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라메기의 전설
춘천의 구(舊)소양강 다리를 건너서 직선으로 향하면 양구로 가는 도로가 나타나고 좌회전으로 꺾어 돌면 화천길인데 길 오른쪽으로 지금은 롯데인벤스 아파트가 서 있지만 옛날에는 이 자리에 제사공장이 있어 춘천 양구 홍천 가평의 아가씨들이 명주실을 뽑던 곳이다,
거기서 조금 더 지나 삼거리에 이르면 바로 두미르 아파트인데 이 자리는 6,25당시에 7연대가 주둔했던 자리며 더 올라가서 춘농공고 맞은편에 부락이 하나 있으니 이 마을을 “가라메기”라고 하였다.
지금은 우리나라 어디나 도로가 황황 뚫렸지만 옛날에 이 신작로에는 자갈을 깔았으며 하루 한 두대 다니는 목탄트럭은 고장이 나서 서있을 때가 많았다.
마차가 다니면 삐꺼덕 소리만 요란하였는데 마을로 들어가는 신작로 입구에는 아름드리 귀룽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늙은 소나무처럼 길을 향해 반은 누워 있어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여기를 신성한 서낭당으로 모셔 왔으며 정초마다 이 서낭당 앞에 떡시루를 차려놓고는 치성을 드렸던 것이다.
어떤 때 길을 지나다 보면 서낭당에다 아기저고리와 삼색의 울긋불긋한 실을 걸어놓기도 하고 또 짚으로 만든 인형 발치에 흰 쌀밥을 무더기로 내버리기도 하여 아이들은 그것을 보자 질겁을 하면서 도망을 쳤던 것이다.
음식을 귀신에게 바침으로서 모든 액막이를 하려 하였던 것은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하늘을 향해 정성을 빌었던 흔적이라고 할 것이다.
지금은 전국 어디를 가도 이런 서낭당을 보기가 어려웠는데 최근에 이것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도 한다.
한길에서 이 마을로 들어서자면 길 양쪽으로 초가집들이 몇 채 씩 이어져 있고 한참 나가게 되면 왼쪽으로 거지들이 사철 노숙을 했던 디딜방아가 있고 그 맞은편에 마당이 넓고 큰 대문이 달린 집이 하나 있으니 이 마을의 부자 댁인 김언필씨 댁이었다.
이 댁의 밖앗마당에는 겨울이면 섶나무를 해다 쌓아놓았고 여름이면 보리타작에서부터 가을이면 볏단을 지붕보다도 높게 쌓은 낟가리가 여러 개가 되었는데 날을 받아 새벽부터 탈곡기 두 대를 들여놓고 벼를 털기 시작하면 저녁 해가 떨어지고 밤중이나 되어야 끝날 때가 많았다.
타작을 할 때면 일꾼들도 많았지만 동네아낙네들이 다 모일 정도로 밥을 하고 까부람질을 하다 보니 아이들이며 식구들이 와서 삼시 밥을 다 얻어먹었다.
그때야말로 잘 살지 못하던 시대여서 사람들은 이 부자 댁에서 일이 있으면 식구가 전부 나와서 일을 거들었고 꼬맹이들은 누룽지를 손에다 들고 서로 나누어 먹었다.
논농사는 물론이고 밭농사로는 콩 조 팥 수수 기장 옥수수 감자 고구마 참께 들깨를 비롯해서 채마밭에는 무 배추는 물론 당근이며 파 마늘 고추에다 우엉과 도라지 더덕까지 안심은 것이 없을 정도로 다 가꾸었다.
농사를 지어도 보통 많이 짓지를 않다보니 가마솥에는 늘 배추 국이 끓었고 사흘도리도 두부를 만들기 위해 콩을 삶고 맷돌에다 갈으니 아낙네들의 손길은 항시 바쁠 수밖에 없었다.
일꾼을 열 명이 넘게 얻어서 밭을 매고 보리타작을 시작으로 감자 캐고 논의 피를 뽑고 조밭과 콩밭을 매며 옥수수 따고 목화밭에 배추를 심자니 아낙네들은 그때마다 점심을 해서 머리에 이고 논과 밭으로 내달아서 논도랑과 밭두렁에다 음식을 차려놓는다.
일꾼들은 그것을 보고는 하나 둘 음식상으로 모여들었다.
“출출하던 판에 막걸리 맛 참 좋겠다.”
“ 저 사람은 못줄 하나 바로 잡지 못하면서 막걸리타령부터 하는 거야.”
“ 아 형님은 어젯밤에 무얼 했기에 모춤도 제대로 던지지 못하면서 남의 탓을 해요.”
“ 그게 그렇게도 궁금해, 튀전 판에 가서 밤 좀 새웠더니 어깨에 힘이 빠져서 그랬다, 왜.”
“ 난 그것도 모르고 호박씨 깐 줄 알았지요.”
“ 고만 덜 하고 어서 술잔이나 받으라고.”
이렇게 농사를 짓다보면 어느 듯 가을이 되어 타작을 해서 볏가마니를 비롯해서 각종 잡곡까지 털어서 마당에다 쌓아놓으면 얼마나 보기가 좋았던 것인가.
그런 멋에 농사를 짓는 것이지만 그것은 농토가 많은 김언필씨댁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가을걷이가 끝이 나면 나머지 일이 한 가지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엉을 엮어서 안채와 밖앗채에 지붕을 해 덮는 일로 이것이 끝나야 일꾼들은 겨울 준비를 해야 한다.
큰 눈이 오기 전에 큰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마당에다가 많이 쌓아 놓아야 겨우내 따뜻하게 방을 덥히고 날이라도 궂으면 흥타령을 부르며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쳤던 것이다.
이 댁이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화천과 홍천을 드나들면서 소장 사를 하던 김언필씨가 돈을 많이 벌어 땅을 사고 이 집을 짓게 되면서 부터였다.
농토도 별반 없이 남의 소작농을 하던 언필씨가 소장 사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조반석죽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집을 나설 때에는 콩을 볶아서 가루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허출하면 한 옴큼씩 꺼내서는 요기를 하면서 다녔다.
말하기 좋아 걸어 다니면서 먹는다고 하였지만 사실 콩가루만 먹고 몇 십리를 걷는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그런데 하루는 언필씨댁에 웬 중이 한 사람 지나다가 언필씨 댁내를 보고는 참 복을 많이 타고 났다고 하면서 초년에는 어렵게 살겠지만 앞으로는 큰 부자가 되겠다는 말을 하면서 부자로 오랫동안 살려거든 한 가지 액막이를 해야 되는데 그것은 강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삼악산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고 절대로 그 나무를 베지 말라는 부탁까지 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언필씨 부인은 남편에게 그 말을 하자 미신을 워낙 어렸을 때부터 잘 믿던 터라 그것을 귀담아들었다가 후일 근방에 땅을 다 샀을 때에 집에서 삼악산이 보이지 않도록 개울가에다가 미루나무 몇 백 그루를 심었는데 워낙 잘 자라는 나무여서 5,6년이 되자 중의 말대로 앞을 꽉 막아서 삼악산이 보이지를 않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언필씨가 총각 때부터 장에 다닐 때만 해도 얼마나 가난했으면 우전마당에서 국밥 한 그릇을 제대로 사서 먹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그는 가난뱅이였다.
그런데 그렇게 고린 자비 노릇을 몇 년 계속하던 그가 몇 년 뒤부터는 차츰 땅을 사들이기 시작하는데 온 동네 것을 야금야금 다 사다 보니 지금까지 국밥 한 그릇 사먹지 못하는 가난뱅이인줄 알던 사람들이 모두가 나가자빠질 지경으로 놀란 것이다.
언필씨는 원래 성질이 꼬장꼬장한 편으로 융통성은 별로 없었지만 신용은 있어서 우전마당에서는 김언필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소 장사를 한번 떠나게 되면 며칠에 걸쳐 화천 양구 홍천 횡성 장 까지 돌게 되다보니 객지에서 유숙하는 때가 많았는데 하루는 화천 주막집에서 자게 되던 날 늘 다니던 주막의 주모가 일부러 언필씨를 부르는 것이었다.
주막집의 주모는 언필씨가 총각인데다가 장사를 잘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항상 만나기만 하면 딸이 있으면 사위를 삼고 싶다고 까지 하던 여인네였다.
그래서 언필씨는 저녁을 먹은 후에 안방으로 주모를 찾아간 것이다.
“ 왜 무슨 일로 고단한 사람을 부르는 게요?.“
“응 마침 잘 오셨네, 다름이 아니라 내가 좋은 일좀 하려고 그러니 한번 들어보시려우.”
평소에도 다정다감하게 대해 주던 주모는 그날따라 막걸리 한 사발을 대접하면서 말을 하는 것이었다.
