일어났다가 패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국가입니다. 국가나 나라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그의 나라도 영원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나라를 사랑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애국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국가가 하나님 나라의 일부임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잘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국가의 번영은 하나님 나라의 번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번영인가 하는 점입니다.
1919년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의 일입니다. 이 일을 계획한 지도자들은 육당 최남선 선생이 초안을 작성한 기미독립선언문을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의 감시가 삼엄하여 대량의 인쇄물을 전달하기 어려운 지역에는 직접 그 지역에서 등사하게 했습니다. 철필로 긁은 등사원고는 아이를 등에 업은 아낙네의 등 속옷에 숨겨져 전국에 전달되었습니다.
북쪽에서도 북쪽에 있는 함경북도 성진에도 만세운동의 소문이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구례선, 1868~1965)의 집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했습니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본국의 지시에 따라 일본 당국에 거슬리는 행동을 자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캐나다 선교사들은 그런 지시가 없었으므로 더 적극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협력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사역을 할 때 그들은 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도왔습니까? 그것은 조선이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인들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원을 지어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학교를 지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리고 어떤 선교사들은 본국의 훈령을 저버리고 독립운동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애국은 하나님의 뜻 아래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국가 그 자체에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맹목적인 충성은 결국 국가를 위태롭게 합니다. 이승만 정권이 3.15부정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이어가려고 한 것은 충성도 애국도 아닙니다. 그것은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며 그것은 결국 나라를 해롭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4.19혁명이 일어나 수많은 젊은이들과 시민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4.19혁명은 시민들이 일어나 권력자들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은 사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큰 희생을 치렀지만 나라를 새롭게 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라 부르며 우리는 그 일을 길이 기념합니다. 1987년에 있었던 6.29선언도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적 절차에 의하여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게 된 사건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큰 진전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많은 사람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그 당시에 권력을 잡은 자들은 이런 일을 모조리 반국가적 행위라고 평가하고 체포하고 구금하지 않았습니까? 무엇이 진정한 애국입니까? 부정한 방법으로 국가를 운영해도 덜 소란한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됩니까? 아니면 조금 소란하더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국가가 운영되어야 합니까?
분명한 것은 정의롭지 못한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양심의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양심의 고통이 커지는데도 그것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살 소망을 잃게 됩니다. 그것이 자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국가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기억할 일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롭지 못한 일을 덮어주는 것은 결국 공동체를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자비가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약자들의 소망을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가난한 자는 항상 우리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마 26:11, 막 14:7, 요 12:8). 또한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언 14:31)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약자를 위한 배려를 잊지 않고 실행하는 사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회입니다. 그런 세상은 반드시 번영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정의이며 가난한 사람을 어디까지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며 가장 좋은 길을 찾기 위해서 의논하고 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우리가 찾아 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4. 다같이 춤추는 하나님 나라
무엇이 정의(正義)입니까? 무엇이 올바른 결정입니까? 도시 재개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성동구 왕십리 지역은 오랜 세월동안 재개발이 이어져 지금은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하던 분들 중에는 지방으로 이사한 분들이 많습니다. 재개발의 결과로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변두리 지역으로 이주하고 새롭게 단장한 곳에는 중산층 이상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하면 ‘부자동네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상가밀집지역에서도 그곳이 번성하면 임대료가 오르고 기존의 상인들은 임대료 인상을 감당할 수 없어서 주변 지역으로 사업장을 옮깁니다. 대표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동구는 서울숲 인근의 상가 1층을 매입하여 공공안심상가를 만들어 임대료 문제를 겪는 분들에게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방지하는 활동입니다. 이것은 지방자치제도의 모범 사례로 선정되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습니다.
우리들은 성동구에 살면서 재개발을 통해서 대부분의 주거세입자나 상가세입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상인들을 돕기 위해서 공공기관이 나서는 일을 보면서 우리는 작은 희망을 발견합니다. 이런 일이 민간에도 긍정적인 영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재개발과 관련하여 성북구 장위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랑제일교회의 ‘알박기’는 언론을 통해 여러 번 소개되었습니다. 언론은 이 사건을 매우 부정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사가 칼로 무 자르듯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가를 보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명확합니다. 그렇기에 무엇이 정의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바른 기준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다시 한번 기억할 점은, 하나님 나라와 국가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국가의 번영은 하나님 나라의 번영입니다. 그러나 국가가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저버리면 그 국가는 반드시 패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정신은 진실과 자비와 신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며(마 23:23) 예언자들의 메시지에서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미 6:8, 호 6:6, 암 5:24 등).
누구든지 국가나 공직사회나 직장이나 가정에서 진실하고 너그럽고 믿음직하게 행동하고 결정한다면 그곳에서는 모두다 기뻐하며 춤추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을 가지고 다투는 세상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라고 했습니다(로마서 14:17).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진실되고 따뜻하고 믿음직하게 사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국가에 유익이 되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는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평화의 날에 그는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기의 날에 국민이 자유를 잃게 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그 대적자들에 대항할 것입니다. 그들이 외적이라면 대항하는 전쟁을 할 것이고 그들이 권력을 사유화하는 세력이라면 불복종 투쟁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위를 다 나쁜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왜 목소리를 높이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민주화를 위한 시위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동남아의 어떤 나라들처럼 독재자가 국정을 좌우하고 국력은 극도로 쇠약하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시위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입니다. 교사들이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밝힐 수 없는 나라는 더 많은 교사들의 죽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럼 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진실과 자비와 신뢰를 위해 자신을 바친 수많은 애국자들의 헌신과 희생 덕분에 오늘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가신 그 많은 선배들이 하늘에서 우리를 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분들은 우리를 둘러싼 구름처럼 수많은 증인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나라를 위해 일할 시간입니다.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같이 노래하고 춤추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런 세상이 어떻게 올 수 있습니까? 서로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서로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우리는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 세상을 다 기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기뻐할 수는 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동네가 잘 되어서 다 같이 춤추기 기뻐하는 세상, 그런 상상만 해도 얼마나 기쁘고 가슴이 벅찹니까!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다운 모습과 품격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교회와 세상을 적대적으로 바라보지 맙시다. 우리는 동네와 이웃을 더 이상 남처럼 여기지 맙시다. 우리는 그들의 이웃이며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춤추는 세상의 일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선택을 하고 그것을 생각합시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유익도 될 것입니다.
성경 요한계시록에서 장차 어떤 세상이 온다고 했습니까? 각 나라와 백성과 방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그 손에는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께 찬송을 불러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어찌 멋지지 않겠습니까! 정말 황홀하고 멋진 장면입니다. 그런 세상이 열릴 것을 바라보고 만국과 이웃과 함께 춤추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런 세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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