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 노트
고향, 그 뿌리의 파편들
오명현
다 닳은 화투짝으로 민화투를 쳤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민화투라서 밋밋하게 그냥 치는 화투놀이가 아니었다. 엄연한 내기였고 노름이었다. 칙칙한 부엌에 놓인 성냥곽에서 성냥개비 한 줌을 주머니에 담고 모이기로 했던 곳으로 내달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밑천 삼아서 따 오는 날이 많지 않았나 싶다.
줄어들었던 성냥곽에 불리어 온 성냥개비를 채워 넣으면서 흐뭇했던 기억은 온전한데,
분명 울고불고 했을 잃은 자에 관한 기억은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것은 내 고향,
어느 겨울날 기억의 파편 중 하나이다.
늦어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의 기억이다. 노름의 기질을 타고난 때문은 아닐 테고,
이렇게 글로써 당시의 정황을 표현할 수 있음은 화투짝에 그려진 열두 달 그림들의 마력이 아니었을까, 라고도 생각해 본다.
많은 세월이 흘렀으나 기술의 발전으로 화투짝의 재질만 진화했을 뿐,
그것에 새겨진 그림은 옛날 그대로인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내 기억의 원본이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복원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라고도 하겠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한 뼘이나 되는 철사의 한쪽 끝을 망치로 두드려 날을 세우고, 동그랗게 다듬으면 메주콩에 구멍을 팔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독극물인 싸이나(당시에는 청산가리를 그렇게들 불렀다)를 콩 속에 집어넣고 초로 밀봉을 하면 감쪽같이 꿩의 먹이가 되었다.
마을 주변의 밭이나 야산에 뿌려 놓으면 꿩의 사체를 종종 주워 올 수 있었다. 털을 뽑고 내장은 버리고 꿩의 살코기를 도막 쳐서 조림으로 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이것은 내가 주연이었던 사건은 아니다.
형뻘 되는 사람들이 주연이었고, 내 또래는 아마 콩이나 철사 나부랭이를 가져감으로써 사건의 일원이 될 수 있는 행운을 얻었을 것이다.
어른들에게 사랑방이 있었듯이 어른들보다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사랑방이 있었다. 어쨌든 아이들의 일들은 주로 과수댁에서 벌어졌다.
난리 통에 홀로된 것인지는 헤아려보지 않았지만 동네의 가호에 비하면 과수댁은 많은 편에 속했다. 때문에 집을 비우는 과수댁은 늘 있기 마련이어서 아이들의 사랑방은 흡족한 편이었다.
스마트폰 시대가 아닌 그때에도 아이들 간의 정보교환은 꽤 체계적이고 효과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방을 구하지 못해 안달복달했던 일들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리 없다. 아이들의 사랑방이 과수댁에 국한된 건 아니었다. 십리 밖에 있는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어른들의 사랑방을 독차지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른들에게는 5일장이 잔칫집에 들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른들의 사랑방은 종일 비어 있었다.
어둠이 깔린 뒤에야 어른들은 고주망태가 되어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날은 마른 호박잎을 둘둘 말아서 불을 붙이고는 입으로 빨아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어른들의 사랑방에 가득한 퀴퀴한 담뱃진 냄새는 엽연초를 피우는 어른들을 흉내 내도록 아이들을 인도한 셈이었다.
누구나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고향에 관한 잔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폐기해 버리고도 싶은 것이 있을 수 있겠으나 다수는 아련한 잔상으로 남아 꾸려가는 삶에 성원이 되고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나의 경우 고향은 두 개인 셈이다.
초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치자마자 전학을 하였으니 나를 자라게 해 준 지리적 고향은 두 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향의 원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은 태어나서 7년 동안 자란 곳이리라. 그것은 태어남의 막중함 때문이겠고, 의식 또한 물렁물렁해서 많은 것들이 들어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긴 했어도 7년이라는 세월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나의 삶에 성원이 되고 촉매제가 되어 오늘에 이르게 한 고향의 잔상을 재현해 보고 싶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그 잔상을 그리면서 나의 뿌리이며 자궁인 고향보다도 더욱 고향 같은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또한 놓칠 수 없질 않은가.
내를 거슬러서 한참을 들어가야 닿을 수 있는 고향은 막다른 길이다.