“ 난 내일은 홍천 장엘 가야겠어 서 일찍 자야하는데 ….”
“ 앗다, 중도 목탁을 두드리며 주막을 지나다가 계집이 부르면 목탁을 바랑에다 넣는다는데 내 말 좀 들으면 어디가 탈이 나며 소장사하는 날이 내일 뿐이랍디야. 지금 김 씨 일생에 대한 배필을 구해주려는데 술은 한잔 못사나마 거절을 하다니 원.”
주모가 한마디 하는 바람에 언필씨는 주춤하고서는 주모의 말을 들어보니 마땅한 처자가 하나 있으니 선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필씨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며 그럴 사정도 되지를 못해서 거절을 하고 말았던 것인데 주모는 그날 이후 유숙할 때마다 성화를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언필씨는 돈 벌 생각만 하였지 장가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를 않을 때였는데 자꾸만 말을 하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옛말에 색시 주인애비를 잘만 서면 술이 석잔 생기지만 잘못하면 뺨 세대를 맞는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주모는 술 석잔 을 바라지 않더라도 인척의 조카딸을 마땅한 자리에 인권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언필씨를 그 당자로 점을 찍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야 언필씨가 알고 보니 이는 한번 시집을 갔다 온 여자로서 딸이 둘씩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언필씨는 그 말을 듣자 입만 딱 벌리고는 공연히 마음만 설렜다고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싹 돌아섰는데 이번에는 주모가 안면까지 싹 바꾸고는 비록 한번 시집을 갔다 오긴 하였지만 그런 여자는 세상천지를 다 뒤져도 찾지 못한다면서 재차 꿀을 들여 붓는 것이었다,
속담에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격으로 계속해서 주모가 꾀는 바람에 어느 날 언필씨는 술김에 그 처자를 한번 만나보겠다 하고는 한밤중에 보게 되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렇게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여자를 보니 언필씨의 마음이 달라지고 그 날로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게 된 것이니 사람팔자 그래서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언필씨는 그리고 얼마 후에 장가를 들고 이듬해에 첫아들을 낳게 되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언필씨가 외아들로 자라서 항상 형제가 많은 것을 원했는데 부인이 귀한 아들을 낳게 되니 아이는 온 동네사람의 귀염을 받게 되고 더구나 자라면서 귀공자처럼 허우대가 좋다보니 할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이름을 영호라고 짓고 보통학교에 입학을 시키니 학교에서는 공부도 잘 하고 서예글씨도 잘 써서 상까지 타오는 것이었다.
영호는 학교를 다녀와서는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고무총으로 참새를 잡거나 가을에는 짚가리에 새를 잡기 위해서 새 창애를 놓기도 하고 한 겨울이면 지붕 초시 마에 집을 짓고 자는 참새를 잡기 위해 밤중에 사다리를 놓고는 새들을 잡아서는 화롯불에 구워서 할머니를 갔다가 드리기도 하였다.
늦은 봄이 되고 보리가 팰 무렵이면 보리밭에서 새끼를 치는 종달새를 잡아와서는 새둥우리를 만들어서 키우기도 하였지만 그 새는 얼마나 성질이 급한지 며칠 살지 못하고는 죽는 것이었다.
그는 한 여름이면 강에다가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거나 여울물에 어항을 놓아서 고기도 잘 잡아들였다.
자라면서 공부에 취미를 가지기 보다는 자연에 심취해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 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소 장사를 줄곧 나가시게 되자 그는 아버지와는 대면할 시간이 거의 없다보니 그의 행동을 제지할 사람이 없어 무슨 일이건 제 마음대로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주로 학교 갔다 와서는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도 극장구경을 간다던지 아니면 장마당에 나가서는 곡마단구경을 하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중학교엘 진학을 하더니 몇 달 동안은 아무 말 없이 잘 다니는가 싶더니 어느 날 부터는 학교가 재미가 없다면서 자주 빠지기 시작을 하는 것이었다.
학교를 가지 않은 눈치를 챈 어머니가 하루는 아들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으니 그는 학교를 도저히 가기가 싫다고 하소연을 하면서 사냥을 다니고 낚시를 다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 학교를 다니는 놈이 공부는 하지 않고 오락에나 미처 다니면 이다음에 어떻거려고 ,정신 좀 차리지 못하겠냐.”
어머니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렸지만 눈물만 흘리고 대답을 하지 않으니 너무 속이 상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타일러도 듣지를 않자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부인의 말을 듣고 장에 다녀온 언필씨가 된통 혼을 내 주긴 하였으나 좀처럼 그의 학교기피증은 되살릴 수가 없었다.
“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고만이라”는데 모처럼 아들을 공부를 많이 시켜 보려 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아버지는 이만저만 실망이 큰 것이 아니었다.
진작 아들에 대해서 단 돌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부인에게 말을 하였으나 부인이야말로 큰살림을 하다 보니 언제 아들에 대해서 참견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이런저런 현상을 감안해 볼 때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은 단한가지라는 생각에 미치자 언필씨는 그 사연을 부인과 의논을 한 것이다.
그것은 건달이 되어가는 아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장가를 얼른 들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지 얼마 후에 부인의 친정 쪽에서 말이 들어 왔는데 가평 북면의 한 농가에서 자란 색시가 있다고 하여 알아보니 길쌈도 잘 하지만 워낙 종가 댁의 맏딸이라 무슨 일이건 척척 잘 한다는 것이었다.
언필씨 내외는 주인애비를 불러서 색시에 대해서 다시하번 자세한 내막을 묻고는 바로 약혼을 시키고는 장가를 들였던 것이니 그때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영호는 장가를 들자 지금까지 나태했던 행동이 나아지고 부인과도 사이좋게 지나는 것이어서 부모는 그제야 한 시름을 놓게 되었던 것이다.
언필씨는 아들이 가정에 충실하게 되자 집안의 모든 일을 맡기겠다고 엄명을 내렸다.
그리되자 영호는 이후 집안의 대소사며 곡물 수납 세금 부과에 이르기까지 처리를 제대로 하게 되었다.
언필씨는 아들이 일처리를 잘 하자 이번에는 뗏목을 이용해서 소금을 팔아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
영호는 장가든지 3년 후에는 두 살터우리로 남매를 두었으니 흥규와 정애였다.
그런데 아들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영호는 한때 중학교 동기생이었던 이 달구라는 친구가 몇 번 찾아온 후부터 시간만 나면 읍내를 자주 나가기 시작을 하였는데 그곳이 읍내의 황금정이라는 고급 술집이었던 것이다.
기생을 여러 명 두고 장사를 하는 이 집에는 술손님들이 저녁마다 많았는데 주로 관공서에 다니는 사람이거나 일본 순사들이었다.
영호가 처음으로 이 집엘 와서 보니 그 분위기도 그렇지만 예쁘장한 기생들이 너무 많아 호기심이 잔뜩 생기는 것이었다.
「 호랑이를 잡으려면 그 굴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과 같이 영호는 다음 날엔 친구를 불러서 다시 황금정을 찾은 것이다.
“아이구 이주사가 어제도 오시더니 또 오셨구랴.”
“ 이 분이 어제 처음으로 이 집엘 오셨는데 여자들한테 홀딱 반한 모야이야.”
“ 아 그러세요 어서 오세요. 우리 집 애들이 예쁘고말고요 호호.”
마담이 호들갑을 떨면서 이달구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 아니야 오늘은 이 분의 손을 잡아요, 아니 거시기까지 잡아도 좋아 . 하하”
” 이 주사 처음 뵙는데 농담이 너무 지나치셔요.“
“ 내가 뭘 어쨌는데 그래 , 사실 오늘은 이 황금정에서 으뜸가는 미인을 하나 만나게 해주면 안 될까.”
“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느 영이라고요 , 잠시 눈만 껌벅거리고 계셔요, 금방 미인 하나 대령할 테니까요.”
술상이 이내 들어오고 뒤따라서 문지방 밖에서 인사를 올리는 여인이 있었다.
“ 처음 뵙습니다. 명월이라고 하옵니다.”
명월이라는 여인이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빨간 갑사치마에 분홍저고리를 입었는데 방안이 환할 정도로 미인이었다.
“ 명월이라, 밝은 달밤에 하늘에서 내려오신 선녀 같구먼.”
이달구가 한마디 하자 명월이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다.
명월이가 술 주전자를 들어 올리자 이달구가 영호 쪽으로 손짓을 한다.
“ 이 분을 잘 모셔야 해,“
영호는 그때까지 잠자코 있었는데 명월이의 얼굴을 훑어보니 가슴이 후둥후둥 뛰는 것이었다.
마담은 처음으로 온 손님인 영호를 극진히 대접을 하기 위해서 마침 그날 처음으로 기방에 들어온 신출내기 기생을 들여보냈던 것이다.
