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아온다. 벅찬 꿈을 안고 도전을 시작할 때다. 도전하라. 인류 문명의 역사는 도전의 역사였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쉼 없는 도전 속에서 살아간다. 도전하는 자만이 성장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도전없이 꿈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얼룩말이 사자에게 돌진한 까닭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서 사자 무리가 얼룩말을 노리고 있다. 맹수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깨달은 얼룩말들은 결단의 갈림길에 선다. 사자의 반대편으로 꽁무니를 뺄지, 아니면 사자 무리를 향해 전진할지 결정해야 한다.
우리 생각에는 무조건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마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얼룩말들은 떼를 지어 사자들을 향해 돌진한다. 풀을 많이 뜯어 먹은 말들은 충분한 힘을 비축하고 있다. 얼룩말 무리가 사력을 다해 달려오면 아무리 용맹한 사자라도 움찔할 수밖에 없다. 자칫 얼룩말 무리와 부딪쳐 부상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사자들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일단 옆으로 피하고 나면 전력 질주하는 얼룩말을 다시 따라잡기란 쉽지 않다.
사람이 겪는 일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종종 ‘두려움의 사자’를 만난다.
두려움은 당신이 피한다고 해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비겁하게 자꾸 피하면 두려움은 당신 뒤를 졸졸 따라다닐 것이다. 무서움에 벌벌 떨수록 오히려 그 힘은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이라면 용기로 무장해 그것에 맞서는 것이 상책이다. 굳은 신념으로 정면 대응하면 모세의 홍해와 같은 기적의 길이 생긴다.
인류사에 위험에 정면으로 맞서 돌파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2011년 일본 대지진으로 쓰나미가 발생하자 해안에 있던 어선 10여 척은 자칫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감행했다. 이와테현 오후나토시의 평온한 어촌 마을에 쓰나미가 덮친 것은 3월 11일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생계를 위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업하던 어부들은 바다의 술렁임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배 밑바닥에서부터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안의 삼나무 방풍림에서는 꽃가루가 불에 탄 재처럼 육지 쪽으로 흩날렸다. 엄청난 해일이 밀려올 징조임을 직감했다.
어부처럼 ‘삶의 쓰나미’ 를 향해 전진하라
어부들의 목숨을 살린 것은 과감한 결단과 민첩한 행동이었다. 이들은 선조들에게 들은 “수심이 깊은 바다로 나가면 파도가 높아지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렸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닥치자 어부들은 지체 없이 행동했다. 이들은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향해 돌진했다. 해안의 건물들이 포탄을 맞은 것처럼 초토화되었지만, 바다로 나간 배들은 한 척도 손상되지 않았다. 위험에 정면으로 대응한 덕분이었다. 만약 이들이 육지 쪽으로 피신했더라면 어선은 해안의 절벽이나 건물에 부딪혀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고대 로마군은 일본 어부와 다른 결정을 내렸다. 로마의 함대들은 거센 폭풍우가 몰려오자 해안으로 피신했다. 거센 파도는 겁에 질린 로마군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배 수백 척이 물에 잠기고 병사들은 물귀신이 되었다. 위험은 회피한다고 물러가지 않는다. 강인한 정신으로 위험을 직시할 때 오히려 출구가 열린다.
자전거를 탈 때도 넘어지지 않으려면 오히려 넘어지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넘어지는 것이 무서워 반대쪽으로 꺾으면 결국 넘어지고 만다. ‘삶의 자전거’를 탈 때도 마찬가지다. 위험을 두려워하면 몸이 움츠러들어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성공한 사람은 외부 장애물이 자기 인생을 좌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과감하게 뛰어들어 걸림돌이 되는요소를 찾아 없애거나 개선한다. 비겁하게 숨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성공의 여신이 혐오하는 사람은 위험을 회피하는 겁쟁이다. 여신은 위험과 패배에 용감히 맞서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만 영광의 잔을 준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은 기회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성공하는 사람은 기회가 오지 않으면 기회를 찾아간다. 성공학의 대가 데일 카네기는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고 말했다. 내 앞에 행운이 오지 않는다면 기다리지 말고 그 것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나는 환경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프리카 소년 레그손 카이라는 행운의 바람을 향해 수만 리를 달려간 사람이다. 그는 아프리카 남동부에 있는 가난한 나라 말라위에서 태어났다. 극심한 가뭄으로 매년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1958년 <성경>을 읽던 열일곱 살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 민족을 역경에서 구하겠다고 결심했다. 대륙을 가로질러 이집트 카이로까지 5,000km를 걸어간 뒤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에 진학할 계획을 세웠다.
