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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애벌레 소유의식, 나비 소유의식>의 줄거리 :
소유의식은 '나는 ~을 가졌다'라는 의식입니다. 혹은 '~을 가지고 싶다'라는 욕구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소유의식은 사람이면 반드시 마음에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면서 동시에 참 좋은 것입니다. 다만 그 소유의식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우리 마음은 애벌레처럼 이 땅을 기어다니거나 아니면 나비처럼 훨훨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애벌레처럼 땅을 기어다니는 소유의식이 얼마나 다양한 걸림과 방해를 맞이하게 되는가를 보여주십니다. 한 마디로 땅을 기는 소유의식으로 인해서 저주받은 삶은 완성됩니다. 그러니 하늘을 나는 소유의식을 가지라는 촉구의 말씀입니다.
애벌레 소유의식, 나비 소유의식
(출애굽기 22:1~31)
1.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2.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3.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4.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6.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
16.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17.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
18.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19.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20.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본문에서는 특별히 소유와 관련된 법규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소유 자체에 대한 언급은 아니더라도 전체적으로 소유의식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6절까지는 도둑질의 처벌과 배상에 대한 말씀이고, 7~15절까지는 물건을 신뢰할 사람에게 맡겼을 때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한편 16~20절까지의 말씀은 얼핏 소유와는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이 모든 내용은 소유의식과 연결됩니다. 21~27절까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조항들 또한 소유의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28~31절에서는 소유와 관련된 부분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의미의 초태생을 바치는 규정을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을 중심으로 “애벌레 소유의식, 나비 소유의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애벌레는 땅을 기어다니고 나비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애벌레가 땅을 기어다닐 때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산처럼 거대한 방해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공중을 날아다니는 나비는 땅에 있는 어떤 대상도 방해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러한 애벌레와 나비의 모습을 소유의식의 관점에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 제8계명은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도둑질 계열의 범죄가 소유 현상에서 비롯됨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채워져서 배부르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뱀처럼 배를 땅에 붙이고 뒹굴 때 나타나는 일이 이 세상 것을 향한 소유의식과 소유욕구입니다. 소유의식은 이미 무엇을 가지고 있을 때 나타나는 마음 상태이고, 소유욕구는 아직 가지지 못한 대상에 대해 갖는 마음 상태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크게 소유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소유의식에 관한 법규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십계명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이러한 법규들은 단순히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키지 못한다면 형벌이 내리기 때문에 지켜야 하고, 피해를 보았을 때에는 보상과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식의 이해는 무척 표면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 담긴 취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 온전히 지켜지는 상태에서, 나머지 사람에 대한 계명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온전히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관점을 제대로 알 수 있으면 말씀에 담긴 취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믿을 때 운명처럼 팔자처럼 주어지는 영적 삶의 조건들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권자 되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에 맞추어진 마음으로 법규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에 적응하기를 24시간 365일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문의 법규들을 보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적 허락하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1~6절에 나오는 경우들은 어떨까요? 그 옛날 깜깜한 밤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집 주인은 저항하다 보면 도둑을 죽이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죄를 묻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낮에 도둑이 들었을 경우에 주인이 도둑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면 이것은 과잉 방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까지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식으로 적용될 수 있을까요? 이어서 언급되는 가축 관리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가축이 남의 밭이나 포도원에 들어가서 작물을 망쳤습니다. 