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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출생
(21: 1-21)
요약
보통 생육법으로는 불가능하던 이삭의 출생은 하나님 언약의 신실함과 전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삭은 넓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좁게는 거듭난 하나님 자녀의 상징이다. 즉 이삭이 언약으로 났듯이 거듭남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며, 그가 할례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듯 우리 역시 거듭남으로 그리하며, 사라에게 기쁨이 있었듯 거듭나면 기쁨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삭이 장성함과 아울러 이스마엘이 추방되는 사건이 일어나듯 영적으로 성장할 때 우리 안의 악의 요소가 사라지게 된다.
강해
본문은 사라의 몸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이삭이 출생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느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며 그 약속은 아무리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전능하시고 신실하셔서 반드시 성취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출생하고 이삭이 자라감에 따라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쫓겨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경이에요. 성경의 원리는 항상 그렇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의미가 있어요. 이 일은 우리가 거듭나고 그 생명이 자라게 되면 그 동안 우리를 주장하고 있던 모든 육신에 속한 온갖 악한 것들이 쫓겨남을 보여줍니다. 이런 해석은 저보다 바울이 잘합니다. 갈4:22-23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가지고 설명하면서 이것을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의 관계로 설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의 이삭이 태어난 사건은 우리가 거듭남에 관해서 보여줍니다.
1.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됩니다.
1-2절에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했습니다.
여기 말씀이라는 용어가 세 번이나 나타납니다. 그런데 다른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중 어느 특정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즉 이미 창17:19-22이나 18:9-15 등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정에 아들을 주실 것을 언약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만약 그 말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삭의 출생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특정한 언약의 말씀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는 복음을 예표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사라에게 말씀 하신 대로 아들을 주심 같이 우리들도 말씀으로 거듭납니다. 그래서 벧전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라고 한 것처럼 성경을 다 알아도 그 말씀과 같이 언약의 핵심인 예수님을 모르면 안 됩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께서 밤에 찾아온 이스라엘의 선생 성경 박사 니고데모에게 중생에 대해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3:10-16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0-16)하셨습니다.
2. 거듭나야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3-4절에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했습니다.
약속으로 난 이삭이 할례를 받는 내용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정결의 예식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는 예식이기도 합니다. 오늘로 치면 세례로서 구원의 표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의 할례가 주는 교훈은 우리가 예수 믿고 거듭나야 만이 구원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의로운 일과 충성을 다 한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거듭나야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하셨습니다.
3. 거듭나면 심령 내면에 기쁨이 있습니다.
6-7절에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사라의 웃음도 두 가지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겠다 하실 때의 웃음은 노인이 자식을 낳는다니까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선 웃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삭을 낳고는 부끄러움보다는 기쁨의 웃음입니다. 저는 아직 경험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즐거움은 손자 손녀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는 부모의 심정과 조부모의 심정을 함께 가졌으니 얼마나 애정이 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리아산에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하신 것을 보아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거듭나면 기쁨이 온다는 교훈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쁨도 사라가 그랬던 것처럼 두 가지에요. 먼저는 거듭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기쁨입니다.왜냐하면 중생 그 자체가 스스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3:8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생의 초기 순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는 상태로 봐선 놀라운 죄인인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하나님 자녀라고 하니까 믿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겸연쩍은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고 죄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 자녀의 확신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낯이 두껍게만 보입니다. 그러므로 기쁨도 없지는 않으나 부끄러움이 앞서는 때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순종함으로 자라고 더 자라면 후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이 옵니다. 여기에 대해 벧전1:8-9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습니다.
현대 신학자들이 거듭난 시점을 이야기하다가 보니까 그렇지 칼빈을 비롯한 많은 개혁자들은 거듭남을 성화까지 다 포함한 그런 전인격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성화란 거듭날 때 생명이 더욱 자라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화된 사람을 “저 사람 거듭났다” 해서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4. 거듭나 장성하면 악의 요소가 추방되기 시작합니다.
8-10절에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 젖 떼는 날에 대해서 “자라다”는 낱말은 ‘장성하다, 크다’ 등의 뜻이 있는데 여러 면에서 자란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젖을 떼다”는 뜻은 열매가 ‘열리다, 익다, 원숙하다’는 뜻으로 특별한 보호 없이 자랄 수 있는 나이를 뜻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대개 만 3살 경에 젖 떼는 잔치를 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말도 하고 심부름도 하고 어떤 아이는 스케이트도 타고 다니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스스로 영적인 생활을 지켜나갈 만큼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주 기쁘셔서 은혜의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충만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삭을 희롱하던 이스마엘이 그 어미와 함께 쫓겨나듯 율법 아래 우리의 옛 사람 죄악들이 율법과 함께 쫓겨나 더 이상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갈4:1-5).