.
영호가 장가를 든 이후에 처음으로 이런 데를 와서 보니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여자들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영호의 취미는 지금까지는 산과 들을 싸다니면서 새나 짐승을 잡거나 강에 나가서 고기를 잡았었는데 황금정에 발을 들여 놓은 뒤부터는 발길이 자꾸 황금정으로 가는 것이었다.
원래 기생집이라는 곳의 기생들은 자주 자릴 옮기기도 하지만 주인마담이 인정하는 기생은 오래도록 한집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영호가 마음에 두는 기생의 본명은 여 명희이며 기방 이름을 명월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내력을 들으니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다 말고 지방의 면화공장이며 양말 공장을 번갈아 다니다가 서울의 방직공장에 좋은 자리가 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올라갔다가 소개하는 사람에게 몸만 더럽히고 기왕에 버린 몸이니 돈이나 벌겠다고 하여 처음 소개 받은 곳이 황금 정이었다.
이날부터 영호는 며칠에 한 번씩 명월 이를 만나보기 위해서 황금 정엘 드나들었지만 좀처럼 명월이를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그때 이미 화금정에는 명월이를 보기 위해서 심심치 않게 남자들이 저녁이면 모여들었다.
영호는 명월 이를 본 이후 욕심이 생겨 본격적으로 명월 이에게 구애를 하고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술집이라는 곳에 한번 발을 들여놓은 기생들은 좀처럼 그곳을 마음대로 떠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은 불문율이었으며 절대적으로 그 권한은 마담에게 달려 있었다.
영호가 명월이를 탐을 낸다는 것을 알아차린 마담은 명월이를 미끼로 영호에게서 어떤 대가를 바라고 싶었다.
그래서 명월이를 불러서 지시를 한 것이다.
“ 명월아 엄마의 말 똑똑히 들어라, 지금 영호씨가 너를 탐내는 모양이니 너는 내 말이 떨어지기 전에는 호락호락 넘어가면 안 된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
명월이야말로 어느 아전이라고 마담의 말을 어길 수가 있겠는가.
황금정에 올 때는 이달구를 꼭 달구 다니던 영호는 얼마 후부터는 혼자 나타나기 시작을 하였는데 그 때마다 마담은 반색을 하며 안으로 모셨지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명월이를 잘 대면을 시키지 않았다.
“ 명월이도 영호씨에 호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먼저부터 오던 사람들이 주욱 줄을 서 있으니 차례가 될 때까지 좀 기다리세요,”
날마다 이런 식이니 영호는 한편으로는 부화가 슬며시 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술이 취한 영호는 마담을 불러가지고 속에 있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 마담 나를 그렇게 괄시해도 되는 거야 , 차례를 기다리라고 그래 술집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놈이 어디 있냐, 돈이면 다 해결이 되는데 말이야.”
“ 아유 선비님도 원 별 말씀을 다 하세요, 누가 괄시를 해요 .”
“ 나 오늘 명월이를 내주지 않으면 다시는 이놈의 집에 발그림자도 비추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 나는 간다.”
이 소리를 들은 마담은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었다. 그동안 영호씨는 관청에 다니는 단골손님보다도 더 매상을 올려주는 분인데 이 분이 안온다면 마담의 책임문제였다.
영호씨가 정말 일어나자 마담은 영호씨를 붙잡아 앉히고는 안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 월매야 오늘 명월이가 가야할 방을 네가 들어가고 명월이를 이리로 보내거라.”
사실 명월이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영호의 평판을 들으니 집이 부자인데다가 인품도 좋게 보여서 한번 친해보고 싶은 충동도 느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영호는 친구와 술을 한잔 나누고 늦으막하게 황금 정엘 나타났는데 그때 명월이가 손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리되자 영호는 갑자기 시기심이 발동하여 명월이가 있는 방을 향해서 “ 명월아 어서 나와“ 하고는 큰 소리를 지르니 황금정안에서는 금방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명월이는 영호의 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서 얼른 방을 나와서는 영호를 부여안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니 이번에는 방금 술을 마시던 손님이 명월 이를 뒤따라와서는 “어느 놈이 남의 술자리까지 방해를 놓는 거야.”하면서 방문을 열어 저치고 들어오더니 영호의 면상을 주먹으로 후려치니 영호의 코에서는 금방 코피가 터지고 입술까지 찢어져 입었던 흰 옷이 시뻘겋게 핏물이 드는 것이었다.
사실 영호는 지금까지 너무도 곱게 귀공자로 자라온 터라 싸움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아왔으며 술김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것이 싸움이 되리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도 못했던 것인데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되었으니 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날 술상에서 일이 벌어지자 마담은 맨발로 뛰어나와서는 더 큰 싸움이 날까봐서 덜덜 떨면서 누구보다도 얌전하던 영호씨가 코피가 터져서 옷이 피범벅이 되었으니 겁이 덜컹 나기도 하였다.
그는 또 황금 정에 대한 나쁜 소문이 세상에 알려질까 봐서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영호를 주먹으로 친 사람은 원래 이 황금 정엘 단골로 다니던 사람이었지만 그도 싸움이라고는 해보지를 않아서 영호를 술김에 한번 때린다는 것이 잘못 때려 상처가 나게 하였으니 그는 그 다음날 상대방이 상해로 고소를 할까봐 겁이 나서 황금 정엘 찾아와서는 사과를 하고 영호에게도 사과를 한다는 말을 마담을 통해서 전해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
영호가 며칠 후에 황금 정엘 나가니 마담이 그날의 일에 대해서 상대방이 사과를 하였다면서 자기를 봐서 고소 같은 것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하여 영호는 그 나름대로 잘못도 있어 그 냥 넘어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이번 기회에 명월 이를 후처로 삼고 싶으니 노골적으로 도와달라는 말까지 하였다.
마담은 영호가 그날의 일을 사건화하지 않겠다는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리고 명월 이를 설득시켜서 영호의 소원을 들어주는 방향으로 노력하겠지만 명월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그것은 전적으로 영호의 몫이라고 못을 박았던 것이다.
명월 이는 그날 이후 몸이 고단하다면서 며칠 간 기방엘 나가지를 않았는데 며칠 후에 마담이 명월 이를 부르는 것이어서 만나 보았더니 영호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 명월아 이 언니를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처음 본 순간 너의 미모로 보아 이런 데에 나와서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네가 황금정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남자들이 눈독을 드리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렇게 되면 납자들 간에 질투가 벌어지는 것이니 이 번 기회에 아주 팔자를 고치면 어떤가 하고 너를 불렀다.“
마담의 말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여 명월이도 속에 있는 말을 다 털어 놓은 다음 좀 더 생각을 해본 다음에 대답을 하겠노라 하고는 물러 나왔다.
사실 명월이가 가만히 생각을 해봐도 황금정에서 큰돈을 벌기는 쉬운 일도 아니려니와 언제 어느 때 자기로 인해서 또 다른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이참에 영호의 말을 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시집을 가면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이 큰 걱정이 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부딪치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는 마담을 찾아 그의 의견을 말한 것이다.
그때 명월이의 어머니는 병환 중에 있었고 명월이가 거두어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었다.
명월이가 마담의 말을 따르겠다는 말 뒤에는 사실 영호네 집안이 아들이 귀한 집이라니 들어가서 아들이라도 여럿 낳아 준다면 그 댁은 그 댁대로 자신을 그리 괄 씨를 하지는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영호는 명월이가 자기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말을 마담에게서 듣고는 바로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리고자 밤저녁에 어머니 방을 찾은 것이다.
원래 어머니는 집안일에 파묻혀서 아들에 대해서는 본인 자신에게 내맡기다시피 하였는데 갑자기 아들이 밤늦게 찾아온 것이 걱정이 되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었다.
“ 그래 무슨 일인데 밤중에 어미를 찾아 온 게냐”
어머니가 말씀을 하시자 영호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는 작은 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 어머니 제가 죄를 졌습니다. 진작 말씀을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러자 무슨 내용인지를 몰라서 우두커니 앉아만 있을 수박에 없었다.
영호는 그제야 어머니에게 그동안에 읍내를 자주 나가다가 우연치 않게 여자 한사람을 친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아이까지 갖게 되었다고 거짓말까지 보태서 말씀을 드린 것이다.
그런 말을 아들에게서 들으니 어머니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반대를 하려야 아이까지 가졌다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더구나 이 아이를 집에 들이자면 남편인 언필씨와 며느리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는데 우선남편네가 허락을 할지가 의문이었다.
언필씨는 한 달에 한두 번 집에를 들릴까 말까여서 부인으로서는 아버지에게 금방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고민 고민을 한 뒤에 우선은 며느리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를 묻고자 며느리를 불렀던 것이다,
원래 영호 부인은 조용한 성격에 남편이 시키면 군 말없이 순종하는 여인이었다.
