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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실제현장 속 영생불멸의 삶>의 줄거리:
구원을 받고 그 받은 구원을 이루어감으로써 영생불멸의 존재가 된 사람은 이 세상 속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일까요? 육체가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영생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 자체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것일까요?
실제 현장 속 영생불멸의 삶
(마가복음 10:17~22)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실제 현장 속 영생불멸의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실제 현장 속 영생불멸의 삶’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창조주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받은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서나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구원은 끊임없이 이루어 가야만 하는 은혜로운 과제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 감으로써 영생불멸하는 존재로 바뀌어 가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단순히 영원히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옥에서도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불멸의 특징은 구원을 어느 정도 이루었느냐에 따라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영생불멸하는 사람이 매일 매일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받아 영생불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끝이라 여기고, 육체가 죽는 것을 마냥 두렵게 여기고, 육체가 죽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구원과 영생의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았고 마음에서 팽개친 채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이미 마태복음에서 한 차례 언급되었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온 장면이 나타나는데 누가복음 18장 18절에서는 이 청년을 관리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언급에서 이 부자 청년이 높은 지위를 가진 바리새인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청년의 조건을 생각해보자면 요즘 대한민국에서 딸을 가진 권사님들에게는 만점짜리 사윗감입니다. 지위가 높고 돈도 많은데 영생에 대해 고민하는 영성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이 영생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돈도 있고 권력도 있으나 마음에 평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민하게 자신의 마음을 관찰한 끝에 영생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영생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열심히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이 청년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와 질문하게 됩니다. 17절을 보면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 청년의 물음자체에는 깊은 내용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랍비들에게 으레 그랬던 것처럼 ‘선한 선생님’이라고 예수님을 불렀을 뿐입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선하다는 표현을 지적하시며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이 참으로 신묘막측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선하십니다. 육체를 입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하나님이시며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굳이 선하다는 표현을 마다하시며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다고 언급하십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써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그 선하심 또한 영원 전부터 지속되어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하다 일컬어지기를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흘러들어오는 존재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성령님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과 일체되어 계셨습니다. 독립적인 인격체이셨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언제나 일체이셨고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과 선하심이 흘러들어오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즉 스스로 선하심을 나타내시고자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받아서 나타내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나타나야 할 선함이란 자신의 독립된 선함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선함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을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선함의 문제가 언급된 이유는 청년의 질문에서 선함과 영생을 연결시켰기 때문입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청년의 질문을 풀어보자면 “선하신 선생님이여 당신이 선하신 것을 보니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가르쳐주십시오.”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의 질문을 그대로 받아들이셔서 선함과 영생의 문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과 선하심이 예수님을 투과하여 극명하게 나타났던 상태가 바로 앞 장에서 나타난 변화산 사건이었습니다. 9장 3절에서 예수님이 변하신 모습을 묘사하기를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절에서는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하였습니다. 두 말씀을 종합해보면 예수님께서 마치 흰 빛의 발광체처럼 보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좋았던 나머지 산 아래 인간세상에서 좋게 여겨졌던 모든 일들을 망각하고 그곳에서 계속 머물기를 바라게 됩니다. 베드로를 황홀경에 빠지게 만들었던 빛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심이 계속되고 계셨음을 전제할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영광이 예수님을 통해 빛으로 나타나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광경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5절을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영광의 빛이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을 통과하여 그 얼굴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과정이었습니다. 변화산 때처럼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드러내신 적도 있으셨지만 그 외의 모든 활동의 순간들 또한 하나님의 빛이 예수님의 마음을 투과해서 입과 손과 발을 통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날 수 있었고 스데반 집사님도 그럴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나타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원죄를 가진 죄악 된 사람들입니다. 원죄를 가지고 있기에 결코 스스로 선함을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선함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심이 인간의 마음을 투과해서 몸을 통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자체에서 발생하는 선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말씀하신 뒤에 계명을 언급하십니다. 그런데 이미 영생이 무엇인지는 언급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청년은 영생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 영생을 얻겠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 원인이 청년에게 있음을 아시고 그것을 드러내시고자 계명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언급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염두에 두면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되는 선하심이 마음을 투과하여 나타나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제목에서 “실제 현장 속 영생불멸의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빛이 마음을 투과하여 몸을 통해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 것이야말로 영생불멸의 삶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영광의 빛은 우리의 마음을 투과하여 몸을 통해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공생애의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셨습니다. 변화산 사건 때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빛을 보이시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빛이 말씀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모습을 통해 영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은 영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예수님께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을 언급하시며 영생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청년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는 방법으로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십계명 중에서 첫 번째 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까지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은 빼놓으시고, 사람사이에 지켜져야 할 여섯 가지 계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자신이 이 여섯 계명을 다 지켰음을 공언합니다.