그래서 바울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사건을 가지고 갈4:29에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하면서 하갈과 그 아들을 내어 쫓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갈 5장에서는 우리 안에 두 가지의 성향을 말씀하면서 성령으로 죄와 정욕이 물러감을 이야기합니다.
5. 그러나 영혼의 거듭남이 가장 중요하나 전부는 아닙니다.
12-19절의 내용인데 18절만 읽으면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즉 광야로 내어 쫓긴 하갈이 방성대곡하며 부르짖고 이스마엘이 목이 말라서 소리지를 때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주시고 눈을 여셔서 브엘세바에서 터져 나오는 샘물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도 12방백을 이루도록 귀하게 쓰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삭만 복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마엘도 복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교훈하는가? 우리가 성령 충만함에 거하면 우리 육체도 성령의 은사로 입혀져서 육체도 영혼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며 귀하게 쓰임을 받는 한 인격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 은사가 입혀지는 시기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지만 우리가 세상사는 동안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들이 발견한 브엘세바의 우물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도 적극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적극적인 믿음에 은사가 임합니다. 그리고 그 때 이스마엘의 방황이 끝난 것처럼 보혜사 성령의 도움으로 방황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은 단지 아브라함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내 심령이 거듭나고 장성하여 변화되고 축복 받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 영적으로 성장하여 육신에 속한 유아기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브엘세바 (21: 22-34)
요약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에게 완전하라 하심에는 그만한 은혜 주심이 전제된 교훈이시다.
율법은 사람에게 완전을 요구하고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는 정죄하고 심판한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자라가면 더 이상 율법의 아래 있지 않게 된다. 먼저 칭의의 확신과 삶의 거룩함으로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
또 성령 안에서 자라가면 생명을 누리되 성령의 강수와 같이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 그리고 지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강해
이 시간에 “브엘세바”라는 제목입니다.
“브엘세바”는 ‘일곱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일곱이라는 숫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23절에 “맹세”(솨바)라는 말의 의미도 일곱이라는 뜻이요, 또 28-30절에 소유권을 확정하는 증거의 암양 일곱이 나오고, 31절에 브엘세바가 일곱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맹세도 소유도 우물도 모두 일곱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수로서 완전함과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오늘은 이런 수가 즐비하게 나오는 것을 보니 무언가 완전해지는 진리가 나올 것 같습니다.
신18:13에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했고,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 죄인된 사람들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어서 그렇게 교훈하셨을까요?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완전할 수 없으나 예수 안에서는 가능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예수 안에서 완전해지는 진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것을 알려면 본문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은 그랄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상호불가침화친우호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서 이제는 더 이상 가나안 땅의 이주민이나 유랑자가 아니라 주변의 강대한 세력들까지 두려워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떤 원수의 세력도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랄왕 아비멜렉은 율법의 상징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옛날 사라 문제로 그랬던 것처럼 다시는 자기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완전하기를 요구하면서 조악 맺기를 요구했는데 율법이 꼭 그렇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치고 나아가 우리에게 온전하기를 요구합니다. 문제는 율법이 의롭게 할 능력이 없는 것이지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혼자 나타나지 않고 무력의 사람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비골”이란 ‘만인의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력도 그냥 무력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깨닫게 하고 가르치는 무력입니다. 아비멜렉이 이런 군대장관을 데리고 나타난 것처럼 율법이 그렇습니다. 율법은 강력한 교훈성과 징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징계하고 죽입니다. 그래서 고전15:56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했습니다. 이런 옳기는 하나 두려운 율법 앞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함께 하셨던지 아비멜렉이 도리어 아브라함을 두려워하고 나아가 불가침을 요구하며 빼앗았던 우물까지 다 내어주고 그 종들이 더 이상 행패 부리지 않게 하고 또 자기 앞에서 자유롭게 거주하도록 특혜를 줍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은혜 아래 살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더 이상 율법의 정죄에 빠지지 않고 온전해지며 율법에서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고 나아가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않고 성령의 생수까지 넘치게 됩니다. 아주 우리 인생이 달라지게 되어요.
이 때가 이삭이 젖을 뗀 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적으로 더욱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했듯이 성령 충만한 삶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율법 문제 있어서 아주 다른 양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율법에서의 자유와 해방과 온전함입니다.
이삭이 자랐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듯 영적으로 자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습니까?
1. 육신의 지배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22절에 “때에” 그랬습니다.
