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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금 나는 깨어있다 원문보기 글쓴이: 추공
[공유, 진속의 화쟁] |
삼국통일 혼란 극복할 사상으로 ‘화쟁’ 제시 |
원효는 한국이 낳은 가장 탁월한 불교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지정학적으로 신라는 한반도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 도입이 고구려(372년)나 백제(384년)보다도 150년 이상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가 태어날 무렵은 신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527년)된지 겨우 90년이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신라불교의 파급속도로 보아서는 불교의 순수교리에
대하여 연구할 기반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원효 이후 신라 통일기 불교가 교학에 대하여 쌓고 있는 업적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1)
당시 민중은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 매우 고단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사회 상황에도 승려 대부분의 삶과 수행은 중생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왕실 내지 귀족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불교를 바라보고 수용하는 두 입장에는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조금 자세하게 보자.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불교계는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된다. 통일 이전은 불교가 정치이념으로서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수용되는데, 이는 국가체제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
불교를 이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 이후가 되면 신라 왕실은 통치의 정당성을 유교적 정치이념(德治, 王道政治)에서 찾고자 한다.
또한 이때부터 신라의 불교는 국가의 통치체제 아래에 들어가는 ‘국가불교’의 모습을 심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체제 유지를 위한 불교의 효용이 사라지면서, 불교는 그 본래적(本來的) 의미(意味)를 상당 부분 회복(回復)하게
된다. 그 결과 불교의 철학적, 종교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며, 세계와 인생의 가치에 대한 반성이나, 불교신앙을 통하여 삶의 위안을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민중들의 불교에 대한 신앙은 여전히 중요하여, 사회적 비중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 결과 통일 이후 신라불교는 사회 구성원 전체로 확산하면서, ‘대중불교’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대중불교의 선구자들은
혜숙(慧宿, 생몰년 미상), 혜공(慧空, 생몰년 미상), 대안(大安, 571~644) 등의 불승(佛僧)들이었는데, 이들은 민중 속에서
입전수수(立廛垂手)하였던 대중불교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원효(元曉)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촌락이나 저잣거리 등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춤추고 노래하고 잡담하는 가운데 불법을 말하여 대중들의 실생활을 불교화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2)
원효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 홀로 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실계(失戒)하면서 설총을 낳는다. 이것은 655년에서 660년, 즉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실계 뒤
원효는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 행세를 하였는데, 이 실계의 사실은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된 중대한
계기가 된다.
원효는 어느 날 한 광대가 이상한 모양을 한 큰 표주박을 가지고 춤추는 놀이를 구경하고는 깨달은 바가 있어, 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들도 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느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이다. 그는 그 노래를 ‘무애가(無㝵歌)’라 불렀다.
원효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 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았고,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혹은 금빛 칼과 쇠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기도 하고, 혹은 《화엄경》에 대한 주소(註疏)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에는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祠堂)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는 혹은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坐禪)하는 등
임의로 기회를 좇아 생활하되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행적 또한 뚜렷한 어떤 규범을 따르지 않았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방법도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받았던 밥상을 내동댕이치고 사람을 구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에는 입 안에 물고 있던 물을 뱉어
불을 끄기도 하였다. 때로는 한 날 한 시에 여러 곳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온 천하를 다 찾아도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원효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찬술할 것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여 온다.
한번은 국왕이 100명의 고승대덕(高僧大德)을 초청하여 인왕경대회(仁王經大會)를 열었을 때 상주(湘州) 사람들이 원효를 천거하자,
다른 승려들이 그 인품이 나쁘다고 헐뜯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왕후가 종기를 앓게 되어서 아무리 좋은 약을 다 써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왕이 왕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영험이 있다는 명산대천을 다 찾아다니며 기도를 드리던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을
다른 나라에 보내어 약을 구하게 하면 그 병이 곧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왕은 곧 당나라에서 좋은 약과 의술에 능한 사람을 구하도록 사신을
보냈다. 왕명을 받은 사신 일행이 바다 한가운데 이르자 바닷물 속으로부터 한 노인이 솟아올라 사신들을 용궁으로 데리고 갔다.
용왕은 자기의 이름을 금해(鈐海)라 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경들 나라의 왕비는 바로 청제(靑帝)의 셋째
공주요. 우리 용궁에는 일찍부터 《금강삼매경》이라는 불경이 전하여 오는데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으로 되어 있소. 원만하게 열린
보살행(菩薩行)을 설명하여 주는 불경이오. 신라 왕비의 병으로 인하여 좋은 인연을 삼아, 이 불경을 당신들의 나라로 보내어 널리 알리고자
사신들을 부른 것이오.”
그리하여 원효가 이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 3권을 지어 황룡사에서 설법하게 되었다. 왕을 비롯하여
왕비와 왕자·공주 그리고 여러 대신들과 전국의 절에서 온 명망 높은 고승들에게 원효는 강해(講解)를 시작하였다. 그의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하고 질서정연하여, 오만하게 앉아 있던 고승들의 입에서 찬양하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강설을 끝내고 원효는 “지난 날 나라에서
100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그 속에 끼일 수도 없더니, 오늘 아침 단 한 개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마당에서는 나 혼자 그 일을 하는구나.”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고승들은 부끄러워하면서 깊이 뉘우쳤다고 한다. 원효는 그 뒤 조용한 곳을 찾아 수도와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 부 240권이나 된다.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龍樹)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사유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대 저술이다.
원효는 그의 삶 대부분을
신라 삼국 통일(676년) 과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내게 된다.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분열과 배타의 정신은 그 모습을 극명(克明)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원효는 성장하면서 신라․고구려․백제 사이의 통일 전야의 그 극렬하고 빈번한 전쟁의 참상을 통해서, 반불교적인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을 것이다. 원효는 부정(否定)과 배제(排除), 분리(分離)와 정복(征服)의 시대를 당하여, 포용(包容)과 공존(共存), 화해(和解)와
존중(尊重)의 정신으로, 당대를 포섭하고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해법을 불교 사상 속에서 ‘한 마음〔一心〕’으로 파악하고
‘화쟁(和諍)’으로 압축하여 온 몸으로 실천하였다. 이 점은 원효의 행적에, 앞서 언급했던 원광이나 자장과는 달리, 국가 혹은 호국(護國)에
대한 활동이나 저술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3)
원효 불교
대중화 운동의 실천은 불교 대중화를 위한 이론적 탐구가 전제되어 있다. 그의 방대한 저술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유식 계통에 대한 것이다. 그가
유식에 이렇게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던 것은 범부들은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심식(心識)을 철저하게 분석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효는 먼저 마음의 분석을 위한 심식연구를 한 다음 수행실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다.4)
주)---------- 이덕진 | 창원 문성대학교 교수
- 불교저널 2016.3.7. -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36
1. 의심을 버림
모두 8품으로 된 《금강삼매경》은 서분(제1 서품)과 정종분 6품(제2~7품)과 유통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분황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정설분 즉 본문의 육품을 세 문 혹은 두 문으로 총괄해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이 육품은 합하여 세 문이 되니, 앞의 두 품은 관행의 처음과 끝을 다 포괄하였고, 다음의 두 품은 교화의 근본과 지말이며, 나중의 두 문은 인을 거두어 과를 이루었다. 또한 앞의 두 품은 상을 버리고 근본에 돌아가는 것[遣相歸本]이고, 중간의 두 품은 근본으로부터 행위를 일으키는 것[從本起行]이며, 나중의 두 품은 (근본으로) 돌아감과 (근본으로부터) 일어남을 모두 나타내었다[雙顯歸起]. 이 두 종류의 세 문으로 대승을 모두 포괄하였다. 또한 이 육품은 단지 두 문일 뿐이니, 상(無相)과 생(無生)을 모두 없애는 것은 본각의 이익이고, 실제와 진공은 여래장이다. 또한 앞의 문은 허망함을 버리어 인을 드러내는 것[遣妄顯因]이고, 뒤의 문은 참됨을 드러내어 과를 이룬 것[顯眞成果]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이문으로 또한 대승을 모두 포괄하였다”고 하였다.
《금강삼매경》의 정종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분황은 하나는 ‘관행을 각기 설명하고’[別明觀行; 別顯觀行], 또 다른 하나는 ‘모든 의심을 전체적으로 결단한 것’[總決諸疑; 總遣疑情]으로 보고 있다. 이 중 <총지품>(總持品)은 정종분 즉 본문의 끝자락에 붙은 품이니 서품까지 셈하면 제8품이 된다. 여기서 총지(總持)란 범어 ‘다라니’의 번역이다. 능지(能持) 혹은 능차(能遮)로도 번역되었다. 총지는 ‘헬 수 없고 가 없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악한 법을 버리고 헬 수 없이 좋은 법을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흔히 다라니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지혜(智慧) 또는 삼매(三昧)를 가리킨다. 이것은 말을 잊지 않고 뜻을 분별하며, 우주의 실상에 계합하여 수많은 법문을 보존하여 가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진언(眞言)을 가리킨다. 이것은 범어 문장을 번역하지 않고 음 그대로 적어서 외우는 것을 의미한다. 진언을 번역하지 않는 까닭은 첫째는 원문의 전체 뜻이 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며, 둘째는 밀어(密語)라 하여 다른 이에게 비밀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총지는 헬 수 없는 뜻을 포함하여 잃어지지 않게 하고, 선법을 가져 잃지 않게 하며, 악법을 가져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라니를 외우는 사람은 헬 수 없는 말을 들어도 잊지 아니하며, 끝없는 이치를 알아 학해(學海)를 돕고, 모든 장애를 벗어나 헬 수 없는 복덕을 얻는 등 많은 공덕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 범어 문장의 짧은 구절을 진언(眞言) 혹은 주(呪)라고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을 다라니 또는 대주(大呪)라고 한다. 《논》에서 분황 원효는 “앞의 모든 품 중의 의심을 결단하여 중요한 뜻을 모두 지녀서 잊어버리지 않게 하였으니 행하는 것에 따라서 ‘총지’라고 하였다”고 풀이하였다. 또 “지장보살이 이미 문의(文義)다라니를 얻었기 때문에 모든 품에 있는 문의를 총지하고, 대중이 의심을 일으킨 곳을 기억하여 차례대로 물어서 모든 의심을 잘 결단하였으니, 그 때문에 총지라고 하였다”고 풀이하였다. 여기서 ‘문의’다라니는 글과 뜻을 모두 기억해서 잊지 않는 염혜력을 가리킨다.
분황 원효는 ‘모든 의심을 총괄적으로 결단한 것’은 다시 1) 요청한 것, 2) 허락한 것, 3) 결단한 것, 4) 이해한 것으로 구분된다. 지장(地藏)보살은 요청의 주체가 된다. 지장은 마치 대지가 모든 초목을 생장시켜 주는 것처럼 이미 동체대비를 얻어서 일체 중생의 선근을 생장시켜 준다. 또 마치 큰 보배 창고에 보배가 다함이 없는 것처럼 다라니로 모든 공덕을 지니고서 모든 이에게 베풀어 주되 다함이 없다. 이에 여래는 모든 의혹을 결단하여 모든 믿음과 이해를 내고 모든 결단의 보배를 내어 법을 구하는 대중에게 베풀어 준다. 지장 역시 뜻이 그 이름에 합당하기 때문에 청하여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분황은 3)의 ‘모든 의심을 바로 결단하는 것’으로 풀어가고 있다. 여기서도 다시 가) 여섯 품의 의심을 차례로 거꾸로 하여 결단한 것이고, 나) 한 품의 세 가지 의심을 차례에 따라서 없앤 것이다. 가)에서도 ① 각각 결단한 것과 ② 전체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나누어 해명한다. 그러면서 먼저 ①의 각각 결단한 것 중에 여섯 가지 의심을 각각 결단해 가면서 뒤에서부터 앞으로 점차 거꾸로 결단하고 있다. 그런 뒤에 나)의 한 품의 세 가지 의심을 차례대로 없애가고 있다. 가)는 정설분의 역순인 <여래장품>→<진성공품>→<일실제품>→<본각리품>→<무생행품>→<무상법품>의 순으로 각 품에서 일어난 의심을 결단하고 있다.
