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군수를 지낸 *김수온*한국불교에서 재가수행의 역사 개관 / 장재진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하늘꽃 ・ 5분 전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4.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억불숭유의 영향으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교의 세력이 약해졌다. 정도전과 권근을 필두로 한 조선 초기 불교비판 유학자들에 의한 불교탄압으로 이후 조선의 국교인 유교를 중심으로 전개된 사회 문화 전반의 변화와 더불어 불교문화의 보편적 현상은 힘든 상황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재가불자 수행자로서 김수온(金守溫, 1410~1481), 김시습(金時習, 1435~1493), 허균(許筠, 1569~1618), 김정희(金正喜, 1786~1856), 강위(姜瑋, 1820~1884), 유홍기(劉鴻基, 1831~1884?), 이종원(李淙遠, 1864~ ?), 방덕권(方德權) 등이, 그리고 근세의 인물로 김대현(金大鉉)이 있다. 조선 전기에 불교가 위축되고 있던 상황에서 고승으로 알려진 승려 신미(信眉)의 동생인 김수온은 세조의 명을 받고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월인석보(月印釋譜)》 등을 집필 편찬하였으며, 사찰에 수많은 기문(記文)들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김수온의 불교에 대한 신앙심은 모친에 대한 ‘애도시(哀悼詩)’에 잘 나타난다.
가문의 번창을 알고자 한다면 자식들 가는 길의 현명함을 보아야만 할 것이네 세 아들은 나란히 郡守로 나아가고 한 아들은 佛僧이 되어 홀로 현묘한 이치를 깨달았구나. 사람마다 다투어 함께 말하노니 ‘세상의 복 다 갖추었네’ 하는 도다.
김수온은 일상생활에서도 “아침과 저녁을 나물, 소금으로 먹었다(《成宗實錄》), 집이 한소(寒素)하여 대신(大臣)답지 않고 승려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世祖實錄》), 김수온의 일상생활이 불교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로 인해 세조는 때때로 물품을 보내 주었다(《成宗實錄》).” 등의 내용을 통해 생활 속에서 불교적 수행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김수온의 불교에 대한 평가는 유교 경전과의 비교를 통해서 보인다. “만일 불경을 읽어서 그 뜻을 얻게 되면, 《대학》 《중용》은 찌꺼기에 불과할 것이다.”(《世宗實錄 卷126》) 대군들에게 “《대학》·《중용》은 《법화경》 《화엄경》에 미치지 못합니다.(《世宗實錄 卷121》)” “비록 유학을 업으로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성품이 불서를 지독하게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늘 스스로 말하기를 ‘《능엄경》이 《중용》보다 훨씬 낫다.’고 하였다.(《文宗實錄 卷1》)”는 내용을 통해서 김수온의 불교사상과 신앙 형태가 대승불교에 가까운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염불신앙을 강조한 내용으로 “눈을 감고 꼿꼿하게 앉아서 종일 밤새 합장하고 경을 외고 염불을 하며 설법하여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世宗實錄 卷121》).”고 전해진다. 그리고 김시습에게 보낸 답시(答詩)를 통해 김수온이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한 수행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갈림길이 다르지만 마음을 수양할 뿐이라오 마음을 수양함을 다른 데서 찾고 있네. 일삼는 곳에서 홀연히 막힘이 없는 것이니 지친 지게미를 어찌해서 일일이 찾으리오.
김시습의 불교 신앙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지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사건 이후 출가한 적이 있으며 유교 도교와 함께 불교가 그의 사상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29세 때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법화경》 언해사업에 참여했으며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여했고, 《유금오록(遊金鰲錄)》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大華嚴一乘法界圖註幷序)》 《화엄석제(華嚴釋題)》 《묘법연화경별찬(妙法蓮華經別讚)》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 등을 저술한 일은 자주 거론되어 왔다. 그리고 김시습의 일대기와 더불어 남긴 시를 살펴보면 각지의 명찰들을 주유하고 산사에서 참선했으며 여러 스님과 교유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바람 잦아든 솔창은 고요하고 향내 스러진 선실은 한가롭네. 이생을 내 이미 끊어버렸나니 水雲 간에 깃들어 살리라.(《梅月堂集》 권9 〈晩意〉) 헛된 몸뚱이는 결국 멸하기 마련이며 단청도 오래되면 또한 희미해진다네. 無生이 본래 이와 같으니 속된 세상이야 말해 무엇할까.(《梅月堂集》 권9 〈遊王輪寺〉) 누가 알리요 아름다운 은둔의 삶을 이미 생멸의 마음을 잊었다네.(《梅月堂集》 권3 〈巖竇〉) 누군가 편안히 참선할 곳 묻는다면 흐르는 물 한 난간 기둥에 꽃 가득 피었다 하리. (《梅月堂集》 권3 〈贈峻上人〉)
이 외에도 많은 시가 전해오고 있지만 김시습의 불교적 사유와 구도적 면모, 그리고 수행적 삶을 알 수 있다. 김시습의 생애는 단지 불교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생멸을 초월한 무생(無生)의 실상을 향한 구도의 열정은 면면히 드러나고 있다. 허균은 스스로 불교를 신앙한다고 밝혀 백월거사(白月居士)로 불렸다. 삼척(三陟) 부사로 임명되었을 때는 불사(佛事)를 행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된 적도 있다. 허균이 행한 불사는 혼자서 예불을 올리고 염불한 것을 말한다.
포단 바친 불공으로 청정한 마음 지키고 스님의 법문으로 외로운 내 처지 위로되네. 경전 속의 부처님 가르침은 빛나고 범종 소리는 산초나무 숲까지 퍼져가네. 괴로움의 바다는 건너기가 어려운데 자비의 항해를 부르기도 쉽지가 않구나. 그냥 사리자 쫓고자 하니 극락정토에서 서로 맞이하겠다.(神光寺 《惺所覆瓿藁》 卷1) 벼슬살이 변변치 않아 가을도 저물어가고 스님 법문이 나를 붙잡아 밤 다 새려 하네. 서럽구나, 이내 몸 고해의 삶에 매이어 머리카락 희도록 말 발자국 벗어나지 못하네. (題僧卷用西潭韻 《惺所覆瓿藁》 卷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