가진 것이라고는 <성경>과 존 버니언의 <천로 역정>, 5일 치 식량, 작은 호신용 도끼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이 갖지 못한 엄청난 재산이 있었다. 바로 열정으로 무장한 도전 정신이었다.
소년의 여행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야생 열매를 따 먹고 밤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잤다. 도중에 열병에 걸려 죽을 고비도 넘겼다. 15개월 만에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 닿은 그는 미국 스캐짓 밸리 대학 학장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장학금을 요청했다. 카이라의 결심에 감동한 학장은 입학을 허락하고 장학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에 가려면 여권과 비자가 필요했다. 카이라는 어릴 때 본 적 있는 선교사에게 편지를 써서 도움을 청했다.
맨발로 카이로에 이르자 소년은 이미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카이라의 이야기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전해졌다. 스캐짓 밸리 대학 학생과 주민은 그의 미국행 항공편을 위해 성금 650달러를 모아서 보내주었다. 집을 나선 지 2년여 만에 드디어 스캐짓 밸리 대학에 도착했다. 소년은 그곳에서 학문의 여정을 밟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가 되었다. 가난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자신의 조국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돕는 활동을 했다.
모진 역경을 딛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카이라!
훗날 그는 “나는 내가 환경의 희생자가 아니라 그 주인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새해가 당신에게 행운을 선사할지, 불행을 안길지는 당신의 도전 여부에 달렸다. 행운은 앉아서 기다리지 않 고 찾아 나서는 사람에게는 절대 비껴갈 수 없으니까.
새해에는 희망의 꿈을 향해 도전해야 한다. 시련과 역경이 닥쳐도 도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단념하지 않는 한 실패와 고난이 당신의 무릎을 꿇릴 수는 없다.
Books I will try, The Detainee, Jingala, The Civil Servant
Education University of Washington, St Catharine's College, Cambridge
레그손 카이라는 5일치 식량과 자신의 두 보물인 성경과 천로역정 방어용 손도끼와 담요만 가지고 인생을 건 여정에 나섰다. 그는 아프리카 남 동부의 니아살랜드(1964년 말라위로 독립) 부족 마을을 출발해, 걸어서 북쪽으로 동아프리카 의 황야를 가로질러 카이로로 간 다음, 그곳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갈 생각이였다.
때는 1958년 10월 이였는데,어머니가 태어난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으므로,당시 레그손은 열여섯 혹은 열일곱 살이었다.
그의 부모는 둘 다 문맹이였고 미국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부모는 레그손의 결심을 달가워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들의 여행을 축복하여 주었다.
레그손의 여행은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에 불을 지핀 그만의 꿈에서 비롯된 것이였다. 레그손은 자신의 영웅들처럼 되고 싶었다. 가난한 환경을 떨치고 일어나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다시 쉼없이 싸워 노예를 해방한 에이브러험 링컨 그리고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위대한 개혁가이자 교육자가 되어 자신과 자신의 동족에게 희망과 존엄성을 선사한 부커T.워싱턴.
이런 훌륭한 역할모델들처럼 레그손은 인류에 봉사하고 싶었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과 목표를 실행하려면 최고의 교육을 받아야했다. 레그손은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선의 장소가 미국임을 알고 있었다.