2. 얻을 것이 없는 일미
지장보살은 말하였다. “일체의 모든 법이 어찌하여 연(緣)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이때에 여래께서 이 뜻을 나타내시려고 게송을 말씀하셨다. “만일 법이 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면/ 연을 떠나서는 법이 없어지게 된다./ 법의 자성은 없는 것인데/ 어떻게 연이 법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분황은 <여래장품>에서 “인연은 없는 것이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에 대해, 이 중에서 일어나게 하는 주체인 인연이 있다고 집착하여, ‘그 과보가 어찌하여 연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하기 때문에 저 의심에 의하여 연의 생기를 물으니, 여래께서 한 게송으로 이 의심을 바로 결단하였다. 그 가운데 위의 절반은 저 본래의 집착을 결단한 것[定彼本執]이고, 아래의 반절은 저것에 의하여 이 연의 생기를 깨뜨린 것[破其緣生]이다. 이 뜻은 바로 세우면 다음과 같다. ‘연은 법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없는 법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토끼의 뿔을 바라는 것과 같다.’ 비량(非量)으로 말미암아 저 의심이 결단된다”고 답변하고 있다. 이처럼 분황은 여섯 가지 품에서 일어난 의심에 대해 촘촘히 결단해 나가고 있다.
나)에서는 <여래장품> 한 품의 세 가지 의심을 차례대로 없애가고 있다. 유독 <여래장품>의 세 가지 의심만 푸는 것은 이 품이 정종분의 마지막 품이자 《금강삼매경》의 결론에 해당하는 품이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분황은 진여와 세속이 다름없는 하나의 여실한 법은 모든 부처가 귀의하는 곳이므로 <여래장품>이라고 하였다. 그는 여기서 헬 수 없는 법과 모든 행위가 여래장 가운데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해명함으로써 ‘들어가는 곳’[所入]에 의거하여 여래장이라고 하였다. 이 품은 모든 분야를 두루 취하여 똑같이 일미(一味)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금강삼매경》의 모든 내용을 일미의 관행(觀行)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보았다.
분황은 정설분 서두에서 “이 여섯 품은 오직 일미(一味)다. 왜냐하면 상과 생은 자성이 없고, 본각은 근본이 없으며, 실제는 한계를 떠난 것이고, 진성 또한 공한 것이니, 무엇을 연유하여 여래장의 자성이 있겠는가? 이것은 아래의 <여래장품> 중에서 ‘이 식은 항상 적멸하며, 적멸한 것도 또한 적멸하다’고 말하고, <총지품>에서 ‘칠식과 오식이 생기지 아니하며, 팔식과 육식이 적멸하며, 구상이 공허하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얻을 것이 없는 일미[無所得之一味]가 바로 이 경의 종요다[此經之宗之要]. 그러나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모든 문이 전개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헬 수 없는 종지가 되는 것이다. 비록 일미지만 여섯 가지 문을 전개하기 때문에 여섯 가지 부분에 의하여 글을 나누어 해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분황은 의심을 총괄하여 없애기 위해 정종분 6품의 역순에 따라 각기 의심을 결단한 뒤 <여래장> 한 품에서 제기하는 세 가지 의심을 각기 결단하고 있다. 즉 범행장자가 게송에서 ‘만일 법은 하나만 있다고 한다면 마치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만일 법이 없다고 본다면 마치 장님이 해가 없다고 잘못 아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저 말에 의하여 의심하기를, 1) ‘장자는 세속의 사람으로서 이와 같이 판단하여 말하였으니, 잘못된 견해인가, 참된 견해인가?’, 저 품에서 말하기를 ‘깨달아 보면 식이 상주하는 것이 되니, 이 식은 항상 적멸하고 적멸도 또한 적멸하다’고 하였는데 2) ’이와같이 상주하는 적멸의 법은 비록 좋아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희이(希夷)하다. 중생의 마음은 거칠고 천박하여 조복하기 어려우니, 어떻게 마음을 조복하여 저 문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저 품의 게송 끝에서 “소취와 능취를 전변시켜 여래장에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3) ‘이 가운데 보리의 도는 평등한 진리로서 곧 여래장이다. 이것은 인과 연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저 능·소를 전변시키는 인으로 여래장의 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들 의심에 대해 분황은 각기 결단하고 있다. 그런 뒤에 그는 1) 사람을 칭찬하여[讚人] 유통, 2) 대중에게 권하여[權衆] 유통, 3) 이름을 세워[立名] 유통, 4) 받아 지니어[受持] 유통, 5) 참회하여[懺悔] 유통, 6) 받들어 행하여[奉行] 유통하는 것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금강삼매’(金剛三昧)의 경전 즉 여러 법을 총괄하여 지니고 있고 모든 경의 요체를 포섭하고 있는 ‘섭대승경’(攝大乘經)은 모든 경전의 법 중에서 법의 종주인 ‘무량의종’(無量義宗)으로서 마무리된다.
고영섭/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시인
- 불교저널 2013.10.4.-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301
불교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로버트 버스웰'(Robert E. Buswell, Jr., 1953 ~ , 만해대상 수상, 1974년 송광사 구산스님으로 부터 선과 화엄학 사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특훈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한국 불교를 중국 불교의 아류로 간주해 온 서구학계에서 한국 불교학을 독립적 분야로 정립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저서로 평가받는다.
특히 '중국과 한국의 선사상 현상'은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계 전반에 한국 불교가 미친 영향을 '금강삼매경'을 통해 치밀하게 파고든다.
기존 동서양 학계에서는 이 경이 인도 혹은 중국에서 찬술된 것으로 추정했으나, 버스웰은 658년경 신라 선승 법랑을 저자로 봤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바로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으로 버스웰은 '금강삼매경'의 등장이 원효의 구도행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이 경의 사상적 특징이 참선을 통한 실천론에 있음을 밝히며 초기 중국 선사상 형성에 한국 불교의 영향이 컸음을 논증한다.
저자는 한국 번역본 저자 서문에서 동아시아 불교계에 미친 한국의 주요 기여 중 하나로 '금강삼매경'을 꼽았다. 그는 "(7세기) 한국인들도 그들 자신의 경전을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로 불교 교학에 대한 이해와 문학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며 "'금강삼매경'은 이러한 불경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로서,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책"이라고 평가했다.
- 연합뉴스 2016.2.19.-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2/19/0200000000AKR20160219136700005.HTML?input=1179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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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성사 (617 ~ 686) 진영 ] |
원효(元曉, 617년 ~ 686년 4월 28일(음력 3월 30일), 경상북도 경산시)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薛思)이나, 보통 한국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불린다.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이며, 한국불교 최초의 깨달은 스님, 한국 최초의 대처승으로도 유명하였다. |
[금강삼매경 (金剛三昧經)]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원효(元曉) 전기에는 8품(品), 30지(紙) 가량으로 되었는데, 현존본은
7품뿐이다. 7품이라는 것은 정설분(定說分)의 7개품만을 말한 것인 듯하다. 이 경전은 그 논소(論疏)인 원효의 《금강삼매경론》(3권)에 의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일체경(一切經)의 목록인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는 경의 규모를 28지(紙)라 하여 《송고승전》의
기록과 거의 비슷하나, 도안(道安)의 《경록(經錄)》에는 양대(梁代)의 실역(失譯)이라 하였고, 승우(僧祐)의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에는
오래전 일실(逸失)되었다고 하였고, 도선(道宣)의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 등에는 궐본(厥本) 상태라 쓰고 있다.
이 경에 대하여
최초의 주석을 쓴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종요(宗要)를 “묶어서 말하면 일미관행(一味觀行)이요 풀어 말하면 십중법문(十重法門)이 종(宗)이라”고
하였다. 이는 곧 이 책이 관행(觀行:인식 및 실행)과 법문(法門:이론 및 교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인터넷 두산
대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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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기사굴山에 계실 때에, 큰 비구들 一만인과 함께 하시니, 그들은 모두 아라한도를 얻은
이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사리불. 대 목건련. 수보리 등의 아라한들이었다.
다시 보살마하살 이천인과 함께 하시니, 그들의 이름은
해탈보살. 심왕보살. 무주보살 등의 보살이었다.
또, 장자 八만인과 함께 하시니, 그 이름은 범행장자, 대범행장자. 수제장자
등이었다.
또, 하늘·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 사람인 듯 하면서 사람아닌 무리들 六十만억이 있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 四부 대중에게 둘러싸여 모든 대중을 위해 대승경을 말씀하시니 이름이 일미진실, 무상무생, 결정실제, 본각이행
이었다.
'만일 이 경을 듣고 한 사구게만 받아지니어도 이 사람은 즉시 부처의 지혜 경지에 들어가서, 능히 방편으로써 중생을
교화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서 큰 선지식이 되리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신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즉시 금강삼매에 들어가시니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시었다.
이 때에 대중 가운데 한 비구가 있었으니 이름이 아가타 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 이
뜻을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큰 바리 구족하신 세존께옵서는
지혜가 통달하여 걸림이 없고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시려
하나인 진리의 뜻을 말씀하시네.
모두 한맛의 도(一味道)로 하시고
마침내 소승으로 아니하시니 설하신
뜻과 맛이 있는
곳에는 실답지 않은 것 모두 여였네.
모든 부처님의 지혜 경지인 결정되고
진실한 경지에 들어 들은 이 모두 다
세간
벗어나 해탈치 않는 이 아무도 없네.
한량없는 모든 보살들은 모두 다
중생을 제도하시려 대중 위해 넓고 깊게 물어
법의 적멸상을 익히 알아 결정된 처소에 들게 하시네.
여래께옵서는 지혜와 방편으로 응당 진실한
경계에 들게 설하시되
모두 다 일승에
수순할 뿐 온갖 잡맛은 전연 없네.
마치 한 차례의 비가 뭇 풀을 적셔 무성케 하 듯,
그 성품 각각
다름에 따라 한 맛의 법으로
흠뻑 적시어 일체를 널리 만족케 하기
저 한 차례 비가 적심같이 하니
보리싹(覺芽) 모두 잘도
자라네.
금강삼매의 맛에 들어 법의 진실한
선정 증득코 결정코 의심과 후회 끊으니
한 법의 도장이
이뤄졌도다.
[형상 없는 법]
그 때에 세존께서 삼매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 경지는 진실한 법상(實法相)과 결정된 법성(決定性)에 들어 있으므로, 방편과 신통이 모두 모양 없는 이익이다. 일각의
요의(一覺了義, 하나인 각의 완전한 의미)는 알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워, 모든 二승들이 알고 볼 바가 아니고 오직 부처님과 보살만이 능히
아시어서, 제도할 만한 중생에게 모두 한맛을 말씀하신다.'
그 때에 해탈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정법(正法)시대가 가고 상법의 세상에서나 말법 중에는, 五탁 중생들이 여러 가지 악업으로
三계를 윤회하면서 벗어날 때가 없을 것이 온데,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후세 중생들을 위하여, 한맛이고 결정적인 진실을 일러주시어, 저
중생들이 한결같이 해탈케 해 주시 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내게 세간을 벗어나는 因을 물어 중생들을
교화하고, 저 중생들이 세간을 벗어나는 果를 얻게 하고자 하니 이 일대사(一大事, 하나의 큰 일)는 헤아릴 수 없다. 큰 자비 때문에 내가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곧 간탐(=법을 아끼고 탐함)에 떨어지리라. 너희들은 일심으로 잘 들어라. 너희들을 위해 말해 주리라. 선남자야, 만일 중생을
교화하려면 변화하는데서 남이 없게(無生)하고 나지도 않고 변화도 없게 하면 그 교화가 큰 것이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마음]과 [나]를
여이게 할지니, 일체의 [마음]과 [나]는 본래 공적(空寂, 공하고 고요함)한 것이다.
만일 공한 마음을 얻으면 마음이
환상(幻像)과 같이 변하지 아니하고, 환상도 없고 변화도 없으면 즉시 무생(無生, 남이 없음)을 얻는다. 무생의 마음은 변화가 없는 데에
있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의 마음은 성품이 본래 공적하고, 공적한 마음은 마음자체(心體)가
빛깔과 모양이 없는데, 어떻게 닦고 익히어야 본래의 공한 마음을 얻겠사옵니까?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써 저희들을 위해 말씀해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온갖 심상(心相, ①마음 모양 ②마음속의 모양)은 본래 근본이 없고 본래
근본처소가 없으며 공적한 경지에 들어가고 공적한 마음자리에서 즉시 마음이 공함을 얻는다.
선남자야, 모양 없는 마음은 마음도 없고 나도
없다. 온갖 법상(法相, 법의 모양)도 역시 그러하다.'
