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추억 2> 친구 만들기와 친구 만평
왼쪽에서 김건 장연광(38회) 유정민 설악산 정상에서
설악산 정상에서 선배님들과 함께
정상 아래 봉정암에서
친구 만들기 「김건」
건이는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담임은 영어과 임우경 선생님이셨다. 교실이 우리 반만 건물 밖 수영장 옆 제일 구석진 외진 곳에 있던 나무판자 교실이었다. 이만규, 조병훈, 변영준 등이 같이 찐뿡을 하며 놀았다.
중학교 3학년 때에도 건이와 문도연(중학교 때에는 문충연)이 유도반을 들어 운동장에 있는 콘셋에서 같이 운동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도연이는 그때 처음 만났다.
그리고 고등학교 올라와서 또 등산반을 들고 같이 다니면서 부쩍 가까워진 것이다. 집이 신촌이라 우리 집과는 방향이 달랐지만 학교 끝나고는 도연이네로 같이 가 많이 어울렸다.
1959년 고등학교 1학년 5월 어느 일요일 날 내가 마포구 신수동 72번지 김건 집을 찾아간 것이다. 물론 특별한 연락도 없이 찾아갔다. 버스를 타고 신촌 로터리에서 내렸다. 이곳은 사거리가 아니라 오거리이다. 이대 쪽에서 넘어와 오른쪽은 연세대, 직진하면 동교동 왼쪽은 서강대이다. 그 사이에 길이 하나 더 있다. 물론 그 길은 비포장이다. 길도 꽤 넓다. 하지만 그 길을 내려가면 기찻길이 지상이 아니라 교각을 세워 높이 있다. 높이가 2m가 넘을 것 같다. 그 당시 기차는 석탄을 때는 증기기관차라 철로 위가 석탄으로 지저분했고 그 석탄이 길로도 떨어져 항상 검었다. 그 철길을 지나면 곧 개천이 나온다. 그 개천가를 따라 길이 있고 길가에 건이네 집이 있었다. 바로 앞에 개천이 있어 집이 길에서 약간 높게 지었다. 문에 계단이 두서너 개 있고 집 마당도 약간 문 쪽으로 기울어 빗물이 잘 빠지게 되었고 집은 ㄱ자 집으로 안방 마루 건넛방 그리고 안방에 딸려 부엌과 아랫방이 있었다. 건넛방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안방에는 어머니 그리고 건넛방에는 아들 셋이 살았다. 건이가 장남 고등학교 1학년 아래는 중학교 2학년 막내는 국민학교 5학년 쯤 되었나보다. 내가 문안으로 들어서니 건이가 나오고 동생들도 함께 나온다. 형 친구가 방문을 하였으니 동생 둘이는 방을 비워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것이 막내는 큰형 친구가 처음 찾아온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아래동생은 드나들며 잔심부름을 해줄 수 있었다.
그 동생들을 건이 장례식장에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둘 다 건강이 나빠 만나지를 못했다. 몰론 자주는 아니지만 동생들 이야기를 가끔씩 듣기는 했지만 말이다.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에 문상을 갔었고 다음 발인날 파주 공원묘지까지 갔었다.
건이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자기 의견을 강하게 이야기하기 보다는 조용히 듣고 많이 동의 해주었다. 하지만 다른 소식은 많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얻지 못한 정보를 어디에선가 듣고는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화여고 학생」 이야기 같은 것이다.
우리 등산반은 거의 100% 도봉산행이다. 만나는 장소는 돈암동 전차종점, 그곳은 일요일마다 교외로 나가는 사람들로 늘 붐비었다. 토요일 학교에서 빌려온 자일(등산용 줄)을 가지고 시외버스를 타면 도봉산 입구까지 신나게 달렸다.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 얼마가지 않으면 비포장도로에 주변에는 논밭 이외에 집들도 거의 없었다. 도봉산에서 내리면 입구에 가게가 하나 있었지만 물건을 사는 일은 거의 없다.