이 “때에”에 대해서 화이트로우라는 학자는 ‘하갈 모자를 내어 보낸 후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또 이 때는 이삭이 젖을 뗐을 때입니다. 이삭이 젖을 뗀 때란 영적으로 영적 자립의 때요, 성령의 지배받기를 시작하는 때입니다. 이 때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 가듯 바로 이 때가 육신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때입니다. 육신의 지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죄악을 이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갈4:24) 하갈을 옛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난다는 뜻도 됩니다. 갈4:1-3에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2. 성령으로 자라가면 더 완전함에 거합니다.
23-24절에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했습니다.
여기 23절의 “맹세”(솨바)란 히브리어 ‘쉐바’에서 나온 말로 일곱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근동에서는 맹세할 때 일곱 번 제사 혹은 증인 일곱을 세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맹세를 일곱이라 했던 것입니다. 일곱 증인이란 두 세 증인보다 더 확실한 절대적 증인입니다. 이처럼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전처럼 거짓말을 해서 피해를 주는 일이 없는 신실한 상호화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서슴없이 “내가 맹세하리라”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이 은혜 안에서 자라면 전에는 율법 앞에서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 못해 거짓되었지만 이제는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을 받고 율법을 범함이 없이 더 완전함에 행하게 됩니다.
롬8:1-4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지상에서 인간에게 절대적 증인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우리 안에 확신을 주시는 성령의 인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믿어지고 복음이 실상화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 되어지고 주의 뜻대로 살아지는 확신으로 다가옵니다. 이미 성도는 인침이 있지만 더욱 강력한 인침으로 체험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물론 넘어지지 조차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과 성령 안에서 온전케 되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골1:28-29).
3. 성령으로 자라가면 생명을 누립니다.
25-27절에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듯 아브라함은 상호우호조약을 조건으로 먼저 자기 우물의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우물에 피해를 준 것은 자기 종들이 그랬지 자기는 모르는 일이며 종들이 그랬다면 이제 그 우물을 영구히 돌려주고 다시는 빼앗지 않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율법의 정죄로 메말랐던 심령에 성령의 생수가 터져 나옵니다. 이 생수의 강은 믿는 자의 뱃속에서 흐르는 성령입니다. 그런데 왜 메말랐습니까?
율법에 의한 심령의 메마름은 율법의 본래적인 의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고 예수가 필요함을 깨닫게 해서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함이 본래 목적이었습니다.
신28:1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 복을 주신다 하신 것처럼 복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의 종들이 그랬던 것처럼 은혜 떠나 율법의 종이 될 때 그런 메마름의 현상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4. 성령으로 자라가면 더욱 생명의 풍성을 누립니다.
28-31절에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했습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은 일곱 암양을 받음으로 우물이 아브라함의 소유권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되찾은 우물이 바로 브엘세바 즉 ‘일곱 우물’이라는 뜻으로서 성령의 상징입니다. 여러분 물이라는 것 연구하면 할수록 신비하다고 합니다. 사람이 물만 잘 마셔도 건강하게 된 답니다. 좋은 물을 충분하게 마셔야 할 시간에 잘 마시면 건강이 옵니다.
물이란 신비해서 인류가 아직 물에 대해서 1%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은 감정과 분위기에 따라 수십 가지의 모양으로 변하고 영향을 끼치며 좋은 물일수록 크기가 작다고 합니다. 좋은 물을 마시면 건강이 오고 노화도 지연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가장 좋은 물은 성령의 생수입니다. 어떤 물도 이 성령의 생수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자라서 성령 안에 있으면 성령의 생수가 넘칩니다. 그래서 보혈로 말미암는 양심의 자유와 성령 충만이 그렇게도 좋은 것입니다.
5. 성령으로 자라면 일생 은혜와 축복 속에 살아갑니다.
32-34절에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했습니다.
에셀나무란 시내반도에 서식하는 상록수로서 재질이 단단하고 키가 커 넓은 그늘을 형성하는 사막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하고 장수하는 나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느티나무가 꼭 그렇게 강하고 크고 그늘이 많지만 느티나무는 가물면 잘 죽지만 이 에셀나무는 사막에서도 뿌리가 깊어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나무를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나무로 삼고 이 나무를 심어놓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생명 안에서 더욱 자라가면 우리 안에 심겨진 영원한 생명이 왕 노릇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1:3에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래서 은혜와 생명이 우리 안에 있고 기쁨과 휴식이 우리 안에 있으며 위로와 축복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아름다운 브엘세바 우물곁에 에셀나무를 심어놓고 그 그늘 아래에서 이삭이 장성하기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이런 은혜 아래서 살다가 천국에 오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이란 이제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성령으로 자라가십시오. 그래서 육신과 율법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더욱 완전함과 자유와 평강과 생명 가운데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