이전 설교에서 십계명에 대해 살펴볼 때에 첫 번째 계명을 지킬 수 있을 때에 다른 모든 계명도 지켜질 수 있다는 내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첫 번째 계명은 바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다른 신이란 곧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의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근원으로 믿을 때에 나머지 아홉 계명도 지킬 수 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때에 하나님의 빛이 나를 통과하여 나타나는 결과들이 나머지 아홉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될 여섯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공언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청년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적이 없었고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들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에 대한 계명 또한 지켰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전혀 지키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청년의 마음의 다른 신은 재물이었습니다. 많은 재물을 통해 기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영생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생불멸의 속성 중에 하나인 평강을 얻기 위해 재물이나 권력에 영생을 덧붙여보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언급하심을 통해 이러한 마음의 실상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청년은 다른 신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영광의 빛이 마음을 투과하여 삶의 현장에 나타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영생불멸의 특징인 평강이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첫 번째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는 모조리 어기고 있었기에 언급할 필요도 없으셨으며 나머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계명을 지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마음을 투과하여 나타난 선함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통해 재물과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악한 의도에서 계명도 지켜 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영생불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문제는 바로 영생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몰랐다는 점입니다. 또 삶의 현장에서 영생불멸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에 영생 또한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영생불멸의 삶이란 죽지 않는 육체를 갖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과 같습니다. 몸은 죽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우선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영생불멸의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생불멸의 삶은 십자가를 잘 활용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여러분의 몸을 보신 후에 여러분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보시길 바랍니다. 이제 마음속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되새겨봅니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둘러봅니다. 그러면 몸과 몸을 둘러싼 환경에 하나님의 주권이 통과되고 있음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직장에 나가면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는 내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동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것을 체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기를 지속하는 동안에 내 몸과 몸을 둘러싼 환경 전체에 하나님의 주권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느끼는 상태가 되기 전에는 나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선하시고 영광스러운 빛이 통과되어 나타날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은 망각되고 무시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서 모든 삼라만상에 영향을 미치고 계십니다. 심지어 나를 해코지하려는 원수의 생명조차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다윗은 시무이가 저주할 때에 신하들로 하여금 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던 중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마주했을 때에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의 생명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여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보지 않고 원수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던 것입니다.
삼라만상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고 무시하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건강이나 주름진 외모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이 통과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몸을 볼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몸을 둘러싼 모든 환경에서도 주권자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우리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빛이 통과될 준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한편 본문 22절을 보면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예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청년에게는 재물이 소중하였듯이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소중하였습니다. 욥에게는 마찬가지로 재산이 소중할 수 있었고 열 명의 자녀가 소중할 수 있었고 건강과 아내와 친구가 소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욥도 부자 청년과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근심하고 돌아서지 않고 하나님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동안 이 세상의 가치들을 기쁨과 만족으로 여기는 상태를 죽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동안에는 세상의 어떤 대상도 붙잡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의 현장이 됩니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정치인들이 정치를 해나가는 모습을 봅니다. 또 드라마를 보며 배우들이 맡은바 배역을 연기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는 시간입니다. 뉴스를 통해 국회의원들이 정치를 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드라마에서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듯이,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죄 때문에 살려고 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심지어 몸에 병이 났어도 그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 통과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소나기가 내리듯 몸과 몸을 둘러싼 모든 환경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는 하나님만이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심을 알고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두 가지 인정이 지속되는 동안 하나님의 선하신 빛은 우리의 마음을 통과하여 영생불멸의 상태가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해야 할 일은 스스로의 판단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고 염려하는 모든 일은 죄악입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가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심을 볼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사물에 임하는 순간을 잊지 않고 지켜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통과시키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감사뿐입니다. 마음의 채움과 기쁨과 만족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가능하심을 다짐하며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영광의 빛이 우리를 통과하여 나타나는 영생불멸의 삶은 이루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조금도 부족함 없이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소나기처럼 내리는 것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며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기억할 때에 우리는 영생불멸의 존재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이 통과되어 나타나는 영생불멸의 존재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쉬운 일입니다. 몸도 아프고 돈도 없고 하는 일마다 실패할 때에도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기억함으로써 영생불멸의 존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몸과 몸이 처한 환경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하시고, 비어있는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로만 채울 수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약속된 모든 은혜를 누리며 영생불멸의 존재로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