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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와 그 아들들
구약성경 - 창세기 제 9장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원리원본 (原理原本) - 1권 (113~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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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천지에 주인공의 위치면서 제2차 인간의 조상 되는 존재의 행동 여하부터가 하나님과 사탄이 행동의 여하를 시작하는 중점이었다. 그 때 노아의 여덟 식구 중에 죄라는 생각조차 하여서는 안 될 존재들이고 하나님의 의만이 시작되어야 할 존재로써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모양이나 흉 하나도 보여지는 행동이 없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노아는 농부가 되어 포도농사를 하였다. 포도주를 먹고 취하여서 장막 안에 벌거벗은 채로 누워서 잠을 자고 있을 때에 노아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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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이 아버지가 옷을 벌거벗고 자는 고로 부끄럽게 여기면서 자기형제들에게까지 가서 부끄러운 행동의 표시를 하니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아버지 벗은 것도 보지 아니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나체를 덮은지라. 이것이 성경을 보면 왜 이런 행동이 하나님이 미워하는 행동인가 하는 근본의 뜻은 오늘날까지 미해결 문제이나 그 근본원리로 볼 적에 그 사실은 명백하여지는 바이다. 이 행동은 무엇을 상징하는 사실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지극히 미움의 행동이며 사탄한테 한편이 될 수 있는 아담, 해와의 벗음의 수치를 다시금 증거하며 타락성의 계승을 표시하는 행동이며, 사탄에게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입장을 세울 수 있는 근본적 문제였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으로 타락된 부끄러움 자체임을 아직 잊지 못하는 존재의 씨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행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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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전인류를 심판하심도 그것의 시작으로 한 결과에 도달하여 지는 바에서 나온 바를 생각하니 하나님은 통분하고 억울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을 보여줌인 동시에 사탄의 성품, 즉 범죄한 직후에 행동의 계승을 증거하는 사실이다. 또 역시 하나님이 뜻하는 근본목적 미완성요소가 잠재함을 알게 됨이니, 또 다시금 사탄의 기착점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그런고로 다시금 사탄은 그 행동 개시를 보게 할 근거를 잡고 나서니 그 요구의 터를 막을 수 없는 사탄의 번식이 시작을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그 행동을 직접 시작하게 한 그 존재가 사탄 편 자이니 함을 대하여 가나안의 조상이 되어 하나님의 원수가 되리라는 것을 말함이다. 그리하여 또 다시금 하나님과 사탄은 대립을 보게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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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자손을 번식하니 또 다시 그 자손들은 다시 하나님이 미워하는 행동으로 흘러 나가게 되었고 노아 전과 같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탄의 뜻 번식에 협조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원리해설 (原理解說)
노아의 家庭은 함을 中心하고 넘어야할 이 責任分擔의 고개를 넘지못하였으므로 다시 아담 家庭과 같은 立場으로 돌아가게된 것이다. 그러면 함은 어떻게되어 이 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고 自己의 家庭을 倫落 케하였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洪水審判後 노아는 葡萄農事를 지어 스스로 만든 포도주에 취하여 裸體 로 帳幕안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둘째 아들 함은 그 裸體를 부끄러워하며 겸연쩍게 생각하여 自己의 兄弟 셈과 야벳까지 煽動하니 두 兄弟 도 同感하여 옷을 취하여 두 어깨에 메고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않으려고 얼굴을 돌이키고 뒷걸음쳐 들어가 덮었다. 이 行動으로 말미암아 함은 詛呪를 받아 가나안의 아비가 되어 代代로 兄弟를 섬기게된 것이다(창 9/25).
함이 이와같이 노아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했다는 行動이 어찌하여 犯罪行爲가 되었는가하는 것을 아직도 未知의 事實로 남아있다. 이 問題를 論議 하기 前에 먼저 罪라는 것은 무엇을 意味하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사탄도 相對基準을 造成하여 原理的인 立場을 취하지않고는 存在의 能을 發揮 치 못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侵犯할 수 있는 條件을 許諾하여 그와 相對가 됨으로써 사탄으로서의 能을 發揮할 수 있는 舞臺로 나의 몸을 提供할 때 罪를 形成 하는 것이다.
