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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웅은 다가오는 극심한 고통 앞에서 신체적 감각을 마비시키는 음료를 거부하는 의연함을 동일하게 보여줍니다.
2.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구원자의 부재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느낀 극심한 버림받음과 조롱은, 헥토르가 신들에게 버림받고 대적자에게 야유를 당하던 비극의 순간을 오마주합니다.
헥토르가 자신을 도울 신(아폴론)과 동료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절망했듯, 예수의 외침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엘리야가 구원하러 올 것이라 착각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이이어 두 사람은 모두 크고 슬픈 외침과 함께 숨을 거둡니다.
3. [핵심 통찰] 백부장의 고백은 찬사인가, 조롱인가?
마가복음 15장 39절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백부장의 말은 전통적으로 ‘이방인의 첫 신앙고백’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맥도널드 교수는 《일리아스》와의 문학적 비교를 통해 이 문장이 승리자의 ‘멸시와 조롱(Gloat)’이었다는 파격적이고 유용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아킬레우스는 죽은 헥토르의 시신 곁에 서서 적을 도륙했음을 자랑하며 외쳤습니다.
“아카이아의 아들들아, 보라! 트로이인들이 신처럼 숭배하던 이 자를 우리가 마침내 죽였도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참으로 이 사람은 신의 아들이었구나!(A likely story, this mortal was a son of a god!)’”
당대 로마 백부장의 시선에서,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 죄수는 결코 제우스나 로마 황제 같은 ‘신의 아들’이 될 수 없었습니다. 즉 백부장의 대사는 아킬레우스가 죽은 헥토르의 시신을 보며 “신처럼 추앙받던 놈이 허무하게 죽었구나” 하고 짓밟았던 수사학적 조롱을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조롱을 텍스트에 남김으로써, 세상의 눈에는 조롱거리에 불과한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참된 구원의 완성이라는 역설적 진실을 극적으로 고발합니다.
4. 예루살렘 여인들의 통곡과 도성의 멸망
누가복음 23장에서 예루살렘 여인들이 예수를 향해 통곡하는 장면 역시, 헥토르의 죽음 앞에 옷을 찢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던 트로이 여인들(헤카베, 안드로마케)의 모습을 오마주합니다.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from top to bottom)” 찢어진 사건(막 15:38)은, 헥토르의 죽음으로 트로이 도성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파멸할 것임을 암시했던 호메로스의 숙명적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헥토르의 죽음이 트로이의 몰락을 가져왔듯, 예수의 무고한 죽음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멸을 예고합니다.
[결론] 비극적 숙명을 뚫고 나온 우주적 사랑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수난을 기록하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22권을 끌어온 이유는 명확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비극적인 영웅이었던 헥토르는 잔혹한 아킬레우스의 칼날과 신들의 외면 속에서 무력하게 죽어갔고, 그의 죽음은 트로이의 참혹한 멸망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은 그 비극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와 완전히 새로운 신학적 역전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헥토르처럼 외롭게 버림받고 세상의 백부장에게 조롱당하며 죽임을 당하셨지만,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한 긍휼을 잃지 않으셨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유혈 낭자한 영웅주의의 비극을 은혜와 구원의 서사로 완성해 내셨습니다.
성경의 수난 기사를 문자 그대로의 사실성 프레임으로만 읽는 데서 벗어나 당대의 문학적 언어로 재발견할 때, 우리는 제국의 폭력과 비극을 넘어서는 복음의 대담한 승리를 비로소 마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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