*참고*
(온갖 법의 모양은 본래 근본이 없고 본래 근본처소가 없으며
공적하여 남이 없다. 만일 법이 나지 않으면 즉시 공적한 경지에 들어가리니, 공적한 법자리에서 즉시 법이 공함을 얻으리라. 선남자야, 모양 없는
법은 [법]도 없고 [나]도 없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일체 중생들이 만일 [내가 있다]는 이나
[마음이 있다]는 이가 있으면 어떤 법으로 깨우쳐, 저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내가 있다]는 이는 十二인연을 관찰하게 하여라. 十二인연은 본래 인과에 따르고, 인과는 마음의 움직임에서
일어나지만, 마음도 오히려 있지 않거늘 하물며 몸이 있겠는가. 만일 [내가 있다(有我)]는 이는 있다는 소견을 멸하게 하고, 만일 [내가
없다(無我)]는 이는 없다는 소견을 멸하게 하며, 만일 [마음이 나는 이]는 멸하는 성품을 멸하게 하고, 만일 [마음이 멸한 이]는 나는 성품을
멸하게 하여라. 이러한 소견과 성품을 멸하면 즉시 진실한 경지(實際)에 들어간다. 그 까닭은, 본래부터 난 것은 멸하지 않고, 본래부터 멸한
것은 나지 않으며 멸하지 않는 것은 나지 않고, 나지 않는 것은 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법상도 역시
그러하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중생이 법이 나는 것을 볼 때에는 어떤 소견을 멸하게
하며, 법이 멸하는 것을 볼 때에는 어떤 소견을 멸하게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만일 어떤 중생이 법이
나는 것을 볼 때에는 [없다]는 소견을 멸하게 하고, 법이 멸하는 것을 볼 때에는 [있다]는 소견을 멸하게 하여라. 만일 이러한 소견들(즉
有見과 無見)을 멸하면 法이 정말 없음(眞無)을 얻어 결정된 성품에 들어 결정코 남이 없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저 중생으로 하여금 無生에 머물게 하면 이것이 무생(無生) 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생에 머물면 곧 生이다. 그 까닭은, 머뭄도 없고 生도 없어야만 無生이기 때문이다. 보살이여, 만일 무생을 내면, 생으로써
생을 멸함이므로, 생멸이 모두 멸하여 본래 生하던 것이 生하지 않아야만 마음이 항상 공적하고, 마음이 항상 공적하면 머무름이 없다. 마음이
머무름이 없으면 이것이 무생이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음이 머무름이 없는데 어떻게 닦고 배움이
있사옵니까? 배움이 있사옵니까, 배움이 없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무생의 마음은 출·입이 없고, 본래
여래장의 성품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으므로, 배움이 있지도 않고 배움이 없지도 않다. 배움과 배우지 않음이 없으면 이것이 곧 배움이 없음이지만,
배움이 없지 않으면 이것이 배워야 할 바이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여래장의 성품이
고요하고 움직이지 아니함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장은, 생멸하고 생각하여 아는 모양이 진리를 숨기고 덮어
나타나지 않게 하지만 이 여래장의 성품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생멸하고 생각하여 아는 모양] 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도리(道理)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만일
옳다. 그르다 라고 분별함이 있으면 곧 온갖 생각을 내는데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생각이 [생멸하고 생각하여 아는 모양]이다. 보살이 관찰하기를
[본 성품과 모양에는 도리가 스스로 만족되어 있으므로,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생각이 도리에 이롭지 못하고 헛되이 동란하여 본심만 잃게 할
뿐이다]고 관하여 사려(思慮)가 없어지면 생멸이 없어지고, (사려와 생멸이) 여실히 생기지 않으면 모든 식이 편안하고 고요하며, 모든 식의
흘러듦이 생기지 않으면 五法이 청정해지는데, 이것이 대승이다.
보살이 五법의 청정함에 들면 곧 마음에 허망함이 없다. 만일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여래께서 스스로 깨달으신 거룩한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고, 거룩한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이는 [모든 것이 본래 나지
않음(本不生)]임을 잘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본래 나지 않음]임을 알면 곧 망상이 없어진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망상이 없다면 그치고 쉴 것(止息)도 없을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망상이 본래 나지 않으므로 쉬어야할 망상이 없다. 마음이 마음없음(無心)임을 알면 그쳐야 할 마음이 없고, 분별이 없으면 현행하는 식(現識)이
나지 않으므로 그쳐야 할 生도 없다. 이것이 곧, 그칠 것 없음이다. 또, 그칠 것 없음도 아니니, 그 까닭은 그칠 것 없는 것을 그쳐야하기
때문이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존이시여, 만일 그칠 것 없는 것을 그쳐야 한다면 그침이 곧 生인데 어찌하여
無生이라고 하셨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응당 이 生을 그치어야 한다. 그치고 나면 이미 그칠 것이 없고,
그칠 것 없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고, 또 머물 것 없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거늘, 어찌하여 生이라 하랴!'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생의 마음은 어떠한 것을 취하고 버리며, 어떠한 법상에 머무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생의 마음은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마음 아닌데 머물고 법 아닌데 머문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마음 아닌 데 머뭄이며 법 아닌 데 머뭄이 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을
내지 않음이 마음 아닌 데 머뭄이고, 법을 내지 않음이 법 아닌 데 머뭄이다. 선남자야, 마음과 법을 내지 않으면 의지하여 머무름도 없고, 모든
행에 머물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다른 모양(異相)이 없으리라. 비유하면 저 허공은 움직임과 머무름이 없고, 생김도 없고 지음도 없으며,
저것도 없고 이것도 없음과 같다. 마음공의 눈(心空眼)을 얻고 법공의 마음(法空心)을 얻으면 五음과 六입이 모두 공적해 진다.
선남자야,
공법(空法)을 닦는 이는 三界에 의지하지 않으며, 계율의 형상에 머물지 않으며, 청정하고 잡념이 없으며, 거둠(攝)도 없고 놓음(放)도 없어서
성품이 금강과 같으며, 삼보를 파괴하지 않고, 공한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六바라밀을 구족한다.'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六바라밀은 모두가 모양이 있는데, 모양 있는 법으로 세간에서 벗어날 수 있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내가 말한 六바라밀은 모양 없고 작위가 없다. 그 까닭은,
첫째, 욕심을 떠난 경지에 잘 들어가서 마음이
항상 청정하고, 실다운 말의 방편
과 본각의 이익으로 남을 이롭게 함이 보시바라밀이다.
둘째, 지극히 생각이 견고하고, 마음이
항상 머무름이 없으며, 청정하여 물듦이 없고, 三界에 집착하지 않음이 지계바라밀이다.
셋째, 空法을 닦아 번뇌를 끊고, 모든 것에
의지하지 않으며, 삼업을 고요히 하고 몸과 마음에 머물지 않음이 인욕바라밀이다.
넷째, 이름과 수효를 멀리 여이고, 空見과
유견(有見)을 끊어 五음의 空에 깊이 듦이 정진바라밀이다.
다섯째, 공하고 고요함도 모두 여이고 모든 공에 머물지 않으며, 마음이
無住에 처하여 大空에도 머물지 않음이 선정바라밀이다.
여섯째, 마음은 마음의 모양(心相)이 없고 허공을 취(取)하지 않으며, 모든
行이나지 않고 적멸도 증득하지 않으며, 아음이 출·입함이 없고 성품이 항상 평등하며, 모든 법의 진여법성(實際)에서 모두 결정된 성품이며, 여러
가지 地位에 의하지 않고 지혜에도 머물지 않음이 반야바라밀이다.
선남자야, 이 六바라밀은 모두 본각의 이익을 얻고 결정된 성품에
들어 초연히 세상을 벗어나 걸림 없이 해탈케 한다.
선남자야, 이러한 해탈法相은 모두가 모양과 행이 없으며, 또한 해탈과 해탈 아님이
없으나 해탈이라 이름한다. 그 까닭은, 해탈의 모양은 모양 없고. 행이 없으며, 움직임 없고, 어지러움이 없는 고요하고 고요한 열반이지만 또한
열반의 모양(涅槃相)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탈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기뻐하면서 일찍 없던 것(未曾有)을 얻고는
뜻(義)과 뜻(意)을 펴기 위해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대각이 원만하신 세존께옵서 중생을 위하시어 법을 펴시되
모두가 一승으로
말씀하시고 二승의 道는 없어시어라.
한맛의 모양 없는 이익은 마치,
가없는 허공과 같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
없어서,
중생들 성품 각각 다름에 좇아 모두가 근본처소 얻게 하시네.
저렇게 마음과 나를 여이면 하나인 법이
성취되매
三有의 같고. 다른 행에서
모두가 본각의 이익을 얻네.
두 모양과 두 소견을 없애면 고요하고 고요한 열반이지만
열반을
증(證)함에도 머물지 않고 결정된 처소에 들어가네.
모양 없고 행함도 없는 빈 마음
적멸한 경지에서 적멸한 마음은 생멸이
없어
저 금강의 성품 같으므로, 삼보를 파괴하지 않고
六바라밀을 모두 갖추네.
중생들 모두를 제도하시어 초연히 삼계에서
나가게 하되
모두가 소승으로써 아니하시고
한맛의 법인(法印)인 一승으로 하셨네.
그때에 대중들이 이러한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마음과 나의 집착을 여이어 空.無相에 들어가니, 마음이 넓고 커서 모두가 결정된 성품을 얻고 번뇌의 결박을 끊어 번뇌의
흐름을 다 하셨다.
[생각 없는 행]
그 때에 심왕보살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三계를 벗어나 불가사의한 경지에
들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게송으로 물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세상에서 벗어나 모양 없으니
모든
중생들이 누구나 다 번뇌의 흐름을 끊어오리다.
번뇌의 결박 끊어 마음과 내가 공하면
이것이 곧 남이
없음(無生)인데
어찌하여, 남이 없는데 남이 없음을
앎(無生忍)을 얻사옵니까?
그 때에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무생법인이라 함은 법이 본래 무생이고 모든 행이 무생(임을 앎)인데, 生과 行이 없지 않은데 무생인을 얻는다는
것은 허망하다.'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생인을 얻음이 허망하다면, 얻음도 없고 앎도 없으면 응당 허망치
않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그 까닭은, 얻음도 없고.앎도 없다하면 이는 곧 얻음이 있음이니, 얻음이
있고 앎이 있으면 이는 곧 유생(有生)이다. 얻음에서 生이 있으므로 얻는 바가 있는 법은 모두 허망하다.'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앎이 없고. 남이 없는 마음이길래 허망치 않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앎이
없고 남이 없는 마음은 마음의 형단(形段=形體)이 없음이 마치 불의 성품과 같다. 불의 성품이 비록 나무 가운데 있으나 그 처소는 결정성이 없는
까닭에 다만 이름과 글자만 있을 뿐 성품은 얻을 수 없고, 그 이치를 설명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이름을 말하나 이름조차 얻을 수 없다. 마음의
모양도 역시 그러하여 처소를 볼 수 없다. 마음이 이와 같음을 앎이 곧 남이 없는 마음(無生心)을 앎이다. 선남자야, 이 마음의 性과 相은 또한
아마륵 열매와 같으니, 아마륵 열매는 본래 스스로 생긴 것 아니고, 다른 것에 따라 생긴 것 아니며, 함께 생긴 것 아니고, 因에서 생긴 것
아니며, 無生도 아니다.
그 까닭은, 연은 바뀌기 때문이다. 연이 생겼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고 연이 바뀌었다고 멸하는 것 아니니,
숨고 나타남이 모양이 없고, 근본이치는 적멸하며 있는 처소가 없고 머무는 곳은 볼 수 없으나 결정된 성품이기 때문이다. 이 결정된 성품은 또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끊어짐도 아니고, 항상함도 아니며,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나가는 것도 아니며,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네가지 비방(즉, 一. 異, 斷. 常, 入. 出, 生. 滅)을 여이어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 無生心 (生함 없는 마음)의
성품도 역시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난다. 안난다, 안다. 모른다라고 말하겠는가? 만일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마음은 얻을 수 있고, 머무를 수
있고, 볼 수 있다' 고 한다면, 이는 아누다라샴먁삼보리 반야를 얻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길고 긴 밤이다.
마음의 성품(心性)을 요별하여
心性이 이와 같음을 알고 心性이 또한 이와 같으면, 이것이 生함과 行함이 없음(無生行)이다.'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음이 만일 본래 진여라면 行을 냄이 없고 모든 行이 남이 없을 것이니, 生과 行이 나지 않아서, 나지 않고.行이
없음이 無生行이겠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무생으로써 무생함을 깨닫겠는가?'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아니옵니다. 그 까닭은, 진여의 무생행은 性과 相이 공하고 고요하여 봄도 없고.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고,
말도 없고. 말함도 없고, 앎도 없고. 모양도 없고,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거늘 어떻게 깨달음을 취하겠사옵니까? 만일 깨달음을 취한다면 곧
다투고 논함(諍論)이 되리니, 다툼도 없고 논함도 없어야만 무생행일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가?'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없사옵니다. 그 까닭은,
보리(覺)의 성품 가운데는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앎도 없고, 분별의 모양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분별없는 가운데가 곧
청정한 성품이며, 청정한 성품은 사이와 잡물이 없고, 말과 말함이 없고,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고, 앎도 아니고, 알지 못함도 아니옵니다.