레그손이 무일푼에 배삯을 치를 어떤 방도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잊어라, 어느 대학을 갈지 또 그 대학이 과연 그를 받아줄지 알수 없었다는 사실도 잊어라 카이로는 레그손이 살던 마을에서 약4800키로미터 떨어져 있으며,그곳으로 가려면 5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수 백 개의 부족이살고있는 마을을 지나야 하는데,레그손은 그중 어떤 말도 할 줄 몰랐다는 사실은 잊어라, 당시 레그손을 둘러 싸고 있던 온갖 부정적인 조건들일랑 모두잊어라 왜냐고? 레그손은 해내야 했으니까, 그리고 해냈으니까.
당시 레그손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땅에 가겠다는 목표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그손이 처음부터 그렇게 의지가 강했던 것은 아니다.어릴적 그는 가난을 핑게삼아 열심히 공부를 하지않았고,해야 할 일도 미뤄두기 일쑤였다.
"나는 가난한 아이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당시 마을 아이들 대부분이 그랬듯, 니아살랜드 지방 카롱가 출신의 가난한 소년 레그손에게 공부는 시간 낭비일 뿐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선교사들이 가져온 책더미를 구경하다가 에브러햄 링컨과 부커 T 워싱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레그손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래서 카이로까지 4800킬로 미터를 걸어 가겠다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가당치도 않은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험한 아프리카땅을 꼬박 5일 동안 걸었지만,겨우 40키로미터 정도밖에 걷지 못했다. 준비한 식량은 벌써 떨어지고 물도 거의 바닥이 났으며 돈도 없었다. 이런 상태로 남은 4760킬로미터를 계속 걸어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레그손은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 여기서 돌아서는 것은 자신의 꿈을 포기 한다는 뜻이었고, 가난과 무지의 삶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그는 자기 자신과 약속했다.
"나는 미국에 갈때까지, 아니면 노력하다 죽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꺼야"
그는 계속 전진했다.때로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걸었지만, 대부분은 혼자였다. 가다가 사람을 만나는 그곳 원주민들이 자신에게 적대적일지 우호적일지 몰라 조심 스럽게 들어서야 했다. 어떤 때는 마을에서 일과 잠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수많은 밤을 별을 보며 한뎃 잠을 잤고, 야생 과일 등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찾아 연명해야 했다.
그는 점점 야위어 갔다. 열병에 걸려 심하게 앓기도 했다. 그러나 친절한 낯선 이들이 약초로 치료해주고,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지치고 의기소침해진 레그손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 어리석어 보이는 여행에 목숨을 거느니,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유혹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대신 레그손은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이미 익숙한 글을 다시 읽으며,자신의 목표에 대한 믿음을 새로이 다졌다. 그리고 계속 전진했다.
1960년 1월 19일 불확실한 여행길에 오른 지 15개월 만에 레그손 카이라는 카이로 까지 총거리의 3분의 1인 1600키로미터를 걸어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 도착했다.
그동안 레그손은 더 튼튼해졌고 생존기술도 더 많이 익힌 상태였다. 그는 6개월 동안 캄팔라에 머물면서 돈을 벌기위해 이런저런 일을했고, 틈만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주린듯 책을 읽었다.
그 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사진이 실린 미국 대학 안내 책자를 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대학의 사진이 레그손의 눈을 사로잡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아래 분수와 잔디밭이 아름답고, 주변으로는 고향 나아슬랜드의 웅장한 봉우리들을 연상시키는 장대한 산들이 펼쳐져있는 위풍당당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의 건물이었다. 워싱턴주 마운트버넌에 있는 스캐짓밸리대학은 레그손의 막연해 보이는 모험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이미지였다.
그는 즉시 그 학교의 학장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입학 허가와 장학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레그손은 스캐짓 밸리대학에 입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자신의 빈약한 예산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대한 많은 대학에 편지를 보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스캐짓밸리대학의 학장이 레손의 용기와 결의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에게 입학을 허락 했을 뿐만 아니라, 장학금은 물론 숙식을 해결해 줄 일자리까지 제공해 준 것이다. 꿈의 또 다른 한 조각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였다.
