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도성은 유교의 이념에 해당하는 인의예지신 다섯개 가치가 둘러싸고 있다
정동의 흥인지문, 정서의 돈의문, 정남의 숭례문, 정북의 숙청문(1523년 이후 숙정문으로 개칭, 그러나 원래 북쪽엔 숙정문 대신 홍지문이 정식 북문이다 ) 등 4개 성문과 도성 한가운데 보신각종이 그것을 말해준다.
흥인지문은 태조 때 도성을 수축하면서 건설되었는데, 1396년(태조 5) 1차 축성 때 경상도 안동과 성주 사람들이 동원되어 동대문 일대의 축성 공사를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이듬해 4월에 완공되었다. 이어 1451년(문종 1)에 중수를 시작하여 1453년(단종 1)에 끝냈다.
이 문의 현판은 오행(五行)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을 포함하며, 동대문 일대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바로 남쪽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之’자를 보강하였다고 한다.
동대문의 중층 누각은 1869년(고종 6)에 새로 지은 것인데, 조선왕조 말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물로 건축양식의 시대적 변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흥인문은 주위 지형의 열악한 조건을 보완하고자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이 옹성은 문 앞쪽에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축성되어 옹성 안에 들어온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였다.
돈의문은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나면서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경희궁 서쪽 언덕 지점에 위치하여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422년(세종 4) 2월에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新門]’이라 불리게 되었다. 돈의문은 의주(義州)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볼 수 없지만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돈의문의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글씨는 1711년(숙종 37)에 조윤덕(曺潤德)이 썼고 1749년(영조 25)에 영건소에서 개조했다고 뒷면에 음각되어있다.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蔓草川)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서울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남대문의 건축은 홍예(虹霓)와 문루 등 그 구조에 특별히 유의하였는데 1396년에 시작하여 1398년(태조 7) 2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여론에 따라 다시 건축하였다. 이때의 숭례문이 오늘에 전하는 것인데 1479년(성종 10)에 중수되었다. 한편 1962년 개수 공사 때 세종과 성종 때 개축 또는 중수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橫額)이 아니라 종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禮)’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양의 조산(朝山)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산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있다.
숙청문은 한양의 주산(主山)인 북악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였으나 그 규모는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소문(小門)의 규모를 따랐으며 오랫동안 문루마저 갖추지 못하였다. 숙청문의 원래 자리는 지금 자리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옮겨졌다.
현재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으로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21년 홍수로 오간대수문과 같이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한북문이라고도 부른다.
그렇게 인의예지가 사방에서 바로설때 비로소 믿음이 생긴다하여 도성 한가운데 보신각종이 위치해 있다
보신각(普信閣)은 종로구 관철동에 있는 전통 2층 한옥 누각이다. 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종루로서 정면 5칸, 측면 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1396년(조선 태조 5년) 창건했다가, 1869년(조선 고종 6년)과 1979년 8월에 재건했다.
여기는 남산골한옥마을이다 원래 남산은 가난한 선비들인 남인 선비들이 주로 머물던 가난한 마을의 상징이였는데 조선말 일제강점기 이곳마저도 돈 많고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서인들의 터가 되어 현재까지 이른다 돈많은 서인들은 북촌한옥마을이 그들의 터전인데 이곳까지 마수를 펼치고 있다
1998년 조성된 남산골한옥마을은 남산 북측 옛 수도방위사령부 부지 총 79,934m²(24,180평)에 한옥 5동, 전통공예관, 천우각, 전통정원, 서울남산국악당, 새천년타임캡슐 광장으로 구성되어 시민과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에서 한국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체험거리를 만나볼 수 있으며, 남산 자락을 따라 전통조경 양식으로 조성된 계곡과 정자, 각종 화초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옛 가옥을 복원해 놓은 남산골한옥마을 남산골한옥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연못 청학지와 그 곁으로 천우각이 있다. 천우각 광장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서울 곳곳에 있던 한옥이 이전·복원되어 옛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볼 수 있게 한 예스러운 공간이 나타난다.
모두 다섯 채의 한옥으로서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관훈동 민 씨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옥인동 윤 씨 가옥이 있다. 이 중 건물 이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은 옥인동 윤 씨 가옥만 새 자재를 사용해 복원했고 나머지 건물은 종래의 집 부재를 그대로 이전했다.
전통정원 가장 높은 곳에는 서울정도 600년을 기념하고 400년 후 서울정도 천년을 기대하며 1994년 당대의 기억을 매설한 서울천년타입캡슐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즐기는 다양한 체험거리 남산골한옥마을에는 다양한 체험거리가 마련되어 있다. 한옥 다섯 채를 활용하여 한옥실내 공간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한국 전통문화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다.
남산골한옥마을에서 내려와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으로 이동했다 오늘도 역시 북촌한옥거리에는 관광 온 외국인들로 인산인해이다
요즘 서울이 그 어떤 지구촌의 도시보다 훌륭하다 외국인들이 평해 이렇게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로 북적인다
나는 정독도서관에 들렀다 역시 가을을 즐기고자 나들이온 시민들과 외국인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시간을 보내다 기차시간에 맞춰 천안으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