온갖 좋은 法行도 역시 이와 같사옵니다.
그 까닭은, 일체의 좋은 법행은 처소를 볼 수 없으나 결정된 성품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얻음과.
얻지 못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네가 말한 바와
같이, 일체의 心行은 모양 없음(無相)에 지나지 않고 자체가 空하고 고요하여 無生이며, 모든 식(識)도 역시 그러하다. 그 까닭은, 눈. 눈의
닿음이 모두 공하고 고요하며 눈알음(眼識)도 역시 공하고 고요하여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 없으며, 안으로 세 느낌(三受, 苦受樂,
受捨受)이 없고 세 느낌이 적멸하며 귀 코 혀 몸, 심. 의. 의식, 그리고 말나 아뢰야도 역시 그러하여 모두 나지 않으면 적멸한
마음(寂滅心)이요 무생의 마음(無生心)이기 때문이다.
만일 적멸하다는 마음을 내거나 무생이라는 마음을 내면 이것은 有生行이지
無生行이 아니므로, 안으로 三受와 三行과 三戒가 생긴다. 만일 적멸이 생기어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적멸하고, 功도 없고 用도
없으며, 적멸相을 깨닫지도 않고 또한 깨달음이 업음에도 머물지 않으며, 가히 無住에 처하여 無相을 거두어지니면 곧 三受가 없고, 三受. 三行.
三戒가 모두 적멸하면 청정하여 머무름이 없고, 삼매에 들지 않고 좌선에 머무르지 않으면 生도 없고 行도 없다.'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선(禪)은 능히 요동을 거두고 모든 환난(幻亂, 환술같은 어지러움)을 고요히 그치게 하거늘, 어찌하여 선을 하지 않는다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선(禪)이 곧 동(動)이므로, 動하지 않고.禪하지 않는 것이 無生의 禪이다.
선의 성품은 無生이므로 선을 내는 모양을 떠나야 하고, 선의 성품은 無住이므로 선에 머무르려는 움직임을 떠나야 한다. 만일 선의 성품은 動.靜이
없음을 알면 곧 無生을 얻는다. 무생의 반야는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고 마음도 역시 움직이지 않는다. 이러한 지혜로써 무생의 반야바라밀을
얻는다.'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생의 반야는 온갖 곳에 머무름도 없고 온갖 곳을 떠남도 없으며, 마음도 머무는
곳이 없고 마음을 머물 곳도 없사옵니다. 머무름 없고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나거나 머뭄이 없사옵니다. 이와같이 마음을 머뭄이 곧 無生에 머뭄
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마음이 無生에 머뭄은 불가사의한데, 불가사의한 가운데는 가히 말할 수 없겠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심왕보살이 이와같은 말씀을 듣고, 미증유한 일(=일찍 없었던 일)이라고 찬탄하면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큰 지혜 만족하신 세존께옵서
널리 무생법을 말씀하시니
일찍 못 들은 것 들었고
말하지 않으신 것
말씀하셨네.
마치 청정한 단이슬(甘露)이
때때로 한 번 나오듯
만나기도 어렵고 생각키도
어려우며 듣기도 역시
어렵다네.
위 없는 좋은 복밭은
최상의 승묘한 약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려고
방금 말씀하셨네.
그 때에
대중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모두 無生과 무생반야를 얻었다.
[근본 깨달음의 이익]
그 때에 무주보살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한맛 진실 불가사의한 법문을 들으면서, 먼곳에서부터 가까이에 와서 여래의 자리 근처에서 전렴(專念)하여 자세히 듣고,
청백(淸白)한 경지에 들어가서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무주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디로부터
와서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가?'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근본 없는 곳으로부터 와서 지금 근본 없는 곳에
이르렀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본래 어디서 온 것이 아니며, 지금 또한 어디에 이른 것도 아니다. 너는
본각의 이익인 불가사의함을 얻은 대보살마하살이로다.'
곧 큰 광명을 놓아서 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시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거룩하다 보살이여!
지혜가 원만 구족하여
항상 본각의 이익으로
중생을 이익케 하네.
네
가지 위의에서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물러
온갖 중생을 인도하여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게 하네.
그 때에
무주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이익으로 운전하여 중생들이 온갖 情과 識을 굴리어 암마라식에 들게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 여래는 항상, 하나인 각(一覺)으로써(중생들의) 모든 식을 굴리어 암마라에
들게 하시는데, 그 까닭은 일체 중생의 본래의 각(本覺)이기 때문이다. 항상 一각으로써 모든 중생을 깨우쳐,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하고, 모든 情과 識이 공하고 고요하며 無生임을 깨닫게 한다. 그 까닭은, 결정된 본 성품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일체의 식은 모두 경계를 인연하여 일어나거늘 어찌하여 (결정된 본성품이) 움직이지
않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의 경계가 본래 공하고, 일체의 식이 본래 공하며, 공한 것은 인연의 성품이 없거늘
어찌하여 인연에서 일어나랴.'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일체의 경계가 공하다면 어찌하여 보임이
있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다는 것이 곧 허망하다. 그 까닭은, 일체 만유(=온갖 존재)가 生함이 없고 모양이
없으며, 본래 제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모두 다 공하고 고요하기 때문이다. 일체의 法相도 역시 그러하고, 일체의 중생의 몸도 역시
그러하다. 몸도 오히려 있지 않거늘 어찌하여 보임이 있으랴.'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일체의 경계가 공하고, 일체의 몸이
공하고, 일체의 식이 공하다면 각도 응당 공 하겠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一각은 헐지도 못하고 깨뜨리지도 못하는
결정된 성품이므로, 空함도 아니고 不空함도 아니어서 空.不空이 없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모든 경계도 역시 그러하여
空相도 아니고, 無空相도 아니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저 경계라는 것은 성품이 본래 경정되었으며, 경정된
성품의 근본은 처소가 없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깨달음도 역시 그러하여 처소가 없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깨달음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청정하고, 청정한 것은 깨달음이 없다. 사물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청정하고, 청정한
것은 形色이 없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마음과 눈과 식도 역시 그러하여 불가사의하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눈과 식도 역시 그러하여 불가사의하다. 그 까닭은, 形色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이름이 없으므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눈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봄(見)이 없으므로 밖으로 나가지 않고, 마음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위가 없으므로 일어나는 곳이 없고, 식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으므로 반연하고 분별함이 없다. (六진.六근.마음.식의) 성품이 모두 공적하며 성품은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으면
곧 깨달음이 된다.
선남자야,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아 알면 모든 식이 곧 들어간다. 그 까닭은, 금강지혜의 경지에서
해탈도(解脫道)가 (모든 식의 종자를) 끊기 때문이다. 끊고나면 머무름 없는 경지에 들어간다. (心識의) 출.입이 없고 마음의 처함이 없는
경정된 성품의 경지는 그 경지가 청정함이 맑은 유리와 같고(大圓鏡智), 성품이 항상 평등함이 저 大地와 같고(平等性智), 깨닫고 묘하게 관찰함이
지혜의 햇빛과 같고(妙觀察智), 이익을 이루어 본각을 얻게함이 큰 법비(大法雨)와 같다(成所作智).
이러한 지혜에 든 이는 부처의 지혜
경지(佛智地)에 든 것인데, 이 지혜의 경지에 든 이는 모든 식이 나지 않는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一각의 거룩한 힘과 네 가지 넓은 지혜의 경지는 곧 일체 중생의 本根인 각(本覺)의 이익이옵니다. 그 까닭은, 일체 중생의 몸 가운데에 본래부터
원만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 까닭은, 일체 중생이 본래 무루(無漏)이고 모든
좋은 이익의 근본이지만 지금은 항복시키지 못한 탐욕의 가시가 있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만일 중생이 본각의 이익을 얻지
못하고서 오히려 (번뇌와 업의 종자를) 캐 모으고 있다면, 어찌하여야 조복받기 어려운 것을 항복받을 수 있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번뇌와 업의 종자)를 모으거나 홀로 행하면서, 분별하거나 물들거나 하면, 정신을 돌려 공의 굴(空窟)에 두면,
조복받기 어려운 것을 항복받고 모든 탐욕의 가시를 멀리 여이어 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초연히 노지(露地)에 앉아 식음(識陰)이 열반에
들리라.'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마음이 열반을 얻으면 오직 一각뿐이고 諸識이 없으므로, 항상 열반에 머뭄이 응당
해탈이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항상 열반에 머무름은 [열반에 얽매임]이다. 그 까닭은, 열반은 본각의 이익이고
각의 이익은 본래의 열반이며, 열반은 각의 공덕 즉 본각의 공덕이고, 각의 성품은 다르지 않고 열반도 다름이 없으며, 각은 본래 무생이고 열반도
무생이며, 각은 본래 무멸이고 열반도 무멸이며, 열반과 각은 본래 다름이 없으므로 얻을 것 없는 것이 열반이기 때문이다. 열반은 얻을 것도
없거늘 어찌하여 머물 것이 있으랴.
선남자야, 깨달은 이는 열반에 머물지 않으니, 그 까닭은 본래 무생임을 깨달아서 중생의
때(垢)를 여의었고, 본래 무적(無寂)임을 깨달아서 열반에의 움직임을 여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에 머물면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고
드나듦(出入)이 없어 암마라식에 들어간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암마라식은 들어갈 곳이라면, 곳이란 얻을 바가 있으므로
이것은 얻는 법(得法)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그 까닭은, 비유하면 길 잃은 아들이 손에 돈을 쥐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고, 시방을 두루 떠돌아다니면서 五十년이 지나도록 빈궁하고 곤고하여 오로지 먹을 것만 구하여 몸을 보양하려 하였으나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런 일이 있음을 보고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돈을 쥐고 있으면서도 왜 쓰지 않는가? 네
뜻대로 필요한 것을 모두 충족시키도록 하여라' 라고 하였다. 그 아들이 깨닫고 보니 돈을 쥐고 있었음을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면서 '돈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어리석은 아들아, 너는 너무 기뻐하지 말아라. 네가 지닌 돈은 네게 본래 있던 재물이고
새삼스럽게 얻은 것이 아닌데 어째서 기뻐하는가?' 함과 같다. 선남자야, 암마라식도 역시 그러하여 본래 나간 모양(出相)이 없고 지금도 들어감이
아니다.
예전에 모를 때도 없는 것이 아니었고, 지금 깨달았다해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저
사람의 아버지가 그 아들의 미혹함을 알았다면 어째서 五十년이 지나도록 시방으로 헤매면서 빈궁하고 곤고한 뒤에야 비로소
말하였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五十년을 지냈다함은 한 생각의 마음이 움직인 것을 말하고, 시방에 헤맸다 함은 멀리
변계(=쓸데없는 분별)를 부린 것을 말한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한 생각의 마음이
움직임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생각의 마음이 움직이면 五음이 함께 나고, 五음이 함께 나는 중에는 五十가지
악(惡)이 갖추어져 있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멀리 변계를 부리어 시방을 헤매고, 한 생각의 마음을 움직임에 五十가지
악이 갖추어진다면, 어찌하면 저 중생들로 하여금 한 생각도 남이 없게 할 수 있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히어 금강地에 머무르게 하고, 생각을 고요히 하고 일어남이 없게하며,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평하게 하면
곧 한 생각도 남이 없게 되리라.'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불가사의 하옵니다. 깨닫고 생각함이 나지 않으면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함이 곧 본각의 이익이옵니다. 본각의 이익은 변동이 없으므로 항상 있어서 없어지지 않으며, 있는 것은 없으나 없는 것이 아니며, 없는 것은
아니나 깨달을 것도 아니옵니다. 깨달을 것이 없음을 깨달아 알면 본래의 이익인 본각 이옵니다. 각은 청정하고 물듦이 없으며, 변하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는 결정된 성품이므로 불가의 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무주보살이 이러한 말씀을
듣고 일찍 없던 것을 얻어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거룩하신 대각 세존께옵서
중생들에게 무념법을 말씀하셨네.
생각
없고 생멸 없는 마음은 마음이
항상하고 무궁하여 멸치 않네.