들어가는 길만 있고 정방향이나 좌우로는 빠져나갈 수 있는 평탄한 길이라고는 없다. 산은 높지 않으나 수평으로 골이 깊은 곳이다. 사람은 한 길로만 다닐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재를 만들었다. 덕룡재, 덕림재 하는 식으로 산을 넘으면서 있는 마을의 이름 혹은 넘어가서 있는 마을의 이름을 붙이면 그만이었다. 지형이 그러해서 마을은 꽤 폐쇄적이었다.
길이 닦여 있어야 차가 들어올 수 있고, 전봇대가 있어야 전기가 들어올 수 있을 터인데 그럴 수가 없었다. 골이 깊은 탓에 톡톡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렇다고 문명이라는 요물은 가만있을 리 없다. 앞서 이야기한 성냥이 들어오고, 독극물이 들어왔으며, 종이가 들어오고, 사서삼경이 들어왔다. 사서삼경이 들어왔으니 서당이 있어야 했고, 그곳에서는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로 연유하여 식자연하는 무리가 생겨나고,
공맹퇴율과 서예로써 우열 다툼이 소리 없이 치열했고 그것은 마치 생사가 걸린 암투인 듯도 했다.
반상의 구분법이 정당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반과 상 사이에 존재하는 법은 엄격했다. 상이라 칭해지는 계층이 살아가는 방법이 어린 눈에도 굴종으로 비쳐졌고, 반이라 칭하는 무리들이 상들에게 가하는 언어폭력이나 물리적인 폭력은 부당해 보였다. 우리 집의 경우 새경을 받고 고용된 머슴은 상에 속했을 것이다. 머슴에게는 하대를 하고, 머슴은 힘든 일을 하고, 머슴은 밥을 많이 먹고 하는 것 외에는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반과 상의 구분은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머슴이 우리 집을 떠나야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골목이 소란해진 것이다.
나무하러 간 사람이 산에서 하는 일이란 양지바른 곳에서 낮잠을 즐기는 것 외에는 나무를 하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뭇짐 없이 집에 돌아오는 일이 있어 본 적이 없고, 우리 집 헛간에는 땔감이 항상 가득 쌓여 있었다.
남들이 나무를 베어서 마르도록 널어놓은 것들을 거두고 묶어서 지게에 지고 오면 그만이었다.
소란은 바로 언어폭력이었고,
물리적인 폭력이 뒤따랐음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머슴은 떠났다. 선녀의 옷가지를 훔쳐 와서 신분상승의 꿈을 꾸는 훨씬 바람직한 결말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고향산천의 4계절은 뚜렷하고 어김이 없었다. 봄은 메마른 때가 많았다.
메마른 중에도 들판에서는 달래와 냉이가 쑥쑥 올라왔고,
산에는 참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또래 셋이서 괭이와 호미를 들고 달래를 캐러 간 적이 있었다. 먼저 본 아이가 손으로 캐려 할 때 한 아이가 괭이를 높이 쳐들었다.
비키라고 했지만 달래를 먼저 본 아이는 고집을 부렸다. 괭이가 그의 옆 이마를 스치며 떨어졌다.
붉은 피가 흘렀다.
피를 흘리던 아이는 울면서 사색이 되어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의 한 아이와 나 역시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기억은 거기까지. 사후에 어떤 의료적 조치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진한 피는 지금도 선명하다.
메마른 봄에 들판을 헤맸듯 진달래 핀 산을 부지런히 쏘다녔다. 그래서 여린 진달래꽃을 손으로 마구 훑어서 허천나게 먹었다. 달래와 냉이를 캐고,
진달래를 훑어 먹고,
보리 서리를 하는 일들이 허기에서 비롯된 듯하지만 배를 곯았다는 것으로 나의 유년이 기억되지 않는다. 어른들에게서 듣는 과거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내 유년에 투사해 보면 배를 곯았어야만 앞뒤의 아귀가 들어맞는다. 배곯았던 사실이 분명 존재했던 것인데 내 기억에서 지워졌다면 그것은 어른들의 배려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에게만은 배고픔이나 가난 같은 건 물려주지 않으려는.
골이 길어서 군계郡界를 이루는 내를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으로 마을이 들어섰는데 그중의 하나가 내 고향이다.
비가 와서 내를 건널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오리 넘게 떨어져 있는 학교에는 갈 수 없었다. 다만 힘센 장정들의 다리로 건널 수 있는 때는 그들의 등에 업혀서 내를 건너 학교에 갔다. 갈 수 없으면 없어서 좋았고,
갈 수 있으면 있어서 좋았다. 모내기가 막 끝날 무렵이면 길가의 낮은 산에는 풋감이 무더기로 떨어져 있었다. 길까지 굴러온 감도 있었다. 아침에 등교하면서 감을 주워 무논에 묻어 놓으면 하교할 즈음에는 떫은 맛이 우려지고 먹을 만했다.