하지만 레그손의 앞길에는 아직도 많은 장애물들이 놓여있었다. 그는 여권과 비자를 받아야 했는데, 여권을 받으려면 정부에 확증된 출생일자를 제출 해야만 했고. 더 큰 문제는 비자를 받으려면 적어도 미국 왕복 항공요금 만큼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다시 한 번.그는 펜을 들어 어릴 적부터 자신을 지도해 준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 선교사들은 정부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해 레그손이 여권을 받을 수 있겠끔 도와 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비자를 신청하는 데 필요한 항공요금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레그손은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돈을 구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며, 카이로를 향해 계속 걸었다. 그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돈으로 신발 한 컬레를 샀다. 스캐짓 밸리대학의 교문을 맨발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시 몇 개월이 지나면서 레그손의 용감한 여행에 대한 소문이 곳곳으로 퍼져갔다. 그가 무일푼에 지친몸을 이끌고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도착했을 때에는,레그손 카이라의 전설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대서양을 건너 워싱턴주의 마운틴 버넌에까지 전해져 있었다. 스캐짓밸리대학의 학생들은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레그손의 항공 요금으로 650달러를 모금해 보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레그손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않았다.
문제를 해결했다는 기쁨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극도의 필요가 몰려왔던 것이다.
1960년 12월. 레그손은 마침내 스캐짓밸리대학에 도착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2년도 더 지난 후였다. 그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두 권의 책을 가슴에 품은 채 레그손은 높이 솟은 이 대학의 교문을 자랑스럽게 통과했다.
레그손 카이라의 도전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학문적 여정을 계속 밟은 그는 영국 캠브리지대학의 정치학 교수이자 존경받는 작가가 되었다. 자신의 영웅인 에이브러햄 링컨과 부커T.워싱턴과 마찬가지로, 레그손 카이라는 초라한 출발을 뛰어넘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했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켰고,다른사람이 지표를 삼아 따를 수 있는 훌륭한 등대가 되었다. 물론 그에게도 길을 잃고 헤맬때 한 줄기 빛으로 인생의 등대 역할을 해준 것이 있었다. 그것은 확고부동한 그만의 목표였다.
새해가 밝아온다. 벅찬 꿈을 안고 도전을 시작할 때다. 도전하라. 인류 문명의 역사는 도전의 역사였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쉼 없는 도전 속에서 살아간다. 도전하는 자만이 성장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도전없이 꿈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얼룩말이 사자에게 돌진한 까닭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서 사자 무리가 얼룩말을 노리고 있다. 맹수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깨달은 얼룩말들은 결단의 갈림길에 선다. 사자의 반대편으로 꽁무니를 뺄지, 아니면 사자 무리를 향해 전진할지 결정해야 한다.
우리 생각에는 무조건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마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얼룩말들은 떼를 지어 사자들을 향해 돌진한다. 풀을 많이 뜯어 먹은 말들은 충분한 힘을 비축하고 있다. 얼룩말 무리가 사력을 다해 달려오면 아무리 용맹한 사자라도 움찔할 수밖에 없다. 자칫 얼룩말 무리와 부딪쳐 부상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사자들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일단 옆으로 피하고 나면 전력 질주하는 얼룩말을 다시 따라잡기란 쉽지 않다.
사람이 겪는 일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종종 ‘두려움의 사자’를 만난다.
두려움은 당신이 피한다고 해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비겁하게 자꾸 피하면 두려움은 당신 뒤를 졸졸 따라다닐 것이다. 무서움에 벌벌 떨수록 오히려 그 힘은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이라면 용기로 무장해 그것에 맞서는 것이 상책이다. 굳은 신념으로 정면 대응하면 모세의 홍해와 같은 기적의 길이 생긴다.
인류사에 위험에 정면으로 맞서 돌파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2011년 일본 대지진으로 쓰나미가 발생하자 해안에 있던 어선 10여 척은 자칫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감행했다. 이와테현 오후나토시의 평온한 어촌 마을에 쓰나미가 덮친 것은 3월 11일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생계를 위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업하던 어부들은 바다의 술렁임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배 밑바닥에서부터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안의 삼나무 방풍림에서는 꽃가루가 불에 탄 재처럼 육지 쪽으로 흩날렸다. 엄청난 해일이 밀려올 징조임을 직감했다.