일각인 본각의 이익으로
모든 본각자를 이롭게
하나,
마치 돈을 얻었다는 이와 같아서
얻은 것이 얻은 것 아니라네.
그 때에 대중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모두 본각의
이익인 반야바라밀을 얻었다.
[실제에 들어감]
그 때에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들이
본각의 이익에 깊이 들어가면 가히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게 된다. 만일 후세의 그릇된 때에 진여에 응하여 설법하면 때(時)의 이익이 갖추어지지
않겠지만, 순(順)으로도 말하고 역(逆)으로도 말하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게, 상응하고 여실한 말로써 온갖 가지 情과 지혜를 가진 유정들을
이끌어서 살바야의 바다(薩波若海, 일체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여, 제도 받을 만한 중생들로 하여금 저(六진 경계의 헛 바람에 휩쓸리지 않게
하고, 모두 한맛의 대 열반을 바라게 하여야 한다.
세간은 세간이 아니고 머무는 곳은 머무를 곳이 아니므로, 五空에 출입하되
취함과 버림이 없게 한다. 그 까닭은, 모든 법의 空相은 성품이 有.無가 아니고, 無.不無(없지 않음)도 아니며, 無(없음)도 아니고
有(있음)도 아닌 것은 결정된 성품이 없어서, 있다(有). 없다(無)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저 有.無는 범부와 二승 성인의 지혜로써 능히
헤아릴 바가 아니다. 모든 보살들이 이 요체(利)를 알면 곧 정각을 얻는다.'
그 때에 대중 가운데 한 보살이 있었으니 이름이
대력이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서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五空에 출·입하되 취사함이
없다]하셨는데, 어떤 것이 五空이기에 취사하지 아니하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五空이란 (一) 三有가 空 (二)
六도의 영상(影像)이 空 (三) 法相이 空 (四) 名·相이 空 (五) 심식의 의미가 空이다. 보살이여, 이런 것 등의 空은 空이 空에 머물지
않고, 空은 空相이 없어서 모양 없는 법이거늘 어떻게 취함과 버림이 있겠는가! 취함 없는 경지(無取地)에 들어가면 곧 三空에
든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三空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三空이란 (一) 공한
모양(空相)이 空함 (二) 공이라는 공(空空)이 空함 (三) 공 하다는 것(所空)도 空함이다. 이러한 공들은 세 가지 모양(즉, 三空相)에
머물지 않으며 진실이 없지 않으나 글과 말의 道가 끊어졌으므로 헤아릴 수 없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진실이 없지 않다면
이 모양(즉, 三空相)은 응당 있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없음(無)은 없음(無)에 머물지 않고, 있음(有)은
있음(有)에 머물지 않으므로, 없음도 아니고 있음도 아니다. 있지 않은 法이라고 곧 無에 머무는 것이 아니며, 없지 않은 相이라고 곧 有에
머무는 것이 아니므로, 有.無로써 설명하여 道의 이치를 취할 수는 없다. 보살이여, 이름과 의미가 없는 모양은 불가사의하니, 그 까닭은 이름
없는 이름이라고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의미 없는 의미라고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이와 같은 이름과 의미는 진실한 진여의 相이며 여래의 진여의 相이나, 진여는 진여에 머물지 않고 진여는 진여의 相이
없사옵니다. 진여의 相에는 진여가 없다고해서 여래 아닌 것이 아니고, 중생의 心相은 心相 역시 여래이므로 중생의 마음도 응당 다른 경계가 없을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중생의 마음에는 실로 다른 경계가 없다. 그 까닭은,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진리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六진에 물들었기 때문에 三界라 하고, 三계의 마음을 다른 경계라 부르지만 이 경계는 허망하여서 마음에서 변화하여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망상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도 없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마음이 청정하면 모든 경계가 나지
않는다면, 이 마음이 청정할 때 응당 三계도 없을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마음이 경계를 내지 않으면
경계가 마음에서 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보이는 모든 경계는 오직 보이는 마음이므로 마음이 幻같이 변화하지 않으면 곧 보이는 것도 없어진다.
보살이 안으로 중생이 없고 三性이 공하고 고요하면 곧 自性중생도 없고 다른 중생도 없으며, 두 가지 들어감(二入)에 이르면 마음을 내지 않는다.
이러한 이익을 얻으면 곧 三界가 없어진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두 가지 들어감이길래 마음을 내지 않사옵니까?
마음은 본래 나지 않거늘 어찌하여 들어감이 있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 들어감이란 (一)이치로
들어감(理入) (二) 행으로 들어감(行人)이다.
첫째, 이치로 들어감이란, 중생(의 성품)이 참 성품(眞性)과 다르지 않으나
하나가 아니고 한가지도 아닌 것은 다만 객진(客塵)에 가리워있기 때문임을 깊이 믿고,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게 마음을 모아 각관에 머물러 불성을
자세히 관찰하되 [(불성은)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니며, 자기도 없고 남도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님]을 알아서 금강心의 경지에 굳게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고 함이 없이(無爲)하고 분별을 없앰인데, 이것을 이치로 들어감이라 한다.
둘째, 행으로 들어감이란,
마음을 기울이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마음의) 영상을 흘리거나 바꿈이 없으며, 있는 처소에서 생각을 고요히 하고 구함이 없으며, 바람이 북치 듯
쳐도 움직이지 않기를 大地와 같이 하며, 마음과 나를 버리고 여이어서 중생을 구원하고 제도하며, 生도 없고 相도 없고,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음이다.
보살이여, 마음은 드나듦(出入)이 없고 드나듦이 없는 마음은 들어감이 아니지만 [들어간다]고 이름한다.
보살이여,
이렇게 법에 들면(진여의) 法相은 공하지 않으며, 공하지 않은 법은 헛되거나 버릴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은, 없지 아니한 법은 공덕이
구족하여,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어서 법 그대로가 청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어서 법 그대로가 청정한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한 진여의 법은 마음과 식의 법(心識法)이
아니며, 마음의 부림에 딸린 법(心所法)이 아니며, 공 모양의 법(空相法)이 아니며, 색 모양의 법(色相法)이 아니며, 마음의 유위의
불상응법(心有爲不相應法)이 아니며, 마음의 무위와 상응하는 법(心無爲相應法)이 아니며, 나타난
영상(所現影)도 아니며, 드러내 보여진
것(所顯示)도 아니며 ,자성도 아니고 차별도 아니며, 이름도 아니고 모양도 아니고 의미도 아니다. 그 까닭은 의미에는 진여가 없기
때문이다.
진여가 없는 법은 또한 진여가 없다는 것도 없고, 진여가 없다는 것도 없으므로 진여가 없다는 것도 있지 않다. 그
까닭은, 근본이치의 법은 이치도 아니고 근본도 아니어서 모든 쟁론을 떠나 있으며 그 모양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이여, 이와 같은 맑은
법은 나게함으로써 나는 것이 아니며, 멸하게함으로써 멸하는 것이 아니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불가사의하옵니다. 이러한
(진여의)법상은 합하여 이룬 것 아니고 홀로 이룬 것 아니며, 굴레 씌운 것 아니고 옭아맨 것 아니며, 모은 것 아니고 흩어진 것 아니며, 나는
것 아니고 멸하는것 아니며, 또한 오는 모양과 가는 모양이 없으므로 불가사의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불가사의하다. 부사의한 마음은 마음역시 그러하니, 그 까닭은 진여는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마음이 본래 진여]이기 때문이다. 중생과 불성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고 생·멸의 성품은 성품이 본래 열반(=적멸)이며, 성품(性)과 모양(相)이 본래
진여이니 진여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法相이 인연따라 생김이 없고, 생기는 法相의 성품도 진여이니 진여는 움직여짐이 없기 때문이다.
인연의 性.相은 性.相이 본래 空하고 없으며, 인연과 인연은 공하고 공하므로 법이 인연에서 생김이 없다. 일체의 인연법은 미혹한 마음이 허망하게
본 것이므로 나타난 것은 본래 나지 않음이니, 인연은 본래 없기 때문이다.
마음진여법의 이치는 자체가 空.無함이 마치 저 허공과
같아서 본래 머무는 곳이 없다.
범부들은 마음으로 허망하게 분별하여 보지만 如如(=眞如)의 모양은 본래 있다. 없다가 아니다. 있다.없다의
모양은 오직 보이는 심식일 따름이다. 보살이여, 이러한 마음진여법은 자체가 없음도 아니고 자체가 있음도 아니므로,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니다.
보살이여, 없거나 없지 아니한 모양은 말의 경지가 아니다. 그 까닭은, 진여의 법은 허공같이 광대하며 모양이 없으므로
二승들이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허공 경계는 內外를 헤아릴 수 없으므로 六行의 선비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六行이온지 원컨대 말씀해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 십(十)신행
둘째, 십(十)주행
셋째, 십(十)행행
넷째, 십(十)회향행
다섯째,
십(十)지행
여섯째, 등각행 이다. 이러한 수행자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실제인 본각의
이익은 드나듦이 없지만 어떠한 법과 마음으로 실제에 들 수 있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실제의 법은 그 법이 끝이
없으므로 끝없는 마음으로라야 곧 실제에 들 수 있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끝없는 마음의 지혜는 그 지혜가 끝이 없고,
끝이 없는 마음은 자재함을 얻을 것이요, 자재한 지혜로써 실제에 들어갈 것이옵니다. 저 범부들처럼 마음이 약한 중생들은 그 마음에 헐떡거림이
많으니, 어떠한 법으로써 다스려야 굳은 마음을 얻어 실제에 들게 하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마음이
헐떡거리는 이는 안과 밖의 부리움 때문인데, 부리움에 따라 (식의 종자가) 흘러 들어가 방울방울이 모여 (장식에서 번뇌의) 바다를 이룬다. 큰
바람이 북치듯이 불어 (식의) 물결이 치면 (무명식심) 큰 용(大龍)이 크게 놀라는데, 이 놀라는 마음 때문에 헐떡거림이 많은 것이다.
보살이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셋을 있게 하고 하나를 지켜서 여래선(如來禪)에 들게 하면, 선정으로 인해서 마음의 헐떡거림이 곧
없어진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셋을 있게 하고 하나를 지켜서 여래선에 드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셋을 있게 한다는 것은 三해탈을 있게 함이고, 하나를 지킨다는 것은 한 마음의 진여를
이치로 관찰함이니, 이와 같은 경지에 들면 곧 실제에 든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三해탈법이란 어떤 것이며, 이치로
관찰하는 삼매(理觀三昧)는 어떠한 법으로부터 들어가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三해탈이란 첫째, 허공해탈. 둘째,
금강해탈. 셋째, 반야해탈이고, 마음을 이치로 관찰한다 함은 마음을 이치와 같이 맑혀서 마음 아닌 것이 없게 함이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해탈의 효용이며 어떤 것이 관찰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실사(實事)가 둘이
아니면 이것을 해탈의 효용이라 하고, 안의 행과 밖의 행, 낢과 듦이 둘이 아니며, 한 모양(一相)에도 머물지 않으며, 마음에 얻고 잃음이
없으며,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경지(一不一地)에 맑은 마음으로 흘러듦을 관찰(觀)이라 한다.
보살이여, 이러한 사람은 두 형상(二相)에
있지 않으니, 비록 출가한 것이 아니지만 재가(在家)에 머물지 않으며, 비록 법복이 없고 파라제목차계(戒)를 지니지 않으며, 포살에 들지
않지만, 능히 자기의 마음으로써 무위이고 자유롭게하여 거룩한 과(聖果)를 얻어, 二승에 머무르지 않고 보살도에 들며, 뒤에 보살지를 다
채우고나서 부처의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출가한 것도 아니고
출가하지 않은 것도 아니옵니다. 그 까닭은, 열반의 집에 들어, 여래의 옷을 입고, 깨달음의 자리에 앉은 때문이니, 이러한 사람은 사문들까지라도
응당 공경하고 공양해야 할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 까닭은, (그러한 사람은) 열반의 집에 들어가
마음으로 三界를 초월하고, 여래의 옷을 입고, 법이 공한 곳에 들어, 깨달음의 자리에 앉아서 정각의 첫 지위(正覺一地)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마음으로 二승을 초월하였거늘 어찌 사문인들 공경하고 공양하지 않으랴!'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그와 같은 정각의
첫 지위와 공의 바다(空海)는 二승들이 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저 二승들은 삼매에 맛들여
집착하고, 삼매의 몸(三昧身, 멸진정에 들어 유루의 智.心을 멸하여 생긴 멸진정의 몸)을 얻어, 저 空海의 한 경지에서-마치 술병(酒病)을
얻어서 잔뜩 취하여 깨지 못함 같이-(삼매의 술에 잔뜩 취해서 깨어나지 못하여) 몇 겁을 지나도록 깨달음을 얻지 못하다가, 삼매의 술 기운이
가신 뒤에 비로소 깨닫고는, 바야흐로 이러한 六行을 닦고나서 부처의 몸(佛身)을 얻는다.
