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력한 인간이 자유의지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 아르미니우스는 그 답을 ‘선행은혜’(prevenient grace) 개념에서 찾았다. 아르미니우스는 선행은혜의 개념과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유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은혜가 없으면 참되고 영적인 선행을 완성하거나 시작할 수 없다.... 은혜는 마음을 조명하여 성정을 적절히 배열하고, 의지가 선을 행하도록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은혜는 선행하여 함께 가고 뒤따른다. 은혜는 우리가 의지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도와주며 움직이게 하여 우리의 의지가 헛되지 않도록 협력한다.... 은혜는 구원을 시작하고 증진시키고 완성시킨다.
하지만 예지예정은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결정에 의존된 예정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인간의 믿음에 우선권이 주어지듯이, 믿음을 떠나는 인간의 결정에 하나님의 구원사역도 실패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이는 구원의 시작과 끝을 열고 닫는 일이 하나님 편에 있다기보다 인간 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논리가 극단화되면 이신론(deism)이 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또한 자유의지를 가능하게 만드는 선행은혜 개념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드러난다. 선행은혜가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과, 이 선행은혜만으로는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그 역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어떤 점에서 보면, 선행은혜는 칼뱅주의의 “전적 타락”의 강도를 약화시키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는 처음부터 전적 타락을 부정하는 펠라기우스주의와 실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혹을 받는다. 물론 중요한 차이점은 있다. 그것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신학이 “자연적 자유의지”(natural free will)에 강조점을 두지만,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divine grace)에 초점을 둔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이 선행은혜의 개념이 얼마나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웨슬리주의에서 말하는 선행은혜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선행은혜는 그리스도의 보편성과 그의 이끄는 은혜(drawing grace)와 관련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롭게 충분히 비출 세상의 빛이다(요 1:9; 3:19-21). 둘째, 선행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딛 2:11)에서 나오지만 선택의 주체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조건적 은혜다. 셋째,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부분적 지식, 하나님을 찾으려는 욕망, 선악에 대한 부분적 지식, 양심(롬 2:12-15) 등과 관련된다. 사도행전에서 지나간 세대에 자기를 증거하신 것이나(행 14:16-17);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것(행 17:27), 그리고 미가서에서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미 6:8)라고 하는 대목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보이신 선한 것 등이 선행은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근거는 일반계시의 차원에서도 해소될 수 있는 것이어서 직접적으로 선행은혜를 지지하는 성경구절로 보기 어렵다.
아르미니우스가 제시한 선행은혜 개념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양 극단을 절충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대안”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것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는 있지만, 이 선행은혜 개념은 성경적 근거가 부족할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풀어야 할 여러 의문이 남아있다. 따라서 아르미니우스의 선행은혜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풀어내는 데 완전히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그가 아우구스티누스-칼뱅 전통의 전적 부패 교리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39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