어부처럼 ‘삶의 쓰나미’ 를 향해 전진하라
어부들의 목숨을 살린 것은 과감한 결단과 민첩한 행동이었다. 이들은 선조들에게 들은 “수심이 깊은 바다로 나가면 파도가 높아지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렸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닥치자 어부들은 지체 없이 행동했다. 이들은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향해 돌진했다. 해안의 건물들이 포탄을 맞은 것처럼 초토화되었지만, 바다로 나간 배들은 한 척도 손상되지 않았다. 위험에 정면으로 대응한 덕분이었다. 만약 이들이 육지 쪽으로 피신했더라면 어선은 해안의 절벽이나 건물에 부딪혀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고대 로마군은 일본 어부와 다른 결정을 내렸다. 로마의 함대들은 거센 폭풍우가 몰려오자 해안으로 피신했다. 거센 파도는 겁에 질린 로마군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배 수백 척이 물에 잠기고 병사들은 물귀신이 되었다. 위험은 회피한다고 물러가지 않는다. 강인한 정신으로 위험을 직시할 때 오히려 출구가 열린다.
자전거를 탈 때도 넘어지지 않으려면 오히려 넘어지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넘어지는 것이 무서워 반대쪽으로 꺾으면 결국 넘어지고 만다. ‘삶의 자전거’를 탈 때도 마찬가지다. 위험을 두려워하면 몸이 움츠러들어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성공한 사람은 외부 장애물이 자기 인생을 좌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과감하게 뛰어들어 걸림돌이 되는요소를 찾아 없애거나 개선한다. 비겁하게 숨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성공의 여신이 혐오하는 사람은 위험을 회피하는 겁쟁이다. 여신은 위험과 패배에 용감히 맞서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만 영광의 잔을 준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은 기회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성공하는 사람은 기회가 오지 않으면 기회를 찾아간다. 성공학의 대가 데일 카네기는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고 말했다. 내 앞에 행운이 오지 않는다면 기다리지 말고 그 것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나는 환경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프리카 소년 레그손 카이라는 행운의 바람을 향해 수만 리를 달려간 사람이다. 그는 아프리카 남동부에 있는 가난한 나라 말라위에서 태어났다. 극심한 가뭄으로 매년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1958년 <성경>을 읽던 열일곱 살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 민족을 역경에서 구하겠다고 결심했다. 대륙을 가로질러 이집트 카이로까지 5,000km를 걸어간 뒤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에 진학할 계획을 세웠다.
가진 것이라고는 <성경>과 존 버니언의 <천로 역정>, 5일 치 식량, 작은 호신용 도끼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이 갖지 못한 엄청난 재산이 있었다. 바로 열정으로 무장한 도전 정신이었다.
소년의 여행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야생 열매를 따 먹고 밤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잤다. 도중에 열병에 걸려 죽을 고비도 넘겼다. 15개월 만에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 닿은 그는 미국 스캐짓 밸리 대학 학장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장학금을 요청했다. 카이라의 결심에 감동한 학장은 입학을 허락하고 장학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에 가려면 여권과 비자가 필요했다. 카이라는 어릴 때 본 적 있는 선교사에게 편지를 써서 도움을 청했다.
맨발로 카이로에 이르자 소년은 이미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카이라의 이야기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전해졌다. 스캐짓 밸리 대학 학생과 주민은 그의 미국행 항공편을 위해 성금 650달러를 모아서 보내주었다. 집을 나선 지 2년여 만에 드디어 스캐짓 밸리 대학에 도착했다. 소년은 그곳에서 학문의 여정을 밟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가 되었다. 가난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자신의 조국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돕는 활동을 했다.
모진 역경을 딛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카이라!
훗날 그는 “나는 내가 환경의 희생자가 아니라 그 주인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새해가 당신에게 행운을 선사할지, 불행을 안길지는 당신의 도전 여부에 달렸다. 행운은 앉아서 기다리지 않 고 찾아 나서는 사람에게는 절대 비껴갈 수 없으니까.
