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
파란불이 켜졌다. 맥도날드 앞,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지호가 업어달라고 했다.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등을 내밀자 냉큼 내 목을 끌어안더니 코알라처럼 등에 딱 밀착하여 업혔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이 따뜻한 느낌이 좋다. 두 손으로 깍지를 끼어 녀석의 말랑한 엉덩이를 받쳤다. 둥실둥실 흔들며 건너고 있을 때, 저편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은 차가 달려왔다.
‘저 차는 왜?’ 하는 순간, 신호에서 멈추지 않은 차는 내 앞을 빠르게 지나서 맞은편에서 우회전하던 두 대의 차를 들이받으며 빙그르르 돌았다. 우지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의 문짝은 휴지처럼 구겨지며 떨어져 나갔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이었다. 딱 한 걸음 차이였다. 아이를 업느라 조금 머뭇거렸던 것 때문에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그냥 손잡고 건넜다면 내게 덮칠 사고였다. 나는 길 한가운데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침에 딸은 병원 간다며 잠시 아이를 맡겼다. 아이와 함께 그림도 그리고 밀가루 반죽 놀이도 했다. 마당에 나가서 풀꽃을 뜯어 소꿉놀이를 하다가 시들해질 즈음 놀이터에 가고 싶어 했다. 집 근처 맥도날드에 가자고 했다. 어른 걸음으로 5분 거리지만 힘들 것 같아서 업어 줄까 했더니 그때는 자기는 이제 아기가 아니라며 의젓하게 걸어갔다. 햄버거 하나 사 먹고 맥도날드 정글 틀로 기어 올라가 고개를 내밀고 까르르 웃었다. 까마득한 꼭대기로 익숙하게 오르는 아이를 보며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때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에 도착했는데 어디 있냐고 물었다. 길 건너편 맥도날드에 있다고 하자 딸은 이쪽으로 오겠다고 했다. 놀고 있던 아이를 채근해서 집으로 향해 돌아오던 중이었다. 길 건너편에서 마중 오던 딸이 사고 현장을 보고 하얗게 질려서 달려왔다.
“엄마! 괜찮아? 지호야 괜찮아?”
등에 업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랐던 아이가 그제야 눈이 동그래져서 엄마를 맞았다.
놀란 마음을 다스리며 집에 돌아왔다. 첫날엔 그저 덤덤하게 지났는데 며칠이 지나도 그날의 순간을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벌렁거렸다. 기껏 외손자와 잘 놀고 오다가 아차 하는 순간 아찔한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얼마 전 TV에서 외손자를 태우고 운전하던 할머니의 자동차 급발진 사고 뉴스가 있었다. 블랙박스에는 마지막 순간의 상황이 생생하게 저장되었다. 절규하듯 다급하게 손자의 이름을 외치던 할머니의 목소리는 충격이었다. 안타깝게 손자는 죽고 할머니는 중상을 입었다.
‘세상에, 저이는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살까? 살아도 사는 게 아니겠다.’ 뉴스를 보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 집 근처는 차가 혼잡하지는 않지만, 웨스턴 하이웨이에 인접한 집이라서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 이유로 매일 새벽 남편이 출근할 때, 대문 앞에서 남편의 차가 도로에 안전하게 들어서서 떠나는 것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아이들이 놀러 오면 행여 놀다가 길로 뛰어나갈까 봐 대문을 걸어두며 늘 조심을 했다. 이젠 아이와 맥도날드 쪽으로 다시는 가지도 말아야지 마음먹지만, 그 길이 문제가 아니라 사고는 살면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도 찰나에 죽음을 비껴간 일이 또 있다. 아들과 함께 동네 쇼핑센터에 갔을 때였다. 친구가 일하던 가게에 잠시 들렀다가 아들이 월남 빵을 먹고 싶다고 해서 푸드코트에 있는 월남 빵 파는 가게에 갔다. 빵을 사서 가게 앞 테이블에서 먹으려고 앉았다가 그냥 집에 가서 먹자며 돌아왔다.
집에 온 후 얼마 안 되어 사이렌 소리가 나고 한바탕 동네가 들썩였다. 쇼핑센터 쪽으로 소방차와 앰뷸런스가 끝도 없이 달려갔다. 방금 있다 왔는데 무슨 일인가 했더니 쇼핑센터에 불이 난 거였다. 나중에 친구가 전한 이야기로는 우리가 떠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바로 우리가 앉았던 빵집 앞에서 가스폭발로 일어난 사고였다.
마당 한구석에 지호가 가지고 놀던 민들레의 노란 꽃잎과 수북이 쌓아둔 반질반질한 돌멩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호가 좋아하던 유난히 반짝거리는 돌멩이를 손에 쥐고 소중한 무엇이나 되듯 쓰다듬고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들도 모두 새롭게 보였다. 빨래를 하려고 세탁물을 거두어 세탁기에 넣다가 늘 뒤집혀 있어 신경 거슬리게 하던 남편의 양말도 오늘만은 괜찮다. 거실 바닥에 그가 벗어던져 널브러진 옷가지도 그저 툭 털고 챙긴다. 그동안 사고를 잘 비껴갔지만 아무 때고 예고 없이 훌쩍 세상을 떠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익숙하던 것들이 그저 계속 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순간 아득히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김미경 / 2009년 ‘문학시대’ 수필 등단. 수필집 ‘배틀한 맛을 위하여’, 공동 수필집 ‘바다 건너 당신’.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