함의 行動이 犯罪가 된 것도 그로 인하여 사탄이 侵犯하여 노아 家庭은 다시 사탄의 活動舞臺가 되어버린 까닭이다. 그러면 노아의 子息들이 그의 父親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했다는 行動이 어찌하여 사탄이 再侵犯할 수 있는 條件이 되었는가를 알아야할 것이다. 아담과 해와와의 사이에 있어서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意識은 創造本性의 發露는 아니다. 그것은 서로 벗고 있어도 부끄럽지않도록 創造하신 까닭이다(창 2/25).
이 下體를 부끄러워하는 意識은 墮落行爲로 인하여 생기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下體를 부끄러워한다는 意識은 下體로 犯罪行爲를 하였다는 表示的 行動이 된 것이다. 이와같이 아담과 해와는 부끄러워한다는 意識의 發露로써 下體로 犯罪하였다는 것을 暗示하였기 때문에 蕩減復歸原則에 의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蕩減條件을 세워놓아야 비로소 아담 해와의 墮落前 狀態를 蕩減復歸할 수 있는 條件이 세워지는 것이다.
아담 家庭 代身 택함을 입어 아담의 지은 罪를 蕩減復歸하지 않으면 안 될 노아 家庭은 부끄럽지 않은 立場을 취하여야 부끄러운 立場을 취해 墮落 된 아담의 罪를 벗을 수 있는 蕩減條件을 세울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5%의 試鍊을 걸어놓고 노아의 家庭으로 하여금 이 고개를 넘도록한 것이다.
그러나 함은 自己가 부끄러워했을 뿐 아니라 이 意識을 兄弟에까지 煽動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담 해와의 墮落行爲를 表徵하는 그 부끄러움의 意識을 反復한 結果가 된 것이다. 이 意識을 反復함으로 말미암아 洪水審判에서 救援받은 함도 墮落 直後의 아담과 똑같은 立場에 있다는 것을 自證 하였다 이로써 함은 審判으로 인하여 사탄을 分離한 立場에 있지 아니하고 아직도 사탄과 血緣關係를 맺은 立場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立證함으로 말미암아 마치 까마귀가 앉을 곳을 찾아 물 위를 헤매듯이 노아의 家庭에 侵犯할 條件만을 엿보고 있던 사탄에게 再侵犯할 수 있는 條件을 許諾하게 되어 노아의 家庭은 다시 사탄의 活動舞臺가 되어버린 것이다.
함의 行動은 이렇듯이 그 家庭으로서 세워야할 5%의 責任分擔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메시아를 맞아 에덴 復歸를 하려던 95%의 復歸攝理 는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延長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現在 우리에게 있어서도 벗을 것을 부끄러워하면 犯罪行爲가 되는가하는 것은 重大한 問題가 될 것이다.
위에서도 詳述한 대로 아담의 墮落行爲로 인하여 誘發된 부끄럽다는 意識 은 바로 墮落行爲를 證據하는 表示的行動이 되었기 때문에 反對로 이런 意識을 느끼지 않는 立場을 취하여 그러한 墮落行動을 除去할 수 있는 蕩減條件을 세워야겠기에 아담 代身 家庭으로 세운 노아 家庭으로 하여금 이 意識을 取消할 수 있는 條件을 세우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條件 은 노아 家庭이 세워야할 蕩減條件으로 남아진 것이다.