새해에는 희망의 꿈을 향해 도전해야 한다. 시련과 역경이 닥쳐도 도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단념하지 않는 한 실패와 고난이 당신의 무릎을 꿇릴 수는 없다.
Books I will try, The Detainee, Jingala, The Civil Servant
Education University of Washington, St Catharine's College, Cambridge
레그손 카이라는 5일치 식량과 자신의 두 보물인 성경과 천로역정 방어용 손도끼와 담요만 가지고 인생을 건 여정에 나섰다. 그는 아프리카 남 동부의 니아살랜드(1964년 말라위로 독립) 부족 마을을 출발해, 걸어서 북쪽으로 동아프리카 의 황야를 가로질러 카이로로 간 다음, 그곳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갈 생각이였다.
때는 1958년 10월 이였는데,어머니가 태어난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으므로,당시 레그손은 열여섯 혹은 열일곱 살이었다.
그의 부모는 둘 다 문맹이였고 미국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부모는 레그손의 결심을 달가워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들의 여행을 축복하여 주었다.
레그손의 여행은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에 불을 지핀 그만의 꿈에서 비롯된 것이였다. 레그손은 자신의 영웅들처럼 되고 싶었다. 가난한 환경을 떨치고 일어나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다시 쉼없이 싸워 노예를 해방한 에이브러험 링컨 그리고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위대한 개혁가이자 교육자가 되어 자신과 자신의 동족에게 희망과 존엄성을 선사한 부커T.워싱턴.
이런 훌륭한 역할모델들처럼 레그손은 인류에 봉사하고 싶었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과 목표를 실행하려면 최고의 교육을 받아야했다. 레그손은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선의 장소가 미국임을 알고 있었다.
레그손이 무일푼에 배삯을 치를 어떤 방도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잊어라, 어느 대학을 갈지 또 그 대학이 과연 그를 받아줄지 알수 없었다는 사실도 잊어라 카이로는 레그손이 살던 마을에서 약4800키로미터 떨어져 있으며,그곳으로 가려면 5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수 백 개의 부족이살고있는 마을을 지나야 하는데,레그손은 그중 어떤 말도 할 줄 몰랐다는 사실은 잊어라, 당시 레그손을 둘러 싸고 있던 온갖 부정적인 조건들일랑 모두잊어라 왜냐고? 레그손은 해내야 했으니까, 그리고 해냈으니까.
당시 레그손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땅에 가겠다는 목표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그손이 처음부터 그렇게 의지가 강했던 것은 아니다.어릴적 그는 가난을 핑게삼아 열심히 공부를 하지않았고,해야 할 일도 미뤄두기 일쑤였다.
"나는 가난한 아이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당시 마을 아이들 대부분이 그랬듯, 니아살랜드 지방 카롱가 출신의 가난한 소년 레그손에게 공부는 시간 낭비일 뿐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선교사들이 가져온 책더미를 구경하다가 에브러햄 링컨과 부커 T 워싱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레그손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래서 카이로까지 4800킬로 미터를 걸어 가겠다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가당치도 않은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험한 아프리카땅을 꼬박 5일 동안 걸었지만,겨우 40키로미터 정도밖에 걷지 못했다. 준비한 식량은 벌써 떨어지고 물도 거의 바닥이 났으며 돈도 없었다. 이런 상태로 남은 4760킬로미터를 계속 걸어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레그손은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 여기서 돌아서는 것은 자신의 꿈을 포기 한다는 뜻이었고, 가난과 무지의 삶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그는 자기 자신과 약속했다.
"나는 미국에 갈때까지, 아니면 노력하다 죽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꺼야"
그는 계속 전진했다.때로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걸었지만, 대부분은 혼자였다. 가다가 사람을 만나는 그곳 원주민들이 자신에게 적대적일지 우호적일지 몰라 조심 스럽게 들어서야 했다. 어떤 때는 마을에서 일과 잠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수많은 밤을 별을 보며 한뎃 잠을 잤고, 야생 과일 등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찾아 연명해야 했다.