저와 같은 사람(즉, 六行의 大士)은 일천제에서
벗어나 바로 六行에 들어가서, 행하는 경지에서 한 생각 맑은 마음이 경정명백하면, 금강같은 지혜의 힘으로 물러나지 않는 자리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되 자비심이 끝이 없으리라.'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응당 계를 지니지 않으리니, 저러한
사문은 응당 공경하고 우러러보지 말아야 하겠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를 말하는 것은 착하지 못함(不善)과
아만(我慢) 때문이며 마음바다(心海)의 파랑(波浪) 때문이지만, 저러한 사람의 마음자리는 八식의 바다가 맑고 고요하며 (등渟)은 九식의 흐름이
맑아서, 바람도 움직이지 못하고 파랑도 일지 않는다.
계의 성품은 허공과 같으므로 지니는 이는 미혹하고 뒤바뀌거니와, 저러한 사람은
七.六식이 나지 않으며 모든 쌓임(集, 五온)이 멸하여 안정되었으며, 세 부처님(三佛)을 여이지 않고 깨달음을 내며, 세가지 모양 없음(三無相)
가운데서 마음을 길들이어 깊은 곳에 들어가며, 깊이 三보를 공경하여 위의를 잃지 않으므로, 저러한 사문에게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보살이여, 저 어진이는 세간의 동법.부동법에 머물지 않고, 三空에 들어가 三계의 마음을 멸하였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저 어진이는 (一) 과만족덕불 (二) 여래장불 (三) 형상불 등 이러한 부처님들의 처소에서 보리심을 내고 三취계에 들어갔으나
그 계의 모양에 머무르지 않으며, 三有의 마음을 멸하였으나 적멸한 경지에서 살지 않고, 제도할 만한 중생을 버리지 않아 고르지 못한 땅(즉,
六도의 거치른 땅)에 들어가오니, 실로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그 때 사리불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반야의 바다를 구족하시고도 열반성에는
안 머무시니 흡사 미묘한 연꽃이
높은 땅에서 아니남
같네.
모든 부처님은 한량없는 겁에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으시고
세상을 건진 뒤 얻으시니 진흙에서
연꽃이 핌과
같도다.
저와 같은 六行의 경지는
보살들이 닦을 바요 저러한 三空의 모임은
보리의 참된 도이어라.
나는
이제, 머물고 안 머물기를 부처님
말씀대로 하리니 온 곳으로 되돌아 와서
구족한 연후에 벗어나리라.
다시 모든 중생들이
나와 같게 하리니
앞에 오는 자나 뒤에 오는 이들
모두 정각에 오르게 하리.
그 때에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헤아릴 수 없구나. 너는 반드시, 오는 세상에 보리도를 완성하여, 한량없는 중생들을 생사의 고통바다(生死苦海)에서 뛰어넘게
하리라.'
그 때에 대승의 무리들은 모두 보리를 깨달았고, 뭇 소승의 무리들은 五空의 바다에
들어갔다.
[참된 성품은 공한 것]
그 때에 사리불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도를 닦음에는
이름과 모양이 없고, 三취계는 형식이 없거늘 어떻게 거두어 지니어서 중생을 위해 말씀하시옵니까?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써 저희들을 위해
말씀해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지금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말하리라. 선남자야, 善.
不善법은 마음에서 변화하여 생긴다. [모든 경계는 뜻과 말의 분별]이므로 한 곳(一心)을 제지(制止)하면 뭇 인연이 끊어져 없어진다. 그
까닭은, 선남자야, 하나인 근본을 일으키지 않으면 세 가지 작용을 쓸 것도 없기 때문이다. 진여의 이치에 머물면 六도의 문이 닫히고, 四연이
진여에 수순하면 三취계가 구족된다.'
사리불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四연이 진여에 수순하면 三취계가 구족함
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四연이란,
첫째, 택멸하는 힘으로 취하는 연이니 [섭율의계(즉율의를 거두는
계)]
둘째, 본각의 이익인 맑은 근의 힘이 모아서 일으키는 연이니 [섭선법계(즉, 선법을 거두는 계)]
셋째, 본각 지혜의 크게
가엾이 여기는 힘의 연이니 [섭중생계(즉, 중생을 거두는 계)]
넷째, 일각의 통달한 지혜의 힘의 연이니 [진여에 수순하여
머무름(順於如住)]이다. 이것이 四연이다.
선남자야, 이러한 네 가지 큰 연의 힘은 일의 형식(事相)에 머물지 않되 보람과 효과(功用)가
없지 않지만, 한 곳-一心의 진여-을 떠나면 곧 구할 수 없다.
선남자야, 이와 같은 한가지 일-진여의 이치에 머뭄-은 六行을 통틀어
거두는데, 이것이 부처 깨달음의 일체 지혜의 바다이다.}
사리불이 사뢰었다.
'일의 형식에 머물지 않되 공용이 없지 않으면 이
법은 참된 공(眞空)이므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며, 두 가지 나를 초월한 대반열반이므로 그 마음이 얽매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것은
큰 힘이 있는 관(大力觀)이며, 이 관각(觀覺, 관찰하고 깨달음) 중에는 응당 三十七도품법이 구족 하였겠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三十七도품법이 구족 하였다. 그 까닭은 四념처와 四정근과 四여의족과 五근과 五력과 七각분과 八정도 등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법은)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니, 이름과 수효이므로 다만 이름과 글자일 뿐이고 법은 얻을 수 없으며,
얻을 수 없는 법은 한 뜻이고 문자가 없다. 문자相이 없는 뜻(義)은 진실한 空性이고, 공성의 뜻은 여실한 여여이며, 여여(眞如)의 이치에는
온갖 법을 갖추었다. 선남자야, 진여의 이치에 머문이는 세 고통바다(三苦海)를 건넌다.'
사리불이 사뢰었다.
'일체 만법은
모두 글과 말이요, 글과 말의 모양은 뜻(義)이 아니므로 여실한 뜻은 말로써 설할 수 없는데, 지금 여래께서는 어떻게 법을
설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말하는 것은 너와 중생이 말하는 경지에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하므로 법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은 뜻말(義語)이지 글말(文語)이 아니고, 중생이 하는 말은 글말이지 뜻말이 아니다.
뜻말이 아닌 것은 모두 공무(空無, 비고 무실함)하고, 공무한 말로는 뜻을 말할 수 없고, 뜻을 말하지 않는 것은 모두 허망한
말(妄語)이다.
여실한 뜻말이란 [실여(實如)는 공성(空性)이지만 공이 아니고, 공성은 실여지만 실이 아니므로 二相(즉 실상과 공상)을
떠났으며, 중간은 중간이 아니고, 중간이 아닌 법은 三相(즉, 실상.공상.중간상)을 떠났으므로 처소를 보지 않고 여여하게 말함]이다.
또, [진여는 無.有가 없지만 無로 인하여 無속에서는 有이고, 진여는 有.無가 없지만 有로 인하여 有에서는 無이나, 有.無는 있지
않다.
有.無에 있지 않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진여에도 있지 않으므로 진여는 있는 진여도 아니고 없는 진여도 아니다]라고
말함이다.'
사리불이 사뢰었다.
'일체 중생이 일천제와 일천제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지위에 머물러야 여래와 여래의
실상에까지 이르게 되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천제의 마음으로부터 여래와 여래의 실상에 이르기까지는 五등급의 지위에
머무른다.
첫째, 믿는 지위(信位), 이 몸 중에 있는 진여종자가 妄心에 가리워 있으므로 망심을 버리고 여이면 淨心이 청백해짐을
믿고, [모든 경계는 뜻과 말의 분별임]을 앎이다.
둘째, 생각하는 지위(思位), 생각한다 함은 모든 경계는 오직 뜻과 말이며 뜻과
말의 분별이 뜻(意)에 따라 나타난 것이므로, 보이는 경계는 나의 본식(本識)이 아님을 관찰하고, 또 이 본식은 법도 아니고 뜻도 아니며,
취해지는 것(所取)도 아니고 취함(能取)도 아님을 앎이다.
셋째, 닦는 지위(修位), 닦는다 함은 (止와 觀이) 항상 일어나고 능히
일으키되, 일으키고 닦는 것을 동시에 하면서, 먼저 지혜로써 인도하여 모든 장애와 어려움(障難)을 물리치고 덮힘과 얽힘(蓋纏)에서
벗어남이다.
넷째, 행하는 지위(行位), 행한다 함은 모든 수행지를 떠났으므로 마음에 취함과 버림이 없으며, 더없이 맑은 근의
이익으로 마음진여에서 움직이지 않으므로 결정된 實性인 대반열반에 듦인데, 오직 성품이 공하고 큰 것이다.
다섯째, 버리는
지위(捨位), 버린다 함은 성품이 공함에도 머물지 않고, 바른 지혜의 흐름을 바꾼 大悲의 진여相인데, 진여의 相은 진여에 머물지 않으므로
삼먁삼보리(正等正覺)를 마음을 비우고 증득하지 않으며, 마음이 끝이 없어 있는 곳을 볼 수 없으니, 이는 여래에 이른 것이다.
선남자야,
다섯 등급의 지위는 하나의 깨달음(一覺)이어서 본각의 이익을 좇아 들어간다. 만일 중생을 교화하려하면 그 근본처소로부터 하여야
한다.'
사리불이 사뢰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근본처소로부터 하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근본처소가 없으나, 처소 없는 공한 경계에서 실제에 들어가 보리심을 내면 거룩한 도를 원만히 이룬다. 그 까닭은,
선남자야, 마치 손으로 저 허공을 잡으면 (허공을) 얻는 것도 아니고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님과 같다.'
사리불이
사뢰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현상(事相)에 앞서 본각의 이익을 취하면 이(생멸하는) 생각이 적멸해지는데 적멸이 곧
진여입니다. (진여는) 모든 덕을 다 지니고 만법을 다 거느리되 원융하여 둘이 아니므로 불가사의 하옵니다. 응당 이 법이 곧 마하반야바라밀이며,
크게 신비로운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같을 이 없는데 같은 주문인가 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진여는 공한 것이 성품이므로 성품이 공한 진여지혜의 불로 모든 번뇌를 태워 없애면 평등하고 평등하게 되어,
등각의 三地와 묘각의 三身이 九식 중에서 환하게 밝고 맑아 온갖 영상이 없다. 선남자야, 이 법은 因도 아니고 緣도 아니니 지혜 스스로의
用이기 때문이고, 움직임도 아니고 고요함도 아니니 用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며, 뜻(義)은 있음과 없음이 아니니 공한 모양도 공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만일 중생을 교화하려하면 저 중생들로 하여금 이 뜻을 관찰하여 이 뜻에 들어가게 해야한다. 이 뜻에 들어감이 여래를
봄이다.'
사리불이 사뢰었다.
'여래불 의미(義)로 관찰하면 모든 흐름에 머물지 않으며, 응당 四선을 떠나고 유정(有頂天,
비상비비상천)을 초월하겠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 까닭은, 온갖 법은 이름(名)과 숫자(數)이니 四선도
역시 그러하다. 만일 여래를 본 이는 여래이니 마음이 자재하고 항상 멸진처에 있으며, 들지 않고 나지 않는데, 그것은 안팎이 평등하기
때문이다.선남자야, 저와 같은 모든 선의 관(禪觀)은 모두가 有爲이기 때문에 망상의 선정이지만, 진여는 저러한 망상의 선정이 아니다. 그
까닭은, 진여로써 진여의 실상(實相)을 관하면 관할 진여의 모양을 볼 수 없는데, 그것은 모든 모양이 이미 적멸하기 때문이다. 적멸이 곧 진여의
뜻(如義)이다.
저와 같은 망상의 선정은 동(動)이지 선(禪)이 아니니, 그 까닭은 선의 성품은 모든 동요를 여인 것이므로 물드는
것이 아니요 물들여지는 것이 아니며, 법이 아니요 영상이 아니어서 [모든 분별을 여인 것]이라는 본래의 뜻이 뜻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이와
같이 관하는 선정이라야 禪이라 이름한다.'
