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19장 40절 -”
금번 미국의 대선(2024년 11월)을 지켜보면서 도저히 침묵하고 있을 수 없어서 또다시 SNS상에 글을 올리게 되는 저 자신이 많이 민망스럽게 느껴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구실로 윤리적 가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트럼프를 선택한 미국 국민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설득, 자기 자신과의 싸움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들 각자가 이 어둠의 현실에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 오히려 이 어둠을 자신도 모르게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지 않으면 안되며, 만물이 형제이며 천지와 내가 한 몸뚱이라는 깨달음에 가닿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온 몸으로 감당해야 할 크나큰 충격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반도 근대사에서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펼치었던 의료 ‧ 교육 ‧ 선교사업들을 결코 잊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쓸 용돈을 아껴서 도움이 필요한 사해동포들을 위하여 기부한다든지, 아니면 몸소 그 나라에 가서 평생을 헌신하는 이웃사랑에 우리 민족은 많은 빚을 지고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이라는 야만적 전쟁을 이해해 보고, 그 전쟁중에, 그리고 그 이후에 남한의 ‘은인’으로 알려진 미국이 행한 역할에 대해 이해해 보려는 시도는 결코 쉽지가 않다. 그 이유는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두운 면, 말하자면 그것의 집단적이고 ‧ 애매모호하며 ‧ 폭력적인 측면을 다루는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전쟁중에 460만의 한국인이 사망했는데, 그중 3백만 명의 사망자는 9백만이 채 안되는 북쪽 지역의 모든 도시에 행해진 융단폭격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장 순(매사추세츠 리지스칼리지 교수) 저 ‘미국의 한반도 개입에 대한 성찰’(후마니타스 펴냄) 중에서 -
“체 게바라가 떠난지 57년(2024년)이 되었다. 그가 죽은 후 자본주의 경제모델의 반대 축을 이루던 마르크스주의는 지하에 매장되었다. 그러면 민주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는 진정 민주적이고 자유로운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금융자본주의 세계하에서, 그 자유는 과연 인간의 존엄적인 자유를 의미하는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도태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한 나라의 소득 총체가 편중되지 않고 잘 분배되는 사회, 1% 권력자들의 힘이 99%의 민중의 힘을 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체 게바라의 이상이 그토록 유토피아적이었던 것일까? 죽을만큼 잘못되었던 것일까? 라틴아메리카의 실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돌아볼수록 체 게바라는 우리에게 아직도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혁명은 가진 자들의 무차별적인 수탈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꿈꾸었던 것은 정의 ‧ 공정성 ‧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살아 있는 인본주의 세상이었다. 혁명은 저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라며 청진기 대신 총을 들었던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부정과 불의가 대한민국을 압도하는 지금,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긴 것은 대중을 평등과 정의의 세상으로 이끄는 길을 찾는 것이었지만 소련은 그렇지 못했다. 자본주의 상황도 여의치 못했다. 지난 몇 년동안 우리는 민중을 향한 자본주의의 직접적인 공격을 목격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부동산 압류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럼에도 대규모적인 몰락은 일어나지 않았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악행을 정확히 의식하면서 대중을 무력화하는 데 필요한 정보조작을 연출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정치에 아주 무관심해진다. 민중을 조직화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진 사회에는 사유재산과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악착스럽게 방어하며 깊이 뿌리 박힌다. 민중은 이제 해결책없이 다 그런것이기에 달리 방법은 없다고 설득된다. 숙명론자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오늘날 유럽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점들이 얼마나 위중한지 알고 있는가? 실업 ‧ 빚 ‧ 이민 등 유럽대륙의 많은 나라들이 오늘날 하향세를 보이고, 경사는 점점 더 가팔라지고 있다. 이 거대한 금융의 집중 ‧ 세상의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듯한 다국적기업들의 검은손 ‧ 천문학적인 군비 ‧ 통신과 석유와 농수산식품에 대한 국가권력의 독점에 직면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녕 무엇인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각각의 기초분야가 누군가의 손아귀에 집중되어 있다. 과연 누가 이런 힘과 싸울 수 있을까?
하지만 쿠바는 달랐다. 우리는 쿠바를 항상 미국같은 선진국과 비교한다. 반대로 왜 쿠바를 이웃나라인 아이티나 도미니카 아니면 온두라스와 비교하지 않는가? 그들중 어느나라가 가장 상태가 좋은가. 어느나라가 시민을 무상으로 돌보고 교육하는가. 어느나라가 가장 범죄가 적은가. 미국은 다른나라의 자원을 강탈하지만, 그 부를 국민들에게 재분배하지 않는다. 약탈당한 나라의 국민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미국이 그렇게 수탈정책을 집요하게 펼치는 동안, 쿠바는 자국의 가장 우수한 의사들을 외국에 파견해서 생명을 구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 에볼라가 창궐하는 동안 서아프리카에는 쿠바 의사들이 제일 많았다. 쿠바는 인구가 1,100만명의 작은 나라로 장장 50년 넘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에 용감하게 저항해왔다. 그 투지가 눈물겹도록 놀랍지 않은가? 쿠바는 냉전이 뒤따랐던 특별한 시기에 어렵게, 그러나 끝내 살아남았다. 쿠바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연대감을 느끼게 하고, 손님을 환대하는 것은 이들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그들은 인간은 누구나 고귀한 존재로, 물건이나 기계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웃에게 사기를 치거나 남의 것을 빼앗거나 탐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겐 페라리나 메르세데스, 개인 비행기도 없다. 그런데 쿠바인들이 서구사회의 사람들보다 심각하게 더 불행한가. 나의 쿠바 친구는 유행이니 시즌이니 하는 콘셉트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런 개념이 변덕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쿠바에는 유행이 없다. 비싼 옷이 아니라 실용적인 옷을 입는다. 그런데 그들은 서구사회의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가. 쿠바는 확실히 대부분의 선진국들보다 가난한 나라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덜 물질적이고 평등의 기준과 공평성이 발달한 사회다. 쿠바인에게는 도덕성과 우애, 정의에 관한 어떤 감각이 있다. 이곳에서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다. 여성도 자신의 육체로 원하는 것을 한다. 임신중절도 허락되어 있어서 아무도 원치 않는 아이를 낳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쿠바엔 범죄도 거의 없다. 정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을 난폭하게 살해한 자는 남자건 여자건 용의자는 보통 그날로 체포된다. 이 나라 전체에 흐르는 안전감은 쿠바혁명이 이 사회에 가져온 변화의 열매다. 쿠바에서는 국가 소득의 일부분은 국민건강에, 또 다른 부분은 교육, 또 다른 부분은 가계보조금, 유치원 같은 사회 프로그램에 조달된다.”
후안 마르틴 게바라(체 게바라의 막냇동생) 저 ‘나의 형, 체 게바라’(홍익출판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