묻어 놓은 자리를 잘 기억하지 못해 허탕을 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잘 기억하지 못해서만 허탕을 치는 건 아니었다. 먼저 지나간 무리들이 먼저 파내서 먹어버리면 그것도 허탕에 속했다. 허탕이건 말건 감을 줍는 일이 좋았고, 무논에 묻는 일이 그저 좋았다.
내 유년은 한국전쟁이 멈춘 때로부터는 꽤나 멀다.
농민잡지에서 윤보선의 사진을 보고, 흙으로 된 바람벽에서 군복을 입은 박정희의 사진을 보았던 때가 취학 전이었으니 연대기적으로 따져볼 필요조차 없다. 그렇지만 마치 내가 전쟁 시기를 관통했던 것인 양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방 덕이다.
피란을 가고 공습경보가 울리고 동네 주민들을 삼밭에 세워놓고 총살했던 일들이 모두 사랑방에서 얻어들은 것들이다. 그런 일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사랑방에 모인 어른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직접 체험한 사건들을 실감이 나도록 잘 전개한 탓이겠고, 수없이 되풀이하여 얻어들은 탓이기도 하다. 아무튼, 병목 같은 길 또는 문이 하나밖에 없는 고향에도 문명이 스며들 듯 전쟁 또한 비켜가지 않았다. 아군이란 자들이 들어와서 적과 내통한 자를 찾아냈다. 적이란 자들이 들어와서 아군과 내통한 자를 지목하게도 했다. 그것들이 되풀이되는 동안 동네 주민들은 서로를 아와 적으로 나누고 있었다. 속으로만 그랬을 뿐 겉으로는 멀쩡했다.
어렴풋해서 입 밖에 낼 수 없었고,
명확한 증거가 있었어도 입 밖에 낼 위인들은 거의 없었다.
적과 내통한 자들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아군과 내통한 자들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아마 이도저도 아닌 회색지대에 있다가 아군과 내통한 자 때문에 목숨을 건지셨던 모양이었다. 결국 전쟁이란 것은 아도 적도 회색지대도 안전하게 목숨을 지켜주지 못하는 괴물이고 요물이었다. 누군가를 지목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슬프고도 슬픈 전쟁의 역사는 사라지지 않을 명제였다. 그렇다. 양민들은 이념의 좌편 우편을 속속들이 알아서 좌우로 갈라선 것은 아니다. 하나를 택해서 서다 보니 그냥 좌가 되고 우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태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삶으로써 존재했던 것인데 곤욕의 끝과 속은 한없이 길고 깊었다.
그냥 삶이었을 뿐인 사람들에게 풍경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꼭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결국 동네에서도 혼줄을 놓은 사람이 몇 있었고, 다들 아는 사실이면서도 모두 쉬쉬하고 있었다.
이렇듯 고향은 그곳에서 태어난 자들에게 성원이 되기도 했고, 곤욕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
손꼽아 헤아리기도 아득한 먼 아버지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수많은 성원과 곤욕이 교차하면서 달이 가고 해가 퇴적되었을 것이었다.
인구의 도시 집중이 가속화되면서 이미 고향은 쇠락했고, 들어서는 길목에는 공적비와 열녀비만 즐비하다.
이산저산에는 누구네 자손이 꾸민 봉분과 묘역이 더 크고 넓은가를 다투고 있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보다 더 득세하여 유택과 비석들의 번지르르함이 극에 다다른 느낌이다.
그래도 전기는 끌어와야 했으므로 전봇대의 위세는 당당했고, 경운기며 차는 다녀야 했으므로 냇가에 축대를 쌓고 다리를 놓았다. 맨발로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머루를 따먹다 보면 하루가 갔었다. 냇가에서 자생했던 머루나무들은 축대에 밀려났다.
수도 없이 밟고 건넜던 징검돌은 콘크리트로 된 다리에 밀려났다.
꿈속에서조차도 신발이 물에 젖을 일은 없었다.
동트기 전에 누님은 보와 논 사이에 있는 물풀 우거진 수로에서 한 사발도 넘게 토하를 잡곤 했었다. 그때 그 수로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