그는 점점 야위어 갔다. 열병에 걸려 심하게 앓기도 했다. 그러나 친절한 낯선 이들이 약초로 치료해주고,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지치고 의기소침해진 레그손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 어리석어 보이는 여행에 목숨을 거느니,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유혹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대신 레그손은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이미 익숙한 글을 다시 읽으며,자신의 목표에 대한 믿음을 새로이 다졌다. 그리고 계속 전진했다.
1960년 1월 19일 불확실한 여행길에 오른 지 15개월 만에 레그손 카이라는 카이로 까지 총거리의 3분의 1인 1600키로미터를 걸어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 도착했다.
그동안 레그손은 더 튼튼해졌고 생존기술도 더 많이 익힌 상태였다. 그는 6개월 동안 캄팔라에 머물면서 돈을 벌기위해 이런저런 일을했고, 틈만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주린듯 책을 읽었다.
그 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사진이 실린 미국 대학 안내 책자를 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대학의 사진이 레그손의 눈을 사로잡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아래 분수와 잔디밭이 아름답고, 주변으로는 고향 나아슬랜드의 웅장한 봉우리들을 연상시키는 장대한 산들이 펼쳐져있는 위풍당당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의 건물이었다. 워싱턴주 마운트버넌에 있는 스캐짓밸리대학은 레그손의 막연해 보이는 모험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이미지였다.
그는 즉시 그 학교의 학장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입학 허가와 장학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레그손은 스캐짓 밸리대학에 입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자신의 빈약한 예산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대한 많은 대학에 편지를 보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스캐짓밸리대학의 학장이 레손의 용기와 결의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에게 입학을 허락 했을 뿐만 아니라, 장학금은 물론 숙식을 해결해 줄 일자리까지 제공해 준 것이다. 꿈의 또 다른 한 조각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였다.
하지만 레그손의 앞길에는 아직도 많은 장애물들이 놓여있었다. 그는 여권과 비자를 받아야 했는데, 여권을 받으려면 정부에 확증된 출생일자를 제출 해야만 했고. 더 큰 문제는 비자를 받으려면 적어도 미국 왕복 항공요금 만큼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다시 한 번.그는 펜을 들어 어릴 적부터 자신을 지도해 준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 선교사들은 정부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해 레그손이 여권을 받을 수 있겠끔 도와 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비자를 신청하는 데 필요한 항공요금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레그손은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돈을 구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며, 카이로를 향해 계속 걸었다. 그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돈으로 신발 한 컬레를 샀다. 스캐짓 밸리대학의 교문을 맨발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시 몇 개월이 지나면서 레그손의 용감한 여행에 대한 소문이 곳곳으로 퍼져갔다. 그가 무일푼에 지친몸을 이끌고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도착했을 때에는,레그손 카이라의 전설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대서양을 건너 워싱턴주의 마운틴 버넌에까지 전해져 있었다. 스캐짓밸리대학의 학생들은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레그손의 항공 요금으로 650달러를 모금해 보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레그손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않았다.
문제를 해결했다는 기쁨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극도의 필요가 몰려왔던 것이다.
1960년 12월. 레그손은 마침내 스캐짓밸리대학에 도착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2년도 더 지난 후였다. 그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두 권의 책을 가슴에 품은 채 레그손은 높이 솟은 이 대학의 교문을 자랑스럽게 통과했다.
레그손 카이라의 도전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학문적 여정을 계속 밟은 그는 영국 캠브리지대학의 정치학 교수이자 존경받는 작가가 되었다. 자신의 영웅인 에이브러햄 링컨과 부커T.워싱턴과 마찬가지로, 레그손 카이라는 초라한 출발을 뛰어넘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했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켰고,다른사람이 지표를 삼아 따를 수 있는 훌륭한 등대가 되었다. 물론 그에게도 길을 잃고 헤맬때 한 줄기 빛으로 인생의 등대 역할을 해준 것이 있었다. 그것은 확고부동한 그만의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