그동안 남편과 결혼을 하긴 하였으나 워낙 큰살림에 쪼들리다 보니 남편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재미도 없이 살아온 것이 부인의 생활이었다.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자 부인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 어머니 제가 아들을 더 이상 가질 수가 없으니 새 사람이 들어와서 아들이나 낳아 주면 좋겠어요.”
사실 그동안 영호의 부인은 남매를 낳고는 몸이 약해져 더 이상 아이를 출산할 수 없다는 진맥을 받은 처지여서 그것이 늘 마음에 걸리던 일인데 오히려 사람이 하나 들어온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여도 좋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 네가 그런 생각을 하였다니 참으로 기득하여 이 에미는 무엇이라 할 말이 없구나.”
어머니는 며느리를 끌어안으면서 한없이 등을 다독여 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후에 언필씨가 집으로 돌아오신 날이다.
부인은 일찌감치 이 일을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니 남편은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다가 하는 소리가 며느리는 어찌 생각을 할까 하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사실 언필씨는 그동안 며느리가 아들을 좀 더 낳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던 것은 손자가 하나밖에 없는 것이 늘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들이 귀한 집에는 자손이 번성해야 되는데 지금으로서는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하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언필씨는 부인의 말을 알아듣고는 모든 것을 부인의 뜻대로 하라고 하니 모든 일은 순조롭게 되어나갔다.
이렇게 해서 황금정의 명월이 즉 여 명희는 영호의 첩실의 몸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들어온 지 열 달 만에 아이를 낳으니 아들이 아니고 딸이었던 것이다.
아들을 바랬던 식구들은 실망이 역역했지만 또 아이를 낳으면 될 것이라면서 들어온 명희 이에게 위로를 해주는 한편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현애라고 지어 주었다.
명희는 한동안 산후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차츰 회복이 되면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가 하면 형님을 친 언니처럼 잘 따르고 식구들과도 화목하게 지나느라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한동안 새사람으로 인해 어떤 분란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을 하던 시부모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그렁저렁 1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났는데 명희가 가만히 보니 영호가 다시 기방엘 드나드는 낌새를 알게 된 것이다.
남자라는 게 한 여자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방에서 터득한 것이긴 하지만 영호는 여자에 대한 독특한 취미 즉 한 여자를 오래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1년을 살면서 느낀 것이다. 자기 몰래 기방을 다시 출입한다는 것도 당초의 약속과도 틀린 것이었다.
영호는 자기가 집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한 눈 팔지 않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명희가 이 집으로 들어 올 때는 부잣댁이라서 큰 기대를 걸고 왔던 것인데 층층시하에서 자기의 위치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아들을 낳고자 하였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를 않아 또 다른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다.
명희의 고민이 이렇게 날로 깊어졌지만 영호는 그 나름대로 볼일이 있다면서 자주 외박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고민이 쌓이다보니 명희의 생활은 날로 괴로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참으로 예상치도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니 그것은 뜻밖에도 한복이라는 머슴의 생일날이었다.
이날 생일상을 파려서 식구들이 즐겁게 저녁을 먹고 난 다음 모두가 잠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사람 살려” 하는 소리가 들려 나와 보니 명희가 속옷 바람으로 뛰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온 식구들이 깜짝 놀라서 사태를 알아보니 술을 잔뜩 먹은 한복이녀석이 현애 엄마가가 혼자 자는 방엘 들어가서 겁탈을 하려던 것이었다.
언필씨 댁에는 일꾼을 세 명이나 두었는데 그중에 나이가 제일 어린놈이 생일이라고 해서 음식을 잘 차려 주었더니 엉뚱한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자 현애 어멈은 그것이 창피하고 분하다면서 이튿날부터 울면서 밥도 먹지를 않더니 사흘이 되던 날 아침 영호가 읍내로 볼일을 보러 간 사이에 보따리를 싸 가지고 가만히 집을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작은엄마가 보따리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본 흥규가 강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작은엄마를 찾으러 가자고 하여 아이들 다섯 명은 읍내 길로 통하는 소양강까지 달려간 것이다.
흥규가 작은 엄마를 잘 따른 것은 여 명희가 오자마자 아이들을 잘 챙겨 주어서 그동안에 정이 폭 들었던 것이다.
마을에서 읍내를 가자면 소양강 다리 밑에 모래사장을 지나 여울을 건너야 읍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서 아이들은 숨이 땅에 닿도록 뛰어갔던 것이다.
달리기를 하는데 맨땅에서는 발이 잘 나갔지만 모래사장에서는 발이 모래에 푹 빠져서 나가지를 않았다.
그때의 소양강 다리 밑에는 흰모래가 백사장을 이루어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모래사장에서 모래찜질까지 할 정도로 너무도 깨끗한 곳이었다.
아이들이 숨을 헐떡이며 마침내 소양강 다리 밑에까지 달려갔지만 현애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래사장만이 넓게 뻗어 있고 물종자리 새들이 강변자갈밭에서 종종걸음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할 수 없이 집으로 모두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현애 엄마는 다시는 집에 나타나지를 않았던 것이다.
한 여자로서 남의 첩살이를 한다는 것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도 어려웠을 것이지만 더구나 영호가 자기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다시 기방엘 나가게 되어 절망을 하고 있던 차에 엉뚱한 일까지 벌어져 아주 이번 기회에 집을 나가기로 결심을 하였던 모양이었다.
명희가 없어지고 나니 현애가 외톨이로 자라게 되어 큰 엄마는 그것이 또 마음에 걸려서 눈물을 흘렸다.
영호는 그 나름으로 한동안 미친 듯이 읍내와 홍천, 화천을 다니면서 명희를 찾으려 하였으나 그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으니 그는 망연자실하게 지나는 것이었다.
그날도 영호는 읍내를 돌아다니다가 늦은 시간에 저적저적 집으로 돌아오다가 머슴들이 있는 사랑마루에 겉터 앉으니 방안에서 도란도란 말이 들리는데 자기에 관한 말이었다.
“흥규 작은 엄마가 너무 예쁜 게 탈이었어.”
“ 그러게 말이야. 기왕이면 좀 참을 일이지 , 그렇게 간다니 말이 되는 이야기야.”
“한복이란 애가 철이 없기도 했겠지만 그렇게 엉큼한 마음을 가질 줄을 누가 알았겠어.”
“ 그게 모두 다 큰 형님이 제대로 가르치지를 않아서 그래요”
“ 왜 그 속에 나를 끄집어 넣는 게야.”
“ 형님 책임이 크니까 그렇지요“
" 그 놈이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었는데 밤낮 일만하다가 갑자기 옆방에 예쁜 아줌마가 와서 있으니 온전히 잠이 올 리가 있겠어.“
“ 술을 처먹은 김에 용기가 났겠지 뭐 .”
“그나저나 흥규 아빠의 몰골이 말이 아니여.“
“ 말은 바로 하랬다고 계집이 어디 그거 하나던가 , 읍내에 가면 계집천지인데 뭘 그리 상심한단 말이야.”
“워낙 미모를 갖추었으니까 그렇겠지.“
“ 미모는 무슨 미모여, 계집이라는 게 한번 데리고 자보면 다 그렇고 그렇다는데.“
영호는 더 들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머슴들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머슴까지도 자기를 웃업게 아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는 그날 이후 한동안 읍내를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아버지 언필씨의 연세도 어느덧 고희를 바라보게 되자 언필씨는 더 이상 소 장사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하고 집에서 농사 관리만 하기로 마음을 잡았다.
한편 언필씨의 부인은 현애 어멈이 나간 뒤에 아들인 영호가 마음을 잡지 못하자 그가 또 딴 짓을 할까봐서 몹시 걱정을 하였는데 그 무렵 친정 쪽에 아는 사람의 아들 며느리가 노동이라도 하려면 읍내 가까운 곳으로 옮겨야 되는데 있을 곳이 마땅치 않으니 좀 인권을 해달라고 연락이 온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마침 현애 어멈이 쓰던 사랑방에 와서 있으면 될 것 같아서 당분간 자기네 일을 거들면서 살다가 마땅한 집이라도 나타나면 그때 옮기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이사 오던 날은 비가 조금 내렸는데 이삿짐이래야 이불 한 채에 입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내의 이름은 ‘노부야마’라고 하였는데 그 이름은 그가 한동안 일본 사람들의 심부름을 역전에서 할 때 부르던 호칭이라고 하였다.
‘노부야마’는 키가 작달막한 사람이 배터에서 목도꾼으로 일을 하다가 그 일이 힘이 들자 품팔이로 노동일을 하였는데 험이라면 술을 너무 많이 먹는 것이었다.