그때부터는 거의 달리다시피 도봉산으로 오른다. 한창 혈기 좋은 10대 아닌가! 천축사 절에 가면 물이 있다. 목을 축이고 다시 선인봉 측면 코스로 달려 올라간다. 천축사는 아주 작은 절이다. 입구에 커다란 나무가 절벽 위에 있어서 그 나무에 줄을 걸고 하강 연습을 많이 하였다. 처음 온 친구들 교육장소이기도 하다. 32회 선배가 하도 많이 다녀 절에서 잘 아는 사이가 되었고 토요일 날쯤 와서 미리 자고 후배들을 기다리기도 했다. 자주 가는 바람에 전용 방이 생길 정도였다.
선인봉을 오르고 시간이 나면 뒤에 있는 주봉(柱峰)까지 오르곤 하였다. 그렇게 두 탕씩 올라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나는 36회 선배한테서 배웠고 38회 후배 박인용에게 전해 주었다. 등산 기술은 일 대 일 전수이기에 같이 암벽등반을 하면서 기술을 전하는 것이다. 이론보다는 현장에서 알려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대개 선배들하고는 많아야 3 번 정도면 기술을 전수받고 동기와 함께 실전연습을 해야한다. 물론 탑(top) 선두에서 처음 오를 때에는 두렵기도 하였다. 제일 많이 의지했던 친구가 건이와 도연이다. 바위를 타기 시작하면 중간에서 그만 둘 수는 없다. 퇴로가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 끝까지 올라야 내려갈 고리가 있고 그 고리에 줄을 걸고 내려올 수가 있는 것이다.
2학년 여름방학, 35회 졸업생 중심으로 설악산 등반이 있다고 하여서 건이와 또 1학년 학생 장연광(38회)과 함께 재학생 셋이 참가했다. 전체 참가인원이 사진을 살펴보니 20명 정도이었나 보다. 등반대장이 위에서 이야기한 32회 졸업생 김인수 선배님이시다. 첫날 12탕골이라는 곳에 올랐다. 산을 하나 넘는 곳인데 정말 물이 흘러내려가면서 바위가 움푹 파인 곳이 12개도 더 되는 곳이다. 자연적으로 물웅덩이가 만들어져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오색약수인가 하는 곳에서 하차 정말 봉정암을 거쳐 소청봉 대청봉까지 오르는 험난한 길을 올랐다. 산 정상에는 표지석도 없었고 정비되지 않아 잡풀이 많았고 이곳저곳에는 포탄의 탄피도 꽤 여러 개가 보였다. 정상까지 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올라갈 때에도 등산로를 따라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도를 보고 길을 만들면서 올랐다. 내려올 때도 물론 지도를 보면서 내려오다가 절벽을 만나면 줄을 타고 내려오기도 여러 번 하였다. 무사히 신흥사 쪽으로 내려왔다. 마땅히 숙소가 없어 우리는 절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하였다.
완전히 하산을 하고 씻고 나도 시간이 좀 나니까 형들이 상가로 떼를 지어 나갔다. 형들 따라 당구장까지 들어갔다. 재학생인 우리는 큐도 못 잡아보고 구경만 했다. 모든 일정이 끝났다고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당구장에 갔는데 막상 숙소로 돌아가려니 비가 온다. 우산도 우비도 없이 나왔으니 비를 맞으며 어찌 돌아가랴? 입은 옷을 벗어 꽁꽁 묶어 품에 안고 나체로 뛰어서 돌아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들 설악산 등정은 처음이라 서울에서 준비를 많이들 하였지만 막상 이곳에서 산을 오르고 보니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이 생겼다. 첫 번째 난관이 등산화이었다. 제일 좋은 등산화는 군화이었지만 그것을 사 신을 만큼의 여유도 거의 없어 헌 군화를 잘 고쳐 신고 왔지만 하루 이틀 만에 신발이 터져 발가락이 나오고만 형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등산화가 보편화되지 않아 없었고 있다 해도 무척 비쌌다. 을지로 3가에 있는 작은 구둣방 송림제화가 유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구둣방에 6.25 한국전쟁 전(前) 중학동에 살 때 알던 동네 형이 있다고 해서 찾아간 적이 있는데 이야기를 하니 유명제화점으로 갔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리고 3학년 때 나와 도연이는 문과 3반, 건이는 이과 5반이었다. 여름방학이면 자주 학교에 나와 공부를 하였다. 넓은 교실에 많으면 서너 명 없으면 한두 명이 앉아 공부를 했다. 그때 건이는 물리 참고서 책을 많이 펼치고 있었다. 결국 건이는 연세대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연세대가 집에서 가까우니까 잘 된 일이었다. 대학에서도 등산반을 들어 활동을 많이 한 편이다. 나는 대학에서 등산에 관한 아무 활동도 하지 않았다. 독일어를 좀 더 공부하려고 한독대학생협회에만 나가 독일어 회화를 배우러 다녔다. 실제 독일인 대학생은 없고 독일문화원에 부속 작은 도서관에 독일인이 일을 하여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한독대학생협회에는 대부분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학생이 제일 많았고 서울대 문리과대와 사범대 독문학과 성대 독문과 출신이 조금씩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우리는 자주 만났다. 민문식, 이광택, 문도연, 김건, 나 이렇게 다섯이 많이 만났다. 만나면 주로 명동에 있는 '은성' 당구장에를 많이 갔다. 대부분 경비는 이광택이 부담했다.