이런 일들은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까지 주장하시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이 허락하셔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한편, 7~15절까지는 물건을 맡겼을 때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을만하다고 여겨서 재산을 맡겼는데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내 악함이 드러나는 일을 허락하심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고, 내가 의도치 않고 원치 않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법규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은 내가 적응해야만 하는 삶의 조건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법규들을 세상 사람들처럼 대하게 됩니다. 그저 지켜야 하고 못 지키면 벌을 받는다고 여기고, 내가 손해를 보았다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만 여기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법규를 본다면 말씀에 포함된 취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규들에 담긴 취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실시간으로 인정하는 입장에서 본문에 언급된 경우들은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 주권자 하나님께서 벌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소유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하나님이 내 유일한 소유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하는 소유욕구의 유일한 대상이시고,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소유의식의 유일한 근거가 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유일한 소유의 대상이십니다. 갖고 싶어 할 대상도 하나님뿐이고, 갖고 있다고 느끼는 대상도 하나님뿐이어야 합니다. 우주 안에서 내 것으로 가질만한 대상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 말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문의 소유에 관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에 대한 소유의식과 소유욕구는 우리의 운명이자 팔자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언급되는 상황들 또한 하나님의 주권이 벌어지게 하셨고 하실 것임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본문에 언급된 사건들을 벌어지게 하시는 것일까요? 도둑질을 당하거나, 역으로 도둑을 잡거나, 내 소유에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들에 대한 다양한 예시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적 체질 때문에 세상 것을 소유하게 되는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다양한 소유의 문제를 겪게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대한 소유의식을 간절하게 유지하고 살아간다면 수많은 걸림돌에 부딪히게 됩니다. 너무나 간절한 마음으로 소유의식을 가지고 많이 갖고 싶은 마음으로 살다 보면 도둑의 침범을 두려워합니다. 내 재산을 빼앗아 가려는 자들이 생깁니다. 내 가축이 타인의 밭을 침범한다든가 실수로 남의 밭을 태우는 등 실수로 인해 남에게 보상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믿을만하다고 여긴 사람에게 가축이나 물품 등의 소중한 재산을 맡겼다가 손실을 보는 경우가 생깁니다. 쉽게 말해 삶에 걸림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들을 예로 들어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 세상 것을 간절히 소유하고 싶어 할수록 걸리고 방해되고 거슬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기는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이 이 세상 것을 소유하면서 살고 싶다는 결정을 하면 그 소유의식 하나 때문에 수많은 충돌이 발생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예는 땅을 향한 소유의식 때문에 발생하는 충돌 중 극히 일부를 보여주신 것뿐입니다. 땅의 것을 소유하려는 사람의 마음은 애벌레처럼 땅을 기어다니게 됩니다. 그럴 때 저주받은 삶의 온전한 형태를 띠게 됩니다. 율법은 기본적으로 저주받은 삶이 어떤 처지에 있는 것인가를 드러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땅의 것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는 애벌레처럼 기어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이처럼 애벌레 같은 상태로 이 세상 것을 많이 가지고 싶어 할 때 얼마나 많은 방해 요소, 걸림의 요소, 충돌의 요소가 생기는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소유의식과 소유욕구는 우리에게 추진력을 갖게 합니다. 무엇인가를 가져보니까 좋더라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추진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소유의식은 마음이 하늘을 향할 수 있는 추진력이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날개가 되어주십니다. 반면 이 세상 것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소유의식은 마음이 땅을 향하게 하는 추진력이 됩니다. 그 추진력으로 애벌레처럼 이 땅을 기어다니며 살게 됩니다. 문제는 이 땅을 기어다니는 동안 소유를 붙잡고 소유를 늘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끊임없이 걱정, 근심, 불안, 아픔, 손해와 같은 방해를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인생을 완성하고 싶으면 이 땅의 것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으면 됩니다. 삶이 괴롭고 힘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참으로 좋은 소유의식을 가지고 이 땅의 것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의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한 수많은 방해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빼앗길까 불안해하고, 빼앗기면 억울해합니다. 