원리강론 (原理講論)
노아가 '상징헌제'에 성공한 후에, 이 가정의 '실체헌제'가 뜻맞는 것으로 바쳐지기 위하여서는, 먼저 '실체헌제'의 중심이 되어야 할 차자 함이, 아담가정의 '실체헌제'의 중심이었던 차자 아벨의 입장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다. 아담때에는 아벨 자신이 아담의 대신으로 '상징헌제'를 하였기 때문에, 아벨이 그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 동시에 '상징헌제'의 중심으로도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 때는 함이 아니고 노아 자신이 '상징헌제'를 하였기 대문에, 함이 '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와 심정으로 일체불가분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함으로 하여금 노아와 심정으로 일체적인 입장에 서게 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섭리를 하셨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창세기 9장 20절 내지 26절에 씌어 있는 기록을 보면, 함은 그의 부친 노아가 장막 안에서 알몸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 형제 셈과 야벳을 선동하였다. 이 때에 그들도 함의 선동에 뇌동되어 그의 부친의 알몸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이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그 부친의 몸에 옷을 덮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죄가 되어 노아는 함을 저주하여 이르기를 그 형제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러한 섭리를 하셨으며, 또 나체를 부끄러워한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이러한 내용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어떻게 되면 죄가 되는가 하는 문제부터 알아보기로 하자.사탄도 어떤 대상을 세워 그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주고 받는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존재 및 활동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든지 그에게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어 사탄의 상대가 됨으로써 사탄이 활동할 수 있게 될 때 거기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어찌하여 노아의 알몸으로써 함을 시험하셨던가 하는 것이다. 방주는 천주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 40일로써 방주를 뜻 가운데 세운 직후에 되어진 모든 사실들을 상장한 것이기 때문에,심판 40일로써 방준를 뜻 가운데 세운 직후에 되어지는 모든 사실들을 상징한 것이었다 함은 이미 논술한 바와같다. 그러므로 40일심판이 끝난 직후의 노아의 입장은 천지창조 후의 아담의 입장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창조된 아담과 해와가 서로 얼마나 가깝고 허물할 것이 없는 사이였으며, 또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었던가하는 것은, 창세기 2장 25절에 그들이 서로 알몸으로 있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한 후에 스스로 하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나무잎으로 가렸었고, 또 하나님이 보실 것을 두려워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었다(창세기 3장 7절). 그러므로 그드이 하체를 부끄러워했던 행위는, 하체로 범죄하여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다는 정념의 표시요, 하체를 가리고 숨었었던 행동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범죄의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40일심판으로 사탄을 분립한 입장에 있었던 노아는 천지창조 직후의 아담의 입장에 섰어야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알몸으로 있어도 그 가족들이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 숨으려 하지도 않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으로써, 일찍이 죄를 짓기전 어디도 가린 데 없이 들어낸 나체 그대로의 인간을 보시면서 기뻐하셨던 그 심정을 탕감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노아로 하여금 나체로 누워 있게 하셨었다. 따라서 함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아무 부끄러움 없이 노아를 대했어야, 노아와 일체불가분의 뜻 가운데서 죄 짓기 전 부끄러움을 몰랐던 아담가정의 입장으로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아들들은 이와 반대로 그 부친의 나체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이를 가렸으므로, 이로써 그들은 타락 후의 아담가정과 같이,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은 부끄러운 몸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까마귀로써 보여주신 것과 같이, 노아가정에 침범할 수 있는 무슨 조건이 없는가 하고 엿보고 있었던 사탄은 자기의 혈연적인 후손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나선 노아의 아들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가정에 다시 침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함이 그 부친의 알몸을 부끄러워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 행동은 범죄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함은 '실체헌제'를 하기 위한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실체기대를 이룰 수 없었으므로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나체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죄가 되는가 ? 노아는 아담의 대신으로서 아담으로 인하여 사탄이 침범한 모든 조건들을 없애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정은 나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가리지도 않는다는 감성과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써,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기 전 아담가정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가리지도 않는 것으로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아담가정 대신으로 세워졌던 노아가정만이 세워야 할 조건이었던 것이다.
원리본체론 (原理本體論)
2) 실체기대
(1) 중심인물 : 함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노아의 둘째아들 함입니다. 실체기대는 실체헌제를 말하는데, 그 조건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입니다. 조건물이 아니고 조건입니다.
셈은 차자 함의 형이기 때문에 함에게 애중굴통(愛仲屈通)해야 합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애중굴통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듯이 셈도 함을 통해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의 심정과 일체를 이뤄야만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아버지 노아입니다. 아버지가 중심이 되어 믿음을 세우고, 그 믿음을 차자에게 계승해야 합니다. 그래야 노아가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함은 노아가 120년 간 닦았던 믿음을 계승해야 실체기대의 중심인물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아담가정에서 둘째아들 아벨이 아버지를 대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가정에서도 차자인 함이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아담가정에서는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아벨이 아버지의 것을 계승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정은 노아가 믿음의 기대를 세웠기 때문에 함은 아버지인 노아의 믿음을 계승해야 합니다. 노아의 믿음을 계승하는 방법은 노아와 심정적으로 완전히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누워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아비 함이 이 광경을 보고 형 셈과 동생 야벳에게 알려서 셈과 야벳이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을 쳐서 술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있는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었습니다(창세기 9장 20~23절).
인간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대단히 잘한 일로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노아가 술에서 깨어 옷이 덮어진 것을 보고 둘째아들 함을 저주합니다. 창세기 9장 25절에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하는 노아의 저주가 나옵니다. 옷을 벗고 있는 것을 보기가 민망해서 덮어 준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히 잘한 일인데, 그렇게 저주한 데에는 어떤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노아가 벌거벗고 누웠던 것은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지로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이 있어서입니다.