친구 만평
김건 용모단정하고 키가 작은 편이다. 거친 면이 전혀 없다. 언제나 부드럽고 다정하다.
이야기도 재미있게 잘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변영준이 건이와 같이 소변을 보다가 건이의 물건을 보고 놀랐나 보다. 영준이가 교실로 와서 떠드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건이가 아마도 포경수술을 한 것이다. 그 당시 그런 수술까지 하였다면 아마도 건이 부모님의 생각이 우리 집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목소리도 곱고 노래도 잘 불렀다, 특히 팝송을 잘 불렀다.
이광택 목소리가 멋있다. 탁하면서도 경상도 사투리가 잘 어울린다. 바로 영화배우 하정우 목소리를 들으면 광택이 생각이 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보면서 목소리가 똑같다고 생각했다. 광택이는 연세대 교육과 출신이다. 내가 재직한 학교에 윤리 선생님이 광택이와 동기라고 자주 이야기를 했다. 광택이는 교직에 들어오지 않았다. 군대생활을 방첩대에서 하였다. 한참 말이 많았던 누상동인가에 있는 방첩대이었다. 광택이네 집에서 무척이나 가까웠다.
박승기 언젠가 같은 반을 하였다. 작년에 다시 필진으로 들어가니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 친구이다. 같이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고맙게 생각한다. 하여간 같은 반이었을 때에는 친했는데…….
여신행 신행이도 같은 반에서 가까웠다. 키가 비슷해서 번호가 가까이 있었을 것이다. 여씨 성을 그때 처음 알았다. 성격이 조용하고 말도 작게 하는 편이었다. 교복도 잘 어울렸고 언제나 단정했다. 몸이 약한 편인 줄은 몰랐다. 경복고에 근무를 하고 있는데 연락이 와서 한 번 만났다. 모 대학 영어과에 재직 중이었다.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임도식 도식이도 가까이 앉아 친했다. 꽤나 다정하고 사심이 없이 잘 대해주었다. 진한 우정이었다고나 할까. 다만 연결고리가 없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조건문 재학시절보다 졸업 후 자주 어울렸다. 활달한 편이고 사교성이 좋았다. 카드놀이를 한다고 여러 번 만났지. 군대 가고 결혼하고 서로 어울릴 시간이 달라지니 계속되지를 못하였을 뿐이다. 각자 자기 생활에 충실하다보니 연속성을 가질 명분이 부족했나보다.
첫댓글 설악산 대청봉과 봉정암 흑백사진을 보니 참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난 처음 설악산 간게 정민 형 보다 몇년 뒤였는데도 당시 설악산 가는 교통은 참 힘들었었죠. 중간에 헌병의 검문도 받았고 또 비포장 도로에 일방통행길도 있었고요. 북한산과 도봉산도 돈암동 부터 걷거나 시외버스 타야했으니까요. 바위를 타는 친구들과의 우정과 유대관계가 끈끈하게 느껴집니다.
맞아요, 김 형도 갔었군요. 고 2학년 그러니까 1960년이군요. 12탕골이라는 곳을 한번 거쳐 갔으니까 또 20여명이 움직이니까 쉽게 이동하기도 어려웠지요. 재학생이라는 특혜 속에 형들 따라 갔어요. 고생은 했지만 그때는 고생이라고는 생각 안했지요. 적극 지지해주는 김 형 덕분에 살맛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