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8년, 단테는 베로나를 떠나 라벤나에 머물면서 [신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천국]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라벤나의 외교 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다가 병에 걸려 1321년 9월 14일에 사망한다. 56년간의 삶에서 3분의 1에 해당하는 19년을 망명객으로 보낸 뒤 맞이한 쓸쓸한 죽음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넘어서야 실책을 깨달은 피렌체는 단테의 유골을 모셔오려 했지만 라벤나는 번번이 거절했다. 1519년에 교황이 그 분쟁에서 결국 피렌체의 손을 들어주자, 라벤나는 단테의 유골을 몰래 빼돌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모처에 은닉되었던 유골이 발견되어 라벤나의 작은 교회에 안치된 것은 무려 1865년의 일이었다. 사후 500년이 되어서야 단테의 긴 유랑은 비로소 끝났던 셈이다.
중세 최고의 철학 서사시 [신곡]
단테와 베아트리체라고 하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정말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지는 의문이다. 우선 두 사람은 신체적 접촉은커녕 말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사이였다. 단테는 베아트리체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연애시를 줄줄이 써냈지만, 정작 그녀를 직접 만났을 때에는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전전긍긍 가슴만 앓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못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은 그저 단테의 짝사랑이었고,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사랑이었다.
베아트리체가 사망한 직후, 충격을 받은 단테는 마음의 위안을 찾아 광범위한 독서에 몰입한다. 이때 그는 철학자 보에티우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술을 숙독했으며, 그런 독서 체험으로부터 중세의 종교 및 사상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철학 서사시 [신곡]의 기본 구조가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단테가 이 작품의 집필에 착수한 것은 1307년으로 추정된다. 비록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보카치오는 이에 관해 매우 흥미로운 일화를 전한다. 즉 망명 당시에 단테는 [지옥]의 처음 일곱 ‘곡’을 완성한 상황이었으며, 이 원고를 압수한 정적들조차도 그 문학성에 감탄한 나머지 원고를 단테에게 돌려보내며 완성을 독려했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단테는 평소 존경했던 로마 시대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부활절 전후 일주일 동안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한다. “[신곡]은 시로 표현된 단테의 자서전”(R. W. B. 루이스)이다. 그는 두 명의 교황을 비롯한 자신의 적들을 지옥에 던지고, 자신의 친구와 존경하는 인물은 연옥(또는 림보)에 두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천국에 모셨다. 이처럼 당시의 역사와 현실이 곳곳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신곡]을 읽기 위해서는 방대한 주석과 해설을 참고해야만 한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지옥]의 경우에는 사전지식 없이 읽어도 충분히 압도적이며, 단테의 탁월한 상상력이 빚어낸 걸작이다.
단테의 서사시는 [지옥], [연옥], [천국]이 각각 33개의 ‘곡’(曲, canto)으로 이루어졌고, 여기에 서곡을 합쳐 모두 100곡이다. 하나의 ‘곡’은 150행 내외로서 전체 1만 4233행에 달한다. 오늘날은 [신곡]이란 제목으로 유명하지만, 원래 이 세 편을 가리키는 제목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comedia, 희극)]였다. “절망으로 시작되어 희망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였다고 단테는 설명했다. 그러다가 단테의 열렬한 예찬자인 보카치오가 이 작품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디비나’(divina, 신적인)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졸지에 ‘라 디비나 코메디아(la divina comedia),’ 즉 ‘신적인 희극’이 되었던 것이다.
“신곡(神曲)”은 일본의 작가 모리 오가이(森鷗外)가 처음 사용한 일본어 표기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최근에 나온 어떤 번역본에서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라는 원제를 병기하기도 했지만, 우리에겐 ‘신곡’이란 번역 제목이 더 익숙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훗날 발자크는 단테의 ‘신적인 희극’이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묘사한 것처럼, 자신은 인간사의 갖가지 단면들을 묘사한 작품을 쓰겠다는 야심에서 ‘인간 희극’(La Comédie humaine)을 발표했다. 이는 한 편의 작품이 아니라 발자크가 1830년부터 사망 때까지 발표, 집필, 또는 구상한 140여 편의 작품군을 가리킨다.
단테의 업적과 [신곡]이 후대에 끼친 영향
단테의 가장 큰 업적은 오늘날의 이탈리아어를 확립한 것이라 하겠다. 단테의 생애 동안에만 해도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는 저마다의 방언을 사용했다. 그러나 [신곡] 이후로 거기 사용된 피렌체의 말, 즉 토스카나 방언이 공용어나 다름없이 되었다. [속어론](1304)에서 단테는 지식인의 공용어인 라틴어보다 각 지역의 일상어인 속어로 시를 쓰자는 주장을 펼친 바 있었다(물론 [속어론] 자체는 라틴어로 쓴 것이었지만). 단테가 [신곡]을 라틴어가 아니라 일상어로 쓴 까닭은, 그래야만 지식인 말고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또한 보다 현대적인 감각에 맞는 문체를 구사하기 위해서였다.
문학사적인 영향력 면에서 단테는 가장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문학적 성취나 영향력에서는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괴테와 발자크 같은 저명한 작가들과 충분히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해럴드 블룸은 [세계문학의 천재들]에서 “세계 역사에서 단테를 주목하지 않고는 천재를 논할 수 없다. 그는 (…)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풍부한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라고 전제한 다음, “[신곡]과 필적하거나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셰익스피어가 남긴 39편의 희곡 중 가장 뛰어난 20여 편을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고 극찬했다.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헨리 롱펠로, 윌리엄 블레이크, 철학자 랠프 월도 에머슨 등도 단테를 숙독하고 예찬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현대의 시인 중에서는 에즈라 파운드와 T. S. 엘리엇이 특히 단테를 좋아했고, 종종 작품 중간에 인용하거나 영감을 얻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문학자 C. S. 루이스 역시 [신곡]을 애독했고, 아내 조이와의 짧고 슬픈 결혼생활을 회고한 저서 [헤아려 본 슬픔]을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묘사한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역시 “나의 나쁜 버릇은 [신곡]과 [돈 키호테]를 끊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특유의 입담으로 단테를 향한 애정을 과시한 바 있다.
단테의 영향력은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지옥]의 한 장면을 묘사한 [단테의 조각배](1822)로 처음 명성을 얻었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1880~1917)도 [지옥]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며,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도 그 조각의 일부다.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님]이라는 아리아로 유명한 푸치니의 오페라 [자니 스키키](1918)는 [지옥]의 한 대목에서 영감을 얻었다. 프란츠 리스트는 [신곡]을 소재로 [단테 교향곡](1856)을 쓰다가 “어느 누구도 천국의 기쁨을 음악으로 묘사할 수는 없다”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만류로 ‘지옥’과 ‘연옥’까지만 쓰고 ‘천국’을 단념했다. 어쩌면 바그너의 주장이야말로 이미 그곳을 시로 노래한 단테에 관한 역설적인 찬사는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