부인은 신랑보다 키도 크고 얼굴은 미인 형으로 생겼으면서도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언필씨네 댁에 와서는 안주인처럼 모든 일을 솔선해서 하는 바람에 언필씨 댁은 며느리 이상으로 일을 그에게 맡겼다.
‘노부야마’는 오던 해에 아들을 낳았고 연년생으로 다시 아들을 낳으니 언필씨 부인은 현애어멈 생각을 자꾸 하면서 더 있었으면 저렇게 손자를 낳을 수도 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였다.
그렁저렁 ‘노부야마’가 이 댁으로 온지 2년이 되는 가을이었다.
그날은 일꾼들이 하루 종일 타작을 하고는 저녁참에 막걸리 한잔씩을 나누는데 ‘노부야마’는 그날 유난히 술이 당긴다면서 밥은 먹지 않고 술만 잔뜩 퍼마시더니 저녁 후 얼큰한 김에 머슴들을 데리고 밖앗마을 주막으로 술을 먹자면서 끌고 간 것이다.
그날 머슴들은 ‘노부야마’로 해서 기분 좋게 술을 마시다 보니 모두가 지나치게 마셔서 잔득 술이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는데 ‘노부야마’는 돌아오지를 못하고 그 집에서 쓸어져서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평소 ‘노부야마’의 안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을 줄 알았던 영호가 이날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늦은 밤중에 ‘노부야마’네 방문을 두드리더니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던 것이다.
밤도 이슥해졌지만 ‘노부야마’네 방에는 석유불이 간당간당하고 있었는데 영호가 들어가자 이내 불은 꺼지고 문 닫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를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영호는 황금 정엘 드나들면서 기방의 내막이며 남자들의 여자에 대한 어떤 탐익술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게 되고 자신도 은연중에 그 속으로 빠져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중에 그는 그의 집에 와서 살고 있는 ‘노부야마’의 부인에 대해서 어떤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그런 잠재적 의식이 ‘노부야마’네 방문을 열게 하였을 것이다.
하기야 숫기가 좋은 ‘노부야마. 마누라인들 어찌 영호의 바람기를 눈치 채지 못하였겠는가.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과 같이 그날 밤의 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진행이 된 줄 알았는데 그 밤길을 미행한 사람이 있었는지 그 후 동네 사람들은 노부야마 마누라와 영호가 가까워졌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파다하게 퍼졌던 것이지만 정작 ‘노부야마’ 마누라는 이 집에 들어 올 때나 마찬가지로 거리낌 없이 치마꼬리를 휘젓고 다녔다.
이런 와중에 이 집의 머슴 중에는 유난히 손재주가 많은 배달섭이라는 머슴에 대한 희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달섭이는 원래 떠돌아다니던 과부 아들이었는데 어렸을 때에는 병치레가 많아서 사람 노릇을 제대로 못한다는 소리까지 있었던 것을 언필씨 댁에 와서 어미가 한동안 일을 돕다가 아주 언 쳐서 살게 되었는데 언필씨는 이 달섭이를 끔찍이 생각을 해서 이다음에 장가까지 들여 주겠다고 하였는데 그 안에 달섭이 어미가 죽는 바람에 천애 고아가 되었던 것이다.
즈 에미가 워낙 마음이 착하다 보니 달섭이도 어미를 닮아서 부지런히 일도 잘 하고 더구나 일을 할 때에는 목청이 좋아서 소리까지도 잘 하여 동네 사람들은 달섭이가 일을 하면 쫓아다니면서 소리를 하라고 청하는 때가 많았다.
그런데 동네에 언제부터 ‘노부야마’ 마누라와 달섭이가 방앗간에서 함께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괴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이 소문을 달섭이가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노부야마’가 술이 잔득 취해가지고는 말을 하는데 자기 마누라와 어떤 관계냐고 따져 물었기 때문이었다.
달섭이는 평소에 ‘노부야마’를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그 말을 들은 달섭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터무니가 없고 나무도 억울한 소리를 들어 감정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달섭이는 ‘노부야마’ 부인을 잘 따르기는 하였지만 그런 일일랑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 그를 더욱 슬프게 하였다.
“아저씨 어느 시래비 아들놈이 그런 농담을 한답디까. 내가 그놈을 알면 칼로 목을 치리다.”
‘노부야마’는 그 후 다시는 자기 마누라에 대한 말을 달섭이게 하지는 않았지만 달섭이는 그 것이 상처가 되었던지 섣달 그믐날 새경을 받아가지고는 온다간다 소리도 없이 살아진 것이니 동네 사람들은 그의 착한 마음을 애석하게 생각을 하였다.
강가에 심은 미루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이 자라고 여름이면 그 나무 그늘을 찾아 일꾼들이 낮잠을 한잠씩 자고 일을 나갔는데 그만큼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일꾼들에게는 안성맞춤의 쉼터였다. 그런가 하면 아낙네들은 삶은 삼단을 풀어놓고는 하얀 넓적다리를 내놓고는 삼을 삼아서 실을 뽑았는데 여러 날을 그렇게 하다 보니 넓적다리는 새까맣게 자리가 나기도 하였다.
겨울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면 남자들은 여름에 아낙네들이 정성을 들여서 삼은 노끈을 고드랫돌에다 감아서는 자리틀을 방안 윗목에다 차려놓고 지직을 엮었는데 언필씨댁에선 머슴들이 겨우내 지직을 여러채 만들어서 안방과 윗방에 깔았는데 일꾼들이 자는 방에는 참대로 엮은 갈자리를 깔았다.
왕골자리보다는 껄끄러웠지만 여름에는 대자리가 시원하다고 해서 머슴방에는 갈자리만 깔았던 것이다.
여름장마가 지고 늦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하루는 소양 로의 파출소에서 김영호를 호출한다는 기별이 왔는데 조사를 할 것이 있으니 그다음 월요일 일찍 출두를 하라는 통지서였다.
그때 소양로 파출소에는 우미노(海野) 라는 일본형사가 있었는데 잘 사는 사람을 골라서 호출을 하고는 무슨 죄목이라도 씌워서 벌금을 물린다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우미노라는 사람은 악질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일본 시대이니 어느 누구 하나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을 때였으니 언필씨는 아들이 불려가는 것을 몹시 언짢아 하셨지만 무슨 손쓸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언필씨는 아들이 가는 날 아침 아들에게 당부하기를 돈을 달래거든 얼마든지 내놓겠다고 대답을 하라고 이르시는 것이었다.
월요일 아침 영호가 일찌감치 소양로 파출소엘 도달하니 절구통처럼 뚱뚱한 우미노형사는 대뜸 한다는 소리가 사람을 질리게 하였다.
“계집질을 곧잘 한다더니 역시 허여멀겋게 생겼구만” 하더니 닷자곳자 정강이를 구둣발로 차는 것이었다.
영호는 집에서 일도 별로 하지 않는 몸이다 보니 얼굴은 하얗고 키는 컸지만 어디 맻인되라고는 한군데도 없는 사람이었으니 어이쿠 하고 나곤드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일어서라고 하더니 귓다시를 오른쪽 왼쪽을 가리지 않고 치는데 나중에는 코피가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우미노는 그리되자 순사를 부르더니 당정 유치장에 집어넣으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었다.
듣던 바대로 우미노는 영호를 별 죄목도 없이 사흘 동안을 유치장에 가두고는 이유 없이 매일 같이 구타를 하더니 나흘만에야 군량미로 벼 50가마니를 내면 풀어준다고 하여서 영호는 그러겠다. 하고는 풀려났는데 사흘 동안에 몰골이 병자처럼 변해 있었다.
그로 인해 집에서는 사골을 사다가 다리고 인삼으로 죽을 쑤어서 먹이니 구타로 인한 고통이 한 달을 간 것이다.
우미노는 그 후 영호가 사는 집을 한번 와서는 밖앗을 돌아보고 갔는데 그 다음 날에는 언필씨를 오라고 호출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언필씨가 갔을 때에는 정중하게 대하면서 어떻게 돈을 벌었느냐면서 묻더니 아들이 빈들거리며 놀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한번 혼을 내주었다면서 앞으로 적극적으로 일본에 협조하면 상을 내릴 것이라면서 차까지 대접을 하였다고 한다.
언필씨야 말로 지금까지 근하게 살아왔고 땅을 많이 사긴 하였지만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왔는데 일본 놈에게 부자(父子)가 사흘도리로 끌려갔다 온 것에 대해서 너무나 분해 하셨다.
그 시기야말로 일본은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우리의 청년들을 징용으로 끌고 가 혹가이도(北海道)의 지하탄광에서 탄을 캐다가 많은 청년들을 죽게 하였으며 십대소녀들은 정신대로 끌어다가 군인들의 성노리개로 삼았던 것이다.