사리불이 사뢰었다.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여래께옵서는 항상 진여의 실상으로써
중생을 교화하시지만, 이러한 실상의 뜻에는 많은 글과 넓은 뜻이 있으므로, 영리한 중생은 닦을 수 있으나 우둔한 중생은 뜻을 두기도 어려울
것이오니, 어떠한 방편으로 저 둔한 중생들이 이 진리에 들게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둔한 중생들로 하여금 한
四구게를 받아지니게 하면 곧 실상의 진리에 들게 한다. 온갖 불법이 한 四구게 중에 다 포함되어진다.'
사리불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한 四구게인지, 원컨대 말씀해 주옵소서.'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인연에서
나는 뜻은 멸하고는 나지 않고,
모든 생멸 멸한 뜻은 나고서는 멸치 않네.'
그 때에 대중들이 이 게송을 듣고 모두 다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모두가 生을 멸하고, 생을 멸하는 반야와 성품이 공한 지혜의 바다(性空智海)를 얻었다.
[여래의
갈무리]
그 때에 범행장자가 본 경계(本際)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난 뜻(=생멸을 멸한 뜻)은 멸하지
않고, 멸한 뜻(=인연에서 나는 뜻)은 나지 않는다]고 하시니 이러한 진여의 뜻이 곧 부처님의 보리이옵니다. 보리의 성품은 분별이 없지만
분별없는 지혜로는 다함없는 것을 분별합니다.
다함없음의 모양(無窮之相)은 오직 분별이 멸한 것이므로 이러한 뜻모양(義相)은 헤아릴 수
없고, 헤아림이 없는 가운데는 분별이 없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온갖 법의 수효는 한량 없고 끝이 없으며, 끝없는 法相은 한 진실한 뜻의
성품(一實義性)이므로 오직 하나의 성품에만 머무니 그 일은 어떠하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헤아릴 수 없다.
내가 온갖 법을 말하는 것은 미혹한 이를 위하기 때문이며 방편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나, 온갖 법상은 한 진실한 뜻의 지혜(一實義智)이다.
그
까닭은, 비유하면 어떤 성시(城市)에 있는 네개의 대문(四大門)을 열어 놓으면 이 네개의 대문을 통하여 뭇 사람들이 모두 한 성시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이, 저 중생들이 뜻대로 들어가는 갖가지 법맛(法味)도 역시 그러하다.'
범행장자가 사뢰었다.
'법이 만일
그러하다면, 제가 한맛(一味)에 머무르면 응당 온갖 맛을 거둘것이 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그
까닭은, 한맛인 실상의 뜻(實義)은 맛이 마치 하나의 큰 바다와 같아서 온갖 법의 뭇 흐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장자야, 온갖 법의 맛은
마치 저 뭇 흐름이 이름과 수효는 비록 다르지만 그 물은 다르지 않으므로, 만일 큰 바다에 머무르면 곧 뭇 흐름을 포괄함과 같이, 한맛에
머무르면 곧 모든 맛을 거두어들이게 된다.'
범행장자가 사뢰었다.
'온갖 법이 한맛이라면 어찌하여 삼승의 도(三乘道)와 그
지혜의 차이가 있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비유하면 강. 하. 회. 해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깊고
얕은 차별이 있으며, 이름과 글자가 다르기 때문에, 물이 강에 있으면 강수(江水)라 하고, 물이 회에 있으면 회수(淮水)라 하고, 물이 하에
있으면 하수(河水)라 하나, 모두가 바다에 있으면 오직 해수(海水)라고만 이름하듯이, 법도 역시 그러하여 모두가 진여에 있으면 오직 불도라고만
이름한다.
장자야, 하나인 불도에 머무르면 곧 三行을 통달한다.'
범행장자가 사뢰었다.
'어떤 것이
三행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 일을 따라 취하는 행,
둘째, 식을 따라 취하는 행,
셋째, 진여를 따라
취하는 행이다.
장자야, 이와 같은 三行은 뭇 수행문을 통틀어 거두므로 온갖 법문이 여기에 들지 않는 것이 없다. 이행에 든 이는 공한
모양(空相)을 내지 않으며, 이렇게 든 이는 가히 여래장에 들었다고 이를 수 있다. 여래장에 드는 것은 들어도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범행장자가 사뢰었다.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여래장에 드는 것은 싹이 열매를 맺는 것과 같으므로 들어가는 곳이
없고, 본래의 근본 이로운 힘이 이익을 이루어 본래의 것을 얻는 것이옵니다. 본래의 실제(實際)를 얻으면 그 지혜는 몇 가지나
되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지혜는 무궁하거니와 간략히 말하면 네 가지이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 결정된 지혜(定智), 말하자면 [진여를 따름].
둘째, 결정되지 않은 지혜(不定智), 말하자면 [방편으로 병통을 깨트림].
셋째, 열반의
지혜(涅槃智), 말하자면 [번개같이 경계를 깨닫는 것을 제거함].
넷째, 구경의 지혜(究竟智), 말하자면 [실제에 들어가 불도를
구족함]이다.
장자야, 이러한 네 가지 큰 일의 用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바이니, 이것은 큰 교량이며 큰 나루이다. 만일 중생을
교화하려면 응당 이 지혜를 써야 한다.
장자야, 이 큰 用을 쓰도록 하여라.
다시 세 가지 큰 일(三大事)이 있으니,
첫째, 三삼매로써 內識과 外境이 서로 빼앗지 않게 함.
둘째, 대. 의. 과에서 도를 따라 간택하여 멸함.
셋째, 진여의
지혜와 진여의 선정에서 대비로써 자.타 모두를 이익되게 함이다.
이러한 세 가지 일은 보리를 성취시키나 만일 이러한 일을 행하지
않으면 곧 저 네 가지 지혜의 바다(四智海)에 들어가지 못하며 또 모든 큰 마(大魔)에게 짬을 보이게 된다.
장자야, 너희들 대중은 성불할
때까지 항상 닦고 익히어 잠시도 잃지 말아야 한다.'
범행장자가 사뢰었다.
'어떤 것이
三삼매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三삼매란 空삼매, 無相삼매, 無作삼매이다.'
범행장자가
사뢰었다.
'어떤 것이 대. 의. 과 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는 四대,
의는 음. 계. 입,
과는
본식(本識)을 말함이니 이것이 대. 의. 과 이다.'
범행장자가 사뢰었다.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이와같은 지혜와 일은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여 三界의 경지를 넘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게 하옵니다.
이와 같은 法相은 생멸법이니 분별의
법이기 때문이옵니다. 만일 분별을 여이면 (적멸의) 법은 응당 멸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 때에 여래께서 이 뜻을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분별에서 나서 다시,
분별에서 멸하나,
모든 분별을 멸한 법은
이 법은 생멸치
아니한다.'
그 때에 범행장자가 이 게송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그 뜻을 널리 펴려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법이 본래 적멸하고
적멸 또한 남이 없건만
이 모든 생멸법은
이 법이 남이 없지 않네.
저것은 이것과 함께 하지
않나니
단. 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둘을 떠났으나
하나에도 머물지 않네.
법에는 하나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런 모양은 털바퀴 같고
아지랭일 물로보듯
뒤바뀜이라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만일에 법은 없다고
본다면
이 법은 빈것(空)과 같으리니
장님이 해 없다며 전도됨 같고
설법도 거북털 같으리.
제가 이제 부처님
말씀듣고
법을 알되 二見으로 아니하고
중간에 의해 머무르지도 않고
無住따라 그 뜻을 취합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가 無住에서 나왔으므로
저도 무주처로 부터
이곳에서 여래께 경례합니다.
경례하는 여래相은
허공같고
부동한 지혜 처소 없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無住身에 경례합니다.
저는 온갖 처소에서 항상,
모든 여래를
뵈옵지만
원컨대 모든 여래께서는 항상
한 법을 말씀해 주소서.
그 때에 여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선남자들아, 너희들은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항상한 법(常法)을 말하리라.
선남자야, 항상한 법은(관념상의) 항상한 법이 아니며,
말도 아니고 글자도 아니며, 진리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며, 없음도 아니고 경계도 아니어서 모든 허망한 경계와 단멸의 경계를 떠난 것이지만, 이
법은 무상(無常)도 아니므로 모든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떠난 것이다. 깨닫고 보면, 식이 항상하다. 이 식은 항상 적멸하며, 적멸하다는
것도 또 적멸하다.
선남자야, 법의 적멸함을 아는 이는 마음을 적멸케 하지 않으나 마음이 항상 적멸하고, 적멸을 얻은 이는 마음이
항상하고 참되게 관하여 [모든 名色은 오직 어리석은 마음임을 알고, 어리석은 마음의 분별인 것으로 모든 법을 분별하면, 다시 다른 일 없이
名色에서 벗어난다.
법이 이와 같음을 알고 문자와 언어에 따르지 않으며, 마음과 마음으로 참 뜻(義)을 좇고 <나>를 분별치
않으며, <나>라는 것이 가명임을 알면 곧 적멸을 얻는데, 적멸을 얻으면 곧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된다.'
그 때에
범행장자가 이 말씀을 듣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명.상.事와 法의 분별이 셋이 되고,
진여와 정묘지가 저것과 다섯이
됩니다.
저는 이제, 이러한 법들은
단견과 상견에 묶인 바라
생멸의 도에 들므로,
이것은 斷이지 常이 아니매
여래께서 空法을 말씀하시어
단. 상을 멀리 여이게
하심을 알았습니다.
인연은 없는 것, 나지 않는
것.
나지 않으므로 멸하지도 않는 것.
인연이 있다고 집착하면
허공꽃을 따려는 것 같고
석녀의 자식을 구함과
같아서
끝내 얻을 수 없으리.
모든 인연 취하는 것 떠나고
다른 것과 멸함에 따르지 않으며,
자기와 의와 대에
따르지 않고
진여에 의하면 진실을 얻으리.
그러므로, 진여의 법은 항상 스스로
여여하게 있으며, 일체 만법은, 진여가
아니고
식이 변화한 것이매, 식을 떠나면 법이
곧 공하므로 공에서 부처 말씀하셨네.
모든 생멸법을 멸하여
(성문의) 열반에 머물면 대비께서 빼앗아서
열반을 멸하여 머물지 않게 하고
소취와 능취를 굴리어 여래장에
들게하시네.
그 때에 대중들이 이러한 뜻을 말씀하심을 듣고 모두 바른 생명(正命)을 얻어, 여래의 여래장 바다에
들어갔다.
[모두 다 가짐]
그 때에 지장보살이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이르러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대중을 보니 마음 속의 의심을 아직 풀지 못한 듯 하옵니다. 지금 여래께옵서 의심을 풀어주려
하시니, 제가 지금 대중을 위하여 의심에 따라 묻고저 하오니, 원컨대 부처님께옵서는 자비로 불쌍히 여겨 허락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여, 네가 능히 이와같이 중생을 구원하고 제도하려하니, 이것은 대비로 불쌍히
여김이니 불가사의한 일이다. 너는 응당 널리 물어라. 너희들을 위해 말해주리라.'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온갖 법이 어찌하여
인연에서 나지 않는다고 하셨사옵니까?'
그 때에 여래께서 이 뜻을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법이 인연에서
난다면
인연을 여이면 법이 없으리니,
어떻게, 法性이 없는데 인연이 법을 낼 수 있으랴.'
그 때에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법이 만일 남이 없다(無生)면, 어찌하여 법이 마음에서 나왔다고 설법하셨사옵니까?'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 마음에서 나온 법은
이 법이 능취와 소취이니,
취(醉)한 눈의 허공꽃 같으나
이 법은 그러하나
저 법은 아니다.'
그 때에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법이 만일 그러하다면 법은 곧 상대가 없고, 상대가 없는 법은 응당 스스로
이루어지겠사옵니다.'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본래 有.無가 없고
자.타도 또한 없으며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마치는 것도 아니므로
이룸과 무너짐도 머물지 않는다.'
그 때에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온갖
법상은 곧 본래 열반이고, 열반相과 空相도 역시 그러하나, 이러한 법들이 없으면 이 법이 진여이겠 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한 법들이 없으면 그 법이 진여이다.'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이와 같은 진여의
모양(如相)은 한가지(共)도 한가지 아님(不共)도 아니므로, 뜻으로 취하거나 업으로 취하거나 모두 공적하고, 공적한 마음과 법은 모두 취할 수
없으므로 응당 적멸할 것이옵니다.'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일체는 공적한 법이지만
이 법은 고요하되 공하지 않으므로
저 마음이 (고요하되) 공하지 않을 때에
(허망한) 마음이 있지 않게 된다.'