애벌레가 땅을 기어다닐 때는 작은 모래알조차 방해가 되는 것처럼, 마음이 땅에서 기어다닐 때는 모든 일이 방해가 되는 저주받은 인생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내가 간절히 갖고 싶어 하는 소유의식에 걸림이 되는 일들을 계속해서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19~21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풀어놓은 것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내 보물로 생각한다면 마음을 많이 보내게 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분량 중에서 내 마음을 보낸 만큼 하늘에서 내 몫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씀에 담긴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에 대한 소유의식을 졸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삶은 괴롭고 힘들어집니다. 끊임없이 간절하게 이 세상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걸림돌이 생기게 하실 것입니다. 애벌레처럼 땅을 기어다니면서 걸림돌과 싸워야 하는 저주받은 인생을 완성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저주는 이 땅을 향한 소유의식으로 완성됩니다. 마음이 애벌레처럼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다닐 때 소유의식을 방해하고 걱정과 불안과 아픔과 염려를 가져다주는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저주받음을 완성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벌레가 아닌 나비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소유의식이 주는 추진력을 갖고 하늘을 향하되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날개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늘을 날아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선민이라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팔자이자 운명입니다. 이것이 소유에 관한 법규들을 바라볼 때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소유와 직접적으로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사항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얼핏 무관해 보이는 상황들도 실은 소유의식과 관련이 있음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16~17절을 보면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라고 했습니다. 납폐금이란 일종의 지참금입니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결혼한다면 일반적인 지참금이 되겠지만, 납폐금이란 피해에 대한 배상과 잘못함에 대한 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예시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남녀관계의 윤리적 기준이 아닙니다. 남녀관계조차 이 세상에 대한 소유의식에 좌우될 수 밖에 없음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옛날에는 아내를 소유물로 여겼습니다. 현대에는 그렇지 않지만 소유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관계에 이 세상 것을 향한 소유의식이 침투해 있고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이혼할 때 잘 드러납니다. 재산이 많을수록 소유의식이 극도로 표출됩니다. 이것이 저주받은 인생을 완성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세상에서 처음 맺는 관계라면, 남녀관계는 지속해서 맺고 살아야 하는 기본관계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남녀관계가 세상에 대한 소유의식에 침투되어 좌우될 때 저주받은 관계로 바뀔 수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한편 18절을 보면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또한 소유의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세상 것을 소유하고 싶은 이유는 마음에서 세상 것들의 좋음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더럽혀진 상태를 마음이 육체화 된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육체화 된 상태에서 이 세상적인 모든 힘을 다 동원해도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으면 영적인 세계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이때 어쩔 수 없이 귀신을 상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을 좋음으로 여기자마자 나는 육체화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영적인 세계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는 귀신이 역사하기 좋은 조건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무당이 끼어들 여지가 생깁니다. 세상 것에 대한 소유의식으로 더럽혀진 마음과 귀신을 중재하는 자가 무당이기 때문입니다.
소유의식 자체는 사람의 본질이기에 죄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가짐으로써 채우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소유의식은 인격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땅의 것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영적인 세계의 도움까지 받고 싶은 경우 귀신과 연결되고자 합니다. 다만 내가 귀신을 어떻게 할 수 없기에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이때 제사장의 역할을 하며 더럽혀진 사람의 마음과 귀신 사이에서 중재하는 자가 무당입니다. 사람과 영적 세계를 중재한다는 측면에서 무당이 제사장의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무당이 중재하는 대상이 세상을 향한 더럽혀진 마음과 귀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무당을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무당을 죽여야 하는 이유도 소유의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19절을 보면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괴한 악행에 대한 말씀도 단순히 성 윤리가 변태적으로 발전하게 된 상태를 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경우 또한 세상 것을 향한 소유의식과 관계됩니다. 당시에는 가장 대표적인 재산과 소유물이 양, 소, 노새, 나귀, 낙타, 말 등의 가축이었습니다. 이러한 짐승과의 행음이란 재산으로써의 가축에 대한 애정이 극단적으로 커져서 변질된 상태입니다.
