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한 목자라
본 문 / 요한복음 10장 14∼15절
주 제 / 선한목자는 양을 알고, 양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
작성일 / 2022년 12월 18일. 대림절넷째주일. (№ 22-51)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4∼15)
Ⅰ 우리에게 임하시는 예수님의 정체 (요 6:51; 10:14; 12:46)
오늘은 ‘대림절넷째주일’이다. “예수여 내 마음에 임하소서!”, “예수여 내 삶에 임하소서!” ‘예수의 강림을 고대하는 신앙’을 한껏 고취시키는 절기이다. 이와 같은 대림절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다. 만약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나, 예수님에 대하여 오해를 한 경우 가짜 예수가 찾아와도 그를 믿고 따르다가 결국 영혼을 망치게 된다. 그러니 내가 고대하는 예수 즉, 성경이 계시하는 예수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그 분에 의해 가꾸어지고, 그 분의 나라로 인도될 수 있다.
예수님은 대림절첫째주일에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 …”(요 6:51a)고 말씀해주셨다. ‘살아있는 떡’이기 때문에 그 떡을 먹은 사람 안에서 살아 역사한다고 했다. ‘죽을 사람’을 ‘영생하는 사람’으로 가꾸어주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떡을 먹되, 회개로써 먹어야 하고, 말씀으로써 먹어야 하고, 또한 십자가로써 먹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대림절둘째주일에는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요 12:46a)라고 말씀해주셨다. 우리가 혼돈하고 공허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황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게 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빛의 자녀가 된 우리는 빛의 자녀답게 빛 가운데서 착하고, 정의롭고, 진실하게 살아야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대림절넷째주일인 오늘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요 10:14a)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은 왜 당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 하셨는지, 그리고 선한목자를 맞이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려고 한다.
Ⅱ 선한 목자 예수 (요 10:14∼15)
예수님은 왜 당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 하셨을까? 요한복음 10장 1∼21절의 주제는 ‘삯꾼목자와 선한목자’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삯꾼목자의 정체’를 공개하셨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요 10:12∼13). 삯꾼목자의 정체는 한 마디로 ‘가짜’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의 됨됨이를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리가 양에게 다가온다면 진짜목자는 이리와 싸워서 양을 지킨다. 그러나 가짜목자는 자기 살겠다고 도망친다. 그렇게 자격도 없고 의지도 없는데 왜 양들 곁에 있었을까? ‘삯’을 받기 위함이다. 가짜목자의 주관심사는 ‘양’이 아니다. ‘삯’이다. 그래서 양은 죽든 말든 자기 살겠다고 도망친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만 백성들의 고난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기들 권위를 높이는 일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니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삯꾼목자’, ‘가짜목자’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말씀하신 것은 “그들과 대비되는 목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한목자’는 ‘삯꾼목자’와 질적으로 다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목자’는 어떤 목자일까?
첫째, 선한목자는 양을 아는 목자이다. (요 10:14∼15a)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요 10:14∼15a) 예수님은 당신이 ‘선한목자’인 이유는 양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알다’(기노스코)란 말은 ‘체험이나 숙달을 통해 아는 지식’을 뜻한다. 들어서 알거나, 배워서 아는 지식이 아니다. 한 덩어리가 되어서 함께 뒹굴면서 알게 된 지식이다. 당신께서 창조하시고, 당신께서 그 안에 거주하심으로써 아는 지식이다. 구지 비유를 하자면,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 그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면서 그 자동차의 모든 것을 아는 것과 비슷하다. 엔진소리만 들어도 컨디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케어를 해 준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숨소리만 들어도 삶이 어떤 상태인지, 기도만 들어도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금방 안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가꾸어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알 듯 예수님이 양을 아신다는 것은 자기를 아는 것처럼 낱낱이 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한목자’이다.
‘삯꾼목자’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비밀이 많다. 그러나 ‘선한목자’ 비밀이 없다. 당신의 정체를 양들에게 낱낱이 공개한다. 이것이 삯꾼목자와 선한목자의 다른 점이다. ‘베드로’가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b)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b)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정체는 베드로가 알아낸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해주심으로써 알게 된 사실이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예수를 가르친다. 성경을 읽을 때에 예수의 마음과 예수의 생각을 가르치고, 기도할 때에 예수의 능력을 가르친다. 우리가 예수의 마음과 생각을 알고, 예수의 능력을 의지해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성령의 계시를 받아서 예수를 아는 사람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당신을 알게 하시니 ‘선한목자’이시다.
나를 모르는 목자는 삯꾼목자이다. 내가 모르는 목자도 삯꾼목자이다. 나를 알고, 내가 아는 목자가 선한목자이다. 우리는 지금 나를 아시고, 나도 아는 선한목자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둘째, 선한목자는 목숨 버려 자기 양의 구원하는 목자이다. (요 10:15b)
“나는 선한 목자라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b). 양을 잡아 자기 목숨을 연명하는 목자는 많지만, 자기 목숨을 버려 양의 생명을 구원하는 목자는 쉽지 않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그런 목자가 있었다. ‘다윗’이다.
이스라엘 장수들이 ‘골리앗’에게 겁을 먹고 벌벌 떨고 있을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현장에 와있던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자원한다. 사울은 당연히 거절한다. “장수들도 두려워하는데 너 같은 어린 아이가 어떻게 싸우겠느냐?” 그러자 다윗이 이렇게 말한다. “…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 17:34b∼35). 보통 사자나 곰이 새끼 양을 잡아가면, 잡혀간 새끼 양을 포기하고 남은 양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다.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다.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이 장면에서 누가 보이는가? ‘엄마’이다. 엄마는 곰이나 사자가 얼마나 센지 따지지 않는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는다. 맹수에게 물려가 벌벌 떨고 있을 자식만 생각한다. 그래서 물불 안 가리고 달려가서 초인적인 힘으로 맹수를 가격하고 자식을 토해내게 한다. 다윗은 맹수와 싸워서 새끼를 구해내고야마는 ‘엄마’였다. 이와 같은 엄마의 마음을 품은 목자가 ‘선한목자’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잘 알고 있었다. 곰의 발톱이고, 사자의 아가리인 것을 알고 있었다. 모욕과 수치와 조롱과 고통으로 가득한 자리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새끼를 구하겠다고 십자가로 뛰어들었다. “인자가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 20:28). 십자가로 뛰어들어서 자기 새끼 구하려고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당신을 가리켜 ‘선한목자’라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엄마의 마음을 품은 ‘선한목자’이다.
Ⅲ 선한 목자를 기다리는 태도
그럼 선한목자 예수님은 어떤 태도로 맞이해야할까?
자기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겨야한다. 예수님이 아는 영혼이다. 예수님을 아는 영혼이다. 예수님이 목숨 버려 구원한 영혼이다. 이보다 귀한 보물이 어디 있는가? 자기 영혼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쓰다듬어주고 닦아주어야 한다. ‘괜찮다’, ‘수고했다’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
이웃의 영혼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웃의 영혼도 예수님이 아는 영혼이다. 예수님을 아는 영혼이다. 예수님이 목숨 버려 구원한 영혼이다. 이보다 귀한 보석이 없다. ‘괜찮다’, ‘수고했다’ 격려하고 응원해야 한다. 그렇게 자기의 영혼이 귀함을 알고, 이웃의 영혼도 귀함을 아는 마음이 선한목자를 기다리는 마음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 영광교회 성도들 자신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또한 이웃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김으로써 선한목자를 맞이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