노아가정은 아담가정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가정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벌거벗고 있어도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창세기 2장 25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후에는 부끄러움을 느껴서 무화과 나뭇잎을 따서 하체를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벗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으나 타락한 후에는 벗은 것에 부끄러움을 느껴 하체를 가렸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가렸다는 것은 타락을 반증하는 행위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가린 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타락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벌거벗고 있는 자리에서 함이 하나님 편에 서느냐, 사탄 편에 서느냐가 결정됩니다. 노아가 벗고 있을 때 함은 노아와 심정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노아가 벗고 있을 때 함도 자신이 벗고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아담이 부끄러움을 느껴 하체를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었듯이 함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결국 아버지를 가려줬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타락한 후손입니다.’하는 자증(自證)입니다.
이미 홍수심판으로 사람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노아가정만 남았습니다. 사탄이 노아가정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함이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자 사탄이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는 함의 행동을 보고 저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함이 사탄에게 침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사탄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무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는데, 함이 순식간에 실수함으로써 그 정성의 기반이 모두 무너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함이 노아와 심정일체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실체기대는 실패했습니다.
(2) 부끄러움이 죄가 된 이유
죄란 사탄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사탄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사탄과 수수작용을 하여 천법(天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는 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벗은 것을 심히 부끄러워했습니다. 함이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사탄에게 ‘너는 나의 후손이다.’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함의 입장에서는 ‘나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다.’ 하고 고백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함은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되지 못하고, 노아가정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 또한 실패했습니다.
노아 이후부터 인간의 언어가 달라졌습니다. 노아의 자손들은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성읍과 탑을 건설했습니다. 그들은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을 내고 인간을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자 일에 손발이 맞지 않고 혼란을 일으키다가 각각 분열되고 말았습니다(창세기 11장 1~9절).
에덴동산의 아담·해와가 완성했으면 아담이 쓰는 말이 인류의 언어가 되고, 아담이 세운 전통이 인류의 전통이 되고, 아담의 문화가 인류의 문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노아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오색인종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해와밖에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백인·흑인·황인종 등 오색인종이 생긴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의 불통으로 인해 단절된 생활을 하면서 제각각 떨어져 한 곳에만 머물러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살아가는 환경의 일조량에 따라, 태양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인간의 피부 색깔이 달라진 것입니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점은 피부색깔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흑인의 피와 백인의 피가 똑같고, 아기 울음소리도 흑인과 백인이 똑같습니다. 슬플 때 눈물 흘리는 것도 똑같고, 기쁠 때 춤을 추는 것도 똑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똑같은데 피부색만 다를 뿐입니다.
피부색이 다른 것은 환경게 따라서 환경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곤충들이 보호색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외적으로는 변화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똑같습니다.
흑인은 코가 납작하고 콧구멍이 큽니다. 반면에 백인은 코가 높고 콧등이 좁으며 콧구멍이 작습니다. 코는 외부의 공기를 받아들여 폐로 전달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그 구조나 모양이 외기의 온도에 대처하도록 되어있습니다.
흑인이 많이 사는 아프리카는 외기의 온도가 인체의 온도와 비슷합니다. 외기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오랫동안 정착해서 살아온 흑인들은 코가 납작하고 콧구멍이 큽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추운 지방에 사는 백인은 콧등이 높고 그 폭이 좁아서 콧구멍이 작습니다. 추운지방의 사람들은 코가 길어서 터널과 같은 역할을 해 줍니다. 찬 공기가 폐로 들어가면 건강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자기 체온에 맞게끔 공기를 데우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가 사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색인종이 하나 된다는 말은 피부색이 하나된다는 말이 아니라, 타락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혈통이 본래의 혈통으로 돌아가 하나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한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됩니다.
3) 결과
노아가정은 믿음의 기대는 성공했으나 실체기대는 함의 실수로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노아가정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 세울 때까지 400년 간 연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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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공부는 성경, 원리원본, 원리해설, 원리강론, 원리본체론을
같이 공부하면 좋을 것 같아서 작성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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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비판만 일삼는 무지한 자들은 원리를 건들지 말고
자기만의 글을 쓰길 바란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아주
감사드립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