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유물관에서 나와 녹우당으로 올랐다
녹우당은 일반에게는 고산 윤선도 고택으로 알려져있으나, 500여년 전 입향하여 본관을 얻은 어초은 윤효정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 5대 윤선도(1587-1671), 8대 윤두서(1688-1715) 등 조선시대 인물들을 배출한 학문적, 경제적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이 주택은 전남 지방에 현존하는 주택 중 가장 큰 규모로 1968년 12월 1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오르는 길 오른편에 고산의 시비가 있다
입구에는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500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1972년 지정)이 우거져 있다.
몇 십 년 전 왔을 때도 녹우당 보수공사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어이구 오늘도 역시 공사로 인해 녹우당은 들어가지 못했다 인연이 그렇게 되나보다 다음에 또 한번 다시 오라는 삼고초려(?)인가?
야옹이 한마리만 대문간에 대자로 드러누워 한가롭게 방문객을 막는다
배치는 갑좌경향(甲坐庚向)으로 서향집이며, 동4택(東四宅-안방, 대문, 부엌이 북쪽, 동쪽, 남동쪽, 남동쪽 방향)에 속한다. 집터 뒤에는 덕음산을 두고, 앞에 안산(案山)으로 벼루봉과 그 바른쪽에 필봉이 자리잡고 있는 명당이란다.
이 건물은 효종이 윤선도에게 내려준 경기도 수원에 있던 집을 1668년(현종 9)에 이곳에 옮긴 것이다.
녹우당 오른편엔 고산의 사당이 위치해 있다
그 위로는 입향조 어초은 윤효정 공의 사당과 덕음산으로 100여 미터 오르면 어초은의 묘소가 있다
어초은(魚樵隱) 윤효정(尹孝貞)공은 해남 정씨 정귀영의 딸과 혼인하여 처가 쪽에 터전을 잡음으로써 해남에 입향했다.
이후 윤구-윤홍중-윤유기-윤선도로 이어지며 가문이 크게 번성하여 명문가로 성장했다.
해남으로 터전을 옮긴 어초은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자 처사촌 동서인 금남 최부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곳 해남을 학문과 예의 고장으로 이끄는데 기여하였다
어초은 묘소는 야생동물로부터 보호를 위해 전기 펜스로 둘레가 쳐져있어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웠다
이곳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비자나무 숲이 있는데 날씨가 더워 들어가질 않았다
이 녹우당은 또 공재 윤두서를 길러내었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선비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집안이 남인 계열인 데다 붕당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자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평생을 보냈다.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은 국보 제 240호로 지정되어 있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삼재로 일컬어지며 조선후기 회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윤두서의 자화상
윤두서가 아낀 재종(再從) 동생 심득경(1673-1710)은 38세에 요절했다. 진사시에 나란히 합격했으나 정쟁이 심했을 때라 둘 다 대과를 포기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벼슬이 없다는 것은 조선 사대부들이 지식인의 사명으로 여겼던 왕을 보좌해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치군택민'(致君澤民)을 실현할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공부해서 뭣하나'라는 자괴감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뜻을 펴지 못한 동병상련의 처지였던 심득경의 이른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의 가족에게 제사 때 걸으라고 윤두서가 그려 준 그림이 '심득경 초상'이다.
제일 위에 예서로 크게 쓴 '정재처사(定齋處士) 심공(沈公) 진(眞)' 표제가 있고, 얼굴 옆쪽으로 좌우 두 부분에 옥동 이서(1662-1723)가 지은 찬문 2편이 있다. 오른쪽 아래는 윤두서의 낙관이다.
심득경은 외증조부 윤선도, 조부 심광면, 조모가 윤선도의 여식인 영조 때 남인의 중심 추우당 심단의 아들이다
심광면은 우리 동암공 오단 선조의 사촌 처남이다
원래 고산 유물관에 공재의 유물관이 따로 특별전시실로 있는데 그 역시 오늘은 개방을 안 하고 문을 닫아 아쉬웠었다
대신 그 앞 그림퍼즐 체험만 하고 나온 터이다
선비 화가로 알려진 윤두서는 살아 있을 때보다 사망한 뒤에 한층 더 파란만장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만년에 서울에서 해남 백련동으로 귀향하여 은거하다가 1715년(숙종 41) 11월 26일 고향 집에서 세상을 떠나, 강진 백도면에 있는 6대조 할아버지의 묘 아래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영면하지 못하고 1828년(순조 28) 해남 현산면 백포리에 최후의 안식처를 찾을 때까지 100여 년 동안 무려 일곱 번이나 천장(遷葬)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녹우당을 빙 둘러 산책 길이 있어 돌아나오며 녹우당과 작별하고 또 유물관 옆으로 땅끝순례문학관도 있었지만 보지 않고 다음 여정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