그들은 군수물자가 부족하자 가정집에서 쓰는 놋그릇이며 수저 주걱 심지어 놋화로까지 다 걷어갔는가 하면 소양강변에 설치한 쇠로 된 난간 까지 빼가는 것이었으니 전쟁에 소용되는 물자가 얼마나 부족하였으면 그랬을 것이랴.
농부들이 피 땀 흘려 지어놓은 농산물을 공출로 다 뺏어가고 그 대신 기름을 빼낸 반이나 썩은 콩깻묵을 배급해 주었는데 모든 백성이 그것으로 연명을 하였던 것이니 어찌 일본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지 않을 수가 있었으랴.
우리의 후손들이야말로 일제 탄압의 혹독했던 그 시대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의지대로 살기를 원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의지가 어떤 외부 작용에 의해 갑자기 꺾인다면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는데 언필씨가 일본 순사에게 부자(父子)가 끌려갔다 온 이후에 받은 충격이야말로 보통 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언필씨는 며칠 동안을 진지도 자시지 않고 분해하시며 작은 일에도 짜증을 잘 내시었다.
워낙 성격이 꼬장꼬장하셨던 그 분은 누구에게 무시를 당해 본적이 한 번도 없으려니와 항상 누구에게나 대우를 받고 사셨으며 특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기에 동네 사람이나 타관 사람들은 항상 그분을 존경해 맞이 않았다.
언필 씨야말로 젊었을 때에는 고생도 많이 하였지만 워낙 부지런하게 살았고 춘궁기에 양식이 떨어져 장리쌀이라도 얻으러 오는 사람이면 아끼지 않고 내준 대신 가을에는 이자를 한 푼도 받지를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나라를 빼앗고 백성들에게 못된 짓을 하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인색하리만큼 협조를 하지 않았던 것인데 그것이 부자가 당한 곤욕이었음을 모르지도 않았다.
그는 항용 자손들이나 인척들이 모이게 되면 은연중에 나라 걱정을 하시며 무슨 수를 쓰던지 간에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로서는 조선 백성이 일어서려야 일어설 수 없는 처지였으니 그들의 정치를 받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 시대야 말로 마음대로 말을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설사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할지라도 어디 가서 하소연 한번 하지 못했던 그 울분 속에서 살아야 했던 가련한 백성이 우리나라 조선 사람이었다.
언필씨가 파출소에 불려 갔다가 나오신지 얼마 되지 않은 날 저녁 갑자기 의식을 잃고 돌아가신 것도 그들에게 당한 고통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가 향년 일흔 여섯이었다.
언필씨의 장례는 9일장으로 받고 성복날 저녁에는 넓은 안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상제들이 빙 둘러서서 성복제를 올리는데 너무도 애석하게 돌아가신데 대해서 모두가 서러워하였다.
제를 올릴 때에는 각처에서 떡과 편 시루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들어왔고 술 퉁자들도 여러 곳에서 들어와 장사집의 음식은 풍족하게 돌아갔다.
언필씨의 장삿날 만장을 앞세운 상여가 나갈 때 길을 가득 메운 인파 속에서는 통곡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는데 일본 놈에게 당하신 충격이 얼마나 크셨으면 갑자기 돌아가셨겠느냐면서 모두가 애석해 하는 것이었다.
장지는 가까운 묘역으로 정하고 여단을 드릴 때 아들인 영호는 너무도 눈물을 많이 흘려
장지에서는 울음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언필씨는 특히 생전에 손자 손녀를 귀여워하시는 중에 특히 흥규에게 이 집안의 대를 이을 막중한 책임이 너에게 있다면서 항상 주의를 주셨는데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흥규는 할아버지의 제상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영호는 자기로 인해서 돌아가신 것이 너무도 분하고 억울하여 며칠 동안을 침식을 거르기까지 하였다.
언필씨가 세상을 뜨고 얼마 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자 마침내 우리나라 금수강산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삼천만의 함성소리가 하늘을 찔렀던 것이다.
외국에 망명을 했던 독립투사들이 속속 귀국을 하였으며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세계만방에 선포를 하게 되었으니 이 모두가 평생 동안을 독립을 위해 싸우신 선열들의 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격동기를 맞아 김영호가 살던 마을에도 자유의 바람이 불고 사람들의 생활이 활기가 넘치기는 하였으나 동네 사람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에 이 마을에는 일본시대 때 형석을 제련하는 제련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자리에 양말 공장이 들어서더니 또 한쪽에는 성냥공장도 가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성냥공장에서는 미루나무 원목을 사서 성냥갑을 만들었는데 공장에서는 이 원목을 여러 군데서 사들이던 중에 이 마을의 돌아가신 언필씨네 심은 미루나무가 으뜸으로 인정이 되어 우선 구입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미루나무가 성냥공장의 필요한 재목이 된다니 영호는 깜짝 놀랐으나 이런 기회를 놓질 수도 없는 입장이라 영호는 부득이 이 나무를 고가로 팔기로 계약을 한 것이다.
아버지가 심혈을 기울여서 심으신 이 나무들이 성냥공장에 팔려 나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한여름이면 아낙네들이 삼을 삼으며 나무 그늘에서 시원하게 여름을 보낼 수가 있었고 밭에서 일을 하던 농부들은 점심 후에 낮잠을 즐기던 미루나무 숲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숲이 살아진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가 안타까워했으며 특히 영호 어머니는 한사코 스님이 일러준 말을 되새기며 나무를 팔지 않도록 아들인 영호에게 말을 하였지만 이미 계약이 이루어진 후였다.
미루나무가 드디어 잘라지기 시작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다 베어지고 나니 앞이 훤히 트이고 보이지 않던 삼악산이 가깝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한동안 성냥공장에서는 이 미루나무를 원료로 한 성냥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미루나무로 인해 영호는 의외의 많은 돈을 많이 벌어들였다.
어머니가 어떤 중의 말을 듣고 심은 나무가 한창 자랄 때 언필씨의 재산은 그 중이 말한 것이상으로 솔 검불에 불이 붙듯이 엄청나게 불어 주위의 땅 모두를 사들였다.
언필씨가 길을 나서면 자기네 땅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로 재산은 계속해서 불어났던 것이다.
아들인 영호가 어느 귀한 자제 못지않게 편안하게 자라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후덕으로 인함이었다.
영호가 어느덧 나이 50줄에 들어섰을 때 아들인 흥규는 중학교 2학년이 되고 딸 정애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흥규는 아버지와는 달리 부지런하고 학교의 성적은 우수하였으며 특히 연극의 대사를 잘 외어서 학교에서 학예회를 할 때에는 늘 뽑힐 정도였다.
겨울에 강물이 얼면 마을의 아이들은 보통 앉은뱅이 썰매를 타거나 철사 줄을 널빤지에다 대고 못을 쳐서 만든 스케이트 모형을 만들어서 탈 때 흥규는 앞뒤가 없는 특별한 스케이트를 사주어서 탔는데 가격이 굉장히 비쌌을 것이다.
흥규가 앞뒤 가리지 않고 빙글빙글 돌면서 스케이트를 탈 때 동네 아이들은 그것이 신기해서
넋을 놓고 구경을 하였으니 그만큼 영호네 가족들은 호사를 하며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던 것이다.
그 시절 우리나라는 38선이 그어지기는 하였지만 초창기에는 남북 사람들의 왕래가 자유로이 서로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정부수립을 한 후에는 그것이 금지되었는가 하면 북쪽에서는 38선의 경계를 강화함과 동시에 이따금 남쪽의 양민을 납치를 하였는가 하면 북산면의 내평지서를 습격하여 순경을 살해하기도 하였을 만큼 이북의 도발은 끝이 없었다.
게다가 지방마다 적색분자들이 준동을 하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끼리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우리의 정세는 날로 불안해지고 있었다.
그때 춘천 서면의 어떤 마을에서는 지방의 빨갱이들이 민가를 습격한다는 소문이 돌아서 흥규네 마을은 이에 대한 대비를 하느라 청년들이 저녁이면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그들의 위협에 대해서 도전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은 새벽 4시를 기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하였던 것이니 38선 부근에 살던 사람들은 피란 보따리를 쌀 사이도 없이 맨몸의 상태로 춘천으로 들여 닥친 것이다.