그 때에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이 법은 三체(=色.空.心)가 아니고 색.공.심도 역시 멸한 것이므로, 이 법의 근본이 멸할 때에 이 법도 응당 멸할
것이옵니다.'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본래 자성이 없고
저것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나,
이와 같은 곳에 머물지 않거늘
저와 같음이 있으리오.'
그 때에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일체 제법이 남이
없고 멸이 없다면, 어찌하여 하나가 아니옵니까?'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머무는 곳이 없고
모양과
수효가 공하므로 없는 것이다.
이름과 말, 그리고 법은 이것이
곧 능취와 소취이다.'
그 때에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온갖 法相이 두 언덕에 머물지 않고 또한 中流(가운데의 흐름)에도 머물지 않으며, 심식도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모든 경계가
식에서 나왔다 하시옵니까? 만일 식이 能生(능히 남)함이 있다면 이 식도 또한 따라 나리니, 어찌하여 無生인 식이 능생함과 소생(내어짐)함이
있사옵니까?'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소생. 능생 둘은 이 둘이 능연과 연이니
모두 다 본래
각각의 자체가 없으매
있다고 취하면 허공꽃과 환이네.
식이 나지 않을 때엔 경계도
나지 않을 때에 식도
적멸하다.
저 경계와 식이 본래 모두
없고 없음과 있음도 있지 않으매,
무생이면 식도 없거늘 어찌하여
경계가
따라 있으랴.'
그 때에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法相이 이와같이 內外가 다 공하고, 경계와 지혜 둘이 모두 본래 적멸하니,
여래께서 말씀하신 실상은 眞空이므로 이러한 법은 (캐고) 모은 것이 아닐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진여의 진실한 법은 色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모여진 것(所集)도 아니고 모은 것(能集)도 아니며, 의도 아니고 대도 아니며 一본각법인 깊은
공덕의 모임이다.'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모임이옵니다. 七식과 六식이 나지 않고,
八식과 五식이 적멸하며, 九식 相이 공하고 없으며 有가 공하여 없고 無가 공하여 없으므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法과 義가 모두
공하옵니다. 空에 들어가서 行이 없으나 온갖 수행의 업을 잃지 않으며, 아견. 아소견. 능견. 소견. 신견이 없고, 안팎의 번뇌와 부림이 모두
고요하옵니다. 그러므로, 온갖 소원도 또한 쉴 것이옵니다. 이와같은 이치의 관찰(理觀)은 지혜와 선정의 진여 이옵니다. 세존께서 항상
말씀하시는 실상진여의 空법은 (무명과 번뇌병을 다스리는) 양약(良藥)이 될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
까닭은, 法性이 공하기 때문이다. 空性은 남이 없고 마음도 항상 남이 없으며, 공성은 멸함이 없고 마음도 항상 멸함이 없으며, 공성은 머무름이
없고 마음도 역시 머무름이 없으며, 공성은 함이 없고 마음도 역시 함이 없다. 공은 출.입이 없고 모든 득.실을 떠났으며, 음.계.입 등도 모두
없다. 마음 진여가 집착하지 않음도 역시 이와 같다. 보살이여, 내가 온갖 가지 공법을 말하는 것은 온갖 有를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有가 實이 아님을 알기를 마치 아지랭이가 물이 아님을 알듯이 하고, 實이
없지 않음을 알기를 마치 불의 성품을 알듯이 하면, 이렇게 관하는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 까닭은, 이 사람은 참되게 관하기 때문이다. 하나인 적멸을 관하여, 相과 相아님에서 평등하게 공으로써 취하고,
공으로써 수행하기 때문에 부처님 뵙기를 놓치지 않고, 부처님을 뵈었기 때문에 三界의 흐름에 따르지 않는다. 대승 중에서는 三해탈도가 체가
같고(一體)성품이 없다. 성품이 없으므로 空하고, 공하므로 모양이 없고(無相), 모양이 없으므로 지음이 없고(無作), 지음이 없으므로 구함이
없고(無求), 구함이 없으므로 소원이 없다(無願). 이러한 업 때문에 반드시 마음을 맑히고, 마음을 맑힘으로써 문득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을
뵈옴으로써 마땅히 정토(淨土)에 태어난다.
보살이 이 깊은 법에서 세번 변화하면서 부지런히 닦아 지혜와 선정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곧
三界에서 벗어난다.'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무생. 무멸은 곧 이것이 無常이옵니다. 이 생멸을 멸하여 생멸이
다 멸하면 적멸이 항상하게 되옵니다. 항상하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는데, 이 끊어지지 않는 법은 모든 三界의 동법. 부동법을 떠난
것이옵니다.
유위법을 피하기를 불구덩이 피하듯이 하면서, 어떠한 법에 의하여 스스로를 꾸짖어서, 저 하나의 문(=寂滅의 문)으로
들어가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세 가지 큰 일(三大事)에서 그 마음을 꾸짖고, 세 가지 큰
진리(三大諦)에서 그 행에 들어가야 한다.'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세 가지 일에서 그 마음을 꾸짖는 것이오며,
어떤 것이 세 가지 진리에서 하나의 行에 들어가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큰
일이란, 因, 果, 識을 말한다. 이와같은 세 가지 일은 본래부터 空하고 없는 것이므로 나나 참된 나도 아니거늘, 어찌하여 이에 대하여
대착하고 물드는 마음을 내겠는가? 이 세 가지 일 때문에 얽히고묶이여 고해에서 표류하는 것을 관찰하고는, 이와 같은 일로써 항상 자기를 꾸짖어야
한다. 세 가지 큰 진리란,
첫째, 보리도, 이것은 평등한 진리이지 불평등한 진리가 아니다.
둘째, 대각, 바른 지혜로 얻는
진리이지 삿된 지혜로 얻는 진리가 아니다.
셋째, 혜정(慧定=지혜와 선정), 다름없는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이지 잡된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가
아니다.
이 세 가지 진리로써 불도를 닦으면 이런 사람은 이 법에서 정각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고, 정각의 지혜를 얻으면 크고 지극한
자비를 흘려내어 자기와 남을 함께 이롭게 하여 불보리(=부처님의 깨달음)를 이룰 것이다.'
지장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법은 인연이 없사옵니다. 만일 緣이 없는 법이면 因이 즉 일어나지 않거늘, 어찌하여 부동법으로 여래에 들겠사옵니까?'
그
때에 여래께서 이 뜻을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일체의 모든 법상은 성품이 공하여 不動도 없으므로
이 때에 있는 이 법은
이 때에 생긴 것이 아니다.
법은 다른 때에도 없어 다른 때에도 생기지 아니하매,
법은 동.부동이 없고 성품이 공하므로
적멸하다.
성품이 공하여 적멸할 때에 이 법은 나타나는데,
相을 떠났으므로 고요히 머물고 고요하게 머물러서 반연치
않는다.
이 모든 연기법은 이 법과 인연은 나지 않음이니,
인연의 생멸은 없고 생멸의 성품은 공적하다.
인연의
성품은 능연. 소연이니
이 능. 소연이 근본 연기이매,
법의 일어남은 인연이 아니고,
인연이란 없으므로 일어남도
없다.
인연에서 나는 법은 이 법이
인연이니 인연의 생멸相은
그것이 곧 無생멸이다.
저 진여의 眞 실상은
본래 출. 몰함이 아니건만
현재에 있는 모든 법은 (법을 보는 이)
스스로가 출. 몰함을 낸 것이다.
그러므로 극히
맑은 근본은
본래 뭇 힘을 인하지 않는데,
뒤에 얻을 곳에서 얻는 것은
본래 얻은 것을 얻는 것이네.
그 때에
지장보살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자리가 상쾌하여졌고, 그 때의 모든 대중들은 의심이 없어졌다.
그는 대중들의 이러한 마음을
알고나서 게송으로 사뢰었다.
제가 대중의 마음속 의심을
알아 은근하고 확고히 물었더니
여래께옵서 큰 사랑으로,
잘
분별하시어 남음 없게 하시니
이 모든 두 무리들이 모두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저도 지금 깨달은 곳에서
널리
온갖 중생을 교화하기를
부처님의 대비와 같이하되
본래의 서원을 버리지 않고
一子地에서 번뇌에 머무르렵니다.
그
때에 여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불가사의하게도 항상 대비로써 중생들의 괴로움을 뽑아주는구나! 만일 어떤 중생이 이 경의
법을 지니거나 이 보살의 명호를 지니는 이는 나쁜 갈래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온갖 장애와 어려움이 모두 없어진다.
만일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지니고, 잡념이 없이 오로지 이 경을 일심으로 생각하고 경법대로 닦아 익히면, 그 때에 이 보살이 항상 화신을 나투워 설법하고, 또 이
사람을 옹호하여 끝내 잠시도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속히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리라. 너희들 보살이 만일 중생을
교화하려하면, 모두가 이러한 대승의 결정된 뜻을
닦아 익히게 하여라.'
그 때에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서
사뢰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대승의 복덩어리는 결정코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게하니, 無生인 각의 이익은 불가사의하옵니다. 이와같은 법은
무슨 경이라 이름하오며, 이 경을 받아지니면 얼마만한 복을 얻사옵니까?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써 저희들을 위하여 말씀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 경의 이름은 불가사의하니,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보호하고
생각(護念)하시어 능히 여래의 일체 지혜의 바다에 드신 것이다. 만일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지니면 온갖 다른 경전에서는 바라고 구할 것이
없으리라. 이 경전의 법은 뭇 법을 총지(摠持, 모두 지님)하고 모든 경전의 요점을 거두었으므로, 이 경법은 모든 경법에 있는 법의 계종(=근본
요지를 묵은 것)이다.
이 경의 이름은 [섭대승경]이라 하고, 또 [금강삼매]라고도 하며, 그리고 [무량의종]이라고도 이름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받아지니면 백천의 모든 부처님을 받아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공덕은 비유하면 허공처럼 끝이 없고 헤아릴
수 없다. 내가 부촉할 것은 오직 이 경전 뿐이다.'
아난이 사뢰었다.
'어떤 마음을 쓰는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 경을 받아지니는 사람은 그 마음에 득.실이 없고, 항상 맑은 행을
닦으며, 희론하는 데서는 항상 고요한 마음을 즐기고, 마을에 들어갈 적에는 마음을 항상 선정에 두고, 집에 있을 때는 三有에 집착하지 않으리라.
이 사람은 현세에서 다섯 가지 복이 있으리니,
첫째,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둘째, 몸에 횡액이 없고 요절하지 않는다.
셋째, 삿된 이론에 잘 대답한다.
넷째, 중생을 기꺼이 제도한다.
다섯째, 거룩한 도에 능히 들어간다. 이러한 사람이 이
경을 받아지닐 것이다.'
아난이 사뢰었다.
'저러한 사람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공양을 받을 수
있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사람은 능히 중생을 위하여 큰 복밭이 되고, 항상 큰 지혜를 행하며,
방편과 실제를 함께 연설하리니, 이는 [네 가지, 의지가 되는 승(四依僧)]이다.
모든 공양에서 머리. 눈. 골수. 뇌까지도 모두 받을 수
있거늘 하물며 옷과 밥의 공양을 받지 못하겠는가! 선남자야 이와 같은 사람은 너희들의 선지식이며 너희들의 교량이거늘 하물며 범부로써 어찌
공양하지 않을 것인가!'
아난이 사뢰었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이 경을 받아 지니고 그 사람을 공양하면 얼마나 되는 복을
얻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에 가득찬 금과 은으로써 보시할지라도, 이 사람에게서 이 경의 한
四구게를 받아 지님만 못하므로, 이 사람을 공양하는 공덕은 불가사의하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이 경을 지니게 하여 마음을 항상
선정에 두어 本心을 잃지 않게 하여야 한다. 만일 본심을 잃으면 곧 참회할지니 참회한 법은 청량(淸凉)해 진다.'
아난이
사뢰었다.
'앞서 지은 죄를 참회하면 과거로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과거로 들어가지
않는다.) 마치 어두운 방에서 밝은 등불을 켜면 어둠이 즉시 소멸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앞서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한다]는 말이 없으면
[과거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이 사뢰었다.
'어떻게 하는 것을 참회라 하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의 가르침에 의하여 진실관에 듦이다. 한번 관에 들 때에 모든 죄가 다 소멸하고, 모든 나쁜 갈래를 떠나 마땅히 정토에
태어나서, 속히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자 이때 아난과 모든 보살들, 그리고 사부대중들은 모두
크게 기뻐하면서 마음에 결정함을 얻고, 이마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였다. 그리고 환희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였다.
-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마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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