평화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시던 분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한창 장사가 잘될 때는 현금이 자루에 쌓였다고 합니다. 집에 와서 번 돈을 털어놓으면 돈 냄새가 그렇게 좋았답니다. 구약 시대에는 가축이 곧 재산이었습니다. 짐승과의 행음은 가축에 대한 애정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는 상태입니다. 앞서 십계명에서 간음 계열에 대해 말씀드릴 때 마음이 육체의 오감에 의존해서 쾌감을 추구하는 행위 전체가 간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가축을 너무나 아끼는 것 자체는 결국 재산이라는 대상에 대한 간음입니다. 이러한 간음 상태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짐승과의 행음입니다. 실제로 짐승과 행음하는 기괴한 악행이 벌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문제시 하시는 것은 이러한 악행이 벌어지게 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재산에 대한 애정이 극단적으로 발전한 소유의식을 문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에만 있었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애완용 동물이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더 큰 문제입니다. 애완용 동물에 대해 정도 이상의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보다 애완용 동물의 존재를 더 크게 느끼며 진심 어린 소중함을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물 사랑이나 자연 사랑은 당연하고 좋은 일이라고 여기지만 이것은 어긋난 소유의식의 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자 믿음의 완성된 모습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아브라함은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 독자 이삭까지도 번제로 바쳐야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나 자녀도 하나님보다 사랑해서는 안 되거니와 하물며 애완용 동물을 하나님보다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애완용 동물에게 마음을 주고 소중히 여기며 아까워하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가축이란 재산이었습니다. 돈 다발을 쥐고 기뻐하는 것과 똑같은 애정을 보일 수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성적 윤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땅을 향한 소유의식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짐승과 행음하는 기괴한 일로도 나타날 수 있을 정도로 소유의식이 어긋났다는 것입니다.
또 20절을 보면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당에 의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신을 섬김이란 결국 세상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소유의식에서 발동합니다. 세상 것들에 대한 간절한 소유욕구가 있고, 소유의식에 취해 있습니다. 이럴 때 세상 소유를 더 늘리기 위해 다른 종교의 신을 찾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신이란 십계명의 제1계명에서 말하는 ‘다른 신’이 아닌 ‘다른 종교의 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것을 바라며 다른 종교의 신들에게 제사하고 숭배하는 소유의식을 문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예로부터 소유의식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소유의식에는 악함과 선함을 좌우하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21~27절에서는 나그네와 고아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조항들이 언급됩니다. 이 또한 소유의식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내게 세상의 소유물을 있게 하셨다는 것은 내게 두신 것입니다. 내게 두신 가치들 중에는 내 주변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몫도 할당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것들에 대해 소유의식을 발동하는 중에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돌아가야 될 몫을 느낄 수 없습니다. 무조건 간절한 마음으로 내 것으로 끌어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저주받은 삶의 모습입니다.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어진 세상 것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써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써야 될 몫을 내게 몰아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재산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마음의 태도입니다. 내게 들어온 것이 적더라도 사회적 약자를 향하여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은혜입니다. 그 사람은 앞으로 물질 문제나 재정 문제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주신 것을 나만 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할당되어야 할 몫을 몰아 주신 것이라는 의식이 분명하다면 평생 재정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쓸 몫과 아울러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직접 주시지 않고, 그 몫을 나에게 주신 이유는 사랑과 관심을 창출함에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웃을 향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늘의 샘을 흘려보낼 기회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 달에 200만 원을 버는데 적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적은 수입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몫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나는 하나님만을 소유하는 것이 운명이고 팔자이기 때문입니다. 200만 원을 나를 위해 쓸지 다른 사람을 위해 쓸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입니다. 주권자 하나님께 물어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재정 문제를 책임지실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우리를 향하여 ‘나를 소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하는 자들이라면 본문에서 제시된 법규들을 보며 ‘내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나비처럼 날아올라 보좌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소유의식으로 마음에 걸림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나는 애벌레처럼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나비처럼 하나님을 소유하기 위해 살고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날개가 되어주시기에 우리는 더욱더 나비처럼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소유의식의 추진력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하여 애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삶의 조건으로 받은 우리에게 본문이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는 주님을 믿어서 우리가 얻게 되는 운명과 팔자 같은 영적 삶의 조건들을 알았습니다. 이 법규들을 보면서 다시는 땅의 것을 향한 소유의식을 발동하지 않게 하시고, 애벌레처럼 살며 이것저것 걸림과 방해들에 괴로워하는 저주받은 생애를 완전히 졸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비처럼 훨훨 날아 아버지만을 소유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자들로 평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