북한의 공산군은 광복이후 수시로 38선 부근에서 약탈과 살생을 감행하여 처음에는 그런 상태이겠지 하였던 것이나 그것은 남한을 적화하려는 총공세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나라는 전쟁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였기에 그들의 진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인민군은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진격을 하게 되었으니 대한민국은 바람 앞에 촛불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사랑하는 유엔군은 공산군의 침략을 묵과하지 않고 유엔군을 파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미국을 위시한 열여섯 나라에서 군인과 군함 비행기를 속속 지원하여 공산군을 격퇴하기 시작하여 그 해 10월 압록강까지 우리 국군은 북진을 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는 또다시 후퇴를 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던 그때를 회상해 보면 우리나라를 도와준 나라들에 대한은혜를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춘천은 6,25이후 민가들이 거의 불에 타서 없어졌는데 마을에서 제일 잘 살던 그 부자 댁 영호네 안채며 밖앗채 창고까지 잿더미가 되었던 것이다.
피난을 갔다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거지 신세가 되었던 것이니 부잣댁 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은 집집마다 되는대로 판잣집을 짓고 살자니 살림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을 잃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는데 그 중에도 피난을 잘 하고 돌아오신 영호어머니가 며칠간을 않으시더니 사흘이 되던 날 새벽에 홀연히 눈을 감으신 것이다.
그뿐인가 영호의 사촌형님은 인민군이 한창 후퇴를 할 무렵 조밭을 매는 중에 그들과 맛닥드렸을 때 겁에 질린 나머지 그들이 지나간 후 반대방향으로 뛰는 바람에 낌새가 이상한 것을 느낀 인민군이 돌아서서 딱쿵총을 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였으며 육촌동생 하나는 국군으로 입대를 하였다가 춘천전투에서 장열하게 전사를 하였다.
적치 3개월 동안 특히 적이 대전 이남까지 점령할 무렵 청년들을 긴급 소집하여 의용군으로 끌어갔는가 하면 지방빨갱이들은 지주 가족과 경찰가족들을 색출해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은 사상적으로 의심받는 사람들은 이유 불문하고 총알이 아깝다며 죽창으로 찔러 죽였는가 하면 화재를 면한 집에 들어가서는 가구를 모조리 뒤져서 옷가지며 패물들을 훔쳐 갔다. 공산당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들 그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인민군이 후퇴한 이후 국군이 춘천에 입성하자 우리나라는 이제 통일의 꿈을 달성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지만 수복된 후의 전황은 계속해서 불리하다는 뉴스가 들려 왔던 것이니 그것은 중공군이 인민군을 도와 인해전술로 압록강을 넘어서 침투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유엔군이 혹한 속에서 후퇴를 시작하고 서울이 다시 그들 손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니
백성들은 다시 혼란에 빠진 것이다.
춘천도 예외가 아니어서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고 있을 때에 마을에서는 엄청난 폭발사고가일어났던 것이니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하였을 것이랴.
그날 아침 날씨는 유난히 춥긴 하였으나 햇발은 따뜻한 편이었는데 흥규는 그날 늦게 일어나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였는데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오시더니 시렁위에 얹어 놓았던 곶감을 꺼내서는 먹으라고 주시는 것이었다.
흥규는 웬 곶감이냐면서 하나를 들었을 때였는데 밖에서 친척의 아제비가 얼른 나오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흥규가 문을 열고 나가니 흥규와 나이가 동갑인 당숙 벌이 되는 인규가 빨리 밖으로 나오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 때 당숙부가 되시는 준성 아저씨가 강가에서 노란 포탄을 들고 오는 것이어서 흥규는 호기심이 생겨서 얼른 밖으로 뛰어나가니 아저씨는 마당 가운데 장작 패는 곳으로 그것을 메고 가는 것이었다.
그때는 엿장사들이 고물을 모아서 가져가면서 옥수수 강정이를 값을 쳐서 주었는데 고물이 크면 값을 더 쳐서 주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무엇을 하려는지 망치로 반들거리는 곳을 톡톡 치는 것이어서 흥규와 어린당숙은 무심코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세 번째 톡 하고 두드리는 찬 라에 동네가 떠나갈 듯이 꽝 소리와 함께 시꺼먼 연기가 하늘로 솟으며 폭발을 하였던 것이니 순간 세 사람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때마침 강가에 갔다 오던 영호 매형인 동옥이 아버지가 먼발치서 “뭘 하느라 그래” 라고 소리를 지르던 찬 라였는데 폭발이 났으며 그 순간 날아오는 파편에 뒷금치를 맞아 금방 선혈이 낭자하였는데 이 분이 목격을 하였기에 그 현장의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자손이 귀하다고 할아버지 언필씨는 늘 걱정을 하셨는데 영호의 외아들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으니 부잣댁의 대가 이렇게 해서 끊어지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도 영호 부인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자 식음을 전폐하였는데 그것도 잠시 사람들은 또 다시 피난길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니 그때야말로 산다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세월이었다.
전쟁이 3년 계속되다가 공산군의 끝없는 회유(전쟁에 불리하니까 들고 나온 휴전협정)에 의거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성립이 되니 그 이후부터는 모든 국민들이 파괴된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던 것이다.
영호는 옛터에다가 다시 집을 지었지만 옛날의 영화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영호의 본부인은 다시 집안을 추수리려고 애를 쓰는 중에도 이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을 찾기 위해 여러 손을 걸쳐서 알아보았던 것이니 여자의 마음속에는 질투란 것이 한쪽에 똘똘 뭉쳐 있다는 말과는 달리 부인은 그런 아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니 참으로 어진 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용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친정아버지의 간곡하신 당부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 너는 오늘부터 출가외인으로서 그 집안의 대를 잇고 그 댁이 잘 되는 것이 너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야”
시집가기 전날 아버지의 하신 그 말씀을 늘 잊지 않고 생활 수칙으로 삼아온 부인이었기에 이집에 들어 와서 대를 끊었다는 원망만은 누구에서라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 여자들이야 많지만 막상 자기 남편과 견줄만한 여자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웬만한 여자를 알아보니 재산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딴 살림을 시켜 준다면 오겠다는 사람도 있어 사람 속에서 사람을 고른다는 일이 너무도 힘이 들어 한때는 포기를 할까도 생각을 하였지만 그렇게 할 수는 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화천의 아주 시골에 사는 여자 하나가 청을 넣어왔는데 이 여인의 바램은 자기 몸에는 어린 아들 하나가 딸려있는데 이 아이를 입적을 시켜준다면 다른 것은 원하지를 않고 들어와서 살겠다고 한 것이다.
세상에 장마당에 가서 옷을 사려고 해도 마음에 맞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고 산에 꽃이 많다고 하지만 막상 꺾으려면 마음에 드는 꽃을 고르기가 어렵다고 자기 남편과 견줄만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기가 쉽지 않더니 그토록 찾던 여자가 특별한 조건도 없이 와서 살겠다고 하니 영호 부인은 이 여자를 적임자로 생각을 하고 택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한동안 적적하게만 지나던 영호는 별 말도 없이 부인의 의사를 쫓겠다는 것이어서 더는 지체하지 않고 여자를 오게 하고 데리고 온 아이는 바로 입적을 시키니 여자 측에서는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 여자는 워낙 시골에서 살아서 그런지 마음이 순박하기는 부처님 앞에서 매일같이 공양을 올리는 보살처럼 착하기 이를 데가 없이 영호 부인의 말을 하늘처럼 떠받치는 것이어서 영호 부인도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
그리고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임신을 하고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흥원이라 지었고 누구보다도 남편이 좋아하였다.
새로 온 여자는 내리 딸 둘 순애와 경애를 더 낳았는데 흥원이가 자랄수록 죽은 형과 모습이 비슷하다 하여 흥규가 도로 살아났다고까지 할 정도로 커갈수록 행동까지도 닮아가는 것이었다.
사실 영호 자신은 흥원이 아래로 다시 아들을 기대했으나 두 번째 여자는 더 이상 임신을 하지 않자 영호는 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었으니 아들을 더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면으로 보면 영호는 기생집을 다니면서 술도 격이 있게 마실 줄을 알게도 되었지만 여러 여자들의 테크닉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던 터였다.
세상의 남자들 처 놓고 여자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여자를 좋아할 수는 없는 것이 사회의 통념이다.
영호는 그런 고루한 생각과는 전혀 다른 면이 있었던 것이니 아마 그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주라고 할 까 아무튼 영호는 새로운 여자라면 관심도 많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빈도는 더 해지는 것이었다.
영호가 젊어 소싯적부터 기생집 출입을 하고 거기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자기 첩실로 들였던 것도 어쩌면 타고난 천성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중에도 영호가 여자를 좋아하게 된 이면에는 경제적인 구애를 전혀 받지 않았던 데다가 아버지께서 자손이 많은 것을 부러워하신 것도 한 목 하였을 것이다.
그는 또 다시 여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니 아들을 낳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새로운 여자를 탐닉하기 위해서 였을것이다.
한동안 뜸하게 마시던 술을 매일같이 마시기에 이르렀는데 어느 날 늦은 밤에 술이 잔뜩 취해가지고 신작로를 지나다가 불이 환한 집으로 들어갔던 것이니 그 집은 작은 재봉틀 집을 내고 있는 과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여자였다.
과부에게는 철모르는 아이 둘이 딸려 있었는데 아이들은 일찍 잠이 들었을 때였다.
사실 영호가 그 집을 들어갈 때는 평소에 어떤 마음을 두었었는지는 모르나 그날 영호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과부는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당정 나가라고 호통을 쳤던 것이나 술이 고주망태가 된 영호는 정신 모르고 쓸어졌던 것이다.
그동안 영호는 술을 마시긴 하였지만 술이 취해서 동네를 다닌 적도 없으려니와 술을 마시고도 마신 척도 한 바가 없었던 것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부터 드린 습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은 생전 처음으로 동네에서 더구나 과부 집에서 그런 망신을 당하였던 것이니
자신이 생각을 해도 그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몇 개 월동안 영호는 근신을 하는 사람처럼 읍내에도 잘 나가지를 않고 동네에서는 영호와 과부의 일을 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 과부가 영호의 큰 부인을 조용히 찾아 왔던 것이다.
속담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그날의 그 일을 세상은 다 잊어버렸지만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두 사람이 어떻게 접촉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과부가 찾아온 것은 영호의 씨를 새로 뱄다는 내용의 조용한 고발이었던 것이다.
영호 부인은 원래가 무던한 분이긴 하였으나 그 말을 듣고는 너무도 놀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남편을 불러 놓고는 생전 처음으로 그동안의 행실에 대해서 아버님을 욕되게 하였으니 그 죄를 어떻게 할 것이냐면서 큰 소리를 지르며 통곡을 하였던 것이다.
세상의 여자라면 누구나 오케 하던 영호였지만 이번만큼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부인 앞에서 잘못하였다고 용서를 빌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집안의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조치였다.
지금까지 큰 부인이 있었기에 이 집안이 그나마 꾸려져 나왔고 그 많은 재산 또한 그가 있었기에 보존이 되었던 것이다.
영호가 지금까지의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더라도 큰 부인에게 남편으로서 해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만날 속만 썩였던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영호는 앞으로는 더 이상 부인의 속을 썩이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을 하였다.
사실 그 과부는 인물이 특출한 것도 아니고 남이 뭐라고 해도 열심히 앞만 보고 재봉틀 바퀴만 돌리던 처지인데 하루 밤사이에 영호의 또 다른 여자가 된 것이었으며 그는 열 달 후에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흥석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아이는 튼실하게 잘 자랐다.
옛날에는 아들 선호사상이 집안의 뿌리를 연결한다고 보아서 강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집안은 유달리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지만 흥규 이후 그것도 다른 배를 빌려서 겨우 두 아들을 건진 것이다.
영호는 그 후에 또 다른 여자를 넘나 보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서인지 집안에서 마누라가 받아다 주는 막걸리를 마셔가면서 낚시를 하고 강에 가서 어항을 놓거나 그물을 쳐서 고기를잡아 왔다.
마을에서 귀공자로 자라기도 하였지만 그의 풍채를 보고는 정계로 나갔으면 도지사는 한자리 해 먹었을 재목인데 너무도 아까운 청춘을 허송하였다는 말이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마디씩 하였다.
다시 보아도 그는 키도 크고 멋도 있었지만 항상 비단으로만 감싸고 읍내를 나가면 사람들이 한번은 쳐다볼 정도였고 술집 여자들은 사족을 쓰지 못하였다.
한번은 영호가 젊었을 때였는데 여름 장마가 시작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강물이 많이 불어났을 때였다.
그때는 강물이 불으면 고산 앞까지 물이차고 흙탕물이 흘러내려 올 때에는 화천에서 화목이 며 잡목들이 많이 떠내려 와서 부락 청년들은 이 나무들을 건져서 겨울 땔나무로 하느라 열심히 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날도 큰 화목이 떠내려 오자 영호가 나무를 건지기 위해서 물로 들어가더니 돌아나와야 할 사람이 나무와 같이 자꾸만 아래로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빨리 나오라고 하였지만 물살에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겠지만 뒤도 돌려다 보지 않고 나중에는 거리가 멀어져 까만 머리만 둥실둥실 보이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며 어서 나오지 왜 저러고 있느냐면서 강물만 바라다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강 건너 끝에 가서야 겨우 뚝 위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그때 소양강 여울까지 내려가면 함수지점이라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위험지점인데 용케도 그 지점 이전에 겨우 강여가리로 나왔던 것이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지만 나무를 안고 돌아 서려는데 갑자기 오른쪽 발에 쥐가 나서 도저히 돌아 나올 수가 없어 안간힘을 다해서 억지로 나무를 안은 채 흘러가다가 살아나왔다는 것이다.
외아들들이 항상 위험을 안고 산다더니 이날 부잣집의 아들이 하마터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하고 모두가 손에 땀을 쥐었던 날이었다.
사실 이 동네에서 화젯거리는 늘 영호네 집안과 영호네 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세월은 아무리 곱던 사람도 종당에 가서는 연약하고 볼 품 없게 변하는 것이니 영호의 청춘도 어느덧 바람결에 수양버들처럼 휘늘어지는 인생 종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랄수록 배는 달랐지만 두 형제를 보면 한 몸에서 낳은 것처럼 비슷한데 가 있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쑤군대기도 하였다.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 동안 집안 식구들이 화목하게 지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인이 아이를 낳은 지 4년 만에 홀연히 병이 나서 사망을 하게 되니 사람들은 그 여자가 너무 박복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운명이라는 것을 인간이 어쩌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혼자서 고생하며 살아가던 중에 본의 아니게 한 남정네를 만나게 되고 좀은 고생을 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봄직 하였으나 단명으로 세상을 버린 것이니 영호에게도 그 일은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한 남자를 가운데 두고 세 여자가 끈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여자야 말로 재봉틀만 하루 종일 돌리면서 오로지 자식 걱정만 하던 여인이었는데 갑자기 남자가 생긴 것이니 자식을 길러야 하는 부담과 새로 남자를 알게 되면서부터 일어나는 남모를 갈등! 이러한 것이 어쩌면 그의 생애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으로 작용한 것이 종래에 가서는 헤어나지 못하는 가슴의 병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큰 부인은 갑작스럽게 재봉틀 부인이 사망하자 그에 따른 자식들을 거두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또 다른 걱정을 떠안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 잘 날 없다는 격으로 남편이 저지른 여자들로 인한 치다꺼리를 큰 부인은 떠맡기만 하였다.
사실 큰 부인은 아들을 잃은 후에 언제 한번 크게 웃어본 적도 없으려니와 그렇게 많은 음식을 장만을 하여도 맛있는 음식을 하번 먹어본 적도 없이 살아 왔다.
해가 지고 나면 아들 생각에 눈물도 많이 흘렸건만 그 눈물은 마를 줄을 몰랐다.
남편은 일생동안을 사랑방에 머무른 객식구처럼 밖으로만 돌기만하더니 차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을 하면서 기력도 떨어지고 있었다.
아! 그런데 어느 날 해가 질 무렵인데 안방에서 작은이가 “ 형님 얼른 와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 왜 무슨 일이 있어 ”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던 큰 부인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던 것이니 남편네가 비스듬히 이불에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급히 들어가서 그의 목을 들어보니 눈에 힘이 없고 긴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그의 몸은 힘없이 자자들고 있었다.
“ 아이고 당신이 이러면 어떻게 해 안 돼 안 돼 ”
큰 부인이 목을 안고 통곡을 하였지만 남편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뜨시더니 그 아들이 또다시 아버지처럼 조용히 세상을 뜨는 것이었으니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재물이라는 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남편의 장사를 지내고 나자 큰 부인도 어느 날부터 자리에 눕기 시작을 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한때 바람을 부리기도 하고 집안의 재력을 믿고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그가 특별히 재산을 축내지는 않았다.
큰 부인의 말이라면 말년에 와서 무슨 말이건 잘 듣고 집안의 대소사는 잘 챙겼었는데 이제 집안의 기둥이 문어지고 보니 큰 부인은 그제야 남편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일 년을 더 넘기지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던 날 큰 부인은 옆에 있는 작은 부인을 억지로 바라보며 한마디를 겨우 하시며 눈을 감으신 것이다.
“자네, 고마웠어.……”
강 건너 마을에서 부자라고 떵떵거리며 해마다 가을이면 곡식더미를 마당 가득 쌓아 놓던 집안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가다 보니 낙조의 바닷가처럼 이 집안의 부귀영화도 장맛 물에 물거품에 휘말러 가듯 떠내려가고 다만 작은 부인이 쓸쓸하게 두 아들의 시중을 받게 된 것이다.
金 斗 洙